워드프레스 KBoard 피드 http://iksa.kr/wp-content/plugins/kboard/rss.php 워드프레스 KBoard 피드 <![CDATA[브루스 그레이슨의 《After》]]> 20210521_140732_60a7bea45bdf2.jpg 

 저자: Bruce Greyson 

출판사: ST.MARTIN’S ESSENTIALS(2021)

 

 

Contents

Introduction: A Journey into Unknown Territory

A Science of the Unexplained 2. Outside of Time

3. The Life Review 4. Getting the Whole Story

5. How Do We What’s Real? 6. Out of Their Bodies

7. Or Out of Their Minds? 8. Are Near-Death Experiences Real?

9. The Biology of Dying 10. The Brain at Death

11. The Mind is not the Brain 12. Does Consciousness Continue?

13. Heaven or Hell? 14. What about God?

15. This Changes Everything 16. What Does Iy All Means?

17. A New Life 18. Hard Landings

19. A New View of Reality 20. Life before Death

 

저자 소개 및 책의 핵심 내용 

이 책 After의 저자 브루스 그레이슨(Bruce Greyson, 1946~)은 오랫동안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 의대 정신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근사체험(Near-Death Experiences; NDEs)에 관한 과학적 연구의 최전선에서 활동해왔으며, 지금도 정신의학·신경행동학과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근사체험이란 심정지로 인해 임상적으로 사망 판정을 받았던 사람들 중 심폐소생술 덕분에 극적으로 회생한 일부, 또는 약물 과다 복용, 출산, 그리고 자동차 사고와 같은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사람들 중 일부가 유체이탈(Out-of-Body Experiences; OBEs), 터널 통과 후 빛을 향해 나아감,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끼게 하는 존재와의 만남, 죽은 친지들과의 재회, 아름다운 음악, 황홀한 광경, 짧은 인생 리뷰 등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갖고 죽음 직전에 되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주류 신경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임상적으로 사망했기에 뇌파가 잡히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없기에 이런 체험은 모두 죽어가는 뇌에서는 일어나는 환각으로 매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얼만 전 인터뷰에서 저자는 그동안 1,000건이 넘는 사례들을 연구했으며 근사체험자들의 평균 나이는 31세라고 밝혔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사례들을 연구했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근사체험이 훨씬 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레이슨 교수는 자신이 받았던 엄격한 과학 교육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우연한 계기에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환자의 몸을 벗어난 의식이 주변 상황을 인지하는 유체이탈 현상을 직접 경험한 후 끝내 이에 대한 궁금증을 떨칠 수가 없었는데, 이것이 결국 50년에 걸친 근사체험 연구로 이어졌다. 자신이 막 정신과 인턴으로서 의사 커리어를 시작했던 시절 저녁으로 스파게티를 먹고 있던 중 응급 연락을 받고 급하게 병원으로 되돌아가느라 넥타이에 스파게티 소스가 묻는 것도 몰랐다. 병원에 도착해 홀리(Holly)라는 환자가 혼수상태에 빠진 것을 확인한 후 병실을 나와 대기실에 있던 친구 수전에게 경위를 물었다. 다음 날 의식이 돌아온 홀리의 병실에 들어갔을 때 홀리가 자신이 친구 수전과 얘기하던 광경, 그리고 자신의 줄무니 넥타이에 묻었던 스파게티 얼룩을 지적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것은 자신이 교육을 받았던 신경과학 지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2020년 국제근사학회(IANDS)에서 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는데 이 일화를 언급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만큼 그의 연구 여정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덧붙여 이 일화를 언급하면서 울먹이며 이 사건을 회상하는 저자의 모습에서 지난 50년에 걸친 근사체험 연구를 수행하면서 느꼈을 복합적인 감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관심 있는 사람은 유튜브에서 <https://youtu.be/acN2MQQYGWg>에 접속하면 이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나아가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이 근사체험 연구에 매진하게 된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만으로도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화학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매사를 엄격한 과학적 태도로 대하라는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의대에서 통상적인 물질주의에 바탕을 둔 의학 교육을 받았던 저자로서는 과학적 연구가 전무했던 당시 상황에서 근사체험 연구에 자신의 커리어를 바치기로 한 것은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렇게 했고 50년이 흐른 지금 이 책을 통해 50년에 걸친 연구 여정에서 느꼈던 개인적 심정을 담담한 필체로 묘사하고 있다. 차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은 근사체험에 대한 이론적 연구나 사례를 다룬 책이 아니라 오랜 연구 기간 동안에 저자가 느꼈던 바를 에세이 형식으로 쓴 책이다. 물론 중간 중간에 자신이 인터뷰했던 근사체험자들의 증언이나 진술이 수록되어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저자가 연구 여정에서 느꼈던 바를 보완해주는 역할에 그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저자의 자전적 에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필자가 이 책의 내용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데는 몇 이유가 있다.

 

첫째, 저자의 진솔함과 용기다. 근사체험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상태에서 이 분야에 매진하기로 결심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저자가 버지니아대 의대 정신과에 인턴으로 있을 당시 철학과 교수였다가 근사체험 사례를 접한 후 이에 대한 연구를 위해 버지니아대 의대에 편입했던 레이먼드 무디(Raymond Moody, Jr.)와 잠시 교류했다. 무디는 근사체험이라는 용어를 고안했으며, 당시 Life After Life라는 책을 출판해 일약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저자는 근사체험에 대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절실하다는 것을 통감했기에 자신의 커리어를 걸고 이 분야 연구에 매진하기로 결심했다. 이 책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1981년 몇몇 연구자들과 함께 <국제근사학회(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Near-Death Studies; IANDS)>를 설립한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둘째,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다른 특징은 저자의 진솔함이다. 책을 읽으면서 모두가 외면하던 분야를 연구하면서 연구자로서 가질 수 있었던 독선이나 분노 같은 감정을 찾아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근사체험자들을 인터뷰한 후 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가능한 최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자세를 견지하고자 최선을 다하던 저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는 저자가 개인적인 명성에 이끌려 불모지를 연구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를 통해 인간의 지적 영역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겠다는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엘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강조했던 순수한 호기심에 이끌렸다고 봐도 무방하다. 

 

셋째, 저자는 지난 연구 과정을 회상하면서 이를 에세이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각 장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가운데 앞장에서 다른 주제와 연계해 다음 장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이는 저자가 나름 신중하게 자신의 연구 여정을 정리해 한 권의 책에 담으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근사체험 연구에 대해 어떤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신중한 태도를 취한다. 이는 저자가 자신의 연구가 미진하다는 것을 인정한다기보다는 워낙 중대한 문제이기에 신중하게 접근하려는 학자적인 태도로 여겨진다. 그래서 저자는 많은 근사체험 사례들에 공통적인 요소들을 다루면서도 그 의미에 대한 최종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를 보인다. 아직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취지에서다. 또한 어떤 주제와 관련해서는 그토록 오랜 연구에도 불구하고 어떤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리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근사체험은 죽음 이후 무엇이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의식과 관련된 자신의 일부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고 인정한다.

 

넷째, 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간명하게 “After”라고 지은 이유를 세 가지 제시하고 있다. 우선 죽음 이후(after death)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근사체험자들이 근사체험 이후(after NEDs) 어떻게 변했는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직접 근사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근사체험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 후(after learning about NDEs)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 책의 제목을 그렇게 정했다고 말하면서 50년간 근사체험을 연구했지만 자신이 직접 근사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자신에게도 상당한 변화가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상당 부분 극복함으로써 삶 자체에 더 충실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저자가 처음 근사체험에 관한 연구를 시작한 이래 수많은 사례들의 분석을 통해 얻은 교훈을 마지막 20장에서 일곱 가지로 정리한 것이다. 50년 연구를 통해 얻은 핵심적인 교훈으로서 근사체험에 회의적인 사람도 관심을 가질 만하다. 일곱 가지 교훈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근사체험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체험이다(NDEs are common experiences that can happen to anyone):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죽음 직전까지 갖던 사람들 중 10~20%, 또는 인구의 약 5% 정도가 근사체험을 했다는데 동의한다. 이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숫자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 1,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근사체험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정신 이상자로 내몰리는 것이 싫어서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임상적으로 사망한 상태, 즉 심정지가 왔고 뇌파가 잡히지 않는 상태에서 유체이탈, 터널 통과, 강렬한 빛을 향해 나아감, 짧고 강렬한 인생 리뷰, 아름다운 음악, 환상적인 장소, 무조건적 사랑을 느끼게 하는 존재(빛 또는 신 등)와의 만남, 죽은 부모 및 친지와의 조우 등과 같은 체험을 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는 결코 환상이나 꿈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들은 근사체험의 기억은 현실에서의 기억보다 훨씬 더 강렬했기에 현실의 기억과는 달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억이 더욱 선명해진다고 말한다. 

  

2) 근사체험은 예외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정상적인 체험이다(NDEs are normal experiences that happen to people in exceptional circumstances):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근사체험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사람으로 여겨질까 걱정해서인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신경과학자 마리오 뷰리가드(Mario Beauregard)에 의하면 근사체험의 기억은 공상이나 상상 또는 꿈에 대한 기억과는 다르다는 것을 뇌의 반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즉 근사체험자에게 당시 기억을 되살려보라고 한 후 기능성 자기공명장치(fMTRI)를 이용해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는 공상이나 상상을 하는 경우 활성화되는 부위와 다르다는 것이다. 저자가 인용한 신경과학자 마리오 뷰리가드는 탈물질주의 선언을 주도할 정도로 뇌와 의식의 관계에 대해 주류 신경과학자들과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기에 그의 주장을 전적으로 수용하기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다른 신경과학자가 실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다. 즉 재현성이 있으므로 저자의 주장을 반박하고자 한다면 동일한 실험을 통해 반박해야 할 것이다.

  

3) 근사체험은 보통 심원하고 오랫동안 지속되는 여러 가지 후유증으로 이어진다(NDEs usually lead to a number of profound and long-lasting aftereffects): 근사체험은 대부분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관대하고 영적으로 성숙한 삶을 사는 전환점을 제공하지만 예외적으로 간혹 이 사건 이후 삶이 혼란스러워지는 경우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특히 근사체험자들 가운데 가족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는데 이들의 변화를 가족들이 수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근사체험자 중 상당수가 이혼하는 것이 한 가지 사례다. 예컨대 나는 천국을 보았다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이븐 알렉산더(Eben Alexander)도 이혼을 한 후 음향 명상에 관심이 큰 카렌 뉴웰(Karen Newell)이라는 여성과 재혼했다. 아무튼 근사체험이 항상 삶과 죽음에 대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한 것은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저자의 과학적 자세를 반영한다는 생각이 든다.

  

4) 근사체험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준다(NDEs reduce fear of death): 이것이 근사체험이 인류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근사체험을 통해 더 이상 막연하게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근사체험자는 다시 육신으로 돌아온 것을 원망하기도 한다. 평소에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호언장담하다가도 막상 죽음을 앞두고는 두려워하는 게 인간이다. 죽음 자체가 동반할지 모르는 고통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육신을 가지고 경험했던 세상과 영원히 결별할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은 어떤 지식과 경험으로도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원시적인 형태로 종교가 등장한 이래 고등 종교로 발전해왔지만 어떤 종교든 죽음의 두려움을 해소해주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다는 현실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을 방증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우주적 종교라는 에세이에서 언급했듯이 처음 두려움의 종교로 출발해 도덕적 종교로 진화해 왔으나 여전히 죽음은 종교의 존재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향후 근사체험에 대한 주류 과학계의 부정적 시각이 해소된다면 이는 인류사에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5) 근사체험자들은 현재의 순간을 더욱 충실하게 살아간다(NDEs lead experiencers to live more fully in the present moment): 이것 또한 근사체험이 제공하는 큰 장점이다. 사람들은 보통 과거의 기억에 집착하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불안한 가운데 살아가느라 현재를 제대로 만끽하지 못한다. 그런데 근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을 경험했던 탓에 누구보다도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흔히 영적 지도자들은 현재를 살아갈 것을 강조하는데 근사체험자들은 자연스럽게 현재에 충만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고 한다. 이 또한 근사체험이 단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시켜주는데 그치지 않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시사한다.

 

6) 근사체험은 마음(의식)과 뇌의 관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것은 과학과 철학의 오랜 난제인 심신문제(mind-body problem)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문제다. 현재 주류 패러다임인 과학적 물질주의에 의하면 우주에는 오직 물질과 에너지만 존재하며 인간의 마음(의식)을 포함한 다른 모든 현상들은 물질과 에너지의 상호작용에서 파생되는 부수적인 현상일 뿐이다. 이것은 곧 뇌가 마음(의식)을 생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근사체험은 이런 주장에 대한 강력한 반증을 제시하고 있다. 수많은 사례들을 통해 의식과 관련된 뇌 부위(신피질 포함)가 사실상 기능을 상실한 상태에서 현실보다 더 생생한 기억을 한 후 이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은 뇌가 의식을 만들어낸다는 주류 신경과학계의 주장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가 말한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에 의하면 기존 주장을 반박하는 하나의 사례만으로도 기존 주장은 수정되어야 한다. 백조는 모두 희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단 한 마리 검은 백조만으로 충분했다. 실제로 호주에서 검은 백조가 발견되었으며, 그래서 백조는 반드시 희다는 주장은 반박되었다.

저자는 휴대폰의 비유를 통해 뇌와 마음(의식)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이는 과거 라디오나 TV수상기에 비유했던 것과 대동소이하다. 우리는 휴대폰을 이용해 다른 사람과 통화하거나 영상을 보지만 휴대폰이 음성을 만들어 들려주거나 영상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뇌는 해당되는 부위를 이용해 우리가 주변 상황을 의식하도록 도움을 주지만 의식 자체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뇌는 의식(또는 마음)의 생산자가 아니라 의식의 필터나 수신기 또는 라디오가 특정 주파수를 감지하듯이 감축 밸브(reducing valve)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감축 밸브 개념은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지각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에서 강조한 것이다. 이와 같이 뇌를 필터나 수신기로 해석하는 것은 저자가 처음은 아니다. 그렇지만 저자는 근사체험에 대한 오랜 연구를 통해 보다 실증적인 차원에서 이 개념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약물을 통해 비일상적인 의식 상태를 체험했고 이를 통해 의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렸던 헉슬리와는 달리 보다 과학적 방식으로 결론에 도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이것은 현재 철학 및 과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아직은 기존 이론을 완벽하게 반박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근사체험에 관한 연구가 이 문제의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7) 근사체험은 사후 의식의 연속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NDEs raise questions about the continuation of consciousness after death): 극한의 상황에서 뇌가 기능을 멈춘 상태에서 마음이 작동한다면 뇌사 이후에도 어떤 형태로든 마음(의식)이 존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와 관련해 아직 어떤 과학적인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사실 사후 의식(또는 마음)이 존속하는가 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근사체험 가운데 죽은 줄 몰랐던 사람을 만났던 사례가 있다는 것은 사후에도 의식이 연속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훗날 더 나은 설명이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현재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설명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우리는 물리적 육체 이상의 존재로서 일부는 육체가 작동을 멈춘 다음에도 지속되며 우리 자신보다 훨씬 더 큰 무엇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보통 영적 지도자나 신비체험을 한 사람들이 강조하는 말처럼 들린다. 실제로 저자는 티벳 불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 성하(聖下)의 초빙으로 인도 다람살라에서 <의식은 뇌와 독립적인가?>라는 주제로 티베트 승려들을 대상으로 근사체험 연구 결과에 입각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저자는 달라이 라마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삶을 강조한 데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서구 과학도 자연을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입장을 지양하고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을 지지한다면서 과학자로서 자신의 연구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필자는 저자의 이런 입장을 근사체험을 연구해서 얻은 결과도 단지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일부인 뭔가가 존속하니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안도감을 갖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품고 있는 자연과 더욱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고 우리가 겪는 고통을 줄이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음과 관련된 오랜 연구를 해온 학자로서의 깊이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근사체험 연구는 과학적인가? 

근사체험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사례는 플라톤이 국가론에 언급했던 에르(Er)라는 이름의 병사의 근사체험이다. 그 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근사체험을 했을 것이지만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의학이 발전하면서 과거에는 죽음을 피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임상적으로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적적인 사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심폐소생술이 발달하면서 심장발작으로 사실상 사망 판정을 받았다가 소생한 사람들 가운데 근사체험을 했던 사람들의 고백이 점증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에는 진취적인 사고를 가진 의사들이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세계적인 의학 저널인 란셋(Lancet)에 최초로 근사체험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네덜란드의 심장 전문의 핌 반 롬멜(Pim van Lommel)이 대표적이다.

  

이미 널리 알려졌듯이 근사체험은 철학자이자 의사인 레이먼드 무디 박사가 처음 소개한 용어다. 그런데 이 책에서 간단히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는 자신의 멘토였던 버지니아대 의대 이언 스티븐슨(Ian Stevenson)교수와 함께 무디 박사보다 먼저 근사체험에 해당되는 사례들을 연구한 적이 있었다. 스티븐슨 교수는 체스터 칼슨이라는 독지가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버지니아대 의대에 인지연구소(Division of Perceptual Studies)를 설립해 버지니아대를 환생(reincarnation) 문제와 근사체험 연구의 중심지로 만든 장본인이다. 굳이 이 점은 언급하는 이유는 저자는 일찍이 근사체험 사례들을 분석하는 연구에 매진했으며, 그밖에 종양 전문의 제프리 롱(Jeffrey Long), 신경정신과 의사이자 명상가인 피터 펜윅(Peter Fenwick), 그리고 심장 전문의 샘 파르니아(Sam Parnia)를 비롯한 여러 전문가들이 다양한 근사체험 사례들을 수집해 과학적인 연구를 수행해왔다.

 

여기서 근사체험은 과연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저자가 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는 최대한 과학적인 방법으로 근사체험 사례들을 연구해왔다는 점을 알리는데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이 책 곳곳에서 저자가 과학적 연구를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런 목표를 가지고 차례를 정한 것으로 보인다. 보통 의학 분야에서 과학적 연구라면 이중맹검법(double blind method)과 같은 방법을 이용해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연구를 말한다. 그렇지만 저자가 단호하게 말했듯이 통제된 연구나 직접 관측이 불가능한 분야가 엄연히 존재하며, 이런 경우에는 다른 과학적 방법이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지질학이나 진화론 등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는 통제된 실험이나 관측이 어렵다. 저자는 근사체험도 그런 분야에 속한다면서 극단적인 상황에서 체험한 것들은 심층 인터뷰를 통해 수집한 체험자들의 기억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분석한 후 이로부터 일관성 있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도 충분히 과학적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저자의 입장에 동의한다. 

 

이런 저자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저자가 개발한 근사체험 등급(NDE Scale)”이다. 저자는 처음에는 80개 지표를 선정해 각 지표에서 근사체험의 강도를 측정하다가 훗날 16개 지표로 압축해 각 지표의 등급을 측정했다. 예를 들면 체험자들은 각 지표에 대해 0, 1, 2 중 하나를 선택해 총 0점에서 32점까지 나올 수 있도록 했다. 2점에 가까울수록 근사체험의 강도가 높은 것으로 측정된다. 이런 등급을 적용하면 지역, 인종, 성별, 직업, 종교 등 여러 측면에서의 차이를 무시하고 근사체험자들이 겪은 체험의 강도를 비교할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최대한 객관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그밖에도 저자는 근사체험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위한 다양한 지표를 개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과학적 연구에 집착한 데는 유년시절 화학자였던 부친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저자의 이런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 모두가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미개척 분야를 지금과 같은 정도로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만든 공은 전적으로 저자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사체험은 무엇이 다른가? 

근사체험이라는 용어 자체가 일상적이 아니다. 보통 우리는 일상적 의식 상태(ordinary states of consciousness)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한다. 알아차림(awareness)이라는 의식의 특성을 이용해 주변 상황을 분석한 후 의사결정을 내리고 행동한다. 반면 비일상적 의식 상태(non-ordinary states of consciousness)LSD, Ketamine 또는 DNT같은 약물을 복용한 의식 상태나 깊은 명상, 무아지경에 빠진 경우 또는 꿈꾸는 경우의 의식 상태를 말하는데 변성의식 상태(altered states of consciousness)라고도 한다. 이런 면에서 근사체험은 비일상적 의식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체험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 전반을 통해 다양한 근사체험자들과의 인터뷰 내용을 분석해 얻은 결괄르 바탕으로 근사체험이 일상적인 체험과 여러 면에서 얼마나 다른지 보여준다. 간단히 말하면 근사체험은 물리법칙이 적용되지 않으므로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주류 신경과학에서 주장하는 것과 상반된 특징을 보여주는 많은 사례들을 포함하고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한 특징 중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근사체험자는 종종 시간이 영원한 것 같이 느낀다. 또한 꿈에서와 같이 과거, 현재, 미래가 순서와는 상관없이 공존하기도 한다. 또는 근사체험은 시간 밖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느껴진다. 한마디로 시간에 관한 물리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시간의 비국소성(non-locality)을 의미하는데, 시간이 무한하게 지속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신중한 저자는 이런 표현을 자제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근사체험자들이 임상적으로 사망한 동안에 얻는 기억은 현실의 기억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보고한다. 저자는 많은 사례를 통해서 이 점을 확인했는데 특히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묻는 경우 이들의 기억은 더욱 선명했다고 한다. 기억의 이런 특성은 기억은 뇌에 저장된다고 하는 주류 뇌과학자들의 견해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뇌파 측정과 같은 실험을 통해 확인한 바에 의하면 근사체험의 기억은 상상이나 환각에 입각한 기억과는 다른 반면 실제 기억과 매우 유사했다고 한다. 이는 근사체험이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는 증거라는 것이다.

다수의 근사체험자들은 유체이탈을 경험하는데 이로 인해 근사체험을 부인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혼수상태에서 유체이탈을 통해 수술실에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과 주변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의 행동에 대한 정확한 진술을 한 사례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자신이 유체이탈을 주장한 환자의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를 만나서 유체이탈을 통해 관찰했다는 의사의 특유한 동작을 확인했다고 말한다. 그는 일본계 의사였는데 수련의 과정에서 습득한 특이한 동작을 했는데 혼수상태의 환자가 이를 관찰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는 것이다. 그밖에 저자는 유체이탈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유체이탈이 일어나는 경우에만 관찰 가능한 위치에 무작위로 특정 이미지가 나타나도록 하는 여러 실험이 모두 실패로 끝난 것이 유체이탈을 부정하는 증거로 사용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의식의 특성을 고려할 때 타당한 지적이다. 의식은 자신이 관심 있는 것에 집중하므로 바로 주변에 관심 밖의 대상이 있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유명한 <고릴라 동영상>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근사체험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비롯한 각종 정신질환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체험이다. 저자는 이런 정신적 체험과 근사체험은 통계적으로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정상적인 사람과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 간에 근사체험을 하게 될 가능성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밖에도 저자는 근사체험이 기존의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철저한 논의를 통해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사례 연구에 의하면 기존의 이론으로는 근사체험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는 물론 처음부터 예견된 것이지만 저자가 담담하게 자신의 생애에 걸친 연구를 회상하면서 이런 결론을 제시하는 데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할 점은 저자는 인간의 뇌와 의식(마음)에 대한 자신의 이론 모형을 바탕으로 결론에 도달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학적 연구 방법은 크게 연역적 방법과 귀납적 방법으로 구분할 때 저자는 많은 사례 연구를 통해 귀납적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가 뇌와 의식의 관계라는 오늘날 과학계의 가장 뜨거운 쟁점에 대해 특별히 기여한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연역적 추론을 바탕으로 성립한 어떤 이론이라도 궁극적으로는 실증 자료에 의해 귀납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저자가 기여한 바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고 본다. 예컨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은 1915년에 발표되었지만 영국의 천문학자 아더 애딩턴(Arthur Eddington)1919년 개기일식의 관찰을 통해 경험적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이론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애딩턴의 실증 연구가 없었다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오랫동안 미완의 이론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저자의 연구를 애딩턴의 업적에 비유한다면 필자의 착각일까. 

 

실제로 저자는 주류 신경과학이론으로는 근사체험을 통해 드러난 뇌와 의식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곳곳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근사체험이 주류 과학계에 던지는 가장 큰 도전이라면서도 저자는 이와 관련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저자는 마음(의식)과 뇌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뇌가 마음을 만들어낸다고 하는 해석은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상당히 절제된 표현이다. 이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과장해서 해석하기 보다는 신중한 입장을 취하면서 이와 관련된 이론 모형을 제시하는 학자에게 역할을 맡기는 겸손한 자세로 여겨진다. 곳곳에서 저자의 학문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이 책을 읽는 재미라는 생각이 든다. 

 

뇌와 의식의 관계: 국소적 vs. 비국소적 

근사체험은 초심리학(parapsychology)에서 다루는 사이(psi)”라 불리는 다양한 초자연현상들, 예컨대 텔레파시, 예지력, 원격투시, 예감, 그리고 환생이라고 불리는 현상과 더불어 대표적인 비일상적 의식 상태에 해당한다. 이런 현상들은 모두 의식(마음)은 뇌가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하는 주류 신경과학이론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래서 주류 신경과학계에서는 이런 현상들을 모두 부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주류 신경과학자들은 이런 현상들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할 의사가 전혀 없는 가운데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매도하는 데 있다. 이는 결코 열린 마음을 가진 과학자의 태도가 아니다. 심지어 어떤 신경과학자는 비록 이런 현상이 사실로 밝혀지더라도 자신은 부정할 것이다라는 극단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가 오랜 세월 신념을 가지고 근사체험을 연구했다는 데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후반부(11장 이하)는 주로 뇌와 의식의 관계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 할애되었다. 이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한마디로 마음(의식)은 뇌가 아니다로 압축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은 저자는 의식과 마음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한데 이에 대해서는 상세한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필자는 마음과 의식은 다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견해를 지지하기 때문에 이 점에서는 저자와는 다르다. 사람들이 전공 분야에 따라 마음과 의식의 관계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고 있기에 더욱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이 문제를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므로 단지 저자의 관점에서 뇌와 의식의 관계를 정리하고자 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 문제에 관한 저자의 태도는 매우 신중하다. 실제로 저자는 각종 인터뷰나 강연을 통해 의식이 뇌와 독립적인 근거로 첫째 오랫동안 의식을 잃었던 사람이 임종 직전에 의식을 회복하는 것, 둘째 최소한의 뇌조직만 남은 사람의 복잡한 의식 활동, 셋째 근사체험자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의식 활동, 넷째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을 들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의식이 뇌에 국한되지 않아야만 설명 가능한 근사체험과 기억이 뇌에 저장되지 않아야만 설명 가능한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 사례가 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기억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와 함께 의식 작용을 위한 필수 요소이므로 기억(특히 장기기억)이 뇌에 저장되지 않는다면 이는 의식이 뇌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지지하는 또 다른 증거가 될 것이다. 의식과 기억은 같이 묶어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근사체험과 전생 기억이라는 두 가지 이례적인 현상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이는 의식이 뇌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즉 비국소적(non-local)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주류 신경과학계에서 의식이 국소적(local), 즉 뇌의 산물이라는 주장에 정면으로 배치될 뿐만 아니라 인류사에서 가장 큰 지각변동을 가져올 파괴력을 가진 가설이다. 수많은 근사체험 사례 분석을 통해 얻은 저자의 통찰에 의하면 뇌는 필터 내지는 감축밸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저자 이전에도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작가이자 철학자인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주장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이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저자는 귀납적으로 많은 사례들을 분석해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근사체험자들은 뇌의 대부분 조직이 기능을 상실해 뇌파를 측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근사체험을 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는 뇌의 기능이 감소할수록 일상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헉슬리는 이런 상황을 지각의 문에서 실감나게 묘사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동물적인 측면 때문에 뇌가 감축 밸브로 작용하면서 생존과 번식을 위해 필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그런데 자신이 직접 체험했듯이 약물에 의해 뇌 기능을 축소시키면 전혀 다른 세상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의하면 근사체험은 뇌 기능이 사실상 거의 소실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뇌에 구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궁극적인 실재(ultimate reality)”에 근접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우리는 평소에 시각적으로는 가시광선만을 감지하고, 청각적으로는 일정 음역(音域) 안의 소리만 감지하는 등 인간의 감각기관들은 모두 감축 밸브로 작용하고 있기에 이 논리는 뇌에 적용하는데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뇌 기능이 거의 소실된 근사체험이라는 매우 이례적인 상황을 통해 의식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의식의 비국소성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뇌가 감축 밸브로 기능함에 따라 우리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의식의 지극히 일부만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근사체험자가 만났던 사람 가운데 사망한 사실을 몰랐던 사람과 만났던 기억을 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이것이 의식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이것은 의식이 시간적으로 영원히 존속한다는 것, 즉 시간적 비국소성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비국소성이란 시간이나 공간적으로 무한(infinity)” 개념에 해당된다. 

 

여기서 의식의 비국성과 관련해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아는 한 이 문제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설명한 대표적인 저서로는 세계적 의학 저널 <란셋>에 근사체험에 관한 논문을 게재했던 핌 반 롬멜의 Consciousness Beyond Life나는 천국을 보았다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신경외과의사 이븐 알렉산더의 Living in a Mindful Universe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비국소적 마음(non-local mind) 개념을 처음 제시한 의사이자 영성가인 래리 도시(Larry Dossey)의 저서 원 마인드(One Mind)와 논문 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들 외에도 의식의 비국소성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 사람들이 여럿 있다. 필자는 이들의 연구를 모두 소개할 능력은 없기에 이 세 사람의 견해를 바탕으로 의식의 비국소성에 대한 이론이 어느 수준에 와 있는지 가늠하고자 한다. 이런 내용을 다루는 이유는 저자가 이 책에서 언급한 뇌와 의식의 관계에 대한 귀납적 해석과 보완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례 분석이 아니라 양자물리학이 발견한 특이한 현상들을 바탕으로 연역적 관점에서 의식의 비국소성을 논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귀납적 방법에 기초한 저자의 주장과 상호보완적이다. 

 

의식의 비국소성에 대한 이들의 견해를 살펴보기 전에 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의 근거가 무엇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견해에 가장 비판적인 사람 중 한 명이 미국의 저명한 회의론자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 박사는 최근 저서 천국의 발명(Heavens on Earth)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런 비유(뇌를 TV 수상기에 비유)는 통하지 않는다. 텔레비전 스튜디오에서 방송 신호를 만들어 송출하면 텔레비전에서 그 신호를 포착한다. 만약 뇌가 텔레비전과 비슷한 기능을 한다면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방송 시설에 해당하는 의식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의식을 방송으로 내보내는 주체는 누구인가? 바꿔 말하면 뇌가 의식의 원천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 원천이라는 말인가? 사실 의식을 방송으로 내보내는 주체는 존재하지도 않고, 뇌도 텔레비전과 전혀 닮지 않았다.”근사체험, 유체이탈, 환생 및 다양한 초감각지각 현상들이 의식의 비국소성을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셔머가 제기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뇌가 의식의 필터라면 도대체 의식의 원천은 무엇이고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뇌가 수신하게 되는지 전체 과정이 과학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핌 반 롬멜, 이븐 알렉산더, 그리고 래리 도시는 근사체험에 바탕을 둔 이론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이들의 주장을 다루기 전에 먼저 이들 주장의 배경이 되고 있는 양자물리학의 초석을 놓은 양자물리학자들이 의식과 관련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들이 양자물리학의 특이한 속성을 이용하도록 동기를 부여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막스 플랑크(191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나는 의식을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나는 물질은 의식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간주한다. 우리는 의식 너머로 갈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의식을 상정(想定)한다.”

   

에르빈 슈뢰딩거(193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의식은 물질적 관점에서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식은 전적으로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그밖에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순간 중력에 의해 태양 주변에서 빛이 휘는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원리를 입증해준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아더 에딩턴(Arthur Eddington)경은 물리적 세계는 의식과의 연결이 끊어지면 완전히 추상적이면서 실제성을 잃게 된다.”고 했으며, 영국의 천체물리학자로서 왕립학회 회장을 역임한 제임스 진스(James Jeans)경은우주는 거대한 기계라기보다는 점점 거대한 생각처럼 보인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모두 의식이 시공간적인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비국소성을 지지하는 발언이다. 

