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분야

레나타 살레츨의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Choice)』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6-04-20 16:52
조회
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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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레나타 살레츨(Renata Salecl)

역자: 박광호

출판사: 후마니타스(2014)

   

 

 목차

1. 선택은 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가?

2. 타인의 시선으로 하는 선택

3. 사랑을 선택할 수 있을까?

4. 아이, 가질 것인가, 말 것인가?

5. 강제된 선택

결론: 사회는 왜 변하지 않을까?

 

 

 

<북리뷰: 선택의 자유는 진정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 저자 소개 및 책의 개요

저자 레나타 살레츨은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서 법, 범죄학과 정신분석학을 결합해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런던 대학교 버크백 칼리지 교수로 재직하면서 런던 정치경제대학과 뉴욕의 카르도수 로스쿨 등에서도 정신분석학과 법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경제학과 별다른 인연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필자는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선택”이라는 주제를 다룬 이 책을 소개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선택의 문제는 이제 더 이상 경제학의 고유한 주제는 아닌 것 같다.

 

전통적인 경제이론에서는 개인의 선택 범위가 확대될수록 경제적 효용이 증가하므로 바람직한 현상으로 본다. “선택 범위 확대 = 행복 증진”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다. 나아가 미국으로 대표되는 소비사회에서는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이 곧 정의에 부합한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이른바 공리주의 원리가 적용되는 사회에서는 그러하다.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비판적 입장에서 이에 대해 상세히 논했으므로 이를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소비를 미덕으로 찬양하는 기존 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든다. 사실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소비를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기에 모든 분야에서 소비를 긍정적인 행위로 장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모든 매스 미디어에서는 소비가 침체하면 바로 글로벌 차원에서 경기침체로 이어져 모두가 어렵게 되는 것처럼 보도한다. 이것은 어느 나라의 경우에나 적용되는 자본주의의 기본원리처럼 인식되고 있다. 우리는 소비자가 왕이고 소비가 미덕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끊임없이 세뇌되어왔다.

 

누구도 소비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 어느 정도의 소비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불가피하다. 나아가 소비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사실 자체는 개인의 행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단, 여기에는 소비자가 항상 합리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반대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의 중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로 인해 선택의 범위가 줄어들면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라고 믿게 되었으며, 선택에 따른 책임은 모두 자기 자신이 떠맡아야 한다는 두려움과 불안에 짓눌리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것이 선택의 독재적 측면이라고 말한다. 개인의 자유 확대에 기여해야 하는 선택이 이제는 오히려 자유를 축소시키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우리는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있는가?

경제학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적인 빌딩블록은 “합리적 선택”이다. 이것은 경제학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이기도 하다. 이것을 포기하는 순간 경제학은 기초부터 무너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경제학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성은 자신의 이익이나 효용을 극대화한다는, 이른바 도구적 합리성(instrumental rationality)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극히 편협한 합리성으로서 인간의 모든 행동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경제학자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경제이론의 논리적 일관성을 위해 지금도 이 잘못된 가정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이 딜레마이다.

 

합리적 선택에 대한 이의 제기는 경제학 내부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시작되었다. 일찍이 대니얼 커너만과 아모스 트버스키와 같은 인지심리학자들은 다양한 선택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가를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주었다. 이들의 선구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이후 많은 후속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과 행동재무학(behavioral finance)이 이제는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서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이들 연구가 보여준 것은 인간은 항상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종종 다양한 방식으로 비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비단 개인적인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장 전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2008년 금융위기도 이런 비합리적인 행동이 만연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다른 의미에서 비합리적인 선택을 논한다. 우선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자기 이익이 아니라 자선 혹은 이타적 관습에 근거해 행동하는 예가 많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것은 우리가 여러 가지 형태의 자원봉사나 기부행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므로 쉽게 수긍할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위의 다수가 믿는 것을 참이라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들은 ‘타자의 믿음에 대한 믿음’에서 번성한다.”(27쪽) 이것은 메타 믿음에 해당한다. 즉 우리가 독자적으로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지나치게 의식하면서 선택 행위를 하는 것이다. 당연한 지적인데도 이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사례가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수로부터 소외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선택 행위와 불안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소비를 미화하는 이유는 소비 선택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반영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것이 사람들을 구속하는 잘못된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경제발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훨씬 풍요로운 상황에서 선택을 하게 되었다. 기존의 선택 이데올로기에 의하면 우리는 과거에 비해 훨씬 더 행복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제는 오늘날 만연한 선택의 이데올로기가 점점 소비자들의 불안감과 부족감(부적절하며 남보다 못하다는 느낌)을 증가시키고 있다.”(10쪽) 더욱이 이런 상황은 자신이 확대되는 선택의 기회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의식을 강화시켜줌으로써 상대적으로 불행해지게 만들고 있다. 나아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의 확대는 이런 현상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지난 수년 동안 행복에 관한 책과 글들은 선진 자본주의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선택이 왜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하는지, 그리고 부자가 되어도 왜 더 행복해지지 않는지 의문을 제기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리처드 레이어드(Richard Layard)가 『행복의 함정』(2011)에서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소득은 일정 수준 이상 올라간 후에는 더 이상 행복의 결정요인으로서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선택과 관련된 불안이나 후회가 오히려 행복을 가로막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베리 슈워츠(Barry Schwarz)가 『선택의 심리학』(2005)에서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주었다. 선택의 대상이 많아질수록 소비자는 오히려 불안해지고 우울해진다는 것이다. 때로는 신경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이 모두 합리적 선택의 장점에 위배되는 현상들이다.

 

저자는 이런 대표적인 사례로 성적(性的) 만족과 관련된 문제를 거론한다. 오늘날 소비사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개인의 성적 취향을 강조하면서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상업적인 동기가 인간의 본능을 강하게 자극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성적 문제를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광고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재 선택 이데올로기는 성적 만족의 본질에 관한