 

필자가 언급한 세 사람 가운데 먼저 비국소적 마음이라는 용어를 제안한 래리 도시의 견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일찍이 1987년 이 용어를 처음 제안했으며, 자신이 편집인으로 있는 저널 Explore20154월호에 이라는 논문을 통해 비국소적 마음(의식)은 양자역학의 양자얽힘(quantum entanglement)에 기초한 비국소성 이상의 개념이라면서 많은 사례들을 통해 확인되어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미 저서 원마인드(One Mind)를 통해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그는 근사체험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이(psi)현상, 예컨대 텔레파시, 예지몽, 예지력, 원격투시 등과 같은 현상들이 엄격한 과학적 기준을 통과했다면서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다. 저널리스트이자 영성지도자인 린 맥타가트(Lynne McTaggart)도 저서 필드에서 그와 같은 주장을 펼쳤다. 그렇지만 이들의 주장에 대한 주류 과학계의 조롱에 가까운 반응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냉소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양자역학은 기이하다. 의식도 기이하다. 그러니 양자역학과 의식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양자얽힘에 근거한 비국소성은 곧 모두의 의식이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의 비국소성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한다. 이 얼마나 기이한가?”필자는 주류 과학계의 이런 비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비록 비국소적 마음, 즉 한마음의 관점에서 의식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양자역학을 동원해 의식을 비국소성을 주장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고 싶겠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다음 이븐 알렉산더는 하버드 의대 등에서 신경외과로 탄탄한 커리어를 쌓은 사람으로서 2008년 박테리아로 인한 급성 뇌막염으로 일주일 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극적으로 회생했는데, 이 기간 중 일어난 근사체험을 바탕으로 두 권의 책을 출판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여기 소개한 저서 Living in a Mindful Universe에서 그는 근사체험이 우주에 충만한 의식의 본질을 알려주는 놀라운 사건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단순한 물질우주가 아니라 우주의식(cosmic consciousness)으로 충만한 우주라는 것이다. 그 또한 양자역학의 특성인 양자얽힘 현상을 이용해 의식의 편재성을 설명하려 시도했는데, 객관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주장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통찰에 더 의존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아무튼 의식이 뇌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면 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된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 또한 획기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획기적인 주장을 하려면 이에 걸 맞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원칙인데 이 점에서는 부족하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따라서 놀라운 근사체험을 했던 당사자로서 그의 통찰이 맞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핌 반 롬멜은 이들 가운데 이론적으로 가장 관심을 가질만한 주장을 펼쳤다. 롬멜도 양자역학의 여러 현상들, 이를테면 양자중첩, 양자얽힘, 입자파동의 이중성, 상보성, 그리고 특히 관찰자 효과(observer effect)를 기반으로 의식의 비국소성을 논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대동소이하다. 그렇지만 필자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볼 때 의식의 비국소성에 대한 그의 설명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비전공자로서 양자역학과 의식이라는 두 상이한 주제를 접목해 이 정도로 논지를 전개한 롬멜의 노력에 경탄할 뿐이다. 그의 책은 학문의 벽에 안주하기 보다는 학문간 벽을 허물고 통합적인 연구를 통해서만 의식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여실이 보여준다. 그런데 롬멜은 자신이 문제의 답을 제시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시도를 통해 의식의 본질에 대한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고대한다고 말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필자는 이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이 주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읽었으면 한다. 

 

이상 간단히 언급한 외에도 의식의 비국소성을 지지하는 전문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이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고무적인 일이다. 만약 이들의 연구가 성과를 이뤄 의식의 비국소성이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날이 온다면 인류사에 커다란 진전이 있을 것이다. 인류는 더 이상 서로를 미워하고 다툴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왜냐하면 의식의 비국소성 여부는 태초에 의식이 출현한 과정, 즉 의식의 기원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핌 반 롬멜이 양자역학의 여러 현상을 바탕으로 의식의 비국소성을 주장하면서도 현재로서는 생명과 의식의 기원을 밝힐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다분히 역설적이다. 아무튼 이 문제와 관련해 여러 사람들이 이론을 제시했으나 아직 어떤 이론도 보편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예컨대 양자물리학자 데이비드 봄(David Bohm)이 저서 전체와 접힌 질서에서 주장한 접힌 질서(implicate order), 시스템과학자 에르빈 라슬로(Ervin Lazslo)Science and the Akashic Field를 비롯한 일련의 저서에서 제시한 아카샤(Akasha) 내지 정보장(information field), 생물학자 루퍼트 셸드레이크(Rupert Sheldrake)Morphic Resonance를 비롯한 일련의 저서에서 주장한 형태형성장(morphogenetic field), 그리고 천체물리학자 버나드 헤이시(Bernard Haisch)의 저서 신이론과 린 맥타가트의 저서 필드에서 제시한 영점장(zero-point field)이 의식의 원천인지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다. 더욱이 이런 원천과 개별 생명체의 뇌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에 관해서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의식의 비국소성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전한 그림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것의 이론의 모체가 될 수 있다.

 

근사체험과 관련된 의문 

전 세계적으로 근사체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그래서인지 이들에 대한 연구도 매우 활발한 편이다. 국제근사학회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런 배경에는 심폐소생술과 같은 의술의 발달로 과거에는 사망했을 사람들이 소생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으며,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는 이른바 커밍아웃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근사체험이라는 이례적인 체험을 한 사람들이 수천만 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근사체험을 죽어가는 뇌에서 산소 부족으로 인해 발생하는 환각 현상으로 매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주류 신경과학자들은 이런 점에서 전향적인 태도를 갖고 이 문제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근사체험 관련 각종 자료들을 검토하고 유튜브에 업로드된 여러 동영상을 보면서 몇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되었는데 그중 몇 가지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근사체험과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의문은 사망 직전까지 갔거나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대체로 10~20%)만 이런 체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저자를 비롯해 어떤 연구자도 명쾌한 답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누구는 죽음 직전에 놀라운 경험을 한 기억을 갖고 회생하는 반면 누구는 아무 것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단지 우연의 지배를 받는가, 아니면 어떤 법칙이 있는지 의문이다. 

근사체험자들이 터널을 통과해 도달했다는 장소(realm)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은 보통 말하는 장소, 예컨대 디즈니랜드와는 다를 것이다. 그러면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지옥이 여기에 해당하는가? 그리고 근사체험자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도달한 곳이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충만하고 평화로우며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면서 마치 천국에 있는 것과 같았다고 기억한다. 반면 일부 근사체험자들은 지옥과 같은 장소에 있었으며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다고 기억한다. 필자는 천국과 지옥의 비유는 근사체험의 진실성에 부정적으로 작용할 소지가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다분히 평소 가지고 있는 종교적 사고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근사체험 중에도 일상적인 의식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이례적인 현상으로서 근사체험의 진실성에 의문을 갖게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단정적인 답변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으면서 다분히 중립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를테면 저자는 근사체험자들이 천국이나 지옥 또는 영적 세상으로 묘사한 것이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친숙한 우리 세상의 다른 측면(예컨대 정치세계나 스포츠 세계라는 표현과 같은 맥락에서)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저자의 이런 표현이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난다는 근사체험의 특성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분명치 않다. 이 문제는 근사체험의 진실성과 관련해 더 깊은 연구를 필요로 한다.

근사체험자들 가운데 90퍼센트 정도는 어떤 신성한 강렬한 빛과 조우한 기억을 말한다. 그렇지만 이 빛의 실체에 대해서는 어떤 일관된 설명을 찾아보기 어렵다. 근사체험자가 살아온 문화적 배경에 따라 이 빛의 존재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자란 체험자는 신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며 그 밖에 다른 지역 체험자들은 크리슈나, 붓다를 언급하기도 하고 혹자는 근원(Source) 또는 신성한 존재(Divine Being)로 묘사한다. 그런데 명칭을 달라도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 존재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과 한없는 평화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다수가 유사한 증언을 하고 있지만 이들이 말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신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흔히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사랑이니라.”라는 표현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도 관심사다. 이 문제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대한 과학적으로 납득할만한 설명을 내놓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만 새로운 패러다임이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 신성한 빛은 에고의 한계에 갇힌 조각난 의식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의식(universal consciousness)으로서 신비체험을 한 사람들에게 우주의식(cosmic consciousness)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막연히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런 의식 상태를 경험한 사람들은 뭐라 묘사할 수 없는 엄청난 희열(bliss)을 느낀다고 했기 때문이다. 올더스 헉슬리는 저서 영원의 철학에서 동서양 여러 종교의 심층을 접한 사람들의 신비체험을 상세하게 비교해서 묘사했다. 이들이 느꼈던 신비체험이 바로 근사체험자들이 느꼈던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관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측할 뿐이다.

 

저자는 자신의 평생 연구를 바탕으로 근사체험의 여러 측면의 진실성을 다시 한 번 점검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학자로서 바람직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 책을 읽어볼 만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학자로서 저자의 진지하면서도 솔직한 태도다. 근사체험은 황당한 비과학적인 주장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바꿀지도 모르는 중대한 사안이라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저자는 그 정도로 강한 표현을 하지는 않고 있지만 이 문제의 중요성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저자는 평생 이룩한 연구 성과에 대한 자찬(自讚)보다는 다시 한 번 의문점들을 점검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한 것들 외에 근사체험의 여러 측면들 가운데 과학적으로 더 검증되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양자물리학이 고전물리학을 대신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실험과 관측을 통해 양자역학의 정확성과 정합성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아니라도 근사체험이론이 주류 과학계의 주목을 받으려면 해결되어야 할 난제들이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모두 해결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피력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50년 연구로부터 얻은 통찰이 인류의 미래를 환하게 밝혀주기를 고대한다. 

 

근사체험의 인류사적 의의 

근사체험이 매우 이례적인 사건처럼 보이지만 미국의 경우만 해도 전체 인구의 5% 정도가 경험한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보편적인 현상이다. 게다가 전 세계에서 발생한 수많은 근사체험들에 공통적인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기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 신경과학계에서는 근사체험을 단지 죽어가는 뇌에서 산소 부족으로 인해 발생하는 자기 방어 메커니즘 정도로 비하해서 평가하는 것은 진정한 과학적 태도라 보기 어렵다. 예컨대 미국에서 사이비과학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잡지인 의 발행인이자 널리 알려진 스켑틱인 마이클 셔머와 젊은 시절 유체이탈 체험을 했으나 나중에 태도를 바꾼 심리학자 수전 블랙모어(Susan Blackmore)는 근사체험을 냉소적으로 평가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현재 근사체험에 대한 주류 과학계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시대 대표적인 신경과학자 중 한 명으로서 캘리포니아 공대 교수를 거쳐 현재 <알렌 뇌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크리스토프 코흐(Christof Koch)가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중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202061일자에 <What Near-Death Experiences Reveal about the Brain>이란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그가 이 글에서 근사체험을 통상적인 느낌이나 지각과 같이 부인할 수 없는 진짜라면서 근사체험의 실제성을 수용한다고 말한 것은 괄목한 만한 변화다. 그러면서 그는 근사체험의 기억은 실제 기억보다 더 진짜 같다는 저자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였다. 그는 결국 주류 신경과학자로서 자연주의 내지 물질주의의 관점에서, 즉 뇌의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근사체험을 해석하는 데 그치고 있다. 예컨대 미국 우주항공국(NASA)에서 우주인을 훈련할 때 사용하는 원심분리기에서 중력의 4배 정도의 힘을 받으며 회전하는 경우 많은 사람들이 정신을 잃고 기절한 후 곧 회복되는데 이 잠깐 사이에 근사체험과 유사한 체험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뇌에 산소가 부족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도 근사체험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이런 지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근사체험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판에 밖은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저자가 코흐 박사의 이 글을 봤는지 모르겠으나 이 책에서 코흐 박사가 제기한 의문점들을 모두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코흐박사는 최근 의식의 본질과 관련해 비주류 주장에 속하는 범심론(panpsychism)을 지지하는 등 비교적 열린 자세를 가진 학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근사체험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주류 신경과학계는 여전히 근사체험을 진지하게 연구할 의향이 없다는 메시지로 봐도 무방하다.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Thomas Kuhn)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분명히 말했듯이 패러다임 전환은 종교의 개종만큼 어려운 것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필자가 비전문가임에도 근사체험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이유는 이에 대한 탐구가 철학과 과학계에서 오랜 세월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심신문제(Mind-Body Problem)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할지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나아가 심신문제의 핵심은 마음-뇌 관계에 있는데, 이것은 다시 의식의 본질에 관한 문제다. 그리고 이것은 1996년 정신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가 말한 의식의 어려운 문제(hard problem of consciousness)”로 압축된다. 이것은 신경세포들 간에 발생하는 전기·화학적 작용으로부터 어떻게 주관적 체험, 즉 퀄리아(qualia)라고 불리는 현상이 발생하는가에 관한 문제다. 이보다 앞서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1974년 듀크 대학교에서 발행하는 저널 Philosophical Review에 게재한 이라는 논문에서 “.....과 같다는 느낌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주관적 체험, 퀄리아에 해당된다. 아직까지도 주류 신경과학계에서는 이 퀄리아의 정체에 대해 어떤 설명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근사체험을 비롯해 환생, 즉 과거를 기억하는 아이들에 관한 연구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만약 뇌가 의식을 생성하는 원천이 아니라 필터 내지 감축 밸브로 작용한다면 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안 된다. 뇌의 전기·화학적 반응이 주관적 체험을 만들어 내는 원천이 아니고 인간이 주변 상황을 알아차리도록 하는 전달 기능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데 뇌의 기능이 사실상 소멸되었을 때 현실보다 더 분명하게 의식 활동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근사체험은 뇌가 필터나 감축밸브로 작용한다는 증거를 제공하므로 의식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도 같은 견해를 갖고 있는 듯하다. 저자는 뇌의 상태와 의식의 상태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뇌에서의 전기화학적 반응이 반드시 생각이나 느낌(퀄리아)을 초래한다고 할 수는 없다면서 오히려 생각이 뇌에서 전기화학적 반응을 유발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말한다. 저자는 뇌와 의식 관계를 연구하는 신경과학자가 아니므로 이렇게 조심스럽게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이런 저자의 입장은 거듭 근사체험이 의식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뒷받침한다. 

 

이미 수많은 연구를 통해 근사체험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저자도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근사체험이 항상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일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확인되었다. 근사체험자들이 마치 지옥을 여행하고 온 듯한 기억을 하는 경우도 있으며, 정상으로 돌아온 후에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함으로서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경우도 간혹 보고되었다. 나아가 긍정적인 경험을 한 사람 가운데 주변 사람들과 정상적인 교류가 어려워져서 고통을 받는 경우도 자주 확인되었다. 저자에 의하면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근사체험자들 가운데 65퍼센트가 근사체험 이전에 비해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않아 이혼하게 된다고 한다. 이 통계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근사체험의 부정적 측면으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추적 관찰 결과를 통해 근사체험이 전반적으로 훨씬 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다른 기억과는 달리 근사체험의 기억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좀처럼 약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근사체험을 통해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삶을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근사체험이 주변 가장 값진 교훈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전에 비해 주변 사람들을 더 배려하고, 더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 유무를 떠나 더욱 영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 대목은 정말 음미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넘쳐나는 증거가 있기에 내가 확신하고 있는 한 가지는 근사체험이 사람들의 태도, 믿음, 그리고 가치에 미친 영향이다. 만약 당신이 이 책에서 한 가지만 취하고자 한다면 근사체험이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놓은 변화시키는 힘을 인식하길 바란다(But there is one thing about which I am certain, about which the evidence is overwhelming-and that is the effect of NDEs on people’s attitudes, beliefs, and values. If you can take only one thing from this book, I would want you to appreciate the transformative power of these experiences to change people’s life.)” 

 

죽음은 모든 것의 완전한 소멸이라는 과학적 물질주의의 주장을 분명한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반박할 수 있다면 이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인류 전체를 위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특히 지금과 같이 불평등이 심화되고 사회 양극화가 악화되고 있는 상황을 근본적으로 반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패러다임 전환이 없으면 정말 해결하기 어렵다. 다행히 최근 과학계 내부에서 기존의 과학적 물질주의 패러다임의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비교적 작은 움직임이지만 머지않아 거대한 파도가 되어 모든 것을 바꿔 놓을 잠재력을 갖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서 근사체험 연구가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201427일부터 9일까지 미국 애리조나 주 투산에 일군의 과학자들이 모여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의 목적은 과학적 물질주의가 과학에 미친 영향을 비판하고 과학, 영성 및 사회를 위한 탈물질주의(post-materialism) 패러다임이 부상하고 있는 데 대해 토론하는 것이었다. 이 회의는 애리조나대학교의 신경과학자 마리오 뷰리가드, 심리학자 개리 슈워츠(Garry Schwartz), 그리고 생물학자 루퍼트 셸드레이크, 심리학자 리사 밀러(Lisa Miller) 및 의사 래리 도시 등 여덟 사람이 주관했다. 이 회의를 마친 후 참가한 300여 명의 신경과학자, 심리학자, 정신의학자, 의사 등 일군의 과학자들은 18개 항에 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그 중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은 물질주의와 환원주의라는 고전물리학의 가정에 근거하고 있는데 19세기 이래 과학적 물질주의라는 신념체계로 굳어졌다. 그 결과 마음은 뇌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활동일 뿐이며, 우리의 생각은 뇌, , 행동, 그리고 물리적 세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이런 과학적 방법론이 자연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고 기술 발전을 가져와 자연을 더 잘 통제하면서 인간에게 더 많은 자유를 가져다 준 것은 사실이다. 

1920년대에 확립된 양자역학은 과학적 물질주의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류 과학자들은 양자역학을 이용한 기술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었을 뿐 관찰자로서 인간의 마음(의식)과 관찰 대상의 상호작용을 줄곧 무시해왔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관찰자 효과(또는 측정 문제)는 물리적 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어 관찰자의 마음(의식)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보여주었다.

과학적 물질주의는 초심리학에서 연구해온 다양한 초자연현상(psi phenomena), 예컨대 텔레파시, 염력. 예지, 원격투시와 같은 현상을 무시해왔으나 이와 관련된 방대한 실증연구결과는 더 이상 무시될 대상이 아니다. 또한 근사체험을 통해 밝혀진 의식과 뇌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뇌가 의식을 생산한다는 과학적 물질주의의 입장에 반하는 것이다. 이는 마음(의식)은 뇌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결론으로 인도한다. 이에 덧붙여 과학적 물질주의는 뇌가 어떻게 마음(의식)을 생산하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탈물질주의 패러다임은 1) 마음은 물질과 더불어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로서 다른 것()으로 환원되는 대상이 아니다. 2) 마음과 물질세계는 깊이 연결되어 있다. 3) 마음은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비국소적으로 작용한다. 즉 마음은 시간적으로는 특정 시각에, 공간적으로는 특정 장소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마음은 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마음은 한계가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개개인의 단일한 마음을 모두 포괄하는 한마음(One Mind)으로 귀결된다. 4) 수많은 근사체험 사례들은 뇌는 정신활동을 중계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마음은 뇌를 통해서 작용하는 것이지, 뇌에 의해 생산되지 않는다. 이것은 육체적 죽음 이후에 존재하는 삶, 즉 사후생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5) 과학자들은 영성과 영적 체험을 탐구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 존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물질주의 과학에서 탈물질주의 과학으로의 이동은 인류 문명의 진화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보다 더 결정적일 수 있다.

 

이 선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근사체험은 단순히 일부 사람들에게 발생한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 아니라 과학계의 오랜 난제인 의식의 어려운 문제에 대한 답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개인의 삶과 사회 전체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만약 더욱 정교한 과학적 검증을 거쳐 근사체험이 객관적인 현상으로 확인된다면 우선 의료산업, 보험산업 등 죽음과 관련된 여러 산업에 획기적인 변화가 불가피하다. 나아가 연쇄적으로 사회 전반에 엄청난 변화가 올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작동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인간의 무의식을 장악하고 있는 한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타인을 사랑하고 배려할 수 없다. 이는 분리된 존재로서 우리는 끊임없는 투쟁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근사체험이 보편적으로 인정된다면 상황은 역전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미래 사회에서 더욱 취약한 존재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는 인간이 다시 원래의 존엄성을 회복하도록 지원하는 유일한 희망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우리 모두 근사체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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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 21 May 2021 23:10:34 +0000 에세이-인문학분야
<![CDATA[문샷 프로젝트를 추진하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정립해 시간과 공간,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중력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과학, 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주옥같은 명언을 많이 남겼다. 그 가운데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 적합한 명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는 문제는 그것을 만들어낸 수준의 사고로는 해결할 수 없다.” 우리사회를 들여다보면 중차대한 문제들이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는 인상을 떨치기 어려운데 그 원인은 아인슈타인이 지적한 것처럼 문제를 만들어낸 수준의 사고가 여전히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자신만이 진실을 말하고 있으며, 자신만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는 착각과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묘책이 있다면 마땅히 채택되어야 한다. 그런 묘책을 찾아내는 참신한 방법이 문샷(moonshot)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이다. 1957년 미국과 냉전 중이던 소비에트연방이 먼저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한 데 충격을 받은 미국 정부는 미항공우주국(NASA)를 창설하고 인간을 달에 보내는 <아폴로 계획>을 추진해 1969년 최초로 인간을 달에 착륙시켰다. 이것이 문샷 프로젝트의 효시다. 당시의 기술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였지만 새로운 발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던 획기적인 계획이었다. 이후 문샷 프로젝트는 혁신적인 방법으로 어렵고도 큰 과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다. 현재 국가로는 영국, 미국 및 일본이 문샷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으며, 기업으로는 구글과 테슬라를 비롯해 실리콘 벨리의 혁신적인 기업들이 이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나라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시장경제는 시장과 정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최악은 독과점적 시장과 독선적 정부로 구성되어 있는 경우다. 한국의 경우 현재 상당수의 시장이 독과점 상태에 있지만 공정경쟁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법과 제도를 정비함으로써 점차적으로 개선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정부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선거를 통해 구성된 정부는 정책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위임 받기에 글로벌 차원에서 경쟁하는 기업들과는 달리 정책 수립과 집행 과정에서 독선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여론을 수렴 한다던가 당정 협의를 거치는 등 형식적인 모양은 갖추어왔으나 실질적으로는 소수의 정치인과 관료들이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우리는 1997년 외환위기를 겪어야 했으며 4대강 개발, 자원외교, 창조경제 등 여러 정책 실패의 대가를 감내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샷 프로젝트의 핵심은 혁신적인 기업들이 해온 것처럼 상금을 내걸고 문제 해결을 위한 경연대회를 개최하는 것이다. 오늘날 시장경제에 고유한 복잡계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정책으로는 당면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부동산 문제가 대표적인 사례이며, 그밖에 교육 문제, 양극화 문제, 불평등 문제, 자살 문제 등도 마찬가지다. 출산율 저하 문제, 기본소득제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정부가 민주주의 정신을 함양하고 국민의 정체성 회복을 원한다면 독선적인 정책 수립을 지양하고 일정한 상금을 내걸고 <부동산 투기 근절 및 가격 안정을 위한 장기 대책>, <대학입학제도 혁신적 개선 방안>, <이익공유제의 장단기 효과에 대한 심층 분석>과 같은 문샷 프로젝트를 추진할 것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 1등에게 10억 원의 상금을 내걸고 경연대회를 추진하면 강호의 많은 전문가들이 팀을 구성해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안할 것이다. 이는 국민의 정책 참여를 촉진함으로써 대의민주주의의 취약점을 보완할 뿐만 아니라 국민의 정체성 회복에도 상당히 도움이 된다. 진정한 민주정부라면 이것이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시대에 적합한 정책 추진 방식임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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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 04 May 2021 23:53:05 +0000 한국사회관련
<![CDATA[달러의 정치경제학]]> 미국은 전성기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초강대국으로서 전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경제적,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미국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분쟁에 개입하면서 평화유지와 내정간섭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미국의 이익이 우선되어왔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국내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진실에 접근하기 어렵다. 미국이 개입했던 여러 사건들을 살펴보면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2003년 대량살상무기를 빌미로 한 이라크 침공이나 현재 진행 중인 중국과의 무역전쟁도 여기에 해당된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친미(親美) 또는 반미(反美)라는 극단적인 입장이 아니라 미국의 정책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용미(用美). 친미를 외치거나 반미를 강조해온 세력은 대체로 표면상으로는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내세우지만 은밀하게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실질적으로 국가의 생존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서는 실용적인 용미가 절실하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강력한 힘의 원천인 달러화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연방준비제도·브레튼 우즈 체제의 탄생과 달러의 특권

달러는 미국 독립 직후인 1792년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 제안한 화폐주조법(Coinage Act)을 의회가 승인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미국의 화폐로 채택되었으니 지금부터 300여 년 전의 일이다. 이후 달러는 중앙은행의 설립 인가 및 취소가 반복되는 가운데 정부 또는 은행이 발행 주체가 되는 우여곡절의 역사를 거쳤다. 그런데 정부가 금화나 은화 같은 주화가 아닌 지폐의 발행 주체가 되었던 것은 링컨 대통령 재임 시절이었던 1861년부터 1865년에 걸친 기간뿐이었다. 남북전쟁에 소요되는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발행된 이 지폐는 뒷면이 녹색으로 인쇄되었기에 그린백(Greenback)이라고 불렸는데 금이나 은의 지지를 받지 않고 순전히 정부가 보증하던 화폐였다. 그런데 남북전쟁의 상황에 따라 금과 대비한 그린백의 가치 변동이 매우 심했다. 그렇지만 결국 북군이 승리함에 따라 그린백의 가치는 점차 안정되었으며 1878년경에는 금과 대등한 가치를 가지면서 유통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더 이상 그린백을 발행하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은행과의 갈등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은행이 지폐 발행을 담당했으나 금과 은의 보증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주기적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등 부작용이 끊이지 않았다. 정부의 시장 개입을 극도로 혐오하는 미국의 전통은 달러화의 발행 및 유통을 둘러싼 정부와 은행 간의 갈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 1791부터 1811년까지 20년간 의회의 승인 하에 미국 제1은행(First bank of United States)이 설립되어 중앙은행의 역할을 수행했으나 의회의 재 승인을 받지 못해 문을 닫았다. 그로부터 5년 후 미국 제2은행(Second Bank of United States)이 설립되어 1816년부터 1836년까지 20년간 존속했지만 역시 의회의 재 승인을 받지 못하고 폐쇄되었다. 이후 1837년부터 1862년까지 개별 주()의 인가를 받은 은행은 자유롭게 영업할 수 있는 자유 은행의 시대가 지속되었다. 이 시기 은행은 금이나 은을 바탕으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는데 느슨한 규제로 인해 금융 불안을 초래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1797년에는 인가받은 은행이 24개에 불과했으나 1837년에는 712개로 늘어났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 이 시기 은행의 수명은 평균적으로 5년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짧았으니 당시 금융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이 기간 내내 인플레이션이 그치지 않았으며 지급불능으로 도산하는 은행들이 빈번했다.

 

이런 금융 불안을 해소하고자 미국 정부는 1863년 국가은행법(National Banking Act)를 제정해 주 단위를 넘어 국가적 차원에서 은행을 개설하는데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으며, 이는 1913년 지금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 이하 Fed)가 설립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이 기간 중 은행들은 금이나 은으로 달러의 가치를 보증하는 데 실패하는 사례들이 종종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빈번하게 금융위기가 재발하곤 하였다. 최종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의 역할을 하는 중앙은행이 없는 상황에서금융위기를 조직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영국이 잉글랜드 은행(Bank of England)을 이용해 아메리카를 통제하려는 데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1694년에 설립된 잉글랜드 은행은 왕실과 상인들이 타협으로 탄생한 주식회사 형태의 중앙은행이었으며 1946년에야 국유화되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미국의 독립을 주도했던 조지 워싱턴을 비롯해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인사들이 은행가들의 탐욕에 봉사하는 중앙은행의 설립에 반대했던 것은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제1은행과 제2은행이 단명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07년에 발생한 금융위기는 전대미문의 파급효과를 미쳤다. 금융재벌 존 피어폰드 모건(J. P. Morgan)의 노력으로 겨우 사태를 수습한 이후 1910년 몇몇 금융인과 상원의원 및 재무부 관료가 조지아 주 연안에 있는 지킬 섬(Jekyll island)에서 극비리에 회동해 새로운 중앙은행 시스템에 대해 논의했다. 그 결과 19131223일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에 서명함으로써 현재의 Fed가 탄생했다. 이 법에 의하면 의회가 이사회 의장과 이사의 선임을 승인한 후 대통령이 임명하는 절차를 밟고, Fed의 이익 중 상당부분이 재무부로 귀속되는 등 정부가 소유한 중앙은행이라는 외양을 갖추고 있지만, 실소유주는 민간은행이다. 이런 점에서 초기 잉글랜드 은행과 유사한 특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금융을 통제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세력이 Fed를 장악하고 있다는 음모론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킬 섬 회동에 참가한 주역들을 보면 이런 의혹이 들 만도 하다. 이들의 면모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넬슨 올드리치(Nelson W. Aldrich): 상원의원, 미국 통화위원회 의장,

                                              존 록펠러 주니어의 장인

에이브러햄 앤드류(Abrham P. Andrew): 재무부 차관보

프랭크 밴더리프(Frank A. Vanderlip): 뉴욕 내셔널 시티 뱅크(National City bank) 총재이며 윌리엄 록펠러와 투자은행 쿤로브(Kuhn, Loeb & Co.)의 대리인

헨리 데이비슨(Henry P. Davison): 투자은행 제이피 모건

(J.P.Morgan Co.)의 선임 파트너, 투자은행가

찰스 노턴(Charles D. Norton): 뉴욕 제이피 모건 퍼스트 내셔날 은행(First National Bank) 총재

벤저민 스트롱(Benjamin Strong): 제이피 모건 뱅커스 트러스트 캄패니(Banker Trust Company) 대표

폴 워버그(Paul M. Warburg): 투자은행 쿤로브의 파트너, 영국의 로스차일드 은행(Rothschild Bank)의 대리인

 

이 명단에는 당시 국제금융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세력들을 대변하는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 록펠러 가문 그리고 모건 가문이 그들이다. 이런 이유로 Fed를 둘러싼 음모론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탄생 목적 자체가 최종대부자로서 금융 안정을 도모하는 데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금융자본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으로 오인될 소지를 안고 있는데, 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에드워드 그리핀(G. Edward Griffin)The Creature from Jekyll Island를 참조하기 바란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읽혔던 중국 작가 쑹홍빈이 화폐전쟁1에서 언급했던 Fed에 관한 내용은 모두 이 책에 근거하고 있다.

 

1914년에 시작해 1918년에 끝난 제1차 세계대전은 국제정치질서는 물론 국제금융질서에도 상당한 변화를 초래했다. 가장 주목할 점은 세계 경제의 중심에 있던 영국의 퇴조다.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 금본위제의 폐지와 준비통화(reserve currency)로서 영국 파운드화의 몰락이다. 준비통화는 기축통화(anchor currency) 또는 국제결제통화(international settlement currency)로도 불리는데, 외환보유를 위한 준비자산으로서 뿐만 아니라 국제무역의 결제통화로도 사용된다. 이런 이유로 준비통화는 다른 통화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파운드화는 준비통화의 지위를 그럭저럭 유지했으나 1929년 세계대공황을 계기로 점차 그 지위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1931년 말 기준 세계 외환보유고에서 파운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50%인 반면,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40%로 상승했으며 나머지는 프랑스의 프랑이 차지했었다. 그 당시 달러는 이미 준비통화로서 파운드의 지위를 위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던 미국은 제조업을 중심으로 영국을 제치고 세계 1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으며 이 추세는 2차 세계대전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1차 세계대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영국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반면, 미국은 오히려 전쟁을 계기로 부동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브레튼 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944년 종전 직전 미국 뉴헴프셔주의 작은 도시 브레튼 우즈에서 44개국의 대표들이 만나 종전 후 국제금융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영국 대표로 참석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 Keynes)의 안이 기각되고 미국이 제시한 안이 채택됨으로써 달러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금융질서가 확립되었다. 이 모임에서 합의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환본위제도를 실시해 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시키고 다른 나라 통화는 달러에 고정

상하 1% 내에서 조정 가능한 고정환율제를 실시하고 국제수지의 근본적인 불균형이 있는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그 이상의 변동을 허용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개발은행(IBRD)의 창설

특별인출권(Special Drawing Right; SDR)의 창출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면서 동시에 가치 안정을 위해 금에 의한 가치 보장을 병행하는 금환본위제도를 실시한 것이다. 이것은 금본위제도의 변형된 형태라 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의 뇌리에는 통화 가치의 안정을 위해서는 여전히 금의 보장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남아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다시 금본위제도로 회귀하는 것이 국제금융질서의 안정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제기되는 것도 이런 사고와 무관하지 않다. 금에 대한 집착은 인류의 무의식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사항은 원칙적으로 고정환율제를 채택했다는 점이다. 환율은 한 나라를 대표하는 가격으로서 거시경제 전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변동성이 커지면 개인이나 기업은 물론 국가 경영이 어려워진다. 환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기업과 정부는 안정적인 계획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브레튼 우즈 체제에 의한 안정적인 환율을 바탕으로 선진국들은 자유무역을 통해 상당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평화로운 번영의 시기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는데, 이는 전후 미국의 역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브레튼 우즈 체제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준비통화로서 달러의 위상이 더욱 강화된 미국이었다. 준비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는데 많은 경제학자들이 동의한다. 당시 이런 요건을 모두 갖춘 통화는 달러뿐이었으니 달러가 준비통화가 된 것은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내경제 규모가 커야한다.

국제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금융시장의 규모가 크면서 개방적이어야 한다.

통화의 태환(兌換)이 용이해야 한다.

국내 거시정책이 안정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달러로 인해 미국이 얻는 이득이 지나치게 큰 데 대한 불만이 팽배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달러의 과도한 특권(exorbitant privilege)’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이는 1960년대 당시 프랑스 재무장관이었던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탕이 한 말로서 드골 대통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실제로 드골 대통령은 당시 프랑스가 보유하던 상당액의 달러를 금으로 바꿔달라고 미국 정부에 요청했는데, 이는 미국의 특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사건이었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스위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달러를 금으로 태환해줄 것을 요청하는 사태로 인해 미국은 달러를 금으로 태환해주는 정책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곧 브레튼 우즈 체제의 붕괴로 이어졌으며, 이후 국제금융질서는 요동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달러의 과도한 특권에 대해 살펴보자. 지금도 이를 반박하는 미국 전문가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벤 버냉키 전 Fed 이사장은 <브루킹스 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가 발행하는 잡지 <BROOKINGS> 20161월호에 수록된 The dollar’s international Role: “An exorbitant privilege?”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달러의 과도한 특권은 과장된 것이며 그나마도 최근 상당히 축소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달러의 특권보다 국제 비즈니스와 정치의 공용어로서 영어의 특권이 더 크다고 비유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이를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지금도 달러는 미국에 엄청난 특혜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렇지 않다면 미국이 달러의 지위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류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달러의 특권을 논할 때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객관적으로 비교할 필요가 있다. 긍정적인 측면으로 우선 주조수입(seigniorage revenue)을 들 수 있다. 화폐를 발행할 권한을 가진 정부는 일정한 주조수입을 얻을 수 있는데 금본위제도에서는 그 수입이 미미했다. 그러나 정부가 보증하는 법정통화제도에서는 그렇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준비통화인 달러의 경우에는 상당한 주조수입이 발생하게 된다. 예컨대 미국 정부가 100달러 지폐를 추가 발행하는 데 소요되는 경비는 대략 1달러 정도로 추산되므로 주조수입은 99달러인 셈이다. 반면 100달러를 얻기 위해서 다른 나라가 미국에 재화를 수출하려면 상당한 자원이 소요된다. 미국은 이런 재화를 사실상 거저 얻는 셈이다.

 

또한 미국은 달러로 인해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로 국채를 발행할 수 있다. 미국은 수십 년 동안 막대한 재정적자를 국채를 발행해 충당해왔으므로 낮은 금리로 인한 이득은 엄청나다. 달러는 상대적으로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달러 표시 채권도 그만큼 유리한 지위를 갖게 된다. 이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였다. 문제의 진원지가 미국임에도 불구하고 달러가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간주되었기에 자금이 미국으로 집중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미국은 풍부한 유동성을 바탕으로 조기에 금융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교수를 역임한 국제금융 전문가 배리 아이켄그린(Barry Eichengreen)은 저서 달러 제국의 몰락(Exorbitant Privilege)에서 미국이 해외 부채에 지급하는 이자는 해외 투자 수익률보다 2~3% 낮으므로 미국은 그 차이만큼 국제수지 적자를 감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미국은 저렴한 해외자금 덕분에 저금리를 유지하면서 방탕한 소비를 유지할 수 있었다면서 가난한 개발도상국 국민들이 잘사는 미국 국민들을 지원하는 셈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이는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그 밖에 미국 기업들은 환전에 따른 거래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으며, 자본을 조달하는 경우에도 유리한 조건을 적용할 수 있는 등 달러로 인한 특혜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반면 부정적인 측면은 매우 제한적이다. 준비통화인 탓에 달러는 종종 과대평가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주장이 대표적인데, 달러 대비 다른 나라 통화가 저평가되는 바람에 미국 기업들이 수출에서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확대될 수 있으며, 실제로 이런 이유도 일부 작용해 미국은 매년 상당한 경상수지 적자를 보여 왔다. 고평가된 달러가 경상수지 적자의 주요 원인은 아니지만 미국은 중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들을 환율조작국이라고 비난하면서 책임을 외부로 돌려왔다. 그런데 달러가 고평가된 경우 미국 소비자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수입품을 소비하는데 따른 이득이 이런 피해를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달러의 과도한 특권은 기정사실이다.

 

브레튼 우즈 체제가 달러에 과도한 특권을 부여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국은 이런 특권을 바탕으로 경제적으로는 물론 정치적, 군사적으로도 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더욱 굳힐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의 냉전체제 하에서 자국의 이익을 유지·확대하려고 했던 미국으로서는 강력한 달러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였다. 물론 달러의 해외 공급량에 따라 달러의 가치가 하락하는 등 부침을 겪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은 Fed의 막강한 영향력과 거대한 금융자본의 힘을 바탕으로 이 과제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해왔다. 그런데 준비통화의 내재적 특성으로 인해 이런 추세를 무한정 유지하기 어렵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트리핀 딜레마·브레튼 우즈 체제의 붕괴와 금융자본의 부상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미국은 폐허가 된 유럽과 일본의 재건을 적극 지원하는 것이 새롭게 부상한 소련과의 냉전체제에서 우위를 점하기 길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마셜 플랜(Marshall Plan), 일본에서는 닷지 라인(Dodge Line)에 입각해 이들의 재건 및 원조 계획을 실행했다. 미국은 마셜 플랜에 따라 1947년부터 4년간 총 130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적, 기술적 지원을 했는데, 이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300억 달러에 달한다. 미국이 이들 국가에 적용한 기본원칙은 복구를 지원하면서 동시에 미국의 제품을 수출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미국의 최대 규모의 금을 확보하는 등 경제력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소련의 세계 공산화 야욕을 견제할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이 한국전쟁에 참여하고 막대한 경제 원조를 해준 것, 그리고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수립 및 집행 과정을 적극 지원한 것 모두 냉전체제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미국 정책의 일환이었다.

 

어쨌든 미국의 지원 덕택에 여러 나라들은 조기에 전쟁의 피해를 복구할 수 있었다. 특히 전범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의 재건은 미국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는데, 1960년대 중반 이들은 미국과의 무역에서 흑자를 시현할 정도로 발전했다. 그 결과 미국은 빠르게 무역 흑자국에서 적자국으로 전환하였다. 동시에 베트남전 확산에 따른 군비지출 증가가 겹치면서 미국은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라는 쌍둥이 적자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것은 해외에 지나치게 많은 달러가 넘쳐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달러 과잉은 필연적으로 달러 가치의 하락으로 이어졌기에 달러를 보유한 국가에서는 더 이상의 손실을 피하기 위해 달러를 금으로 태환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것은 결국 1973년 브레튼 우즈 체제의 붕괴로 이어졌다.

 

여기서 준비통화로서 달러의 피할 수 없는 한계를 살펴보자. 준비통화로서 달러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가치가 안정적이어야 하는 동시에 여러 국가들이 외화자산으로 보유하고 국제결제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의 달러가 해외에 공급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양립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 달러 공급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달러 가치 하락에 따라 안정성이 훼손되는 반면, 안정성을 유지하려면 미국이 경상수지 흑자를 유지해 해외 달러 공급이 축소되어야 한다. 그러면 유동성 부족으로 준비통화로서 달러의 지위가 흔들리게 된다. 이것이 트리핀 딜레마(Triffin dilemma)인데, 1960년 예일대 경제학 교수였던 로버트 트리핀(Robert Triffin)이 의회의 증언을 통해 밝힌 내용이기에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트리핀 딜레마는 달러뿐만 아니라 준비통화라면 어떤 것이든 피하기 어려운 문제다. 글로벌 시대에 이 문제를 현명하게 대체하려면 관련된 여러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다자간 협상이 원만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지나치게 자국의 이익에 집착하고 있기에 유럽연합, 러시아 및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반발을 사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경향은 특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이후에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문제는 그의 정책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이다. 무역전쟁에 비판적이면서 동시에 미국 사회에 어느 정도 이를 묵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은 달러의 특권을 유지하길 원하는 대다수 미국인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은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태환해주는 정책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이 보유한 금의 규모에 비해 너무 많은 달러가 해외로 유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미국 대통령은 19702월 미국의 재정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아시아에서 미국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닉슨 독트린(Nixson Doctrine)을 선포한 데 이어 19718월에는 달러의 금 태환 정치를 골자로 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을 닉슨 쇼크(Nixon shock)라고 한다. 닉슨 독트린은 아시아를 비롯한 분쟁 지역에 미국은 더 이상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원칙을 천명한 것이라면, 금 태환 정지는 실질적으로 브레튼 우즈 체제의 종식을 알리는 것이다. 모두 미국이 처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런데 이후 전개된 국제경제질서의 변화를 고려할 때 미국의 금태환 정지 및 브레튼 우즈 체제 붕괴에 따라 고정환율제도에서 변동환율제도로 이행한 것은 결과적으로 미국에 더 많은 경제적 이득을 제공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그 배경으로는 1980년대에 들어 미국 정부가 실시한 신자유주의정책과 투자은행의 급부상으로 국제금융시장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더 커졌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1933년 대공황 직후 커터 글래스 상원의원과 헨리 스티걸 하원의원이 제안해 입법화된 <글래스-스티걸법>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를 철저히 분리해 은행이 과도한 투기적 사업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금융안정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법에 반하는 금융 행위들이 1970년대 중반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증권화(securitization)를 들 수 있다. 과거에는 유동성 부족으로 거래하기 어려웠던 모기지 채권을 비롯한 각종 금융자산들을 적당한 패키지로 묶어 유동성을 부여함으로써 대량 거래의 길을 터준 것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찰스 퍼거슨(Charles Ferguson)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필름 Inside Job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변동환율제도로 인한 금융시장 변동성 확대에 대처하는 수단으로서 파생증권(derivative securities)의 거래를 장려하는 금융제도가 점차 확산되었다. 그 결과 1999년 클린턴 행정부 시절 <글래스-스티걸법>을 완전히 폐지하는 결정이 내려짐으로써 금융자본은 실물자본을 지원하는 소극적 역할에서 벗어나 실물자본을 통제하는 위치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월스트리트(Wall Street)가 메인스트리트(Main Street)를 지배한다는 표현은 이를 상징한다. 금융자본의 부상은 곧 달러의 지위가 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러는 준비통화로서만 아니라 천문학적 규모의 파생금융상품 거래의 결제통화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도 국제외환거래의 80% 이상이 달러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쑹홍빈의 화폐전쟁5, 레이쓰하이의 G2전쟁, 그리고 크리스티안 마라찌의 금융자본주의의 폭력을 참조하기 바란다.

 

브레튼 우즈 체제의 붕괴로 인해 정부는 금의 보증 없이 필요시 원하는 만큼 통화를 발행할 수 있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부분 통화 남발에 따른 인플레이션의 위험 때문에 이런 정책을 실시하기 어려웠는데 미국은 예외였다. 준비통화인 달러의 막강한 힘 때문에 미국은 달러의 공급을 크게 늘려도 인플레이션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Fed는 저금리 기조를 유지하고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를 통해 달러 공급을 대폭 늘렸지만 해외에서 달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덕분에 미국은 인플레이션 위험 없이 경제침체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준비통화로서 달러의 막강한 위력을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최근 미국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현대통화이론(Modern Monetary Theory)에 의하면 미국은 정부 부채가 계속 증가하더라도 달러의 추가 발행을 통해 인프라 구축과 교육 등에 투자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준비통화로서 달러의 힘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인플레이션 위험 때문에 생각하기 어려운 정책적 발상이다.

 

이런 달러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는 통화로 거론되는 것이 중국의 위안화라는 사실은 어떤 면에서는 다분히 역설적이다. 중국은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최근까지도 국제금융의 변방에 있던 나라였다. 그런데 갑자기 글로벌 자본주의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국제금융 분야에서 일약 조커(joker)로 등장한 것이다. 여기에는 중국이 예상보다 빠르게 경제발전을 이룩함으로써 미국의 지위를 위협하는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는 점이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중국의 위안화는 국제금융시장에서 점점 더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를 반영해 위안화는 2016년 국제통화기금에서 발행하는 가상통화인 특별인출권(SDR)을 구성하는 통화 바스켓에 편입되었으며, 얼마 전에는 달러화와 유로화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가중치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다음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런 상황에서도 준비통화로서 달러의 위상에는 거의 변화가 없다. 조만간 달러를 위협하는 대체 통화가 등장할 것 같지 않다.

 

<주요 통화별 외환보유 구성 비율>

 

2018

2016

2014

2012

2010

2008

2006

2004

2002

2000

61.7%

65.3%

65.1%

61.4%

62.1%

63.7%

65.0%

65.5%

66.5%

71.2%

유로

20.6%

19.1%

21.2%

24.1%

25.7%

26.2%

24.9%

24.6%

23.6%

18.2%

5.2%

3.9%

3.5%

4.1%

3.6%

3.4%

3.4%

4.2%

4.9%

6.0%

파운드

4.4%

4.3%

3.7%

4.0%

3.9%

4.2%

4.5%

3.4%

2.9%

2.7%

위안

1.8%

1.2%

1.0%

 

 

 

 

 

 

 

 

이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 나라들의 외환보유에서 평균적으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60%대를 유지하고 있다. 1970년대에는 이 비중이 80%대를 유지했던 적이 있었던 것과 대비해 상대적으로 달러의 비중이 다소 감소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1990년대에는 50%대로 하락했던 적도 있었음을 감안할 때 20년 이상 60%대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준비통화이자 결제통화로 달러의 위상은 견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중국의 경제력이 급증했지만 준비통화로서는 여전히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무역전쟁·통화전쟁과 달러의 미래

20187월을 기점으로 시작된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최근 양국 간에 일정 부분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미국의 대중 무역적자가 대폭 줄어들기 전까지는 쉽게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무역전쟁이 당사국들은 물론 글로벌 경제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여러 번 입증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1930년 미국 공화당 소속 리드 스무트(Reed Smoot) 상원의원과 윌리스 홀리(Willis Hawley) 하원의원이 발의했던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들 수 있다. 미국은 당시 2만개가 넘는 수입품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국내 생산품에 대한 수요를 견인해 경기침체를 막으려는 잘못된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대해 여러 나라들은 보복관세로 맞섰으며 이로 인해 국제 교역량이 크게 감소하면서 막 시작된 대공황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것이 중론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무역전쟁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아가 무역전쟁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비판하는 미국 내 여론이 상대적으로 약한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는 그 원인을 통화전쟁에서 찾고 있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통화전쟁은 단순히 미국과 중국 간 환율을 둘러싼 갈등에 한정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준비통화의 지위를 둘러싼 갈등을 말한다. 유튜브를 검색해보면 통화전쟁의 관점에서 무역전쟁을 해석하는 동영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 정부는 물론, 일반대중도 준비통화로서 달러의 엄청난 특권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중국은 현재 이런 달러의 위상을 위협할 잠재력을 가진 유일한 나라다. 따라서 미국의 파워엘리트들은 과거 달러화가 파운드화를 밀어내고 준비통화가 되었던 전철을 밟아 중국의 위안화가 달러를 대신해 준비통화가 되려는 시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한다는 것 말고는 무역전쟁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 점에서는 일반대중을 비롯해 미국을 움직이는 파워엘리트와 트럼프 행정부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미국의 국내총생산이 세계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과거 30%가 넘던 시절에서 지금은 20%대로 하락함에 따라 달러화의 위상이 전성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여전히 막강하다. 국제통화기금 자료에 의하면 2019 글로벌 GDP(경상)865990억 달러로 추정되는데, 이 가운데 미국 GDP214394억 달러로 24.8%를 차지했고, 중국 GDP141401억 달러로 16.3%를 차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각국의 물가수준을 감안한 구매력 평가(PPP)에 의하면 글로벌 GDP1418690달러, 중국 GDP273088억 달러(19.3%), 미국 GDP214394억 달러(15.1%)로 추정되므로 미국과 중국의 실질적인 경제규모는 이미 역전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같이 중국의 경제규모가 실질적으로 미국을 능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준비통화로서 중국의 위안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 이유는 달러로 거래하는 데 따른 편리함과 이득 때문에 굳이 준비통화를 위안화로 교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네트워크 외부효과(network externality). 그렇지만 이것만으로 달러의 현재 위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는 달러를 바탕으로 하는 금융자본의 막강한 금융시장 지배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금융자본의 주체들은 국적을 막론하고 달러를 기반으로 자금을 운용하는 것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도 이익임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준비통화로서 달러의 위상을 유지하려 할 것이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이들은 전쟁도 불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사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가 저서 거대한 전환에서 1차 및 2차 세계대전의 배후에는 준비통화를 둘러싼 열강들의 갈등이 있었다고 지적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중국은 국제통화기금이 발행하는 가상통화인 특별인출권 바스켓을 구성하는 비중 면에서 달러와 유로화 다음 세 번째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 정부는 달러 기반의 오일머니, 즉 페트로-달러에 대항하기 위해 2019년 상하이 국제에너지 거래소에서 위안화로 결제하는 석유선물거래를 개시함으로써 페트로-위안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이는 유럽연합이나 러시아가 달러를 이용해 석유를 거래하는 관행에 도전해 온 것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렇지만 중국은 더 원대한 포부를 갖고 계속 이와 유사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중국이 현대판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One Belt-One Road) 정책도 위안화의 국제적 지위를 궁극적으로 준비통화로 격상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금융세력은 이런 시도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트럼프 행정부가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는 무역전쟁은 중국을 길들임으로써 통화전쟁으로 비화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고도의 전략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한국은 미국의 전략적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후 이를 바탕으로 실질적으로 국익에 도움 되는 대미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섣불리 판단해 중국에 편향된 정책을 추진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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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 04 May 2021 23:45:26 +0000 [일반자료파일]한국/글로벌경제관련
<![CDATA[능력주의의 어두운 면]]> 진화가 특정한 방향을 향해 진행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소 분분하다. 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을 비롯한 대다수의 진화론자들은 진화에는 일정한 방향이 없다고 주장한다. 진화는 인간과 같은 고등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온 것이 아니라 오직 자연선택과 돌연변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진화는 특정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도 일부 존재한다. 그런데 진화 과정에서 복잡성과 다양성이 증가해왔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한다. 이것은 인간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간은 매우 단순하고 획일적인 사회로부터 정말 복잡하며 다양한 사람들이 교류하는 사회로 진화해왔다. 이것이 놀라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자 동시에 크고 작은 갈등의 원천이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의 경제적 욕구를 지속적으로 충족시켜주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기준이 준수되어야 한다. 하나는 효율성이고 다른 하나는 공정성이다. 이 둘 중 하나가 치명적으로 훼손된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암울해질 것이다. 과거 공산주의 체제를 채택했던 국가들이 붕괴한 것은 효율성 기준이 훼손되었기 때문이었다면 자본주의 체제를 채택한 국가들은 공정성 기준이 훼손되면서 내부로부터 붕괴할 수 있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그 동안 이 두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로 널리 지지를 받아왔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자신의 노력과 재능 및 업적에 따라 보상을 받는 시스템을 의미하는데 부지불식간에 사람들 뇌리에 당연한 것으로 각인되었다. 그 결과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오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실패한 사람은 자신의 무능을 탓하며 굴욕감을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능력주의가 초래한 오만과 굴욕감은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라는 물질적 상처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에 정신적 상처를 남기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오늘날 능력주의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으면서 상당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경고가 도처에서 들리고 있다. 한국 사회의 높은 자살률도 능력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필자는 이것을 승자독식의 야만적 능력주의(barbarous meritocracy)’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 시점에서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가 어떤 위상과 역할을 하고 있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하버드대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최근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바탕으로 대안을 제시하였다. 원 제목이 능력의 폭정(Tyranny of Merit)’이라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샌델은 능력주의로 인한 부작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보통사람들이 능력주의에 대해 반발한 대표적인 사례로 영국의 브렉시트와 2016년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거론하였다. 이 두 사건 모두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부와 권력을 획득한 엘리트들로부터 무시당하고 굴욕감을 느꼈던 저학력자들과 빈곤층 사람들이 반격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샌델은 다음과 같이 능력주의의 부작용을 지적한다. 노력과 재능의 힘으로 능력 경쟁에서 앞서 가는 사람은 그 경쟁의 그림자에 가려 있는 요소들 덕을 보고 있다. 능력주의가 고조될수록 우리는 그런 요소들을 더더욱 못 보게 된다........우리 스스로를 자수성가한 사람 또는 자기 충족적인 사람으로 볼수록 감사와 겸손을 배우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런 감성이 없다면 공동선에 대한 배려도 힘들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능력주의가 잘못된 방향으로 발현되면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우월감이 만연하게 됨으로써 연대와 협력을 강조하는 공동선은 퇴조하게 되고 사회 양극화가 더욱 악화될 것이 자명하다. 현재 우리는 이와 같은 능력주의의 부작용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능력주의를 폐기처분하고 다시 과거와 같은 세습 신분사회로 회귀한다거나 결과의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능력주의의 장점을 살리는 가운데 이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모색해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불평등과 양극화에 대한 처방을 모색하는 차원을 넘어 향후 도래할 인공지능 시대를 고려할 때 더욱 절실한 과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자동화로 인한 일자리 소멸에 대비해 보편적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은 중요한 한 가지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일의 존엄성,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이다. 단지 소비하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이자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대접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미국 실리콘벨리의 핵심 인물들이 앞장서서 기본소득을 거론하는 배경에는 현재의 야만적 능력주의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에 앞서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저런 잡다한 요인들을 제외하면 능력주의로 향한 첫 단계는 대학입학이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은 일단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간주된다. 다음은 명문대학 진학 여부다. 대학도 같은 대학이 아니기에 명문대학에 진학해야만 능력주의의 혜택을 누릴 기회가 많아진다. 다음은 인기학과에 적을 두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가치 시스템에 가장 충실한 전공, 예를 들면 의대나 법대 또는 경영대에 진학해 향후 커리어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은 졸업 후 각종 국가고시에 합격하거나 유망 대기업 또는 공기업 선발고사에 합격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는 이런 식으로 이미 정형화된 과정을 거쳐 능력주의의 혜택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선택된 길을 가는 것이 후손들에게도 유리하다는 고정관념이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이는 곧 세대를 이어 승자와 패자를 가름으로써 사회 양극화를 악화시키고 새로운 세습사회로 가는 길을 촉진하게 될 공산이 크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요한 삶을 살 수 있다 하더라도 이는 발전이 아니라 퇴보를 의미한다. 야만적인 능력주의는 우리를 건전하고 건강한 사회 대신 분열되고 황폐한 사회로 이끌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기서 능력주의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다. 현재와 같이 돈의 위력이 강력한 상황에서는 돈이 곧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내심으로는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돈으로 측정되는 시장적 가치가 바로 개인의 능력을 측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아니다. 헤지펀드 매니저가 막대한 소득을 올린다고 해서 능력이 있고, 코로나19 사태의 최전선에서 분투하는 간호사가 적은 소득을 번다고 해서 능력이 없다고 단언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모두 시장적 가치의 노예임을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능력인가는 그 사회의 의식 수준 내지 문화 수준에 의해 결정되므로 가변적이다. 예를 들면 유대인 사회에서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는 랍비(rabbi)는 모두에게 존경받는다. 이와 같이 진정한 선생으로 역할을 하는 사람의 능력을 존중해주는 사회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능력의 정의가 시대적, 사회적 산물임을 의미한다. 오늘날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리는 프로스포츠의 슈퍼스타나 인기 연예인들은 지금과 같은 시대에 태어났기에 그런 대접을 받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이들이 100년 전에 태어났다면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이 사실은 능력주의에 대한 다른 비판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데 과연 자신이 기여한 정도가 얼마나 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우연한 행운, 부모의 지원, 적절한 사회제도 등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보다 더 노력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성취한 모든 것은 온전히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회구성원들이 그것을 돈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만큼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극단적인 자기도취자일 뿐이다. 이와 관련해 샌델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사회 속에서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의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이와 같이 능력주의의 혜택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겸손을 배울 수 있다면, 그리고 나아가 이들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강력한 유인을 제공하는 사회규범과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면, 필자는 이런 상황에서의 능력주의를 계몽된 능력주의(enlightened meritocracy)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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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07 Mar 2021 23:00:51 +0000 한국/글로벌경제관련
<![CDATA[이승만의 <독립정신>]]> 20201229_164522_5feb5d22aa32a.jpg 

 

저자: 이승만

교정: 박기봉

출판사: 비봉출판사(2019)

 

차례

1.총론   2. 사람마다 자기의 책임과 잘못을 깨달아야 한다

3. 자신의 직책을 다하지 못하면 화를 당한다 4. 백성이 힘써 노력하면 될 것이다

5. 참으로 충성하는 근본 6. 마음속에 독립을 굳게 해야

7. 각국과 서로 통하는 문제 8. 독립국과 중립국의 구분

9. 백성이 깨이지 못하면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10. 자주 권리는 긴요하고 중대하다

11. 천지자연의 이치 12. 육대주의 구별

13. 오색인종의 구별 14. 새것과 옛것의 구별

15. 세 가지 정치제도의 구별 16. 미국 백성들이 누리고 있는 권리

17. 미국이 독립한 역사 18. 미국 독립선언문

19. 미국의 남북전쟁사 20. 프랑스 혁명사

21. 헌법정치의 효험 22. 정치를 변혁하지 않는 것의 손해

23. 정치제도는 백성의 수준에 달려 있다 24. 백성의 마음이 먼저 자유해야 한다

25. 자유 권리의 방한 26. 대한의 독립 내력

27. 청국의 완고함 28. 일본이 흥왕한 역사

29. 아라사의 정치 내력 30. 서양 세력이 동의로 뻗어오다

31. 일본이 조선과 통하여 하다 32. 일본과 처음으로 통상하다

33. 임오군란 34. 갑오년 이전의 한··청 삼국의 관계

35. 갑신 난리의 역사 36. 공사를 처음으로 서양에 보내다

37. 갑오전쟁의 근본원인 38. 갑오전쟁 후의 관계

39. 아라사 세력이 요동을 점령하다 40. 청국의 의화단

41. ·아전쟁의 근본 원인 42. 갑오·을미 동안의 대한의 사정

43. 갑오을미 후의 일본과 아라사의 상황 44. 전쟁 전 일·아 양국의 형세

45. ·아 교섭의 결말 46. ·아전쟁 개전 후 대한의 정황

47. 일본의 목표가 바뀐다 48. 대한의 청··아 삼국한테서 해를 받음

49. 우리는 좋은 기회를 여러 번 잃어버렸다 50. 일본 정부의 의도

51. 일본 백성의 의도

 

 

청년 이승만의 문제의식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1875~1965) 박사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평가가 엇갈린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그렇게 다를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우호적인 진영에서는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며 오늘의 대한민국의 기틀을 마련한 국부로 추앙한다. 반면 비판적인 진영에서는 개인적인 욕심으로 임시정부의 분열을 초래했고 미주교포사회를 농단하였으며, 권력에 눈이 멀어 남북분단을 고착시켰고, 말년에는 민주주의 정신을 훼손한 독재자로 폄하한다. 필자는 이승만 박사의 공과에 대한 첨예한 논쟁에 끼어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가 약관 20대에 쓴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당시 그의 지적 수준과 정신세계를 가늠해보고 이를 통해 지금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필자가 이 책을 접하면서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한성 감옥이라는 열악하고 폐쇄된 공간에 수인의 몸으로 있으면서, 그것도 콜레라가 창궐해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던 암울한 여건에서, 20대 후반의 나이에 19042월부터 6월까지 단 4개월 만에 집필을 마쳤다는 사실이다. 이승만 박사는 어린 시절부터 신동이라 불리면서 자랐다고 한다. 어린 시절 10년 간 유학을 공부한 후 19세부터는 배제학당에 입학해 선교사들로부터 서양 학문을 배우고 기독교 신앙을 통해 서구의 정신세계를 접하는 등 동서양의 지식을 섭렵하는 과정을 거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과 관련해서는 그가 서재필 박사와 협력해 협성회를 조직해 주필로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려고 했으며, 이후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매일신문>을 창간하는 등 언론인으로 탁월한 실력을 보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런 배경이 있기에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 <제국신문>2년여에 걸쳐 논설을 실을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단 기간에 이 책을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 청나라, 일본, 러시아 및 서구 열강이 조선의 명운을 놓고 각축전을 벌리던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혼란의 시대에 조선의 백성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리기 위해 조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함께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차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51개 사안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담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쓴 책은 아니다. 옥중에서 쓴 논설들을 수정 보완한 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일부는 내용이 간단하지만 다른 일부는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면에서 저자가 각 사안에 얼마만큼 비중을 두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예를 들면 저자는 특히 <24. 백성의 마음이 먼저 자유해야 한다><51.일본 백성의 의도>는 상대적으로 상세하게 논했다.

 

청년 이승만은 영어(囹圄)의 몸으로 있으면서 당시 대한의 사정, 대한을 둘러싼 열강들의 의도와 책략에 대한 이해,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역사의식 등을 한 데 묶어 이 책의 내용을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논설을 바탕으로 한 글이라 학문적 성격보다는 시대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 책을 읽는 사람들, 즉 대한의 백성들에게 자극을 주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비록 몸은 구속되어 있으나 자유를 추구하는 젊은 정신은 그야말로 막힘이 없이 다양한 주제와 쟁점에 대한 소신을 열정적으로 풀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주어진 열악한 상황과 젊은 나이를 감안할 때 저자의 대단한 집중력과 순발력, 그리고 분석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1. 총론>에서 <6. 마음속에 독립을 굳게 해야>까지는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대한의 백성으로서 갖추어야 하는 정신 자세를 일깨워주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소신을 갖고 행동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격려한다. ()를 행해야 할 때 뒤를 돌아보는 것은 벌써 나의 죽을 마음이 굳건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진실로 이렇게 죽는 것을 영광으로만 안다면, 남들이 모르는 중에 나 혼자 알고 의를 위하여 죽는 것이 더욱 영광된 일인데, 남이 나의 뒤를 따르지 않는 것이 나에게 방해가 될 것이 무엇이며, 만약 남이 나와 같이 죽을 자 없어서 일이 성사되지 못할까봐 염려한다면, 마땅히 내가 남이 죽는데 같이 죽지 못하는 것을 먼저 염려해야 할 것이다.”(39)

 

다음, <7. 각국과 서로 통하는 문제>부터 <25. 자유 권리의 방한>까지는 당시 서구 여러 나라에서 이룩한 엄청난 과학적 발전과 경제적 진보 등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던 세계가 어떻게 구현되었으며 그 원동력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주려고 했다. 특히 미국의 독립과 남북전쟁, 그리고 프랑스 혁명과 입헌군주제(저자가 말하는 헌법정치) 등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소개 및 평가는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식견을 이해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지구의 자연환경에 대한 이해, 그리고 당시로서는 최신 물리학 지식도 갖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서구의 과학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감추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6. 대한의 독립 내력>부터 마지막 <51. 일본 백성의 의도>까지는 서구 열강의 통상 요구에서부터 청일전쟁과 노일전쟁 등 구한말 대한민국의 명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여러 사건들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정리되어 있다. 이 가운데 특히 노일전쟁 전후 대한의 상황, 그리고 당시 일본과 러시아의 상황에 대한 묘사는 탁월하다. 최악의 열악한 상황에서 자료도 턱없이 부족했을 텐 데 이 정도의 글을 썼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입장을 바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는 놀라운 역량과 집념의 산물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자주와 독립의 당위성

청년 이승만이 이 책을 쓴 이유는 무엇보다도 백성들이 자주와 독립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기 바랐기 때문이다. 자주란 스스로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태도를 말하며, 독립은 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의존하거나 부적절하게 신세를 지지 않고 독자적으로 난관을 해쳐나가는 자세다. 청년 이승만이 보기에 당시 사대부로 고위 관직에 있는 자들은 한 결 같이 자주와 독립보다는 조정의 권세가나 외국의 유력자에 의탁해 개인의 입신양명을 도모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이런 세태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질타한다. 이러면서 이들이 겉으로 하는 일은 체통과 예절 지키기, 등록(謄錄) 찾기, 사직상소 하기, 모든 글의 문구 차례 하기 등인데, 이런 일을 하느라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백성은 사경에서 울부짖고 있는 중에도 이들의 놀이와 잔치는 날로 심해가며, 나라의 위망이 시각에 달려 있으나, 종로 삼거리로 풍악을 울리며 돌아다닐 때 좌우로 벽제(辟除) 소리는 전 보다 더 요란하다.”(44) 한 마디로 당시의 파워엘리트들은 오직 개인적인 부귀영화에만 집착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이들이 당시 세계적 조류에 무지했기에 변화를 거부하고 기득권을 지키는 데 있는 힘을 다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 열강과 일본의 통상 요구 및 이권 쟁탈전 앞에서 무방비 상태의 조선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였다. 청년 이승만은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면서 감옥에 있으면서도 대안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야말로 대단한 결기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독립은 군대를 조련하고 무기를 갖추어 무력을 바탕으로 외세에 대항하자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오직 백성이 새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무지에서 깨어나 현재 자신과 나라가 처해 있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자주와 독립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저자는 젊은 시절부터 서구 열강들의 각축전에서 대한민국이 영구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들 못지않게 학문적으로 발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식이 부족해 그들을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면 일시적으로는 독립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결국 그들의 속국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본 것 같다. 큰 틀에서 보자면 이는 정확한 판단이라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예를 들어 현재 한국의 경제 규모 면에서는 세계 12위 안팎의 강국으로 성장했는데, 이는 모든 면에서 지식이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첨단 지식의 거대한 흐름에서 소외된다면 다시 중진국, 나아가 후진국으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그렇게 멀리 내다봤다고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진정한 독립을 위한 최우선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지식과 함께 독립하고자 하는 강한 정신이 반드시 갖추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지금 우리나라에 독립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은 외국이 침범해 오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도 아니고, 정부에서 보호해주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인민의 마음속에 독립이란 두 글자가 없는 것이 참으로 걱정이기 때문이다.”(65) 개개인이 자주와 자유를 추구할 권리를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사는 집, 즉 국가(國家)가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되며, 이는 각자가 맡은 바 직분을 다하는 가운데 독립정신을 마음 깊이 새겨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지당한 말인가. 문제는 실천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이 책을 써서 널리 읽히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 대한 평가

그런데 이 책 전체를 통해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청년 이승만의 일본에 대한 인식이다. 여기서 청년 이승만을 강조하는 이유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리고 일제의 지배가 지속되면서 이승만의 일본관에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서술한 내용만으로는 청년 이승만이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정확하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단정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그가 일본이나 일본인에 대해 당시 비교적 우호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게 만드는 표현이 눈에 띤다. 이에 앞서 외국의 통상 요구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저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에는 조금도 누구를 해롭게 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와 통상하고 교섭하여 피차 이롭게 하고자 오는 것이니, 이는 결코 막을 수도 없고 막을 이유도 없다.”(73) 이것은 매우 순진한 견해라 볼 수 있는데, 당시 서구 사정에 비교적 정통했던 저자가 이런 생각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 선교사들의 우호적인 태도에 익숙한 나머지 그리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닌지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저자가 이런 맥락에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1876년 일본과 제물포조약을 체결해 개항하기 전 일본 내부에서는 조선을 침공하자는 강경파와 아직은 시기상조이니 훗날을 도모하자는 온건파가 대립했었는데, 결과적으로 온건파가 승리해 조선과 통상조약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런데 강경파는 사이고(西鄕)를 주축으로 이에 수긍하지 않고 내전을 일으켰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일본 정부에서 사이고(西鄕, 반란의 수괴)의 주장을 따르지 아니 한 것은 과연 장원한 계책으로 밝게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두운 이웃나라를 극력 깨우쳐서 힘을 합쳐 보존하고자 한 것은 우리나라 신민들이 일본에 대하여 깊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247) 일본이 조선에 침공하지 않은 것은 우리를 배려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내부 사정과 이익을 위해서인데 왜 우리가 감사를 해야 하는지 저자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저자가 주장하는 자주와 독립정신에도 위배된다.

 

나아가 청년 이승만은 일본이 청일전쟁을 승리함으로써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의 지위에서 벗어나 독립국임을 선언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그 공을 일본에 돌리는 것 같은 발언을 했다. 필자가 오해하지 않았다면 이는 간과해서는 안 되는 대목이다. 설사 일본적 외교적 수사를 동원해 대한의 독립국임을 천명했다 하더라도 일본의 간계를 간파했어야 한다. 이는 단지 사후에 비판적으로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 일본이 우리에게 한 각종 만행을 보면 결코 그들의 행보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년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우호적으로 일본을 평가한다. 만일 이 통상조약이 아니었으면 서양 각국이 결단코 그저 있었을 리가 만무할 것이니, 그 중에서 강포한 나라가 먼저 기회를 타서 손을 댔더라면 대한의 형편이 어떻게 되었을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다행히 일본과 먼저 통상조약을 맺어 공고하고 완전한 독립을 실제로 공표하였으니 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251) 이것은 필자가 청년 이승만의 뜻을 왜곡하기 위해 거두절미하고 일부만 인용한 것이 아니다. 이 문장의 전후맥락으로 보아 그는 당시 일본에 호의적인 태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짐작컨대 청국을 물리친 점, 그리고 일찍이 명치유신에 성공해 서구열강과 같은 반열에서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이 부러웠기에 일종의 롤 모델로 여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속내를 드러낸다. “이처럼 전후로 사십 년 동안 전국이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서, 세상 사람들은 이르기를, 일본은 다만 그 나라 이름 두 글자 외에는 변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는데, 이렇듯 속히 변혁한 것은 세계 역사에서도 드문 일이다. 우리나라의 신민된 자들은 저들의 변화한 모습을 보고 부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227)

 

그밖에도 저자가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가졌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 많이 있다. 필자는 여기서 이승만 박사가 원래부터 친일 성향이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일본에 대한 이승만 박사의 태도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 박사의 역작 Japan Inside Out(일본의 가면을 벗긴다)를 통해 이런 변화를 살펴 볼 수 있다. 이 박사는 일본이 194112월 진주만을 기습하기 전인 6월 이 책을 미국에서 영어로 출판했다. 당시 66세인 이 박사의 대일본관을 알 수 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일본은 군국주의의 망령에 빠져 세계를 지배자가 될 운명이라는 맹신을 갖고 아시아 여러 나라, 그리고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수행할 만반의 준비를 갖춰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1910년 대한민국 합방은 이런 담대하고 거대한 계획의 시발점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 내에는 일본의 집요하고도 조직적인 홍보로 인해 평화주의자들이 득세하는 형편이라는 것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런 내용으로 미루어 노년의 이승만 박사는 일본의 감추어진 내면을 제대로 파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일본관을 수정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완전히 떨쳐버리기 어렵다. 예를 들면 1848년 정부 수립 후 <반민족특별위원회>를 무력으로 해산한 것은 이 박사의 오점(汚點) 중 하나로 남아있는데, 이 사건이 이 박사의 일본관과 연관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완전한 인간은 없다는 경구를 떠올리기 된다. 이는 누구나 실수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부족하므로 자신을 돌아보고 실수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 박사가 <반민족특별위원회>가 대한의 모든 백성이 자주와 독립의 정신으로 무장하는 데 중요한 동기를 제공한다고 생각했으면 과연 그리 행동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지금도 필요한 독립정신

이미 강조했듯이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일반 백성 모두가 자주와 독립정신으로 무장해야만 나라집(국가)가 반석위에 선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24. 백성의 마음(정신(精神)이 먼저 자유해야 한다>에 담겨 있다. 청년 이승만은 당시 우리나라 사람 모두 과거의 풍속과 문화에 결박당해 있다고 진단했다. 칼 융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시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은 병적인 상태에 고착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자유로운 사고를 가로막음으로써 자유와 자주의 주체로서 개인의 존엄을 물론 나아가 나라의 독립마저 위태롭게 만드는 치명적인 병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런 정신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문제점 8가지를 지적했는데 다음과 같다. 살펴보면 공감하겠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1) 반상(班常)의 등분을 깨뜨리지 못한 것이다.

2) 생각을 제 뜻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3) 사람들이 벼슬(관직)에 복종하는 노예의 사상을 면치 못한 것이다.

4) 사람의 마음이 세력에 의지하기 좋아하는 것이다.

5) 사람들이 사사로운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6) 사람의 생각이 구습(舊習)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7) 사람의 마음이 거짓말하는 악습(惡習)에 물든 것이다.

8)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릴 권리가 있음을 알지 못하는 폐단이다.

 

이어서 저자는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밝힌다. 이상의 여덟 가지는 다 사람의 마음이 결박하여 하늘이 부여해준 자주 권리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폐단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들이다. 이것을 깨뜨려 부수지 못하고는 백성 된 권리를 얻어 발달 진보하는 데로 나아갈 수 없으니, 사람마다 자기부터 먼저 이런 습관을 깨치고 어서 남을 깨우쳐 주는 것을 자신의 직책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알고자 한다면 새 학문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것이다.”(204)

 

저자가 말한 8가지 가운데 첫째와 마지막은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는 데 무리가 있다. 지금은 양반사회가 아니므로 신분제와 관련된 정신적 장애요인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렇지만 최근 부와 소득의 극심한 불평등이 고착화되면서 새로운 세습제에 대한 우려가 싹트고 있기에 이것도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은 실정이다. 마지막 만물을 다스릴 권리에 관한 것은 저자가 기독교인이기에 그 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다종교사회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렇지만 살펴보면 나머지 6개의 문제점은 지금도 그대로 우리 주변에 편재해 있는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파당(지금은 팬덤)을 지어 획일적으로 사고하면서 자신들과 달리 사고하는 사람들과는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이 확산되고 있다. 이는 진정한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것이요 결국 개인의 자유와 자주를 위협하는 것이다. 사회의 기초가 무너진다면 궁극적으로는 독립국의 지위도 위태로울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과거처럼 속국이나 식민지로 전락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나라의 영향력이 커진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승만 박사의 철학이나 정치 인생 그리고 삶 전반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단지 청년 이승만의 독립정신이라는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쓰는 것이다. 이승만 박사는 어떤 기준에서 보더라도 탁월한 지적 능력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집념을 가졌기에 한 시대의 주역이 될 만한 충분한 자질을 갖춘 인물임은 우리 모두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출중한 지적 능력과 용기, 그리고 강인한 정신을 바탕으로 통합된 인격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던 인물이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어떤 기준에서 보더라도 용납하기 어려운 실수 내지 악행을 저지른 이유가 무엇인가? 단순히 나이를 먹으면서 총기가 흐려졌다는 말로서 변명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지식과 권모술수의 측면에서는 출중했으나 통합적인 인격이 결여되었기에 발생한 모순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물음이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크던 작던 공익을 위해 봉사하려는 사람들은 이승만 박사의 행적을 연구하고 분석함으로써 어떻게 해야 언행이 일치하도록 처신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보여준 청년 이승만은 높고 순수한 이상, 해박한 지식, 그리고 조국 독립에 대한 불굴의 열정으로 가득 찬 대단한 인물이다. 이런 인물도 시간이 지나면서 권력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하물며 요즈음 지적으로나 결기 면에서 이 박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한 사람들이 권력을 탐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고 막막할 뿐이다. 모쪼록 이들이 청년 이승만이 독립정신을 통해 대오각성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면 이 책은 그 소명을 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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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 30 Dec 2020 01:47:31 +0000 에세이-사회과학분야
<![CDATA[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Tyranny of Merit)>]]> 20201217_160419_5fdb8183da35c.jpg 

저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역자: 함규진

출판사: 와이즈베리(2020)

 

차례

서론: 대학입시와 능력주의

1장 승자와 패자

2: “선량하니까 위대하다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3장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는가

4장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5장 성공의 윤리

6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

7장 일의 존엄성

결론: 능력, 그리고 공동선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근본 문제

경제 시스템으로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가장 두드러진 장점인 효율(efficiency)과 혁신(innovation)은 시장경제에서 치열한 경쟁이 유지되는 가운데 경제주체들이 최선을 다하는 경우에만 실현 가능하다. 이것은 곧 독과점으로 인해 경쟁이 제한되고 나아가 이로 인해 혁신이 불가능하다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쇠락의 길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장점을 유지 발전시키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정한 경쟁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며 각자 최선을 다하도록 적절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포용적 제도가 구축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이상적인 조건이 갖추어진 경우에도 자본주의의 내재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이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분배 문제에 관한 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을 제공하지 못하는 한계를 말한다. 그런데 오랫동안 주류 경제학자들 사이에 분배 문제를 다루는 것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롭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이 문제는 철저하게 외면당해왔다. 1995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시카고대학교 로버트 루카스(Robert Lucas, Jr., 1937~)교수는 이런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다. 그는 2004년 미니어폴리스 연방은행 연례보고서에 기고했던 The Industrial Revolution: Past and Future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건전한 경제학에 해로운 것 중 가장 유혹적이면서 가장 독성이 강한 것은 분배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지난 200여 년에 걸친 산업혁명 과정에서 발생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복지 향상은 부자로부터 가난한 사람에게 소득을 직접 재분배한 것에 조금도 기인하지 않았다. 현재 생산된 것을 분배해주는 다른 방법을 찾음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잠재력은 명백한 무제한적인 생산 증가의 잠재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통해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 중요할 뿐, 분배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다른 글에서 시장이 다 알아서 해결하므로 분배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주류 경제학자들은 대체로 루카스 교수의 견해를 지지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

 

그런데 2008년 금융위기로 자본주의의 취약성이 백일하에 드러난 이후 분배문제는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했다. 그 배경으로는 부와 소득분배의 불평등이 악화된 것이 글로벌 금융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에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점점 악화되는 불평등을 방치하는 경우 더 큰 경제적 재앙이 발생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IMF 수석이코노미스트와 시카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인도 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라구람 라잔(Raghuram Rajan)은 저서 폴트라인에서 불평등 문제를 조급하게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서브프라임 사태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금융위기가 촉발되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불평등이 악화된다는 것은 곧 대중소비가 위축될 것임을 의미하며 이는 결국 만성적인 경기침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데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이 시대적 상황에서 2014년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역작 21세기 자본을 시발점으로 조셉 스티글리츠 교수의 불평등의 대가, 앤서니 앳킨슨 교수의 불평등을 넘어등 관련 저서들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불평등 문제가 글로벌 이슈로 부상한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글로벌 공조체제를 출범시킨다는 관점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능력주의의 빛과 그림자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분배를 설명하는 유일한 원리는 한계생산성이론(marginal productivity theory)이다. 이것은 경제주체는 각자 생산과정에서 기여한 만큼 소득을 얻는다는 원리로서 일견 상당히 공정한 분배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론은 완전경쟁(perfect competition)과 완전정보(perfect information)의 가정이 성립하는 경우에만 타당하다는 데 있다. 현실은 불완전경쟁과 불완전정보가 지배하고 있으며 이는 결코 바뀌지 않을 속성임을 감안한다면 한계생산성이론은 현실에 적용하기 어려운 유토피아적인 분배이론일 뿐이다. 나아가 이 이론의 추가적인 약점은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다양한 생산요소들의 한계생산성은 측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계생산성이론이 타당하더라도 현실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경우 이 이론의 유일한 용도는 현재 당신이 얻고 있는 소득은 당신의 한계생산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이요, 원인과 결과의 역전이라 할 수 있다. 한계생산성이 측정된 후 이에 따라 소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결정된 소득이 바로 한계생산성을 반영한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현실 경제에 한계생산성이론의 원리를 적용한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로서 능력주의(meritocracy) 내지 실력주의를 들 수 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재산이나 사회적 신분 대신 재능, 노력 및 성과에 근거해서 개인에게 보상해주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현재 미국을 비롯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 지배적인 분배 원칙이라 할 수 있는데 과거 서구의 귀족제도나 조선의 양반제도에 비해 더 효율적이고 공정한 시스템으로 인식되어왔다. 그런데 최근 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이 저자가 이 책 공정이라는 착각(Tyranny of Merit)에서 제기하고 있는 비판적 성찰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능력주의라는 용어는 공식적으로는 1958년 영국의 정치인이자 사회학자인 마이클 영(Michael D. Young)이 저서 능력주의의 부상(The Rise of Meritocracy)에서 처음 사용했다. 사실 영은 능력주의의 장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2033년이라는 미래 시점에서 능력주의로 인해 예상되는 디스토피아를 풍자하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영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능력주의는 공정한 분배의 원칙을 표방한 것으로 인식된 가운데 확고한 가치 분배 시스템으로 정착했다. 물론 과거에도 능력주의가 적용된 사례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과거 중국과 조선에서 실시했던 과거제도는 능력주의 원리를 적용한 대표적인 제도에 해당된다. 신분에 따라 지위와 보상이 결정되었던 서구의 귀족제도에 비해 진일보한 제도로 평가받았던 것을 사실이지만 이 제도도 많은 부작용을 낳았으며 나중에는 원래의 취지가 퇴색되었다. 그럼에도 현대에 와서 이런 제도는 각종 국가고시나 자격증, 대학입학 등 다양한 선별 기제(screening mechanism)로 발전하면서 능력주의가 시회 전반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부상했다.

 

미국 버클리대 골드만스쿨의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 교수는 저서 자본주의를 구하라에서 능력주의의 위력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급여가 자기 가치를 결정한다는 개념이 대중의 인식에 매우 깊이 박혀 있어서 흔히들 소득이 매우 적은 것은 전부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머리가 좋지 않거나 성격에 결함이 있는 등 개인의 실패라고 생각해 수치를 느낀다. 엄청난 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은 같은 맥락에서 자신이 특별히 현명하고 매력적이고 우월하다고 믿는다.” 그러면서 라이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능력주의의 부작용을 진단했다. 실력주의 사회는 사람들이 대체로 자기 가치에 비례해 보수를 받는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노동의 대가를 매우 적게 받는 사람도 매우 많이 받는 사람도 자신의 가치가 그만큼이라고 추정한다. 미국의 실력주의 관점으로는 개인의 소득과 미덕이 일치하고, 재산과 도덕적 가치가 일치한다.” 이 책에서 샌델도 같은 맥락에서 능력과 시장적 가치를 동일시하는 풍토는 도덕적 가치를 외면하게 함으로써 공동선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사회통합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고 강조한다. 이를테면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으로 더욱 분열된 미국 사회가 단적인 예에 해당된다. 이것은 2020년 미국 대선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미국의 분열은 쉽게 치유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 배후에는 과도한 능력주의와 그동안 이를 부추긴 공화당, 민주당 정부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샌델은 특히 영국의 브렉시트와 2016년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사건을 능력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반발 내지 역습으로 평가한다. 당시 합리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이런 사건이 일어난 이유는 능력주의에 의해 굴욕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에 반발해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는 데 찬성했고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는 것이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세계화와 정보화의 메가트렌드로 인해 일자리를 잃거나 소득이 줄어든 사람들이 능력주의에 입각해 출세한 엘리트들에게 반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능력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오늘날 양극화된 정치 환경을 넘어 길을 찾으려면 능력주의의 장단점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엘리트층에 대한 분노가 민주주의를 위험 수준까지 밀어내게 될 때, 능력에 대한 의문은 특별히 중대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갈등 지향적 정치에 필요한 해답이, 과연 능력의 원칙을 더 믿고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계층을 나누고 경쟁시키는 일을 넘어 공동선을 찾는 것인가에 대해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38)

 

능력주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흐르게 된다. 오로지 자신이 이룩한 업적과 성과를 바탕으로 많은 소득과 높은 지위를 획득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기 보다는 개인주의적 성향을 더욱 강화시키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저자가 정의란 무엇인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비롯해 여러 책과 강연에서 강조해 온 공동선의 함양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필자는 능력주의의 배경인 경쟁과 공동선을 양자택일적인 문제로 간주하는 저자의 입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공동선 경제 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크리스티안 펠버(Christian Felber)모든 것이 바뀐다(Change Everything)에서 강조했듯이 경쟁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공동선과 양립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능력주의가 반드시 공동선과 모순인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필자는 저자와는 다소 견해를 달리한다. 능력주의의 장점을 살리면서 공동선을 함양하는 중도적인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곧 개인주의와 공동선의 조화를 모색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능력주의가 초래한 가장 큰 사회적 문제는 승자와 패자를 확연하게 구분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승자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과 오만을 주체하지 못하는 반면, 패자는 수치심과 굴욕감을 떨칠 수 없는 아주 비열한 방식으로 말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능력주의 이념에 찬성하며 그것을 자신들의 정치 신념으로 삼는 사람들은 이러한 도덕적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그들은 또 더 큰 정치적 의미를 갖는 문제도 외면한다. 승자들 가운데, 그리고 패자들 가운데 능력주의 윤리가 부추기는 도덕적으로 좋지 못한 태도의 문제다.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들을 오만(hubris)으로, 패자들을 굴욕과 분노로 몰아간다.”(52) 이와 같이 오만과 굴욕이라는 반대되는 감정으로 대변되는 현재의 능력주의는 물질적·정신적 사회 양극화의 원천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에 덧붙여 유유상종의 원칙에 의해 비슷한 계층의 남녀가 결혼하는 경향이 대세가 되면서 새로운 세습제도로 정착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근 수십 년 동안의 폭발적인 불평등 증가는 사회적 상승을 가속화시킨 게 아니라, 정반대로 상류층이 그 지위를 대물림해줄 힘만 키워주고 말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명문대학들은 한 때 특권층 자녀들의 입학에 걸림돌이 되었던 인종, 종교, , 민족 등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SAT는 계층과 가문이 아니라 학업 성적으로 학생을 뽑겠다는 약속과 함께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능력주의는 세습귀족제로 굳어져가고 있다.”(50) 이것은 미국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목격할 수 있는 현상으로서 계층 간 이동성이 현저하게 줄어든 나라들은 모두 이런 위험을 안고 있다. 과거 귀족제도에서는 모든 것이 출생의 운에 의해 결정되므로 지배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보통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미안한 감정을 가졌으며, 그렇지 못한 평민들은 자신이 부족한 탓에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자책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을 뿐 자신이 무능하다고 자책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능력주의가 모든 분배를 결정하게 되면서부터 상황은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 관점이다. 승자는 자신의 업적을 오직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자랑하면서 이를 공공이 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예를 들면 결혼 및 자녀의 명문대학 입학 등)을 추구한 반면, 패자들은 낮은 소득을 감수할 뿐만 아니라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굴욕감마저 감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사회의 양극화는 더욱 심해졌으며 이는 극단적인 반발로 표출되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하지만 포퓰리즘적 저항을 편협한 시각이라고 무시하거나, 이를 다만 경제적 불만의 표출일 뿐이라고 받아들이는 일은 잘못이다. 영국에서 브렉시트가 승리한 것처럼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수십 년 동안 불평등이 커지고 상류층에게는 혜택을,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력감을 안겨준 세계화가 진행된 데 대한 분노의 판결이었다. 이는 또한 경제와 문화 조류에서 뒤떨어져 버린 사람들의 항의를 나 몰라라 한 테크노크라트 정치에의 반발이기도 했다.”(42) 여기서 세계화의 주동 세력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한 파워엘리트들과 월가의 금융자본이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미국과 영국의 파워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중산층 이하 저소득층을 착취했다는 역설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월가를 점령하라는 운동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는 이런 정서를 교묘하게 이용한 전형적인 포퓰리스트일 뿐이다.

 

샌델은 이 책에서 능력주의의 장점보다는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이론적 배경에 대한 탁월한 요약과 함께 관련된 사례들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논지를 전개하는 저자 특유의 재능은 여전히 감탄할 만하며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특히 시장적 가치와 능력을 동일시하는 현재의 시장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또한 세계화와 정보기술혁신의 메가트렌드에서 소외된 계층의 불만과 좌절, 이를 무시하고 기술관료적인 행태를 보이면서 너도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You can make it if you try)”라는 공허한 말만 되풀이했던 정치인들에게 큰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이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다음에 잘 드러나 있다. 시장친화적이고 기술관료적인 세계화 개념은 좌우 주요 정당들에게 고스란히 수용되었다. 특히 중도 좌파 정당이 시장 중심적 사고와 시장적 가치를 수용한 일은 무엇보다 의미심장했다. 이는 세계화 프로젝트 진행에, 그리고 뒤따른 포퓰리즘의 반격에 큰 영향을 미쳤다.”(46)

 

그러면서 저자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기술관료적 관점에서 능력주의를 신봉했던 대표적인 정치인이었으며, 결과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부상하게 된 원인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대처 수상이 정권을 잡으면서 세계적인 조류를 형성했던 신자유주의는 세계화와 자유화 및 민영화를 추진함으로써 도덕적 가치를 몰아내고 시장적 가치가 득세하게 만듦으로써 능력주의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부상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보수정권과 진보정권을 막론하고 모든 정부는 세계화와 정보화라는 메가트렌드의 진행 과정에서 오직 기술관료적 관점에서 문제를 풀어나갔다는 데 있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이 서로에게 무슨 책임이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공동선과 관련된 사회적 담론은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이와 같이 시장적 가치가 사회 전반을 압도하게 된 데는 정치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 시각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가장 비판을 받을 사람은 보수정치인이었던 레이건 대통령이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아니라 중도좌파의 정치노선을 표방했던 민주당의 클린턴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특히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매우 신랄한데 상당히 근거가 있다. 이를테면 1999년 클린턴 정부 시절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를 완전히 분리했던 글래스-스티걸 법이 완전히 폐기되었다. 이후 족쇄에서 풀려난 금융자본은 실물자본을 압도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으며 급기야 2008년 금융위기를 초래했다. 또한 오바마 대통령이 2008년 금융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구제금융을 통해 금융위기를 초래한 은행들을 구제해주는 정책을 실시한 것은 공동선을 배제한 전형적인 기술관료적 행태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샌델은 또한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에 나타난 표현을 바탕으로 그가 얼마나 능력주의를 신봉했는지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바마의 사회적 상승 담론은 레이건과 클린턴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능력주의를 지향했다. 비차별을 강조하고 열심히 노력할 것을 주장하고, ‘개인이 각자 책임을 지라고 시민들에게 훈계했다.”(118) 그러면서 저자는 노래 가사에서 따온 너도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라는 표현은 레이건 대통령이 처음 사용한 이래 후임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 되었는데 이를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었다고 지적한다. 이는 전통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을 실시했던 민주당의 전통에 비춰볼 때 다분히 역설적이다. 저자는 오바마 대통령을 진보적이라기보다는 시장적 가치에 더 경도되었던 기술관료적 정치가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샌델은 오바마 대통령의 말이 오히려 반발을 불러왔다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불평등이 위험 수위까지 올라왔을 때 이러한 담론(사회적 상승 담론)이 가장 구역질나게 들렸음은 우연이 아니다. 가장 부유한 1퍼센트가 전체 인구의 50퍼센트보다 더 많이 벌고 있으며 중위소득이 40년 동안 줄곧 제자리걸음만 한 상황에서, ‘노력하고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성공한다는 말이 빈말로 들리지 않을 리 있겠는가.”(126) 이것이 바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에 원인을 제공한 근원이라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단지 경제적 가치의 분배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 가치의 분배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님은 자명하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기본 시스템으로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대부분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에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안은 무엇인가?계몽된 능력주의

능력주의가 잘못된 방향으로 발현되면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우월감이 만연하게 됨으로써 연대와 협력을 강조하는 공동선은 퇴조하게 되고 사회 양극화가 더욱 악화될 것은 자명하다. 현재 우리는 이와 같은 능력주의의 부작용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이런 능력주의를 야만적 능력주의(barbarous meritocracy)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렇다고 능력주의를 폐기처분하고 다시 과거와 같은 세습 신분사회로 회귀한다거나 결과의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능력주의의 장점을 살리는 가운데 이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불평등과 양극화에 대한 처방을 모색하는 차원을 넘어 향후 도래할 인공지능 시대를 고려할 때 더욱 절실한 과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자동화로 인한 일자리 소멸에 대비해 보편적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은 중요한 한 가지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일의 존엄성,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이다. 단지 소비하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이자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대접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미국 실리콘벨리의 핵심 인물들이 앞장서서 기본소득을 거론하는 배경에는 현재의 야만적 능력주의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에 앞서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대학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대학은 인재를 선발하는 기능, 즉 선별기제(screening mechanism)으로 기능하도록 설계되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대학은 능력보다는 자신을 알리는 신호(signal)로 활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명문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이 주어진 업무에 더 뛰어나다는 보장은 없다. 단지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하게 만들 뿐이다. 그렇지만 이런 대학 진학을 둘러싸고 엄청난 경쟁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로부터 능력주의 경쟁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대학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대학을 폐기할 수는 없다. 저자는 이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능력주의의 폭정(이 책의 원 제목)을 극복하다는 게, 능력이 직업과 사회적 역할의 배분에 아무 역할을 못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대신 그것은 성공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스스로 잘나서 그런 것이라는 능력주의적 오만에 의문을 제기함을 뜻한다.”(247) 저자는 대학에 진학한 젊은이들이 오직 자신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 성공이 아니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유전적 요인, 부모의 재산과 관심, 사회제도 등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서 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수용함으로써 좀 더 겸손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대체로 동의하지만 이는 다분히 나이브한 발상이다. 능력주의적 오만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해서 이미 기득권을 확보한 엘리트들이 미동이나 할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저자 자신 하버드 대학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대부분 자신의 노력과 분투에 힘입어 하버드에 입학했다는 점을 강변한다는 것은 저자의 생각이 나이브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능력주의의 원천으로서 대학의 역기능을 완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지원자들 가운데 일차로 몇 배수의 유자격자들을 선발한 후 이들을 대상으로 최종적으로 제비뽑기로 선발하자고 제안한다. 얼핏 보기에는 뜬금없는 제안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하버드대에서 지원자들 중 신입생 정원의 5배수(지원자 수를 고려해 조정 가능하다)를 일정 기준에 의해 일차로 선발한 후 다음에는 복권 추첨하듯이 무작위로 최종 신입생을 선발하는 것이다. 5배 수 내에 든 지원자들의 실력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굳이 최종 시험을 통해 선별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과정을 거쳐 하버드에 진학한 학생들은 자신의 능력만으로 입학했다는 자부심과 오만보다는 운이 좋아서 입학했다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며, 이는 훗날 능력주의의 폭정과 오만을 완화시키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서울대를 비롯해 이른바 명문대에서 이런 방안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제비뽑기라는 용어 대신 좀 더 순치된 표현을 찾아야 할 것이고, 우리 실정에 맞춰 지역적 안배와 소득수준 안배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을 고려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와 같은 대학입학제도로는 야만적 능력주의의 확대재생산과 세습사회로의 이행을 저지할 방법이 없다면 이런 파격적인 발상도 검토해야 한다.

 

여기서 능력주의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다. 현재와 같이 돈의 위력이 강력한 상황에서는 돈이 곧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내심으로는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돈으로 측정되는 시장적 가치가 바로 개인의 능력을 측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아니다. 헤지펀드 매니저가 막대한 소득을 올린다고 해서 능력이 있고, 코로나19 사태의 최전선에서 분투하는 간호사가 적은 소득을 번다고 해서 능력이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모두 시장적 가치의 노예임을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능력인가는 그 사회의 의식 수준 내지 문화 수준에 의해 결정되므로 가변적이다. 예를 들면 유대인 사회에서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는 랍비(rabbi)는 모두에게 존경받는다. 이와 같이 진정한 선생으로 역할을 하는 사람의 능력을 존중해주는 사회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능력의 정의가 시대적, 사회적 산물임을 의미한다. 오늘날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리는 프로스포츠의 슈퍼스타나 인기 연예인들은 지금과 같은 시대에 태어났기에 그런 대접을 받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이들이 100년 전에 태어났다면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이 사실은 능력주의에 대한 다른 비판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데 과연 자신이 기여한 정도가 얼마나 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우연한 행운, 부모의 지원, 적절한 사회제도 등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보다 더 노력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성취한 모든 것은 온전히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이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회구성원들이 그것을 돈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만큼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극단적인 자기도취자일 뿐이다. 샌델이 우려하는 것은 필자가 야만적 능력주의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런 능력주의는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양극화를 심화시키며, 개인적으로는 승자는 오만의 덫에서, 패자는 굴욕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그 결과 수많은 패자들은 일의 존엄성을 상실하게 되는데 이는 경제적 궁핍보다 인간적으로 더 큰 고통을 안겨준다. 그리고 이것은 승자에게도 적용된다. 경제적 풍요는 누리게 되었지만 시장적 가치에 편향된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 이상의 보상에 대한 불안감이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재보다 열악한 상황이 도래할 것을 지나치게 염려하는 나머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월스트리트의 많은 금융인들이 마약을 찾고 술과 섹스에 탐닉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샌델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일의 존엄성을 회복할 것을 권한다. 맞는 말이다. 이와 관련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16년 이후 시사평론가와 학자들은 포퓰리즘의 불만에 대해 논쟁해왔다. 그것은 일자리 감소와 임금 정체 때문인가 아니면 문화적 변동 때문인가. 그러나 그것들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일은 경제인 동시에 문화인 것이다. 그것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방법이자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는 원천이다.”(309) 일의 존엄성은 곧 인간의 존엄성으로 이어진다. 저자의 지적대로 경제적 이유만은 아니다. 인간적인 굴욕감을 느끼게 만든 것이 트럼프와 같은 선동가가 득세하게 된 이유일 것이다. 바이마르 정부가 붕괴된 혼란기에 아돌프 히틀러가 득세한 것과 같은 이유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면 금융자본의 득세에 따른 가치체계의 왜곡이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이것은 필자도 오랫동안 견지해온 관점인데 샌델도 거의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다. 사실 샌델은 이미 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이런 주장을 했다. 월스트리트로 상징되는 금융자본은 시장자유화의 물결을 타고 실물경제를 지배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장적 가치체계를 금융에 유리한 방향으로 철저하게 왜곡시켰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금융업계는 2008년 금융위기 때 극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이 때 불거진 논쟁은 주로 세금으로 구제금융을 제공해야 되느냐어떻게 월스트리트를 개혁해 앞으로의 위기 가능성을 줄이느냐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그보다 훨씬 덜 주목받은 문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금융이 경제를 재구성했으며 교묘하게 능력과 성공의 의미 또한 뜯어 고쳤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변화는 일의 존엄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그러나 경제의 금융화야말로 아마도 일의 존엄 감소에 더 큰 영향을 미쳤으며, 노동자들의 사기 저하에도 역시 더 큰 역할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현대 경제에서 시장의 보상과 실제 공동선에의 기여도 사이에 아마도 가장 큰 격차 사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335)

 

오로지 시장적 가치에 바탕을 둔 능력주의는 야만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능력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능력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결정되기 보다는 행운이나 우연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능력의 의미가 살아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연대와 협력의 가치를 존중하고 공동선을 함양하는 방향으로 능력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샌델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사회 속에서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의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이와 같이 능력주의의 혜택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겸손을 배울 수 있다면, 그리고 나아가 이들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강력한 유인을 제공하는 사회규범과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면, 필자는 이런 상황에서의 능력주의를 계몽된 능력주의(enlightened meritocracy)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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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 18 Dec 2020 01:05:40 +0000 에세이-사회과학분야
<![CDATA[데이비드 애튼버러경 인터뷰 동영상]]> 기후변화의 진위에 관한 논쟁은 이제 더 이상 불필요하다. 이산화탄소와 메탄가스를 비롯한 여러  온실가스가 초래하는 온실효과로 인해 이미 지구온난화는 상당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46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이 사실상 확정된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이 무엇보다도 먼저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이 탈퇴한 파리기후협약에 다시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밝은 것은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은 현재는 중국 다음 세계 2위지만, 얼마 전까지는 1위의 이산화탄소 배출국이었다. 우리나라는 2018년 기준 국가별로는 세계 8위로서 전 세계 배출량의 2%를 차지했고, 1인당으로는 세계 6위의 배출국으로 비중이 높은 편이다. 그렇지만 미국과 중국이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 가운데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니 두 나라의 협력 없이는 지구온난화를 저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우리 정부도 그린 뉴딜정책을 통해 2050년까지 탄소 순제로(net zero)’의 실현을 목표로 설정하였지만 제반 여건을 고려할 때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다. 

 

여기 소개하는 동영상은 1968924일 첫 방송을 시작한 이래 지금도 방송중인 미국 CBS의 대표 탐사보도 프로그램 <60(Sixty Minutes)>에서 영국의 보물(national treasure)로 칭송 받고 있는 탐험가이자 방송인인 데이비드 애튼버러(David Attenborough, 1926~)경을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애튼버러경은 영국 공영 텔레비전 방송사 BBC에 입사한 후 지구 곳곳의 다양한 생명체들의 경이로운 삶의 현장을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 제작을 주도하고 직접 해설을 맡았으며, 관련된 책을 출판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가 처음 참여했던 <지구의 생명(Life on Earth)> 시리즈와 이후 제작된 <행성 지구(Planet Earth)> 시리즈는 그야말로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다큐멘터리 필름이다. 필자는 그가 열대우림, 초원, 사막, 근해, 심해. 극지방을 비롯해 지구 구석구석에서 살고 있는 다양한 생명체들의 삶을 친근한 목소리로 해설한 경이로운 영상을 감명 깊게 보았다.

 

애튼버러경은 28세부터 최근까지 거의 70년 동안 보르네오의 열대우림을 비롯해 지구 곳곳을 탐사하면서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자연이 어떻게 파괴되어왔는지, 야생동물들이 어떻게 서식지를 잃고 멸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지 직접 목격한 증인이다. 예를 들어 그가 20여 년 전에 탐사했던 오스트레일리아 해변의 산호초(coral reef)는 장관을 연출하면서 동시에 해양 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같은 해안을 탐사했을 때 그가 발견한 것은 산호초의 무덤이었다. 기후변화로 바다의 온도가 상승하면서 산호초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고, 이로 인해 바다의 생태계가 회복 불능 상태로 파괴된 것을 목격했다. 지구의 야생과 동식물들을 오랫동안 관찰해왔고 이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노 탐험가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연유로 애튼버러경은 최근 기후변화에 대한 깊은 우려의 메시지를 담은 다큐멘터리와 책을 출시했다. 오랜 세월 지구의 야생세계를 탐사해온 그로서는 더 이상 자연이 파괴되는 것을 방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인터뷰는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충만한 그의 생애와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다큐멘터리 <우리의 지구를 위하여(A Life on Our Planet)>를 통해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압축해서 다루고 있다. 그는 이 필름에서 자신의 말은 증인 진술(witness statement)이라고 비장하게 선언하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긴박한 상황에 처해있으므로 화석연료를 신속하게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해야 하며, 열대우림을 파괴하고 종의 다양성을 감소시키는 라이프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를 위해 국제공조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실제로 그가 글로벌 리더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을 담은 영상 <A Message to World Leaders(https://youtu.be/fyYpExl8AJU)>를 보면 기후변화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한 것은 지구를 위해, 그리고 후손들을 위해 천만다행한 일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애튼버러경의 입장은 단호하다.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자연을 구하면, 자연이 우리를 구할 것이라고 말한다. 자연을 다시 야생으로 돌려서 생명의 다양성을 회복하는 것이 곧 인류를 구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후변화를 저지하고 원래 자연 생태계를 회복해야 한다. 지금은 국가적 이익을 앞세우기 보다는 지구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공조해야 하는 긴박한 시점임을 호소하고 있다. 앞으로 이 땅에서 살아갈 후손들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그의 메시지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끝으로 많은 사람들이 애튼버러경이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해설을 맡은 최신 다큐멘터리 <우리의 지구를 위하여>를 꼭 감상하였으면 한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음을 공감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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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06 Dec 2020 22:47:45 +0000 [일반자료파일]한국/글로벌경제관련
<![CDATA[위선을 장려하는 사회]]>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당선이 사실상 확정된 제46대 미국 대통령 선거는 지구촌 곳곳 많은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필자도 며칠간 긴장감 속에서 밤늦도록 각 주에서 진행되는 개표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유는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절대로 재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파리 기후협약을 탈퇴함으로써 정치적, 경제적으로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세력을 지원하였으며, 선악과 진실에 대한 기준을 전도시킴으로써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무력화시켰고, 공동체의 근간인 공동선(common good)의 파괴에 앞장서왔다. 게다가 그의 위선적인 언행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감내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으니 미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양식 있는 사람들은 그의 당락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의 낙선이 거의 확정된 현 시점에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점은 투표에 참여한 인원의 과반수에 조금 못 미치지만 7천 만이 넘는 미국인들이 그를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4년 간 그가 보여준 인종차별적 발언, 동맹국들과의 불화, 국제적 갈등 조장, 기후변화 불인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아도취적인 행동과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언행으로 인해 대다수의 미국인들아 이번 선거를 통해 그에게 등을 돌릴 것으로 예상했던 필자의 예측은 크게 빗나갔다. 그나마 코로나19사태에 대한 대응 실패로 인해 그의 재선이 저지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정치인들 가운데서도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위선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7천 만이 넘는 유권자들이 그를 지지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소셜 미디어의 부작용으로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시대에 사람들의 판단력이 흐려진 것인가, 아니면 그의 위선적인 측면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인가?

 

주지하다시피 위선(僞善)은 표면적으로는 미덕과 선을 주장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이를 부정하는 태도를 말한다. 한 마디로 자신의 실체를 외면하면서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우월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위선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어느 정도 그 정당성을 인정받아왔다. 지금까지 지구에 살다간 사람들 가운데 위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인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체로 위선적인 존재이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융(Carl G. Jung)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사회규범과 관습을 고려해 자신의 페르소나(persona), 즉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존재다. 그것도 상황에 따라 가면을 바꿔가면서 말이다. 그러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의식적인 에고에 바탕을 둔 페르소나는 자신의 무의식적인 측면을 담고 있는 그림자(shadow)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그림자에는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융의 생각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페르소나에 집착하지 말고 의식적으로 그림자를 포용함으로써 더 나은 인간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페르소나가 그림자를 외면하면 할수록 인간은 점점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은 이렇게 해석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선거가 조작되었으며 사기라고 주장하면서 대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그의 태도를 보니 이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얼마 전 재 구속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진실은 가둘 수 없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인간은 누구든 위선을 완전히 극복하기 어려우므로 일상생활에서 일정 범위의 작은 위선은 서로 눈감아주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한 경우가 흔하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의 위선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과도한 위선적인 행동이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비정부기구(NGO)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위선적인 행동을 목격하는 것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를 저지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플라스틱 폐기물을 마구 버린다거나 반미운동에 전념하던 사람이 자식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것 등은 명백히 위선적인 행동이다. 얼마 전 사회 문제가 되었던 것처럼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명예 회복을 돕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고 할머니들에게 인간적인 모욕을 주었다면 이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위선적인 행동이다. 이와 관련해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에 일관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위선은 도덕적 아노미, 즉 도덕적 무질서를 유발할 수 있다.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한국 사회에서 일부 성직자들과 정치인들이 그간 보여준 위선적 행동으로 인해 일반인들의 도덕적 기준이 무너지고 이성적 사유와는 점점 멀어지는 쪽으로 기울게 된 것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특히 일부 성직자들이 보여준 극단적으로 위선적인 행태는 인간의 본성을 의심하게 만들 정도다. 게다가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이 보여준 위선적인 행태를 보면 가히 말문이 막힌다. 이와 유사한 사례들을 정치인들의 행동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들 모두 다수의 사람들을 상대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다 보니 자신이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우월한 존재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의 추종자들이 이런 위선적인 행동을 오히려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선거는 조작되었으며 사기라고 주장하면서 그를 지지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사물을 공정하게 판단할 능력을 상실한 가운데 자신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취한다면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은 더욱 강화되고 결국 독선적인 신념체계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트럼프주의(Trumpism)가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이번 미국 대선 이후 전개되는 상황을 관망하면서 문득 향후 한국 사회에서 위선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이로 인해 도덕적 무질서 상태가 만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 사회에 위선적인 인사들이 득세하는 풍토가 조성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제도권 종교계가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관련해 영국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가 동서양 심층종교의 핵심 메시지를 정리한 기념비적인 저서 영원의 철학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고행을 하지만 여전히 자만심에 차있고 자기중심적인 금욕주의자와 고행하지 않는 쾌락주의자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후자는 칠칠치 못하고 야심이 없으며, 마음속으로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서, 자신의 몸·마음·영 외에는 많은 해를 끼칠 에너지와 동기가 부족하다. 전자는 모든 부수적인 미덕을 갖추고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업신여기기 때문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매우 큰 규모로 해를 끼치려고 마음먹을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도덕적인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오만한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은 위선을 범하고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가 정치인들에게도 적용된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은 대의와 공익을 위해 봉사하므로 사소한 실수나 잘못은 문제가 안 된다는 독선에 빠지기 쉽다. 이런 성향은 특히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발견된다. 예를 들어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경력을 바탕으로 제도권 정치인으로 변신한 박원순 시장이 아무 죄의식 없이 여직원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했다가 궁지에 몰리자 자살로 마감한 사건은 이를 웅변적으로 대변한다.

 

인터넷과 모바일 혁명으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정보에만 집착하는 편향된 태도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상황은 필연적으로 자신은 옳고 다른 사람은 틀리다는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고, 이에 따라 자신의 위선을 정당화하면서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심지어 앞으로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이용해 자신의 위선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할지도 모른다. 이런 시대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자기 성찰을 통해 자신의 행적을 되돌아보고 위선적인 태도를 조금이나마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든 위선적인 면을 갖고 있으며 이를 완전히 극복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려면, 그리고 진정 우리 후손들에게 도움을 주려면 위선적인 사람들이 득세하는 풍토가 지양되어야 한다.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고 타인을 돕는다는 것은 숭고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각고의 노력을 통해 에고의 한계를 극복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회지도층 인사 가운데 이런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공익을 위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위선적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스웨덴의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는 아이작 뉴턴 이후 가장 뛰어난 과학자로 평가받았던 인물이다. 그런 스베덴보리는 53세부터 사망할 때까지 일체 과학 연구를 중단하고 기독교 신비가로서 유체이탈을 통해 영계를 넘나들면서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의 글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기에 필자도 과연 그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스베덴보리가 저서 천국과 지옥에서 인간이 사후 영계에 가면 어떤 위선도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말에 일말의 희망을 걸어본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교황 가운데 상당수가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진실이라면, 그리고 사람들이 이것을 믿게 된다면 자기 자신과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위선적인 행동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이 쉽게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미국 대선을 통해 확인되었듯이 최악의 위선자가 다수의 사람들을 선동하고 그 여파로 인해 사회가 분열되는 비극을 막는 것이 시급한 과제임은 명백하다. 한국 사회에서 심하게 위선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일말의 죄책감도 갖지 않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부조리를 막기 위해서라도 스베덴보리의 경고가 효과를 발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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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06 Dec 2020 22:34:29 +0000 한국사회관련
<![CDATA[인공지능의 정치경제학]]> 요즘 세간의 관심이 온통 코로나19에 쏠려 있는 바람에 인공지능과 관련된 보도는 거의 눈에 띠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공지능 기술에 대한 연구가 한계에 도달했다거나 투자가 위축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21세기 경제 패권을 장악하려는 집단들 간에는 치열한 개발 경쟁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반 세상을 바꿔놓은 전기보다 인공지능의 파급효과가 더 크다는 데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동의한다는 점에서 향후 인공지능이 사회 전반에 미칠 파괴력을 가늠해볼 수 있다.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성능이 향상되고 있는 인공지능 기술은 단지 기술적인 면에서 파괴적 혁신을 주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긍정적·부정적 양면을 포함하는 이율배반적인 특징을 보일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을 곤혹하게 만들 것이다.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경제활동이 급격히 위축되고 있는 가운데 본분을 망각한 일부 인사들의 공허한 말장난과 소모적인 정치적 논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허탈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려운 시기에 국가 재정을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실현하는 편리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인사가 있는가 하면 자신은 항상 옳다는 무오류의 착각에 빠져있는 인사도 있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인사도 눈에 띤다. 이런 유형을 나열하자면 지면이 부족할 지경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문득 과연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존속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동안 정치, 경제 양면에서 괄목할 성과를 이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취약한 부분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공동체의 유지·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공감 대화 능력이 턱 없이 부족하다. 이런 풍토에서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 유지되기 어렵다. 서로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사회 전반에 불만과 갈등이 누적되어 언제 폭발할지 모를 지경이다.

 

이런 시점에서 인공지능 기술이 향후 사회 전반에 미칠 영향을 살펴보는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인공지능 기술은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과 이미 상당히 진행된 기후변화와 더불어 인류에게 존재적 위험(existential risk)을 촉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와 인공지능은 2018년에 작고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사후 출간된 저서 빅퀘스천에 대한 간결한 대답에서 인류를 멸종으로 내몰 수 있는 요인으로 지적했던 것이다. 호킹과 같은 뛰어난 인물이 경고했다는 이유만으로 존재적 위험에 대한 두려움에 떨 필요는 없지만 사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왜 이런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지 스스로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어려운 시대를 견뎌낼 수 있도록 하는 힘의 원천은 육체적인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 강인함이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마래에 대한 예지력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공지능의 정치경제학, 즉 인공지능이 정치와 경제에 미칠 파급효과를 생각해보는 것은 후손들의 미래를 위해서 중요하다. 일각에서는 인공지능이 자본주의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를 일소에 붙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이런 주장을 한 대표적인 인사로는 중국 칭화대 법대 펑시앙(Feng Xiang) 교수를 들 수 있다. 펑 교수가 2년 전 인공지능 워크숍에서 발표한 내용이 미국 신문 <워싱턴 포스트>AI will spell the end of capitalism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는데 미중 무역전쟁이 진행 중인 요즘 주목할 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한 마디로 인공지능 시대에는 미국식 주주자본주의보다는 중국식 국가자본주의가 더 우월하므로 사유재산에 기초한 자본주의는 종언(終焉)을 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펑 교수가 이런 주장을 하게 된 배경에는 과거 미국식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장점이었던 가격 시스템을 이용한 정보 처리 기능보다 국가가 인공지능을 활용해 정보를 처리하는 계획경제가 더 우월하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서 개인의 억지 주장으로 매도하기 어려운 진실이 내포되어 있다.

 

시장경제에서 수요·공급의 상황을 반영해 가격 시스템이 유연하게 작동한다면 시장참여자들은 시장경제 전반에 걸친 정보를 입수해 의사결정에 반영함으로써 효율적인 결과를 달성할 수 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대부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일찍이 1945The Use of Knowledge in Society라는 논문에서 강조한 내용이다. 하이에크는 정보의 집계(aggregation), 전달(transmission) 및 공유(sharing)라는 측면에서 자유시장보다 더 나은 경제 시스템은 없다고 역설했으며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에 공감해왔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하이에크는 시장참여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정보적으로 우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두 비슷한 협상력을 가진 경쟁적인 시장을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반대로 현실의 시장은 대부분 독과점 상태에 있으며 우월한 정보를 보유한 일부 시장참여자들이 항상 존재한다. 이는 곧 하이에크가 강조했던 정보적 측면에서의 시장경제의 장점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시사한다.

 

펑 교수는 이와 같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자신만만하게 인공지능 시대에는 중국식 국가자본주의 내지 사회주의적 시장경제가 정보적 측면에서 미국식 주주자본주의보다 우월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의 주장이 인권을 무시하고 사생활보다는 사회적 가치를 극도로 우선하는 전체주의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계획경제가 시장경제보다 정보적으로 우월할 수 있다는 점은 무시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과 같은 주주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정보기술기업은 사회적 측면을 배제한 가운데 사적인 이익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행동에 관한 빅데이터를 활용할 뿐이다. 반면 중국식 국가자본주의에서 알리바바나 텐센트 같은 민간 기업은 언제나 국가 통제 하에 있으면서 사회적 이익을 위해 사적 이익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인공지능이 누구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지 자명하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중국은 모두의 이익을 위해 인공지능을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반면 미국은 오직 소수의 엘리트가 인공지능이 창출하는 가치를 독점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요점은 분권화된 시장경제가 정보적 측면에서 중앙집권적인 계획경제보다 우월하다는 명백한 사실이 인공지능시대에는 더 이상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스마트한 민주정부가 국가재정으로 인공지능 기술을 개발한 후 향후 이 기술을 활용해 얻는 수익을 국민에게 사회적 배당금의 형태로 나눠줄 수 있다면 펑 교수가 주장한 중국식 시스템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왜냐하면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극소수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중국식 시스템은 결국 내부로부터 붕괴하는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반면 전문성과 도덕성을 갖춘 각계각층의 인사들로 구성된 국가 인공지능 위원회를 설립해 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하면서 인공지능 알고리즘 개발에 매진하도록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면 미국식 자유방임정책과 중국식 국가독점방식의 장점만 취하는 묘책이 될 수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현 정부는 그동안의 실책을 반성한다는 의미에서도 인공지능 기술의 개발과 활용에 관한 획기적인 정책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런 필요성을 못 느낀다면 이는 곧 현 정부는 한국의 실정에 적합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스템을 모색할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 증거로 간주될 수 있다.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현재와 같이 무능과 비효율과 점철된 국회를 유지하기 보다는 복잡한 현실에 적합한 법을 신속하게 제정할 수 있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개발한 후 국회는 인공지능의 제안을 추인하는 정도의 권한만 갖도록 하는 것이 대안으로 검토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신차 프로젝트를 추진했던 사례에 관한 자료로부터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신차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경우 소요되는 기간과 인력 및 예산에 비해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단기간에 그것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은 예산을 가지고 더 나은 신차를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것을 그대로 정치와 입법 과정에 적용한다면 사회 전체가 얻게 되는 이익은 엄청날 것이다. 무엇보다도 저질의 말장난과 소모적인 비방으로 인한 대다수 국민의 정신적 피로감을 해소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기여하는 것이다. 게다가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한시도 쉬지 않고 더 나은 법과 규칙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인공지능으로 인해 사라지는 일자리는 콜센터 직원만이 아니라 정치인이 일 순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대오각성하기 바란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새로운 자본주의와 새로운 민주주의가 요구된다는 것은 굳이 칼 마르크스의 유령을 불러오지 않더라도 반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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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 28 Oct 2020 01:16:13 +0000 한국/글로벌경제관련
<![CDATA[false knowledge]]> false knowledge

 

book knoweldge is store knowledge

a book writer's bubble of creation of knowledge

truly, book knoweldge is also indirect knowledge

 

indirect knoweldge is not direct knowledge

direct knoweldge is truth and real me leading and guiding me knowledge

but indirect knoweldge is from a book writer direct knwoeldge but to the reading book person get

indirect knoweldge

 

if direct knowedlge is truth knwledge

indirect knoweldge is false knowledge

 

 

but all of book reading person regard as book writer knowedlge is only geting

but truly direct knowledge is from inside knowledge

direct me knowledge is lead me to the righteous soul living in destination place

 

all of macro concept world livings are running toward to a destiantion place

whoes runs destiantion place

my runs destinaiton place

what is inidcate

 

that is not indirect knoweldge but direct knowledge

all of livings in the macro concept world

livings living depend on direct getting knwoeldge from

inside of righteous soul living in destinaiton place

 

so that who never reading book, but live well

but even ignorance alpahbat but living well

 

here is truth of direct knwoedlge is righteous soul livings will be

susally geting silence and clean clear of bubble of creation of knoweldge

 

truly infer that

book rerading indirect knwoeldge is added to the false knowledge

false knoweldge is purpse is not same as truth of righteous soul livings

truth of rightoeus soul living knoweldge is me running to the righteous soul

living in destination place is purpose

 

but false knoweldge of indirect knwoeldge is

contained uselesss knowledge my living,

book reading indirect knwoeldge is not adsorb 100 % of my living

but comming from inside creation of knoweldge is

100% adsorb knoweldge to guide me whare to go

 

but most false knoweldge relative livnigs arguing

reading book

tjhat is infer that some of wrong issue

this is macro major living saying

truly macro and major living

reading book is not wrong

 

but truly

micro and minor living is book living is not help

a living

 

living righteous soul living of creation of knoweldge is truth living

living righteous soul is feeling

silecne and clean clear living

only 100% adsorb bubble of creation of knowedl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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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 06 Oct 2020 07:23:38 +0000 [일반자료파일]의식/영성관련
<![CDATA[이제는 공동선을 논의할 때다]]> 사회가 개인들의 단순 합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함께 신자유주의 정책을 주도했으며 철의 여인이라 불리면서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영국의 수상을 역임했던 마가렛 대처는 1987년 영국 잡지 위민스 오운(Women’s Own)과의 인터뷰에서 사회 같은 것은 없다. 개인으로서 남자와 여자, 그리고 가족이 있을 뿐이다라고 사회를 부정하는 취지의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 이 말은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함과 동시에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는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널리 인용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전후 맥락을 무시하고 일부만 인용함으로써 오해를 유발한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왜냐하면 대처 수상은 사람들이 개개인의 특수한 문제까지 정부가 해결해주어야 한다며 지나친 요구를 하는 것을 반박하면서 사람들은 그들의 문제를 사회에 내던지는데 도대체 사회란 무엇인가?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으로서 남자와 여자, 그리고 가족이 있을 뿐이다. 어떤 정부도 사람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사람들은 우선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 우리 자신을 돌본 후 우리 이웃을 돌보는 것이 우리 의무다.” 이것은 사회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책임을 묻는 말이다. 대처 수상은 개인의 자유를 존중했지만 동시에 개인의 책임도 강조했다. 그래야만 정부의 과도한 개입이 없더라도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개인들을 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 연결시켜주는 복합적인 네트워크로서 사회는 분명 존재한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가 적절하게 묘사했듯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사회는 상상의 질서임은 분명하지만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실체다. 이 점은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개미 연구로 유명한 하버드대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은 저서 지구의 정복자에서 지구상에 존재했던 수백 만 종() 가운데 벌, 개미,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를 비롯해 불과 20종만이 진사회성(eusociality)을 획득했다고 말했다. 진사회성은 집단의 구성원이 여러 세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분업의 일부로서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경향을 가진 동물의 속성이다. 따라서 진사회성의 핵심은 공동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거기서 이타적으로 다른 개체를 돌봐주는 행동에 있다. 그리고는 진사회성이 출현하게 된 경로에 대해 윌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사회성으로 향하는 경로는 집단 내 개인들의 상대적인 성공을 토대로 한 선택집단들 사이의 상대적인 성공을 토대로 한 선택사이의 경쟁을 통해 도출되었다. 이 게임의 전략들은 세밀하게 조정되는 이타성, 협력, 경쟁, 지배, 호혜성, 변절, 기만의 복잡한 혼합물이었다.”이것은 이기심과 이타심의 절묘한 상호작용을 통해 진사회성이 성립하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와 같이 생물학적 관점에서도 인간은 본래 사회적 동물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높은 수준의 문화를 형성해온 인류 역사에서 진사회성에 대한 암묵적 합의가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만약 오직 개인만을 강조하는 이기심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타심을 압도했다면 사회는 해체되었을 것이다. 반면 개미 사회와 같이 개별 주체는 없고 오직 사회를 위한 이타심만 강조하는 질서가 형성되었다면 개인은 사라지고 전체주의적인 사회만 남았을 것이다. 이런 두 극단의 중간 어딘가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있다. 그것은 이기심과 이타심의 조화를 바탕으로 공동선(common good)을 회복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즉 행복이나 복지를 공동선으로 제시한 이후 공동선은 서구 정치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으나 시대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이 점은 동양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비물질적인 측면에서는 존엄성, 연대, 협력, 신뢰, 정의 및 공평과 같은 가치, 그리고 물질적인 측면에서는 공공재나 공유자원과 같은 것이 공동선의 공통 요소로 간주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공동선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것을 모두 망라한다. 예컨대 공원이나 도서관, 그리고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확인되었듯이 공중보건 시스템은 공동선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공동선은 특정 이데올로기나 지역 및 인종을 불문하고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구글 검색을 해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듯이 한국 사회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정말 기이하다. 몇 년 전 하버드대학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출판되었을 때 잠깐 공동선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곧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한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도덕적 가치체계를 확립하는 것이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억압하고 전체주의 사회로 나가는 길을 닦는 것이 아니다. 물론 과거 이런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다르다. 과거와 같이 특정 정치세력의 선동이나 조작에 의해 일반대중이 일방적으로 조종당하던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공동선은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요소가 있다면 대중적 담론을 통해 결국 도태될 것이다. 오히려 공동선은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사회적 약자를 비롯한 다수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시켜줄 수 있다. 허울뿐인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시켜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선과 개인의 자유는 상호보완적이지 결코 배타적이 아니며, 이는 역사가 증명한다. 공동선이 제대로 확립된 스웨덴이나 덴마크, 그리고 스위스 같은 나라에서 개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선택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한편 공동선이 쇠퇴함으로써 개인의 선택의 자유가 사실상 위축되고 공동체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을 들 수 있다. 클린턴 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현재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는 저서 The Common Good에서 미국 사회에서 공동선의 회복이 시급하다면서 이런 상황을 초래한 근본 원인으로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whatever it takes to....)”라는 사고가 사회 전반에 만연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는 대표적인 사례로 정치에서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권력을 유지하려다가 발생한 워터게이트 사건, 20세기 최고경영자로 추앙받던 미국 GE의 잭 웰치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이윤을 극대화하려고 시행했던 구조조정과 대량해고, 그리고 대법원판사였던 루이스 파월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보수세력이 정치, 경제 및 교육 분야를 장악해야 한다는 파월의 메모를 들었다. 라이시 교수는 이들이 남긴 영향이 미국 사회 곳곳에 만연함으로써 다민족사회인 미국을 지탱했던 공동선이 쇠퇴하였고 이로 인해 불평등과 양극화를 비롯해 미국 사회의 몰락을 예고하는 징후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의 정점에 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있다는 것이다. 라이시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라는 유산을 물려받아 이를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고 줄기차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가? 공동선의 관점에서 보자면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파괴적 혁신과 글로벌 팬데믹이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시점에서 개인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서도 공동선에 대한 논의는 절실하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끊이지 않는 갈등의 근본 원인은 공동선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할 때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 분쟁을 해결하는데 적용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분쟁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실정에 적합한 공동선의 구체적인 내용을 정립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동선에 관한 논의가 지지부진한 원인은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어렵다는 점과 실행 가능성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공동선의 내용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공동선을 훼손시키는 것들을 공동악(common bad)으로 규정한 후 이 가운데 사회공동체에 가장 큰 피해를 주는 것들을 추방하는 캠페인을 제안하고 싶다. 공동악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피해를 주는 그야말로 반사회적인 요소다. 필자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대표적인 공동악으로 도덕적 해이와 지대추구행위를 들고자 한다. 그밖에 다양한 공동악이 있지만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막론하고 크고 작은 권력을 장악한 소수가 범하는 도덕적 해이와 지대추구행위는 사회 전반에 엄청난 부작용을 낳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해이는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한 고질적인 공동악이다. 전직 대통령들이 재임 시 추진했던 여러 정책이나 결정이 도덕적 해이에 해당된다는 사실이 법정 공방을 통해 밝혀졌다. 그밖에 이른바 힘 있는 자리에 있는 인사들의 도덕적 해이는 정권이 바뀌더라도 끊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아마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평가한다면 이들이 내리는 의사결정과 이에 따른 행동 중 상당 부분은 도덕적 해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통틀어 공통된 현상이다. 예컨대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정의기억연대의 기부금 운용 관련 의혹은 도덕적 해이의 전형이다. 일제 강점기 위안부로 끌려가 인간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정신적·육체적 고초를 겪은 분들의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위해 일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이 분들이 위임해준 참 뜻을 펼치기 보다는 개인적인 이익을 도모하는 데 주력했다면 이는 전형적인 도덕적 해이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관련 인사들이 부실한 회계처리를 큰일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작은 실수라고 변명하는 데 필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덕적 해이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이들의 무지가 안타까울 뿐이다.

 

지대추구행위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는 기여한 바가 없으면서 기존의 가치 가운데 더 많은 몫을 차지하려는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지대추구행위는 도덕적 해이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더 넓은 개념이다. 권한의 위임이 없는 경우에도 지대추구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중세시대 영주들이 자신의 영지 내를 흐르는 강에 쇠줄을 설치하고 통행하는 배들로부터 통행세를 징수하는 것은 지대추구행위에 해당된다. 로비활동이 합법화되어 있는 미국에서 로비스트들이 정부의 보조금을 더 얻어내기 위해 활동하는 것도 지대추구행위에 해당된다. 국회의원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특정 기업을 지원하는데 예산을 배정하도록 압력을 넣은 후 이 기업으로부터 후원금 명목으로 기부를 받는 것은 지대추구행위와 도덕적 해이의 종합이다.

 

공동선 관련해 필자가 이 글을 통해 주장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첫째 공동선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지 못한 이유는 개념 정립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동선을 훼손하는 행위를 근절한다는 관점에서 공동악의 리스트를 만들어 이를 추방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강화하고 사회규범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가장 악질적인 공동악부터 사회에서 추방하자는 것이다. 만약 이런 취지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면 이는 스스로 사회의 암적 존재임을 자인하는 셈이다. 둘째 공동선에 관한 논의는 정부가 아니라 시민 사회가 주도해야 한다. 이 작업을 정부가 주도한다면 이는 반대 세력의 거센 저항에 직면할 뿐만 아니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진보니 보수니 하는 프레임에 갇혀 문제의 본질이 흐려진다. 예컨대 현 정부가 적폐청산을 내세운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시대착오적이다. 과거 정부에서 부정부패 추방, 정의사회 구현, 경제민주화, 모두 부자 되는 나라 등 현란한 구호를 내세웠지만 어떤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시민이 주도하는 가운데 한국 사회에 적합한 공동선 운동과 우회적으로 이를 지원하는 공동악 추방 운동이 동시에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야 한다. 이런 운동에 참여하는 시민과 시민단체는 훗날 집권세력의 일부가 되려는 부질없는 야망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민운동이 정의기억연대와 같이 권력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운동은 항상 권력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가운데 순수하게 시민운동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래야만 정부, 시장, 사회 세 부문이 상호 견제를 통해 국가발전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은 시민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본인이나 사회를 위해 바람직하다. 대의로 위장한 독선과 이기심이 뿜어내는 악취는 사회 전체를 오염시킬 수 있다. 이는 공동선을 함양하는 데 치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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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 26 Sep 2020 21:58:10 +0000 한국사회관련
<![CDATA[폴 샤피로의 <클린 미트(Clean Meat)>]]> 4차 산업혁명이 진행 중인 현재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분야는 인공지능이다. 이 분야의 선두주자는 글로벌 차원에서 패권을 쥐게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기에 미국과 중국은 인공지능 개발에 모든 역량을 쏟아 붓고 있는 실정이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의 경우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 같은 기업이 이 분야를 주도하고 있는 반면, 중국은 정부가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인공지능은 패권을 장악하는데 그치지 않고 체제의 우월성을 알리는 계기를 제공할 수도 있다. , 미국식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우월한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공지능 못지않게 사회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잠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분야가 있다. 그것은 세포농업(cellular agriculture) 분야인데, 청정고기(clean meat)는 이 분야를 대표하는 프로젝트이다. 청정고기는 배양고기(cultured meat), 실험실 고기(lab-based meat)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 프로젝트는 한 마디로 기존의 공장식 사육을 통해 소, 돼지, 닭 등 동물 고기 및 부산물을 생산하는 방식 대신 실험실에서 동물의 근육세포를 배양해 고기를 생산하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청정고기 프로젝트를 1만 년 전 농업혁명과 더불어 시작되었던 1차 가축화(domestication)에 대비해 2차 가축화라고 부른다. 가축을 사육하게 된 것이 인류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생각해볼 때 청정고기로 대표되는 2차 가축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그야말로 혁명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에 관한 논의는 넘쳐나는 반면, 청정고기에 관한 논의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 이유는 청정고기 프로젝트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여전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폴 샤피로(Paul Shapiro)는 아래 첨부한 동영상에서 기존의 공장식 사육을 통해 고기를 얻는 방식의 문제점과 청정고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샤피로는 <동물 권리보호 명예의 전당>에 오를 정도로 동물보호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행동가로서 미국 동물보호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궁극적으로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현재와 같은 공장식 사육 방식을 종료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동물의 근육세포를 채취해 배양함으로써 동물을 도살하지 않고도 고기를 얻을 수 있는 첨단 기술에서 대안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샤피로가 세포 배양을 통해 청정고기를 공급하는 방식을 적극 추천하는 이유는 동물을 보호하는 실질적인 방안은 인간의 자비심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대안을 제공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 역사적으로도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그는 미국에서 포경산업과 마차산업이 쇠퇴했던 사례들을 들었다. 고래 기름은 과거 등불을 밝히는 원료로 널리 사용되었는데, 등유가 등장하면서 시장에서 사라졌다. 그 결과 수많은 고래들이 남획의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초까지 마차는 미국에서 주요 운송수단이었으며, 말은 엄청나게 혹사당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헨리 포드가 대중적인 자동차를 출시하면서 해소되었다. 즉 동물 학대를 종식시킨 것은 인간의 자비심이 아니라 기술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샤피로는 현재 잔인하고 비위생적인 방식으로 사육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의 원인을 제공하며, 열대우림을 파괴하고, 물과 토지를 비롯한 엄청난 자원을 낭비하게 만드는 기존의 공장식 사육을 종식시키는 유력한 대안으로 세포농업에 기반을 둔 청정고기를 소개하는 것이다. 그는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 분야의 유망 스타트업들을 직접 방문하고, 이들이 만든 제품을 시식하는 과정을 통해 청정고기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평가하고 있다.

  

청정고기를 생산하려는 최초의 시도로는 2011년에서 설립된 스타트업 모던 메도우(Modern Meadow)를 들 수 있다. 샤피로는 채식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기업이 세포 배양을 통해 생산한 소고기 칩(beef chip)을 시식하기도 했다. 이후 이 기업은 고기 대신 가죽을 생산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밖에 다양한 기업들이 등장해 이 분야를 주도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2013년 최초로 햄버거용 패티(patty)를 생산한 네덜란드의 모사미트(Mosa Meat)2015년 최초로 미트볼을 생산한 멤피스미트(Memphis Meat)를 들 수 있다. 이들을 포함해 이 분야의 스타트업들이 구글의 공동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이나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같은 진취적인 기업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청정고기 프로젝트가 갖는 중요한 사회경제적 의미를 환기시켜준다.

  

여기서 한 가지 첨언할 것은 현재와 같은 비위생적인 공장식 사육 방식은 지금 지구 전체를 강타하고 있는 팬데믹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미 조류독감을 통해 확인되었듯이 현재와 같이 비위생적이고 비인도적인 방식으로 닭을 사육하면 또 다른 변종 바이러스가 등장해 인류를 위협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의미에서도 청정고기 프로젝트에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요구된다.

  

마지막으로, 샤피로는 저서 클린미트(Clean Meat)에서 청정고기를 비롯해 세포농업 전반, 효모와 균을 배양해 우유와 요거트 및 달걀 등을 생산하는 비세포농업(acellular agriculture), 나아가 기존의 식물성 고기(plant-based meat) 분야의 최근 동향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또한 기존의 사육 방식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청정고기를 포함하는 세포 및 비세포농업은 인류의 마지막 대안이 될 수도 있다. 필자는 이 분야는 인공지능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본다. 인간에게 고기 섭취는 단순히 먹거리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 나아가 인류의 존립과도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1960년 이후 현재까지 세계 인구는 2배 증가한 반면, 고기 소비는 5배 증가했다. 그리고 2050년경이면 세계 인구가 90~100억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한 최근 경제발전에 따라 인도와 중국에서 고기 소비가 크게 증가한 것을 감안한다면 인구 증가로 인한 고기 수요는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보이며, 이는 곧 고기 소비로 인한 부작용 또한 감당하기 어려워 질 것임을 시사한다. 인간의 고기 소비를 억제할 수 없다면 유일한 대안은 세포농업을 통해 청정고기를 생산하는 것이다. 그런데 청정고기가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기술적, 경제적, 제도적 장애요인들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장애요인은 과연 소비자들이 기존 고기의 대안으로 청정고기를 수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다른 장애요인들을 극복해 저렴한 가격으로 청정고기를 공급할 수 있게 되더라도 소비자들이 고기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향후 몇 년 안에 청정고기의 가격이 기존 고기와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낮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청정고기가 진정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하고 지구를 살리는데 기여하려면 소비자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우리 모두 유념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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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 26 Sep 2020 21:44:40 +0000 [일반자료파일]한국/글로벌경제관련
<![CDATA[보이는 것은 이미 과거지식, 안보이는 것이 미래지식이다]]> https://blog.naver.com/seongju630525/222097488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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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seongju630525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014049

http://lib.dankook.ac.kr/search/detail/CATTOT000001239150

 

 

 

 

보이는것은 이미 과거지식, 안보이는 것이 미래 지식이다

 

 

 

 

 

 

보이는 것은 과거 지식이다

항상 거대한 것들은 과거의 지식에 더 있다

 

보이지않는 미래지식이 서서히 보이면서 그때서야

거대한 자본, 거대한 영역이 관심을 갖게된다

 

그러니

보이는 것은 과거의 지식의 강에 떠있어서

보이는 것을 따라가는 것은 항상 하류다

 

보이지않는 것을 미래지식이다

그러니 그 지식이 보이기 시작하면  점점 과거의 지식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곳에는 거대한 것들이 섬치하려 달려든다

 

그런데 보이지 읺은 미래의 지식은

어 떤 개인의 Righteous soul 의

silence and clean clear로부터 시작이 된다

그 silence ans cleanc elar는 마로 bubble of creation of knwoeldge를 듣게된다

그래서 그 개인은 그 것을 기로하기 시작 한다

 

그러니

극서은 개인에게 많이 새로운 지식으로 개인의 righteous soul living 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다

 

그 개인의 문제가 해결이되면

그것이 미래에, 가가운 지금 사용하게 될 지식을 알게되고 그곳에 또

거대한 자본과 거대한 그 무엇이 가지게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거대한것의 씨앗은

보이지 않는 지식 의 어떤 혼자의 셋계에서 시작이 된다

 

creation of knoweldge는 righteous soul living에 주어지는 보이지않는 곳에서

creation of knoweldge를 가져오는것이다, 그런데 그 짓기은 바로 의로운 영혼들이

사용하는 지식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새로운 것 ,creation of knwoeldge는 의로운 영혼이 살 수있는 곳에서 시작이 된다.

그리고 creation of knowledger가 발생한곳에서 그 지식에 보여지는 것으로 부터

 

과거이고 현재이고 미레이고

그런데,

 

creation of knowledge가 창조되지 못하면

그지식에 과거의 지식에 의해서 살게되면 그 렇게 사는 자는 바로

과거에 머므르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지식으로 사는가는 어쩌면 각자가 다른 세상에 살고 잇다고 infer of truth가 될 수잇다

 

보이지않는 것은 미래의 지식이다

그래서 미래의 지식은 그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 다르다

전여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풀러간다

 

 

그러니!

성장이다, 발전이다, 그래서 약자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 가능하게된다

새로운 기업, 새로운 작가, 새로운 창작자들이 끊이 앖이 생기게 된것이다

 

 

거대하고 힘있는 곳은 보이는 곳이다

아주 보이지않고 힘도 없는 곳에 creation of knoweldge가 있다

보이지않는 창조적 지식이 거대한 old knoweldge를 이기고 세상을 바꾸게 된다

 

보이지 않는 창조적 지식은 시작이고, 보이는 old knwoeldge는 끝에 있다

그래서 시작은 또 긑으로 가는것이다

 

끝에서 달랑 달랑 메달려있는 힘있는 거대한 그것은 결국 끝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새로운 보이지않았던 새로운 지식이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댕글댕글 긑에 메달려 있는 ,old knwoeldge 거대한것은 자신이긑에 댕글댕글 메달려 있는 것을

알지못한다

 

지식도 늙어서 사라지게된다

 

힘들게 창조하는 자들은 사라져가는 old knwoeldge를 대체하게 된다

결국, 아직은 알지도 못하는 창조적 지식이 그 지식이 성장하게되면

그 지식을 태동시켰던 그 누구를 찾아서 그 원천을 창조 만들어낸다

 

그래야, 그 지식의 거대함을 인정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지식의 강에 떠 있는 거대한 것들은 그지식 힘으로 거대한것의 쥬지할 수잇는 것으로

지식은 또 사시 끝에 온다

 

 

보이는것은 이미 과거지식 안보이는 것이 미래 지식이다

 

보이는 지식은 늙은 지식이다

보이지 않는 지식은 젊은 지식이다

 

그지역이 그 어떤 곳이 젊다고 하는 것은 창조적 지식이 100% 의 진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그지식은 보이지않는 곳에서 시작하는것이다.그래서 그 지식의 힘은 모두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지식으로 모두가 성장하는 곳이다

그곳에는 바로 젊은 성장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공간이 늙어간다는 것은 , 보이는 지식으로 살고 잇는 곳으로

그 보이는 지식은 이미 거짓, 목적성, 의도성 거짓이 섞여 있다 그래서 100% 의 사실이아니다

가정해서 80% 사실과 20 % 의 거짓이 섞여있는 것이고

만약에 사실이 40% 이고 거짓이 60% 라고 하면, 그곳은 완전히 늙은 곳이다

 

 

 

보이는것은 이미 과거지식 안보이는 것이 미래 지식이다

어떤 곳, 어떤 공간이 계속 젊기위해서는

그곳에 Righteous soul의 로 사는 자가 있어야하고

그 자가 보이지않는 지식을 가져오는

내면에 silence and clean clear로 살며

도한 그 곳에서 bubble of creation of knoweldge를 가지고 와야한다

 

 

젊은 지식은 바로 righteous soul livi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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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 23 Sep 2020 14:46:00 +0000 [일반자료파일]의식/영성관련
<![CDATA[음이 양을 제대로 사랑 할 줄 아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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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 양을 제대로 사랑 할 줄 아는 용기

 

 

 

음은 양과 함께 살고, 양은 음과 함께 산다

 

음은 여러 지식을 가지고 산다

양도 여러지식을 가지고 산다

 

음은 음으로 살면서 음의 역할을 잘 할 수있는 지식을 가진다

양은 양으로 살면서 양의 역할을 잘 할 수있는 지식을 습득한다

 

어쩌면 면 음은 음의 본능이 있다

양도 양의 본능이 있다

 

음의 본능은 유전자 정보에 저장에 되어 있다

양의 본능은 유전자 정보에 저장이 되어 있다

 

그러나

macro concept world,에서는 음이 음로 살고, 양이 양으로 사는것이 혼재되어 있다

macro concept world에서는 음이 음으로 살기 위해서 양과의 관계에 법률 등으로 음으로 편안하게 살게 합 놓고 잇다

 

macro concept world의 양은 양으로 사는 데, 다른 양들과 경쟁을 한다

그래서 경쟁에서 밀리는 양은 새로운 자신에 맞는 양의 포지션을 잡아야하는데 그런 순간에 음이 없다

 

음양의 조화로 음과 양이 친하고, 음과 양이 적의 관점에서 규율이 만들어지지면 좋겠는데

음양의 관계에 많은 법률들이 있다. 그래서 음은 음대로 위축되고, 양은 양데로 위축이 되어서

음양의 조화라는 멋진 의로운 영혼의 세상을 상당히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이 극복해야할 것이 있을것 같다

 

음이 용기를 가지고 양을 제대로 음 역할을 하면 좋겟다

 

불교에는 보살도가 있다, 그래서 음으로 양으로 관계자를 살아갈 수있도록 돕는다

만약에

음이 보살도라고 하면

음은 용기 있게 제대로 양을 사랑해주면 사실 음도 양으로부터 양의역할을 기대할 수가 있다

 

 

macro concept world에서 음양이 함깨 사는것은

음도 양도 음양의 조화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양은 음에게 space를 만들고, 음은 양에게 그 space에서 양을 운전하는 것 맇 수있다

macro conceprt world 에서 음은 정확히 의로운 영혼의 세상의 길에서 잘 굴러 갈 수있도록

양 운전을 잘해야 한다

 

음은 운전사 이고

양은 바로 차이다

 

음이 차를 잘 끌고 가는 것이 바로 함깨 잘사는 것이다

 

 

그러나 음이 macro concept world에서 음역할을 잘하기 위해서는

걸려내야 할 old knoweldge가 있다

 

1. 남여가 같다는 것보다는 남여가 조화로워야한다는 생각의 창조적 생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2. 동양 철학 주역에는 음 이 가운데 양 2이 밖같에 있는 것은 " 화(火) 여름" 이다, 이는 에너지를 얻는 괘이다

   음은 가운데서 정신 차리고 양을 관리를 잘해야한다

3. 만약에 음에 가운데를 포기하고, 밖으로 나가면, 동양 철학의 주역에서는 바로 "수(水) 추운것의 겨울" 이다

   아무런 에너지를 얻을 수가 없다

 

이 세가지 논리에서

음은 가운데서 바깥의 양을 운전하고 관리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음이 양을 제대로 사랑할줄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는

음양에 관한 old knwoeldge를 모두 버리고

음의 내면에서 나오는

음이 silence and clean clear의 내면늬 소리를 듣고

양을 참사랑을 해주어야한다

 

그것이

음이 안에 있고, 운전하고는 것이고, 그리고 양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을 관리 한다는 것은 도다른 표현으로 음이 주인이다는 것도 될 수가 있다

 

 

TV 프로에서 보면

음양의 문제는 누구에게도 직접 공격이 되지않아서 아주 가볍게

old knwoeldge를 이야기 하는 데

음이 양을 관리를 포기 하는 것들의

 

micro concept world 의로움영혼의 세상에서 보면 끔찍할 이야기들을 막 퍼붓는다

음이 양에대한 운전 관리를 포기히고, 그져 운전도 싫고 관리도 싫은 그런 음들이

이야기 한다

 

음양의 조화는

 

음양은 은 독같은 조건에서 음양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macro concept world에서는

부모는 양이고,자식은 음이다

그래서 

남편과아내의 아내는 음의 역할을 하고

부모와 잣기에서는 남편과 아내는 양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macro concept world에서 사는 것이

여자가 양 역할을 하고 살면 남자 처럼 살 수가 있다

 

그래서 남자 여자는 평등하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실상

 

그래서 남자여자 평등하니가 여자나 남자가 모두 편안하게 살자는 주의다

아주 맞는 개념으로 보인다

 

그래서

 

엄마로 살지 아내로 살지못하는 슬픈일이 많다

 

아내로 사는 것은 음양의 조화로

이 곳에 micro concept world 음의 misison 이 있다

자기의 짝을 잘데리고 같이 의로운 영혼의 세상에 무사히 도착하는 것이다

 

즉 음은 안에서 양을 데리고 의로운 영혼의 세상에  돌아가는 운저사의 역할을 해주어야한다

 

그런데 그일은 음의 역할이다, 그래서 음의 역할은 사실 힘드는 일이다

함께 성장하고 의롭게 살아서 의로운 영혼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길이 쉽지않더

그래서 어려운 길은 포기하고, 쉬운길인 엄마의 길을 간다

 

그러면, 엄마는 양으로 사는 것이어서

결국 , 음이 음으로사는 즐거움 재미를 잃게된다

 

이렇게 macro concept world에서 사는 것은 정교하고 정밀하다

우주는 의롭게 살기를 바라고 있다

의롭게 사는 것은 silence and clean cleear로 사는 것을 말한다

 

음이 의롭게 살면 자기 짝인 양으로 으로게 살 수있도록 하고, 그리고 함께 의로움 영혼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그일을 하는 것은 절대로 old knweodlge롤 안되고

의로운 영혼 내부의 bubble of creation of knwoedlge로 만 가능하다

내면에서 의로운 영혼의 세상에서 보내준 creation of knwoeldge를 가지고 의로운 영혼의 세상으로

무탏하게 돌아가야, 이 우주는 다시 silence and clean clear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주는 그렇게 사는 의로운 영혼에게 righteous soul energy를 준다

 

의로운 영혼 음은 바로 이미 예비된 사악한 영혼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안에서 끝까지 운전하고 관리하고 해서, 끝에서 의로운 영혼 음이 의로운 영혼의 양을 만나서

의로운 영혼의 세상에서 머물러야한다

 

 

그러니

 

음이 양을 제대로 사랑 할 줄 아는 용기

로 양을 진쩌로 쭉 참사랑하며 재미있게 살 줄알야한다

절대로 저짓의 지식을 버리고, 절대로 참된 내면의 creation of knwoeldge를

듣고 음의 짝 양을 잘 운전하여 의로운 영혼의 세상으로 돌아 와야한다.

 

그러니 음양의 조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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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 23 Sep 2020 10:45:52 +0000 [일반자료파일]의식/영성관련
<![CDATA[Re:창조적 지식의 씨앗]]> 최성주님, 반갑습니다. 이 웹사이트를 관리하고 있는 입장에서 오랜만에 다른 분이 올린 글을 보게 되니 기분이 좋습니다. 링크에 접속해보니 아마존 e-book 코너에 여러 권의 책을 올리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 또한 수 년 전 e-book 코너에 두 권의 책을 올렸습니다만 반응이 거의 없었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소신을 갖고 글을 쓰는 분임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최성주님의 글을 읽다보니 맞춤법에 어긋나는 대목이 많이 보이고 영어 표현을 이해하는 데 다소 어려움이 있습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올리신 글을 읽고 공감하기 바라신다면 수정 기능이 있으니 이를 사용해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정정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관리자로서 이 사이트에 관심을 가져주신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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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20 Sep 2020 13:36:26 +0000 [일반자료파일]의식/영성관련
<![CDATA[창조적 지식의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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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지식

씨앗

 

창조는 이세상에 없는 것을 가져옴, 창조는 깊이를 더 깊에 넓이는 더 넓게 하는것

지식 문제를 해결하는 것, 원인과 결과의 한세트를 만들어 더깊이 더 넓게 하는 해결책

 

씨앗 은 가장 연약한 순간, 힘이 살짝 센 old knwoeldge가 짓 밟으면 그냥 사라지는것

그리고, 씨앗은 creation of knowledg 의 씨앗은 힘이 없다, 그리고 상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old knoweldge는 지금 당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고, 성장할 시간이 필요없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old knoweldge를 가지고 살고 잇다

 

creation of knwoeldge는

씨앗이고, 싹이 터서 성장해서 강해지고 그리고 열매를 먖는 다

그러면 창조된 지식의 새로운 개념의 시간이 열린다

 

사실 old knoweldge 으로 사는 사람들은

creation of knwoeldge를 아무리 이야기 해도 알아듣지못한다

만약에 알아들으면 그것은 역시 old knoweldge이기 때문이다

 

olld knoweldge에는 그것을 추정하는 그것으로 사는 기득권의 인간들이 무궁무진 하게 많다

그러나

creation of knoweldge 인간은 혼자이다

그러니, 혼자가 가져운 creation of knwoeldges는 힘이 앖다

그리고 무시된다.

 

그러면 creation of knoweldge는 없다

 

 

creation of knoweldge는 최고로 약하다

그리고 가난하다

 

creation of knowledge 쉽게 이해하는것은

1. 가난한 화가

2. 무명의 글을 쓰는 자

3. 무명의 배우, 가수 등

 

창조를 개인의 독특함으로 만 살아나는 오직 혼자만 있는 혼자만 필요하는 그것이 창조여서

창조는 사실 혼자 만의 세계이다

그 창조를 이것이 가치가 있다고 발견하는 것은 점점 과거지식의끝에서 겨우

그림, 노래, 글의 가치를 찾아낸다

 

creation of knowledge로 표햔된 책, 그림 미술 등은 창조된지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 겨우

알데 된다. 그러니 이세상에 창조는 사실 공감을 받을 수가 없다

창조 된 후에 그 창조의 지식이 이미 창조가 아닌 때에 old knoweldge일 때에야 대중이 알아 주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창조의 지식은 매두 중요하다

만약에 어떤 시공간에 창조적 지식이 나타나지 못하면 그 시공간에는 미래가 없다 왜냐하면

미래에는 다른 시공간에서 창조되어서 old knoweldge가된것이 강한 힘으로 지금이곳의 지식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창조자는 새로운 지식을 이세상에 가져오지만

사실 ,old knoweldge로 살고 잇는 자들의 공감을 받을 수가 없어서 매우 외롭게 살다가 간다

 

사실 35 권의 책들이 creation of knoweldge라고 여기는 책들이 나는 누구도 읽지도 않고

알아주지도 않아도 나는 creation of knowledge를 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창조의 지식을 가져오는 사람들 도전자 들 끝까지 창조의 외로움을 창조의 약함을

창조는 창조자는 똑같은 인간인데 창조물이 힘이 없으니, 그리고 혼자 만 아니, 그것이

작품으로 책으로 그림으로 노래로 구체화 되어디지고 그래도 그길은 매우 외롭다

사실 창조를 한다는 것은 외로움과 싸움이다

 

그러나

나는 나오도 싸우고, 알주지않는 자들과도 싸운다

그래도 난 과거의 지식은 싫다, 왜냐하면 과거은 지나가변 과거의 문은 closing 닫친다

그런데, 과거의 지식은 지식으로서 성숙이 되었으니, 모두가 공감해서

그것이 지식으로 그리고 권력으로 자리 매김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씨앗인 창조적 지식을 가져 와야한다

그러나 창조자는 거짓과 싸운다

그것으 old knwoeldge는 과거에 창조된 창조지식과 시간에 붙여진 거짓으로 되어 잇다

나는 거짓을 보때에

나는 그 거짓에 이세상을 끌고 가고 있는 것을 볼때에 나는

 

창조자의

완전한 creation of knwoeldge의 어떤 책임을 느낀다

창조는 바로 완전한 사실을 말한다

나는 창조하는 글을 써오고 있다

 

어쩌면 이글은 나만의 글일 수도 잇다

그래서 난, 혼자서 힘들게 글을 쓰지만 사실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성장하는 것으로

나는 이세상에서 진짜 로 살다가 가는 큰 즐거움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창조자는 항상 외롭다

그래도 창조자는 혼자서 다른 세상을 살다가 간다

그러니, 창조자 혼자 살다가 가는 꼴이 되는것이다

 

 

새로운 것은 진짜로 살고 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진자는 우주의 법을 지키는 것이고

의로운 영혼으로 살수 있고 이세상에 살다가

의로운 여혼의 세상으로 안전하게 돌아가데 되는 것이다

 

 

모든 의로운 영혼은

righteous soul feel silence and clean clear

so that righteous soul feel bubble of creation of knowledge

그것은 macro concept world에서는 모티브라고 한다

 

그래서 창조자는 혼자서 그 buble of creation of knwoeldge를

느끼고 기록한다

 

그러면 그것은 책이 되고

그림이 되고 음악의 작곡이 되고

그래서 그것은 기다려서 과거의 지식에 편입이 된다

그러면 비로소

그 창조는 과거의 지식에서

과게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알아서 그것이 그것이 지식으로 받아 들여진다

 

 

창조는 아무리 잘해도 혼자 만 알게되어었다

창조는 그것이 진짜이고 사실인데도 혼자 만알게 된다

왜냐하면 창조의 지식을 지금 과거의 지식으로 사는 자들에게  이것이 사실이라고

외쳐도 과거의 지식의 힘에 의지해서 사는 자는 사실 진짜를 받아 들이디않기 때문이다

 

칭조지식에 는 시간이 필요하다

 

창조가 과거의 지식으로 힘을 가지게 되는되는 시간이 걸린다

 

 창조는 그것을 기반으로 어떤 자는 일생을, 어떤 기업은 지금까지 살아있게 된다

 

창조는 절대로 옳고 바른 길이다

그래서 창조의 지식은 마치

창조의 지식으로 들어가면 넓은 다른 창조의 지식을 모두 알게 된다

그래서

 

이세상에서 깨달은자 to be enlighten person

창조해서 알게되면 그것이 gate가되어서 다른 창조의 지식 다발을 알게된다

 

유교의 공자는 一以貫之 로 표현을 했다

공자가 알게된 유교적 creation of knoweldge는

공자가 느낀 一以貫之를 우리는 과거지식으로 배우고 있다

그 과거의 지식은 매우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어떤 지역의 기준이 되어서 규울 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의 creation of knoweldge를 자지지 못하면, 그리고 새로운 창조지식을

성하게 하지못하면, 결국 이지역은 차지역에서 창조된 지식으로 살게된다

그래서, 창조된 지식에 초기에 힘이 없지만 그 지식이 성장해서 old knwoeldge가 되면

그 지경은 완전한 새로운 지역으로 변한다

창조된 지식이 성장하면, 그곳은 새로운 세상이 된다

그리고 창조된 지식은 우리는 진짜로 살게하고, 그 창조된 지식에는 아직은 가짜가 없다

그러니, 그 지식은 그 지역에 사는 자들은 모두 의롭게 살게하는 강한 힘이 되어서

그지역에서 창조되 지식은 타지역으로 전파되어서 타지역을 지식으로 관리 하게 된다

 

 

힘없는 창조를 하지를 못해서

이지역은 타지역으로 부터 침법을 받았다

 

맞다, 지금 우리시대에 새로룬 창조적 지식으로 창조해주지못하고

그리고 그 지식으로 성장 시키지 못하면, 결국 세월이 지나면 절대로 주도하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 할 수조차 없다

 

타지역이 맛본 창조적 지식의 진자 지식의 기쁨을 알 수가 없게 된다

 

잠으로 신기한것은 ,old knwoeldge 권력의 지식인들은  자신의 강한 권역의 향유를

절대로 버일 수가 앖어서

 

old knioweedge는 절대로 창조적 지식을 수용하지 않는다

결국 old knowledge 지식의 권력은 그 시간 공간을 계소 초 스피드로 망하게 만든다

 

예수, 석가, 공자는 새로운 지식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old knwoedlge는 수용하지 않았고, 그리고

결국 그때의 creation of knwoeldge는 지금의

힘이 있는 old knwoedlge로 변해 있다

 

여기서 강하게 주장하고 깊은것은

creation of knowedlge는 절대로 old knwoeldge 힘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창조는 지금까 말한데로 혼자의 영역이다

그리고 창조는 힘이 없는 역한 것이다

 

그래서 마치 창조적 지식을 잘 안다고 하며,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삭부터 자르는 자는 바로 old knowleddge power이다

 

old knwoeldge는 creation of knwoeldge를 알지도 못하며, 판다할 자도 아니다

creation of knoweldge는 그자체가 싸워서 이기고 성장해야한다

 

만약에 창조적 지식에 100% 사실이고 새롭다고 하면 절대로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창조자가 창조한 creaiton of knwoeldge는 계속 성장하게 된다

 

 

 

creation of knoweldge

는 지금은 힘이 없다

그러나 그래도 이 창조적 지식을 누군가는 가지고 와야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바로 righteous soul living of silecne and clean cear living

and get a bubble of creation of knwoeldge

so that meet and hear of righteous soul living in destiantion place brodcasting

truly rightoeus soul living in destiantion place keep same bordcasting to help

a rightoeus soul in the macro concpt world safe returngin to the mciro cocnept world

righteous soul living in destianion place

 

누군가가 의롭게 살지못하면 그 지역은 creaiton of knwoeldge를 가질 수가 앖어서

creation of knwoeldg를 가진 어떤 지역은 시간이 지나면

그 창조의 씨앗이 자라나서 나무가 되어서 열먀를 맺게되면

과거의 지식은  새로운 지식으로 바끼게 된다

 

과거의 지루하고 따분한 지식으로부터

새롭고 참신한 그리고 과거의 지식속에서 고통스럽게 사는 자들을

새로운 지식으로 모두가 같이 힘있게 실 수가있다

 

새로운 지식은 넓이를 넓이고

깊이를 더 깊게해서

더 많은 자들은 함게 모두 문제를 해결해서  잘 살 수있다

 

creation of knowelge 는 바로 과거 지식에서 힘들게 살았던 문제를

모두가 함께 살 수있는 더 깊고 더 넓은  문제를 해결해준다

 

과거의 지식에서

창조의 지식으로 변화를

받아드리는 지역은 모두가 함께 잘 살 수있고

 

과거의 지식에서

창조를 하고 그것을 키우고 그리고 기다리고

그래서 과거의 지식 힘이 떨어질때, 창조의 지식이 그지역을 모두 발전하고 역동적이 지역으로 만들어준다

 

그 creation of knoweldge는 그 기준이 모두 바끼게 된다

 

창조적 지식을 키우고 성장을 시킨 지역의 은 샤로운 강한 지역

과거의 지식에 머무는 지역은 약소지역 되어, 결국 새오운 창조의 지식이

과거의 지식에 허덕이는 약소지역을 통합하게 된다

 

 

나는 정치 역사에 대한 책은 절대로 안쓴다

내가 쓰는 책은 나를 연구해서 내가, 혹은 혼자 개인이 가장 의롭게 살다가 가는 책을 쓴다.

 

 

 

내가 이세상에 살려면

내가 창조해서 창조적 지식으로 살게 되면 분명한것은

나는 혼자서 창조적으로 살다가 가는 것이다

 

그러니 그 혼자는 비록 힘이 약해도

나중에는 강한 과거의 지식이되어서

많은 자들이 창조적 지식으로 살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기꺼이 나느 창조적으로 살며

누가 내가 창조한 책을 단 한권을 읽지않아도 그것은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silence and clean clear, geting bubble of creaiton of knoweldge

로 즐기며 의로운 영혼의 세상으로 가고 있는데

내가 긑까지 의롭게 살다가 가면, 나의 책들은 모두 강한 창조적 지식으로 전세계 서점애서

의로운 영혼을 먹이는 양식으로 역할을 하게 될것이다

 

 

 

 

나는 창조자이다

나는 창조를 하는 의로운 영혼으로 살고 있다

그러면 된것이다

나는 의로운 영혼으로 끝까지 잘 살아서

내가 이세상에서 misison clear한후애

나는 의로운 영혼의 세상으로 가서 영원히 그곳에 머무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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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 16 Sep 2020 11:20:45 +0000 [일반자료파일]의식/영성관련
<![CDATA[케이트 레이워스의 <도넛 경제학(Doughnut Economics)>]]> 20200827_140635_5f47bdebe96d8.jpg 

저자: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  

역자: 홍기빈

출판사: 학고재(2018)

 

 

차례

1장 목표를 바꿔라: GDP에서 도넛으로

2장 큰 그림을 보라: 자기 완결적인 시장에서 사회와 자연에 묻어둔 경제로

3장 인간 본성을 피어나게 하라: 합리적 경제인에서 사회 적응형 인간으로

4장 시스템의 지혜를 배워라: 기계적 균형에서 동학적 복잡성으로

5장 분배를 설계하라: 부자로 만들어주는 성장 신화에서 분배 설계로

6장 재생하라: 저절로 깨끗해진다는 성장 신화에서 재생 설계로

7장 경제성장에 대한 맹신을 버려라: 유일한 지상명령에서 성장 불가지론으로

 

  

대안 경제이론의 모색

저자 케이트 레이워스는 이 책의 <여는 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현재 주류 경제학이 비현실적인 가정에 근거해 지나치게 편협한 사고를 강요하는데 반발해 경제학을 접고 직접 현실에 뛰어들어 국제빈민구호 단체인 옥스팜(Oxfam)UN을 비롯한 다양한 기관에서 근무한 경력의 소유자다. 세계 여러 곳에서 현실을 체험한 후 저자는 정책결정 과정에서 여전히 경제이론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인지한 후 새로운 경제학의 필요성을 절감해 다시 경제학에 대한 연구로 회귀했다. 이 책은 이런 저자의 개인적 고뇌의 여정을 통해 탄생했다. 저자는 인간의 존엄과 자연의 소중함에 대한 자신만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대안 경제이론을 모색하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만큼 주류 경제학인 신고전파 경제이론의 영향력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 정책을 뒷받침했던 효율적 시장가설(Efficient Market Hypothesis; EMH)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해 잘못된 이론임이 백일하에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계와 금융계에서의 위상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는 실정이다. 이것은 한번 확립된 이론을 퇴출시키고 대안 이론을 도입하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작업임을 의미한다. 과학사학자 토마스 쿤(Thomas Kuhn)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지적한 대로 패러다임 전환은 종교의 개종(conversion)과도 같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경제이론의 중요성을 실감했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공공정책을 수립하고 기업이 투자결정을 내리고, 소비자들이 소비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경제이론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1950년대에 이론적 토대가 마련되었으며 지금도 경제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주류 경제학은 21세기의 상황에 더 이상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저자는 그동안 주류 경제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했던 행동경제학, 복잡계 경제학, 생태경제학, 제도경제학 등 다양한 이론적 시도를 통합적으로 적용한 새로운 경제학을 제안하기에 이른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 도넛 경제학(Doughnut Economics)라는 다소 특이한 명칭을 부여했다. 저자 나름 고심 끝에 선택한 명칭이지만 상당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명칭으로 여겨진다. 도넛은 대체로 건강에 좋지 않은 식품의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도넛 경제학의 핵심 메시지 

저자가 제안한 도넛 경제학은 두 가지 기본 목표를 지향한다. 하나는 사회적 기초(social foundation)를 충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태적 한계(ecological ceiling)를 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는 가운데 인간의 위한 경제 공간으로 도넛의 내부에 머물 것을 제안한다. 도넛이라는 식품이 주는 불량식품의 이미지를 배제한다면 저자가 도넛을 통해 제시하려했던 시각적 효과를 이해할 수 있다. 사회적 기초에는 모든 인류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면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12가지 요소들(, 식량, 교육 등)이 포함된다. 저자는 12가지 사회적 기초를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도넛의 안쪽 원이 갖는 의미다. 생태적 한계에는 기후변화로 인한 생태계 파괴와 이로 인한 멸종, 수몰, 나아가 지구 차원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 반드시 준수되어야 하는 9가지 요소들(기후변화, 해양 산성화, 담수 고갈 등)이 포함된다. 이것이 도넛의 바깥 원이 갖는 의미로서 어떤 경우에도 이 9가지 한계를 위반해서는 안 되는데 이미 4가지 한계를 위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궁극적으로 모든 경제활동은 이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 그림에서 도넛은 허용 가능한 경제활동의 범위를 보여준다.

 

 

 경제학, 도넛으로 바꿔라

저자는 경제학에서는 그동안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도표와 그림을 이용한 교육이 효과적이었음을 인지하고 자신이 제시한 두 가지 목표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도넛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다. 도넛의 이미지에서 알 수 있듯이 도넛의 안쪽 원에 의해 묘사된 사회적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최소 기준을 침범해서는 안 되며, 동시에 도넛의 바깥 경계를 넘어 생태적 한계를 무너뜨려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경제주체를 오직 도구적 합리성(instrumental rationality)에 따라 행동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경제주체는 소비로부터의 효용을 극대화하고,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만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또한 주류 경제학은 시장에서 가격을 지불하지 않고, 즉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다른 경제주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외부효과(externalities)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음에도 이를 매우 예외적인 현상으로 간주해왔다. 예를 들면 공해물질을 방출하는 것이 대표적인 외부효과의 사례임을 감안할 때 이제는 더 이상 이런 문제를 예외적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이런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는 주류 경제학은 기후변화와 불평등과 같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저자의 문제의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단순히 문제를 지적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충격을 줌으로써 정책이 바뀌고, 기업이 목표에 변화가 일어나고, 소비자들이 외부효과를 의식하는 가운데 적절하게 행동하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는 이론 모형이 요구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이런 이론 모형을 구축하는데 반드시 반영되어야 할 7가지 원칙을 강조한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나 새로운 이론 모형을 제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도넛 경제학이 대학에서 학생들의 교제로 채택되기 어렵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주류 경제학자들에게는 그다지 자극이 되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그동안 다양한 관점에서 주류 경제학을 비판해 온 것들을 모아놓았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만큼 깊은 차원의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제시한 7가지 원칙을 다시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러다보면 과연 이 원칙들을 모두 반영한 새로운 경제이론의 가능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넛 경제학이 제시하는 7원칙

저자가 제시한 7개의 원칙은 하나하나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개별적으로 논의되었던 것들을 함께 묶어서 논의하도록 제안한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들을 순차적으로 간략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1) 목표를 바꿔라: GDP에서 도넛으로

GDP는 한 나라의 경제적 성과를 측정하는 거시지표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GDP가 국민의 일반적인 복지 수준을 측정하는 지표로는 부적절하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여성의 가사노동을 비롯한 무보수노동의 가치가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으며, 범죄활동이 활발해지면 이를 예방하는 활동도 증가해 GDP가 증가하는 등 부정적인 요인들이 넘쳐난다. 전쟁을 수행하는 경우 이와 관련된 생산과 지출이 증가하면 GDP가 증가하는 것도 대표적인 부정적인 측면이다. 이와 같이 GDP의 한계는 이미 잘 알려져 있으나 이를 대체할 마땅한 거시지표가 없는 실정이다.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 시절인 2008<스티글리츠--피투시 위원회(Stiglitz-Sen-Fitoussi Committee)>에서 이 문제를 검토한 후 발간한 GDP는 틀렸다(Measuring Our Lives)GDP의 여러 대안을 검토한 대표적인 보고서지만 아직 어떤 것도 현실에 적용되지 않고 있다. 다른 대안으로 UN에서 개발한 인간개발지수(HDI)라든가 부탄에서 실시한 국민총행복지수(Gross National Happiness; GNH) 등이 거론되었지만 GDP의 약점을 보완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저자가 도넛을 통해 제시한 상한 기준과 하한 기준을 염두에 둔 거시지표를 만드는 작업은 상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사 새로운 지표가 만들어진다 해도 기존 GDP 기준에 익숙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채택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저자가 제시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하위 목표들을 모두 양적으로 측정하는 작업에 내재한 한계를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큰 그림을 보라: 자기조정적인 시장에서 사회와 자연의 일부인 시장으로 

자유시장의 가장 탁월한 기능은 가격 시스템을 통해 수요와 공급을 원만하게 조정함으로써 시장의 안정적인 균형 상태로 수렴할 뿐만 아니라 효율적인 자원배분을 달성하도록 해준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강조한 보이지 않는 손의 현대적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장경제가 완전 경쟁(perfect competition)과 완전한 정보(perfect information)라는 이상적인 조건을 충족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즉 현실에서는 불완전한 경쟁과 불완전한 정보가 일반적이라는 사실은 스스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자기조정적인 시장이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경제사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일찍이 저서 거대한 전환에서 자기조정적인 자유시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시장을 모든 것을 갈아엎어버리는 악마의 맷돌에 비유했던 것이다.

 

저자는 폴라니와는 다른 맥락에서 자기조정적인 시장은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주류 경제학에서는 시장이 사회의 하위 조직이며, 경제와 환경의 긴밀한 관계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을 배제한 가운데 구축된 경제이론으로부터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이론적 기초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회와 자연이라는 경제활동보다 상위에 있는 두 가지 측면을 망라한 새로운 경제이론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 또한 저자의 주장에 대체로 공감하지만 이 모든 측면들을 망라한 이론 모형을 구축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과제다. 저자는 이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사회와 자연에 기반을 둔(embedded) 경제이론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패러다임 전환이 요구하며 이는 학제 간 연구를 통해서나 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3) 인간 본성을 피어나게 하라: 합리적인 경제인에서 사회 적응형 인간으로 

주류 경제학에서 경제주체는 도구적 합리성에 입각해 오직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반면 비용을 극소화하고자 하는 냉혹한 인간으로 묘사된다. 또한 경제주체들 간 상호작용은 모두 시장에서 수요과 공급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시장수요와 시장공급의 관계에 따라 가격이 신축적으로 변동하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지만 그동안 현실 경제에서 관찰된 결과는 이런 가정이 모두 틀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수요와 공급의 법칙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수요와 공급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경제주체는 항상 도구적 합리성에 의존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가격을 통하지 않고 서로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사례가 빈번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현실의 관찰 결과를 이론에 맞추는 억지를 부리지 않으려면 이론을 수정해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합리적 경제인 대신 사회 적응형 인간을 상정한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사회 적응형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상호의존관계를 인식하고 있으면서 상호주의에 입각해 서로 주고받으며, 협력해서 과제를 완수하는 적응적인 인간을 말한다. 이와 같이 저자는 현실에서 우리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경제이론을 구축하자고 제안한다. , 도구적 합리성 가정을 배제하는 경우 연역적 방법론에 입각한 경제이론을 구축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단점이 노출된다. 예를 들면 행동경제학은 경제주체가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다양한 사례들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인간의 심리에 내재된 성향이라는 것을 여러 실험을 통해 입증했다. 그렇지만 행동경제학에서의 발견을 바탕으로 주류 경제이론을 대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 주된 이유는 연역적인 이론을 구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어진 과제는 실험을 통해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현실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연역적인 방법을 적용한 이론 모형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류 경제학의 근본 가정을 바꾸는 결코 간단하지 않은 작업이다. 

 

4) 시스템의 지혜를 배워라: 기계적 균형에서 동학적 복잡성으로 

주류 경제학에 의하면 시장경제는 항상 균형 상태로 수렴하는 특징을 갖는다. 외부 교란이 있더라도 빠른 조정을 거쳐 새로운 균형 상태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이런 핵심 메시지를 현실 경제에 광범위하게 적용한 실험이었는데 결과는 참담했다. 이런 균형이론의 특징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효율적 시장가설이다. 이것은 시장에서 모든 이용 가능한 정보는 즉각적으로 가격에 반영되며 그 결과 수요와 공급이 조절되어 항상 균형으로 수렴한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이 가설에 의하면 가격 거품(price bubble)이 형성될 수도 없고 가격 폭락도 있을 수 없다. 즉 역사적으로 반복해서 발생했던 금융위기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가설에 의하면 2008년 금융위기도 발생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발생했고 이는 효율적 시장가설이 틀렸다는 명백한 증거다.

 

따라서 저자는 새로운 경제학은 시스템의 관점에서 새롭게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진화론과 복잡계 이론(complex system theory)의 관점에서 시장경제를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새로운 주장이 아니라 이미 여러 학자들이 제안한 것이다. 특히 산타페 복잡계 연구소의 연구원인 브라이언 아서(Brian Arthur)는 복잡계 경제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그가 제기한 엘 파롤 바 문제(El Farol bar Problem)”는 복잡계 경제학이 왜 필요한지 잘 보여준다. 그 밖에 복잡계 전문가 데이비드 오렐(David Orrell)경제학 혁명, 마크 뷰캐넌(Mark Buchanan)내일의 경제, 그리고 에릭 바인하커(Eric Beinhocker)부는 어디에서 오는가는 왜 복잡계의 관점에서 시장경제를 이해해야 하는가를 잘 설명해준 책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주류 경제학자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복잡계 경제학은 여전히 경제학의 변방에 머물고 있다. 그렇지만 현실의 시장경제는 복잡계의 관점에서 시장을 파악하는 것이 옳다는 다양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으므로 계속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시장을 불균형 상태에서 동학적으로 변동하면서 결코 균형 상태로 수렴하지 않는 시스템으로 파악하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모든 시장이 항상 불균형상태에서 끊임없이 변동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일부 시장은 시간이 지나면 균형으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다른 시장은 대체로 불균형상태에서 지속적으로 변동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예를 들면 금융시장은 후자의 사례에 해당되고, 가격 변동이 거의 없는 생필품 시장은 전자에 해당된다고 본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저자가 주장하듯이 시장경제는 자동적으로 균형으로 수렴하는 시스템이라는 사고를 극복하는 것이다. 균형이론으로는 금융위기와 같은 창발(emergence) 현상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의 시장경제에서는 다양한 창발 현상이 종종 발생한다는 사실은 복잡계 이론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5) 분배를 설계하라: 성장 신화에서 설계에 의한 분배로

주류 경제이론에 의하면 경제성장은 모두를 위해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공평한 분배를 통해 모두의 번영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성장지상주의다. 그러나 지속적인 성장은 사실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장을 통해 분배 문제도 해결된다는 가정은 오류임이 확인되었다. 경제성장은 고용 없는 가운데 이루어졌으며 분배 불평등을 심화시켜 미래의 성장 동력을 상실하게 만들고 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일부 급진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역성장(degrowth)을 주장하지만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는 실천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어쨌든 완급을 조절하는 가운데 꾸준히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키우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렇지만 저자를 포함해 많은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분배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성장은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시장경제도 일정한 제도와 규칙을 바탕으로 작동하는 것이지 문자 그대로 아무런 간섭이나 규제 없이 작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가 분배를 설계(design)하자고 제안한 것은 새로운 주장을 아니지만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누진세제를 강화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경제 전반에 걸쳐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토지, 금융, 정보기술 등 소수에 의한 독점적 지배로 인해 경제적 과실이 한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분배되는 구조를 개선해야 할 것이다. 이런 과제를 수행하면서도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인센티브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어렵지만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과제다. 분배를 설계하는 것은 곧 성장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장과 분배의 조화는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더욱 중요한 과제로 부상할 것이다. 

  

6) 재생하라: 성장만능주의에서 재생 설계로

주류 경제이론은 청정한 환경을 사치재로 간주한다. 따라서 성장과정에서 공해는 불가피하지만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스스로 감소하게 된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펼쳤다. 이른바 성장이 결국 공해를 해결한다는 이상한 논리다. 그렇지만 불평등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처럼 환경 문제도 저절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탄소세를 도입하고 배출권 시장을 활성화하려는 것은 공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순환경제(circular economy)의 개념을 도입해 모든 분야에서 재생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재생을 지지하는 인센티브를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예를 들면 태양광이나 풍력 에너지의 경우 기존 화석연료보다 에너지 단가가 높다는 이유로 시장에서 외면되었지만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 한편 원가절감과 기술혁신을 통해 점점 에너지 단가를 낮춰 지금은 경쟁 가능한 수준에 도달했다. 이른바 그리드 패리티(grid parity)를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기후변화의 심각성에 대해 더 분명하게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재생에너지의 비중을 늘리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대세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에너지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가 재생 가능한 순환경제로 재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의식 전환이 요구된다.

 

7) 경제성장에 대한 맹신을 버려라: 성장 중독에서 성장 불가지론으로 

주류 경제학자들은 복지 향상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불가피한 것으로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무엇보다도 자연에서 무한정 성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는 경제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다. 진화론자들의 표현대로 자연에서 적응하기 위해서는 최적의 규모를 추구해야지 무조건 규모를 확대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진국같이 일정 수준에 도달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성장을 추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성장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취지에서 성장 불가지론(growth-agnostic)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우리가 추구할 것은 성장 자체가 아니라 모두에게 번영을 가져다주는 경제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지극히 원칙적인 주장이므로 이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현실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성장을 배제한다면 과연 무엇을 대안으로 내세워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는 정부의 입장에서는 외면할 수 없는 과제다. 이것은 경제 시스템 전체를 재구축해야 하는 차원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현재와 같이 금융부문의 과도한 지배와 이로 인한 단기 성과주의가 만연하고 기업이 주주가치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풍토에서는 성장지상주의를 저지할 세력이 없는 셈이다. 따라서 성장 대신 번영의 공유를 목표로 하는 경제 시스템을 지향하려면 완전히 새로운 시장경제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관련해 저자의 주장은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것은 결국 자본주의를 어떤 방향으로 개선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넛 경제학은 가능한가? 

2008년 전대미문의 금융위기를 경험한 후 여러 경제학자들이 새로운 자본주의를 위한 이론을 모색해왔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은 금융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현행 자본주의는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경제학자 조셉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교수가 즐겨 사용하고 있듯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난데없이(out of thin air)”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극단적인 자유시장 옹호론자들이라도 시장이 아무런 규제 없이 작동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장경제는 어떤 경우에도 일정한 제도와 규칙 및 법체계를 바탕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과거 자유방임주의는 독점기업을 비호했던 세력들이 지지했던 이데올로기로서 경제주체의 선택의 자유를 역설한 것이 아니라 원하는 방식으로 경제적 상황을 조종할 수 있는 재량을 얻고자 했던 것뿐이다. 즉 자유방임은 더 이상 논의할 가치가 없는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은 옵션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장점을 최대화하는 반면, 단점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민주적 절차에 의해 현재의 경제 시스템을 개혁하는 것이다. 이는 곧 효율을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분배의 불평등을 최소화한다는 의미다. 필자는 이것을 효율과 평등의 조화라고 부르고자 한다. 직접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해 투표를 시행한다면 어느 나라에서나 과반수이상이 이런 개혁을 지지할 것이 확실시 된다.

 

문제는 개혁의 방향과 실행 가능성이다. 저자는 두 가지 목표와 7가지 원칙의 관점에서 새로운 경제학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저자가 도넛이라는 그림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안쪽 원과 바깥쪽 원이 상징하는 두 가지 한계다. 안쪽 원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12가지 항목의 사회적 기초의 최소 요건을 나타낸다. 앞의 그림에서 보았듯이 12가지는 물, 식량, 보건, 교육, 소득과 일자리, 평화와 정의, 정치적 발언권, 사회적 공평함, 성 평등, 주거, 각종 네트워크, 에너지를 말한다. 이 모두 사회구성원으로서, 그리고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위해 필요한 물질적·정신적 가치들이다. 도넛의 바깥쪽 원은 멸종을 피하고 지구의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생태적 한계를 표시한다. 여기에는 기후변화, 해양 산성화, 화학적 오염, 질소와 인의 축적, 담수 고갈, 토지 개간, 생물 다양성의 손실, 대기 오염, 오존층 파괴와 같은 9개 항목이 포함된다. 이들 항목 중 일부는 중복되는 느낌을 주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사회적 기초를 구성하는 요소들과 생태적 한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기후변화는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더욱 큰 피해를 줄 것이므로 기후변화를 저지하는 것은 곧 이들에게 사회적 기초를 제공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경제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 21세기 경제학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의도다. 그리고 경제학자들이 이를 반영해 새로운 경제학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저자의 과도한 욕심이다. 우선 경제학만으로는 이 모든 변수와 요인들을 고려하는 가운데 경제이론을 구축할 능력이 없다. 이는 본질적으로 여러 학문 분야에 협력해서 대안 이론을 구축해야 하는 성격이 문제다. 저자는 경제학자들의 지적 수준을 지나치게 높이 생각하는 것 같다. 더욱이 주류 경제학에 익숙한 세대는 이런 작업을 수행할 의지뿐만 아니라 능력도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새로운 경제학이 출현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의 개발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주류 경제학의 핵심적인 가정 중 하나는 수확체감의 법칙인데,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반대로 수확체증의 법칙을 실현시킬 것이 거의 확실하다. 따라서 일부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데로 2045년 경 특이점이 도래하기 전에 주류 경제학은 새로운 경제학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그리 멀지 않았다. 앞으로 10년 후면 새로운 경제학의 내용을 담은 텍스트가 사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도넛 경제학은 주류 경제학의 한계, 그리고 앞으로 인류가 해결해야할 경제적 과제들을 다양한 그림을 이용해 간결하고도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책이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저자가 제시한 7가지 원칙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중요한 원칙을 천명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이나 방안이라는 면에서는 다소 미흡하다는 점이다. 아무리 훌륭한 아이디어도 실행이 어려우면 별 의미가 없다. 저자가 제시한 원칙은 모두 훌륭할 뿐만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해관계의 그물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현실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느낌이다. 저자도 인지하고 있듯이 시장은 중요하다. 국가와 코먼스(commons)의 역할을 되살리더라도 시장과의 협력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다양한 경제주체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금전적, 비금전적 인센티브 시스템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경제주체는 인센티브에 반응한다. 단지 주류 경제학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금전적 인센티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금전적 인센티브도 중요하다. 이 두 가지 인센티브를 적절하게 배합하는 것은 저자가 제시한 7가지 원칙을 현실에 적용하는 데 중요하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필자가 번역한 크리스티안 펠버(Christian Felber)의 저서 모든 것이 바뀐다(Change Everything)와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갖는다. 펠버는 이 책에서 공동선(common good)에 근거한 새로운 윤리적 시장경제를 제안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과 차별화된다. 예를 들어 펠버는 공동선 대차대조표(common good balance sheet)는 기존의 재무적 대차대조표 대신 기업을 평가하는 주된 대차대조표를 사용되어야 한다면서 구체적으로 공동선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 방법과 절차를 제시하고 있다. 한편 케이트 레이워스는 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경제 모델로서 도넛 경제학이라는 더 큰 그림을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책이 제시하는 내용을 종합해 더 나은 윤리적 시장경제이론을 구축한 후 이를 실행할 수 있다면 향후 도래할 총체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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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 27 Aug 2020 23:09:31 +0000 에세이-경영학/경제학
<![CDATA[마이클 셔머의 <천국의 발명(Heavens on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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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

역자: 김성훈

출판사: arte(2019)

 

차례

1부 죽음 체험과 영생 추구의 다양성

1장 고귀한 생각/죽을 운명에 대한 상상

2장 이뤄질지도 모를 꿈/영생을 상상하다

3장 하늘 위의 천국들/일신교의 사후 세계

2부 영생의 과학적 탐구

4장 내면의 천국/영적 구도자들의 사후 세계

5장 영생의 증명/임사체험과 환생

6장 사후세계의 증거/기이한 심리적 체험과 사자와의 대화

7장 영혼의 요소/정체성, 복제, 부활

8장 무신론자를 위한 사후 세계/과학이 죽음을 이길 수 있을까?

3부 우리의 모든 어제와 내일

9장 우리의 모든 어제/진보, 쇠퇴, 그리고 비관주의의 인력

10장 우리의 모든 내일/허구와 현실 속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4부 죽을 운명과 의미

11장 우리가 죽는 이유/개체는 죽지만 종은 영원하다

12장 천국이 없다는 상상/무의미한 우주에서의 의미 찾기

 

 

생명, 의식과 과학적 물질주의

과학계에서 종종 회자되는 조크 가운데 늦은 밤 가로등 밑에서 뭔가를 찾는 사람에 관한 얘기가 있다. 지나가던 행인이 그 사람에게 무엇을 찾고 있냐고 물었더니 집 열쇠를 찾고 있다고 대답했다. 행인이 어디서 잃어버렸냐고 물었더니 집에서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찾느냐고 물었더니 여기가 가장 밝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조크가 시사하는 바는 엉뚱한 곳에서 답을 구하고자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행위인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 조크를 뇌에서 의식의 원천을 발견하려는 신경과학자들의 현재 상황에 적용할 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기능성 자기공명장치(fMRI), 뇌파검사(EEG) 및 경두개자기자극술(TMS) 등 첨단기기와 첨단기법의 도움으로 뇌를 구성하는 개별 신경세포의 작동원리, 신경세포들 간 정보 전달 과정, 그리고 신경망(neural network)과 커넥텀(connectome), 즉 신경망 지도에 관해 많은 것이 밝혀졌다. 이런 여건이 바로 밝은 가로등 밑에 해당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과 의식의 원천 및 본질에 대한 연구는 오직 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고정관념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이를 부인하는 신경과학자들은 이단으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애리조나대학교의 신경과학자 마리오 뷰리가드(Mario Beauregard)Brain Wars는 이런 상황을 상세하게 기술한 후 대안을 모색한 책이다. 이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이와 같이 뇌와 의식(또는 마음)의 관계에 대한 논쟁의 결과에 따라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이 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현재 이 문제를 둘러싸고 주류에 속하는 신경과학자. 심리학자, 물리학자. 생물학자. 컴퓨터과학자 등 다수의 과학자들과 이에 저항하는 일단의 과학자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일찍이 토머스 쿤(Thomas Kuhn)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지적했듯이 패러다임 전환은 종교의 개종과도 같아서 주류에 속한 과학자들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필자가 래리 도시(Larry Dossey)의 저서 원 마인드의 리뷰에서 언급했듯이 2014년 마리오 뷰리가드를 포함한 일단의 과학자들이 탈물질주의 과학 선언을 공표한 것이 훗날 패러다임 전환의 신호탄으로 평가될지도 모른다.

 

이 선언의 핵심 메시지는 기존의 과학적 물질주의(scientific materialism) 내지 물리주의(physicalism)는 과학을 바라보는 하나의 철학적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과학적 사고를 지배하면서 인간의 마음과 의식을 오로지 뇌의 작용에서 비롯되는 산물로 간주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좁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인간적, 사회적 문제들의 원인을 제공해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간의 영적 측면을 무시한 결과는 탐욕과 질투, 그리고 파괴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과학적 물질주의와 물리주의에 의하면 우주에는 오직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이들 간의 상호작용에 적용되는 물리법칙만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과 같은 것은 환상(illusion)이거나 기껏해야 진화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등장한 부수 현상(epiphenomenon)일 뿐이다. 그러므로 의식(또는 마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가 없다. 모든 것은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들로 환원해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을 추구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시도가 실패한 이후에도 많은 물리학자들이 이것을 물리학의 성배(Holy Grail)로 간주하면서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과학적 물질주의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거시세계에 적용되는 상대성이론과 미시세계에 적용되는 양자역학을 통합한 그야말로 모든 것의 이론을 구축하기 어려운 이유는 과학적 물질주의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는 일찍이 4세기 전 과학혁명이 일어났을 때부터 이미 과학적 방법론에 내재해 있던 한계였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과학혁명의 선구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자연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씌어있다.”고 선언했다. 이는 자연과학은 오직 수치로 측정 가능한 현상만을 다룬다는 것으로서 주체와 분리된 객체의 여러 측면 가운데 측정 가능한 부분, 예컨대 거리, 무게, 부피, 온도, 운동량 등만이 분석 대상인 셈이다. 이것은 관측과 실험의 대상인 객체의 질적, 주관적 측면은 철저하게 배제한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런 내재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난 400여 년 동안 과학혁명은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문명의 이기들은 과학혁명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혁명은 물론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인 인공지능, 로봇공학, 나노기술, 합성생물학 등 여러 분야에서 전 방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기술혁신은 모두 과학혁명의 결과물이다. 이와 같이 갈릴레이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주체와 객체(대상)을 철저히 구분하고, 관찰과 측정 및 실험을 바탕으로 축적된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인류는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이룩해왔다. 그 결과 물질주의는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실로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유일무이한 원리로 작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다른 측면, 즉 의식과 마음, 나아가 영혼이라는 측면은 모두 물질로부터 파생되는 부수적인 현상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과도하게 물질주의에 편향된 결과 여러 가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등장해 개인의 삶을 황폐화시키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과학적 물질주의를 반박하는 연구 결과들이 상당히 축적되어 왔으며 필자가 리뷰를 했던 래리 도시의 원 마인드는 많은 결과물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왜 물질주의는 이다지도 강력하게 우리의 삶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가?”하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탈물질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음에도 물질주의가 여전히 지배적인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4차 산업혁명의 특성을 감안할 때 물질주의의 영향력은 앞으로도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모든 파괴적 기술이 인간의 영적 측면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감각적 쾌락을 더욱 확장해주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감각적 쾌락을 극대화하고 이를 더 즐기기 위해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할 것이므로 자연스럽게 물질주의의 지배는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상황에서 물질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논리, 바꿔 말하면 탈물질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시한 논리를 반박하는 논리가 무엇인지 점검하는 것은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균형 감각을 잃지 않는 가운데 인간의 의식과 마음, 그리고 죽음이라는 주제를 둘러싼 팽팽한 대립의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불멸이라는 환상

이 책의 저자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 박사는 널리 알려진 스켑틱(skeptic), 즉 회의주의자로서 Skeptic이란 잡지의 발행인이면서 사이비과학을 비판하고 무신론을 지지하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해온 사람이다. 셔머가 비판했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의사이자 영성지도자로 명성을 쌓은 디팩 초프라(Deepak Chopra)와 생물학자로서 대안적 과학이론을 주장해온 루퍼트 셸드레이크(Rupert Sheldrake)를 들 수 있다. 셔머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 근거 없는 허튼 소리라는 식으로 냉혹하게 비판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나는 그에게 근거 없는 잡설(woo-woo nonsense)이나 내뱉으며 사이비 과학을 한다고 비난했다, 그는 나의 사고방식이 편협하고, 독단적인 유물론과 과도한 과학만능주의에 빠져있다고 비난했다.”(131)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셔머는 디팩 초프라가 운영하는 <초프라 센터>를 방문해 거기서 운영하는 영성 프로그램에 참여함으로써 초프라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리고 셸드레이크와는 함께 Arguing Science라는 책을 통해 과학에 대한 서로의 입장을 밝히면서 건전한 방식으로 토론을 하기도 했다. 이것은 셔머 박사의 긍정적인 면이다. 비록 과학적 입장은 다르지만 대화를 통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열린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데, 셔머 박사는 적어도 이 점에서는 호전적인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와는 차별화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부제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에서 영생, 사후 세계, 그리고 유토피아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이 가운데 핵심은 죽을 운명인 존재, 즉 필멸(mortality)의 존재인 인간이 불멸(immortality)을 꿈꾼다는 데 있다. 즉 죽음에 대한 인간의 저항이 이 책의 핵심이다. 그래서 저자는 몇 년 전 우리에게도 소개되었던 철학자 스티븐 케이브(Stephen Cave)가 저서 불멸에 관하여(Immortality)에서 제시했던 네 가지 불멸 모델에 관해 언급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그것은 1) 영생(staying alive) 2) 부활(resurrection) 3) 영혼(soul) 4) 유산(legacy)이다. 영생은 문자 그대로 현재의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고, 부활은 사후 어떤 계기에 의해 원래의 몸을 갖고 되살아나는 것이며, 영혼은 비록 몸은 소멸하지만 별개의 존재인 영혼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산은 자식을 통해 유전자를 물려준다거나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남거나 유명한 작품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유산은 가장 약한 형태의 불멸로서 사실상 불멸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리고 다른 세 가지 경우도 과학적 물질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실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는 매 한가지다. 이 가운데 그나마 논의의 여지가 있다면 영혼의 불멸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철학과 종교의 핵심 주제였는데 지금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저자도 이런 이유로 여기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반박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도 일신교의 관점에서 사후 천국과 지옥을 통한 영생을 논한 부분이나 지상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던 과거의 시도 및 앞으로의 시도에 관한 논의는 이 책의 핵심이 아니다. 왜냐하면 저자가 이런 문제들을 깊이 다룰 수 있는 배경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적으로 불멸을 꿈꾸는 시도라 할 수 있는 인체냉동보존술, 트랜스휴머니즘, 특이점주의, 그리고 정신업로드(mind-upload)에 관한 논의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이와 관련해서는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가 저서 사피엔스호모 데우스에서 전개한 논의에 미치지 못한다. 저자는 회의주의자로서 다양한 주제에 관한 토론에 참여해온 과정에서 축적된 나름의 역량을 바탕으로 이런 다양한 주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는 있지만 굳이 여기서 리뷰할 만한 내용은 없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따라서 불멸 가운데 영혼의 존재에 관한 내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도대체 영혼을 어떻게 정의하고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영혼은 종교와 철학 그리고 심리학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많은 혼란을 야기해왔다.

 

우선 영혼에 관한 저자의 정의 또한 과학적 물질주의의 기본 정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자아는 우리의 물리적 구성, 정보 패턴, 고유한 경험, 개인 시점에 의해 정의된다. 이것이 자율적인 자아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진짜 당신이고, 당신의 영혼이다.”(214) 저자는 개인의 영혼이란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형성된 정보 패턴에 지나지 않으며 이 모든 것은 뇌에 저장되어 있다는 입장이다. 영혼을 정의하려는 저자의 시도는 좋지만 과학적 물질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문제가 있다. 영혼도 물리법칙으로 환원해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갈릴레이가 천명한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자의 해석일 뿐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영혼의 정의는 아니다. 예컨대 유식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식을 전() 오식(五識)과 의식, 말나식 및 아뢰야식의 8식으로 구분한 후 윤회하는 것은 아뢰야식이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는 아뢰야식이 영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육체와 상호작용하지만 분리 가능한 정신적 실체로서 영혼의 존재를 탐구한다면 의식의 어떤 측면으로 한정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방법인 것으로 보인다. 레리 도시는 원 마인드에서 이런 의미의 영혼은 결코 소멸되지 않으며 원래부터 우주적 차원에서 원 마인드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육체의 소멸, 즉 죽음 이후에는 다시 여기에 합류한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그러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사례들과 관련된 과학적,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려고 시도했다. 필자가 이미 그의 책을 리뷰하면서 언급했듯이 래리 도시는 의식의 비국소성(non-locality)이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영혼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단언했지만 이는 아직은 성급한 결론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된 더 많은 연구와 반박 그리고 재반박이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저자가 시도한 것은 래시 도시가 원 마인드에서 제시한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간단히 말해 과학적 물질주의와 물리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의식과 마음은 뇌의 산물이므로 죽으면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비롯한 일체의 정신활동도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죽음은 완벽한 소멸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소망사고가 불멸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수많은 종교가 탄생해 이런저런 방식으로 불멸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켜왔다는 것이다. 나아가 최근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점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임사체험(near-death experience)이나 환생(reincarnation)도 대동소이하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의 무의식에 내재해 있는 불멸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 소망사고일 뿐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무엇보다도 임사체험이나 환생과 관련해 저자가 제시한 반박의 논거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 필자의 기본 입장이다. 지금까지 임사체험이나 환생에 대해 제기되었던 반박 논리와 비교해 조금도 새로운 것이 없다. 반면 그동안 임사체험이나 환생 관련 연구는 상당한 발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가 구글 검색과 유튜브 영상을 을 통해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와 관련된 방대한 연구와 증언이 축적되어왔으며 하나하나 무시하기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모든 연구 결과와 증언들을 간단히 죽어가는 뇌에서 산소 부족으로 인해 일어난 환각(hallucination)의 일종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비판적인 입장에서 이런 자료에 대한 좀 더 과학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것이 진정 과학에 임하는 자세일 것이다. 임사체험 및 환생과 관련해 필자가 검토했던 다양한 저서, 연구 자료 및 동영상에서 제시된 내용을 간단히 허튼 소리라고 매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초심리학(parapsychology)에서 다루는 초감각지각(ESP) 현상 내지 초자연현상(paranormal phenomena)에 대해 철저하게 부정적이다. 이는 뇌가 의식을 생성한다는 과학적 물질주의의 관점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다. 이 경우 의식은 뇌에 한정되므로 국소적(local) 현상이다. 반면 텔레파시, 예감(premonition), 예지력(clairvoyance), 염력(psychokinesis) 및 원격투시(remote viewing)와 같은 초자연현상들은 시공간적으로 비국소적(non-local) 의식을 전제로 한다. 래리 도시는 원 마인드에서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이런 초자연현상들이 결코 기이한 것이 아님을 강조했으며, 미국 정신과학연구소(Institute of Noetic Sciences)의 딘 래딘(Dean Radin)을 비롯해 다수의 연구자들이 다양한 초자연현상들을 연구하고 있다. 과학적 물질주의를 신봉하는 과학자들은 이들이 그동안 축적한 연구 결과가 모두 허튼 소리에 불과하다고 단언하기 전에 비판적 관점에서 검토하는 전향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저자는 그럴 의도가 없어 보인다. 예컨대 저자는 미국 라이스대학교 종교학과 제프리 크리팔(Jeffrey Kripal) 교수가 여러 가지 초자연현상을 연구하면서 여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냉소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기이한 체험을 사후 세계 시나리오가 진짜라는 증거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라이스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제프리 크리팔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그가 말하는 외상성 초월(traumatic transcendence) 또는 강렬한 인간적 고통의 중력에 의한 영향을 받아 생기는 시간과 공간의 예지적 뒤틀림의 사례로 마크 트웨인이 꾼 죽음의 예지몽을 든다.”(183) 이와 같이 저자는 크리팔 교수의 주장에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처럼 매도하지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크리팔 교수가 제시한 초자연적 사례들은 기존의 과학적 사고, 즉 과학적 물질주의에 의하면 당연히 초자연적이다. 하지만 과학의 영역을 확대한다면 이런 사건들이 정상적인 사건, 즉 자연적인 사건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고 본다. 크리팔 교수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나아가 그는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 가운데는 마크 트웨인을 비롯해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과학자, 의사 등 일반인보다는 훨씬 더 지적이고 과학적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이들은 단지 자신들의 체험이 비합리적이고 기이한 현상으로 취급받는 것이 싫어서 공개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크리팔 교수의 저서 The Flip은 래리 도시의 원 마인드와 더불어 의식의 비국소성을 지지하는 다양한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질 만하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과학적 물질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이상 현상(anomalies) 더욱 많이 축적되면 언젠가는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전환의 과도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전환하는데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아직 충분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레이먼드 무디(Raymond Moody, Jr.)박사가 임사체험이라는 용어를 창안해 이런 사례들을 널리 알린 책 Life after Life를 출판한 것이 1975년이므로 아직 60년도 지나지 않았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삶의 의미와 목적

죽음은 본래 역설적이다. 우리는 죽기 전에는 죽음의 상태에 대해 알 수 없으며, 죽고 난 후에는 그것을 전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역설적이다. 저자도 지적했듯이 미국 인구조사국의 통계 자료에 의하면 기원 전 5만 년과 기원 후 2017년 사이에 약 1080억 명의 사람이 태어났는데 이 가운데 사후 세계에서 돌아와 그 세계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확인해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죽음은 모든 것의 소멸이라는 과학적 물질주의의 관점에 한 점 오류가 없다는 것인가?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냉소적인 평가는 존재하고 있음을 현재와 같이 육체의 감각에 의존하는 존재를 상정하는 경우에는 타당하다. 그렇지만 마치 주파수가 다르면 전파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는 수신기가 있는 것처럼 육체가 소멸한 다음에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 내지 존재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해야 할 근거가 없다. 문자 그대로 우리는 사후 세계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임사체험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사후 세계에 대한 정보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이는 더 많은 검증을 거쳐야 하는 문제이긴 하지만 수많은 임사체험에 공통적인 요소들을 추출해 분석한 자료에 의하면 사후 세계에 해당되는 무엇이 존재한다고 한다. 심지어 이 세계에서 느끼는 감각의 강도는 현실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고 증언하는 사례도 많다. 대표적으로는 신경외과의사로서 임사체험을 한 후 나는 천국을 보았다(Proof of Heaven)를 쓴 이븐 알렉산더(Eben Alexander)의 사례를 들 수 있다. 필자는 이런 주장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보자는 것이다.

 

물론 저자와 같이 과학적 물질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내용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세계관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학적 물질주의에 입각한 유물론을 신봉하는 일원론자임을 스스로 천명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 임사체험이나 환생에 관한 자료를 인정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유물론자들에게 공통적인 반응이다: 이원론은 직관적으로, 일원론은 반()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한 가지 이유는 뇌가 자신의 신경 과정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신적 활동이 뇌와 별개로 존재하듯, 다른 원천, 즉 정신이나 영혼, 혹은 의식에서 비롯된다고 여길 때가 많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나를 비롯해서 서구식 교육을 받는 과학자 대부분은 이원론적 직관을 신뢰하지 않는 일원론자다. 이원론적 직관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는 직관적으로는 지구가 고정되어 있고 태양이 그 주위를 도는 듯 느껴지고, 또 그렇게 보이지만 그런 직관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와 같다.”(124) 이와 같이 지동설과 우리 직관의 차이를 들먹이면서까지 자신의 일원론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는 일종의 근본주의자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뇌를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전파를 수신하는 텔레비전으로 비유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어느 정도 동조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아직은 기존 주류 과학계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좋다고 은근한 제안을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식이 얽히고설킨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우리는 뇌가 죽을 때 측정 가능한 의식도 함께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와 반대로 증명되기 전까지는 뇌가 의식을 만들어낸다는 기본 설정 가설(default hypothesis)로 삼아야 한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140)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아마도 뇌가 과연 의식을 생성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주류 과학계에서는 신뢰할만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간단히 말해 뇌의 상태와 의식의 상태 간에 상당한 상관관계(correlation)가 있다는 것은 대체로 인정되고 있지만 인과관계(causation), 즉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뇌가 의식을 만들어내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의식의 어려운 문제(hard problem of consciousness)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있다. 옥스퍼드대학교 철학자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슈퍼인텔리전스(Super Intelligence)에서 언급했듯이 아마 이 문제는 초인공지능(ASI)이 등장해야 해결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의식의 비국소성과 관련해 저자가 다음과 같이 의문을 제기한 것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런 비유(뇌를 TV 수상기에 비유)는 통하지 않는다. 텔레비전 스튜디오에서 방송 신호를 만들어 송출하면 텔레비전에서 그 신호를 포착한다. 만약 뇌가 텔레비전과 비슷한 기능을 한다면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방송 시설에 해당하는 의식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의식을 방송으로 내보내는 주체는 누구인가? 바꿔 말하면 뇌가 의식의 원천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 원천이라는 말인가? 사실 의식을 방송으로 내보내는 주체는 존재하지도 않고, 뇌도 텔레비전과 전혀 닮지 않았다.”(129) 임사체험, 유체이탈(out of body experience), 환생 및 다양한 초감각지각 현상들이 의식의 비국소성을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저자가 제기한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뇌가 의식의 필터라면 도대체 의식의 원천은 무엇이고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뇌가 수신하게 되는지 전 과정이 과학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아직 어떤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다. 예컨대 양자물리학자 데이비드 봄(David Bohm)이 주장하는 접힌 질서(implicate order), 시스템과학자 에르빈 라슬로(Ervin Lazslo)가 말하는 아카샤(Akasha) 내지 정보장(information field), 생물학자 루퍼트 셸드레이크가 말하는 형태형성장(morphogenetic field) 또는 천체물리학자 버나드 헤이시(Bernard Haisch)가 주장하는 영점장(zero-point field)이 의식의 원천인지 여부는 아직 누구도 단정하지 못한다. 더욱이 이런 원천과 개별 생명체의 뇌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에 관해서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의식의 비국소성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전한 그림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것의 이론의 모체가 될 수 있다.

 

과학적 물질주의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의 차이는 결국 의식은 국소적인가, 아니면 비국소적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관되게 의식이 비국소적이라는 입장, 즉 뇌가 의식을 생성한다는 입장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증거를 제시했다. 그러면서 이것을 기정사실로 인정하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것만이 진정 지상의 천국들(heavens on earth)’을 건설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원래 이 책의 제목이 지상의 천국들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천국이 복수인 이유는 제도권 종교에서 말하는 그런 천국이 아니라 각자의 삶을 통해서 만들어가는 천국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나름 감동적(?)인 멘트로 책을 마감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기회는 단 한 번이고, 태양 주위를 80바퀴 돌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다. 가설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우주의 드라마에 설 짧지만 영광스러운 시간이다. 우리가 우주와 자연의 법칙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이 정도가 우리 대다수가 합리적으로 바랄 수 있는 최대의 시간이다. 다행히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 시간이 생명의 영혼이다. 그 시간이 바로 지상의 천국들이다.”(417) 그런데 저자가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 자체는 의문이다. 뜬금없이 삶의 목적과 의미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저자는 이런 우주적 관점(빅뱅에서 출발한 우주)이 옳다면 우리는 대체 어디 가서 의미와 목적을 찾아야 할까? 그 답은 영성(spirituality)과 경외에 관한 더욱 깊은 이해에서 출발한다.”고 말하며 또한 용기, 자각, 정직한 마음으로 죽음과 삶을 마주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좋은 것과 가장 소중한 것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감사의 마음과 사랑이다.”라는 식으로 갑자기 영성, 사랑, 의미 그리고 목적을 강조한다. 이것은 과학적 물질주의를 지지하는 회의주의자로서는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더 나아가 저자가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를 강조하는 대목에서는 헷갈린다. 과학적 물질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저자의 일관성이 결여된 태도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하는 데서도 확인된다. 저자의 논증은 이른바 체리피킹(Cherry Picking)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다름 아니라 저자가 분명 존경하고 있을만한 대단한 과학자들이 의식의 비국소성을 지지하는 말들을 남겼음에도 저자는 이들의 견해를 전혀 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널리 알려진 것 몇 개를 소개하는 다음과 같다.

 

막스 플랑크(191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나는 의식을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나는 물질은 의식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간주한다. 우리는 의식 너머로 갈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의식을 상정(想定)한다.”

 

만물은 원자를 진동하게 만들고, 가장 작은 태양계와 같은 원자를 유지시켜주는 힘으로부터 유래하며 이로 인해 존재한다. 우리는 이런 힘의 뒤에는 의식적이고 지적인 정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이 정신이 바로 만물의 매트릭스다.”

 

에르빈 슈뢰딩거(193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의식은 물질적 관점에서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식은 전적으로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찰스 셰링턴(1932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자연과학의 추종자들로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서의 전체적인 상관관계 외에는 생각과 뇌의 관계에 대해 알지 못한다.”

 

존 에클스(1963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나는 내 몸과 뇌에 관해서는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이상 뭔가가 있다. 나는 나를 유일무이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 즉 나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그밖에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순간 중력에 의해 태양 주변에서 빛이 휘는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원리를 입증해준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아더 에딩턴(Arthur Eddington)경은 물리적 세계는 의식과의 연결이 끊어지면 완전히 추상적이면서 실제성을 잃게 된다.”고 했으며, 영국의 천체물리학자로서 왕립학회 회장을 역임한 제임스 진스(James Jeans)경은우주는 거대한 기계라기보다는 점점 거대한 생각처럼 보인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외에도 양자역학의 거물이었던 닐스 보어(Niels Bohr),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그리고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를 비롯해 많은 과학자들이 이들과 유사한 견해를 피력했다. 한 마디로 의식은 비국소적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의식이 비국소적이라는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한 과학적 물질주의와 물리주의라는 과학적 사조를 바탕으로 인류가 이룩한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는 지금 역사적 전환점에 와 있으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 전체가 암울한 질곡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극단적인 상황을 피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현재 진행중인 4차 산업혁명은 물질적 풍요의 가치를 더욱 드러낼 것이므로 우리는 물질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나아가 코로나19로 촉발된 글로벌 팬데믹이 자주 반복될 수 있는 미래, 그리고 기후변화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을 수도 있으며, 생태계가 파괴되어 모든 종()이 소멸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고려할 때 우리 모두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에 대한 탐구에 더 많은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 이를 통해 만약 의식의 비국소성이 과학적 진실로 수용되는 날이 온다면 이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죽음을 기억하면서 또 다른 의미를 찾아 새로운 세계로의 여정을 즐겁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이다. 그리고는 스스로 그리고 함께 빅퀘스천을 탐구하는 것이다. 나는 어디에도 없으면서 모든 곳에 있고,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그런 존재인지 여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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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 28 Jul 2020 01:45:23 +0000 에세이-인문학분야
<![CDATA[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기]]> 세계인구시계에 의하면 20191214일 기준 지구상 인구는 총 77.5억 명에 달하며 현재 추세라면 2057년에 100억 명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기후변화로 인한 예측불허의 사태를 고려한다면 언제까지 인간이 지구에 생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모두 당장은 별 문제 없다는 듯 살아갈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본래 근시안적이다. 그런데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대극적인 측면을 갖는다. 한 측면은 다양성이 증가해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를 바탕으로 역동적인 사회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양성을 억압하는 전체주의 사회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므로 다양성을 장려하는 것은 미래의 생존 전략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 다양성이 증가하면 사람들 간 의견 대립이 빈번해지고 갈등이 증폭되어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런 대극적인 두 측면을 방치한다면 한국 사회에서는 부정적인 측면(갈등)이 긍정적인 측면(창조성)을 압도하는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세계관은 고사하고 단지 정치적 견해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 아니면 재산 규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공감을 바탕으로 원만하게 지내기 지극히 어려운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그래서 대극의 조화(harmony of the opposites)”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필자는 여기서 다양성의 증가에 따른 갈등과 충돌을 완화하는 방법으로 우선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기(agreeing to disagree)”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얼핏 말장난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주관을 가질 고유한 권리가 있으며, 나아가 이를 공개적으로 주장할 권리도 갖고 있다. 물론 이 모두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이는 '진정한 개인주의(true individualism)'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면, 이는 곧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성적이요 진정한 개인주의 원칙에 충실한 것인 바,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기는 그 출발점이다. 필자는 현재 한국사회에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이 원칙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단지 다른 사람들과 동의하지 않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사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것은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지 않기(disagreeing to disagree)”에 해당된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견해나 주장은 조금도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의 주장이나 견해만이 옳다는 독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바람직한 경우는 동의하는 데 동의하기(agreeing to agree)”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다분히 동어반복적인 인상을 주지만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우리는 어떤 견해에 동의한다고 말한 후 특별한 이유 없이 곧바로 이를 부정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경우는 동의하는 데 동의하기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깊은 사고를 바탕으로 진정한 동의에 도달한 경우에만 동의하는 데 동의하기단계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대극적인 입장은 동의하는 데 동의하지 않기(disagreeing to agree)”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자기모순적인 상황이므로 배제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 의할 때 우리가 따라야할 자연스러운 과정은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지 않기에서 출발하더라도 진지한 토론과 논쟁을 거쳐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기단계에 도달한 후, 일정한 시간을 두고 더 깊은 논의를 통해 동의하는 데 동의하기단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안에 있어 항상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선호나 감정, 그리고 경험의 차이로 인해 끝까지 이런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이슈들에 관한 한 이런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런 논의와 관련해 다음 사례를 생각해보자. 우주만물의 탄생 및 생명의 출현과 관련해 창조론과 진화론이 오랫동안 극단적으로 대립해왔다. 창조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진화론을 수용할 수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창조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충분한 과학적 근거 없이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는 편협한 사람들로 매도하는 한편, 진화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창조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신화와 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로 치부한다. 이들은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지 않기단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사람들이 종교와 과학은 각각 고유의 영역이 있으므로 서로 충돌할 이유가 없다면서 서로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을망정 다름을 인정한다면, 이는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기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단계에 이르지 못한 상황에서 지적설계(intelligent design)나 창조적 진화(creative evolution)와 같은 대안적 모델이 제시되었으니 양쪽 모두의 지지를 기대하기란 원초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위해서는 우선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기단계에 도달할 필요가 있다.

 

현재 인류의 생존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이슈는 기후변화에 따른 존재적 위험이다. 기후변화는 이미 상당히 진행 중이라는 것이 과학계의 정설이므로, 획기적으로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줄이기 위한 국제 공조의 필요성이 강조되어 왔다. 그렇지만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의 생산, 가공 및 유통을 통해 막대한 이윤을 얻고 있는 에너지 기업들과 이들을 비호하는 정치세력은 집요하게 기후변화는 없다는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도해 미국이 파리 기후협약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런 기득권층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에서 환경오염물질을 가장 많이 배출하는 기업으로 알려진 <코크 인더스트리즈(Koch Industries)>는 공화당에 막대한 자금을 후원해 온 코크 형제(Koch brothers)가 소유하고 있다. 이들은 재력을 이용해 기후변화는 없다는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일반대중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이런 이유로 기후변화에 관한 한 우리는 아직도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지 않기단계에 머물고 있으니 앞으로 갈 길이 요원하다.

 

우리는 수많은 크고 작은 문제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본성과 양육의 차이로 인해 똑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일란성 쌍둥이라 할지라도 다른 환경에서 자라게 되면 다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은 항상 맞고 상대방은 항상 틀리다는 생각을 고수하는 한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지 않기단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당면한 문제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 한국사회에 대체로 이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이런 교착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됨에 따라 마치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인이나 정부 관료, 재벌 총수나 기업의 임원 누구를 막론하고 한국사회에서 힘 좀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좀 더 냉소적으로 말하면 의도적으로 벗어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가 분열될수록 자신에게는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이는 한국사회의 발전과 통합을 위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일련의 사건들, 예컨대 일본의 경제보복과 한국정부의 대응, 특정 인물의 법무부장관 인선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공방, 과감한 최저임금제의 실행에 따른 공과에 대한 논쟁 등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여전히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지 않기단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한 개인적·사회적 에너지 낭비는 실로 막대하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닥칠 엄청난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한국사회에는 깊이 사고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증거가 점점 쌓이고 있다. 깊이 사고하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의 현재 사고틀(mindset)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부족한 점을 보완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여행이나 현장 학습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며, 체계적인 독서를 통해 제대로 된 지식을 얻는 것도 매우 효과적이다. 나아가 인터넷 시대를 십분 활용해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전문가나 학자들의 글을 읽거나 유튜브를 통해 이들의 강연이나 인터뷰 동영상을 감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런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가운데 가짜 뉴스에 의존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의 그럴듯한 주장에 일방적으로 경도한다면 어떤 의미 있는 변화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지 않기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 단계를 넘어 동의하지 않는 데 동의하기단계로 이행해야만 그 다음 단계로의 이행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다. 이 단계로 이행하는 것이 왜 그리 어려운지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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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12 Jul 2020 21:24:32 +0000 한국사회관련
<![CDATA[피터 디아만디스의 <메가트렌드를 이해하라>]]> 4차 산업혁명이 진행 중인 현 시점에서 미래에 대한 전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기술적 유토피아(technological utopia)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적 디스토피아(technological dystopia)이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전자에 의하면 우리는 모든 것이 풍요롭고, 건강하게 오랫동안 살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를 맞이하게 된다. 반면 후자에 의하면 인공지능을 비롯한 파괴적 기술로 인해 대부분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고,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는 보편적 기본소득으로 겨우 연명해야 하는 쓸모없는 계층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 가운데 무엇이 실현될 것인지 현재로서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진행 중인 기술혁신의 특성과 속도를 감안한다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쯤은 누구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지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되돌아보면 앞으로 일어날 변화의 일부를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동영상의 연사 피터 디아만디스(Peter Diamandis)는 대단한 아이디어와 정열, 그리고 추진력을 가진 혁신기업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과 더불어 기술적 유토피아의 대표적인 전도사라고 할 수 있다. 디아만디스는 그리스계 미국인으로 MIT에서 분자유전학을 전공했고, 하버드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니 과학자로서 탄탄한 기반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학문적 배경을 바탕으로 그는 재학 시절부터 벤처 사업을 추진하는 등 남다른 행보를 보였으니, 훗날 엑스 프라이즈 재단(X Prize Foundation)을 비롯해 10여 개의 하이테크 기업을 설립한 정열은 그때부터 싹텄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여기서 특별히 강조할 것은 2009년 레이 커즈와일과 공동으로 캘리포니아에 싱귤레리티 대학(Singularity University)를 설립한 것이다. 이 대학은 특이점 (singularity)으로 상징되는 기술적 유토피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10주간 코스를 통해 창업을 원하는 사람들을 교육하는 한편, 정예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집중 토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조직으로서 구글과 나사(NASA) 등의 지원을 받아 설립되었다.

 

이 동영상은 20198월에 개최되었던 싱귤레리티 대학의 연례 행사인 글로벌 서미트(Global Summit)에서 디아만디스가 풍요(abundance)를 주제로 현재 진행 중인 메가 트렌드를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30분이 넘는 비교적 긴 동영상이지만 현재 첨단기술 분야에서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디아만디스가 여기서 전하는 메시지는 그의 저서 어반던스(Abundance), 볼드(Bold), 그리고 최근 출판된 The future is faster than you think에 잘 정리되어 있으니 추가 정보가 필요하면 이 책들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디아만디스가 강조하는 이 시대의 특징인 풍요는 레이 커즈와일이 강조한 수확가속법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 기술혁신이 일어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기하급수적 성장(exponential growth)으로 인해 과거 결핍의 시대가 끝나고 이제는 풍요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사물인터넷에 들어가는 각종 센서, 네트워크 장비, 인공지능, 로봇공학, 3D 프린팅, 합성생물학, 블록체인 등 다양한 기술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함과 동시에 모든 기술들이 하나로 수렴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비즈니스의 기회가 창출되고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투자 자본을 비롯한 모든 자원이 풍요로운 여건에서 정열과 아이디어만 있으면 획기적인 프로젝트(moonshot project)를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좋은 여건 덕분에 2019년 기준 10억 달러 이상의 기업가치를 갖는 스타트업 기업인 유니콘(unicorn)360개나 탄생했다고 한다.

 

디아만디스가 말하는 풍요가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가 지적한 것처럼 재생에너지를 거의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 것은 사실이고, 앞으로 더욱 발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더 큰 혜택이 돌아갈 것이다. 정보통신이나 디지털기기 분야에서는 이미 풍요를 경험하고 있다. 예컨대 5G가 상용화됨으로써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통신을 하고 용량이 큰 데이터도 순식간에 다운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기하급수적인 기술들이 수렴해 이제는 장수(longevity)분야에서도 획기적인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디아만디스는 커즈와일과 마찬가지로 이 분야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문제를 다루는 스타트업을 창업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 모두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기를 원하며, 이는 기하급수적인 기술을 통해 가능하리라고 믿는다. 그것도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과 같이 머지 않은 미래에 기술적 유토피아가 실현될 수도 있고, 아니면 선택된 소수만이 혜택을 누리는 기술적 디스토피아가 어두운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 어떤 미래가 실현될지 여부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메가트렌드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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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05 Jul 2020 18:19:45 +0000 [일반자료파일]한국/글로벌경제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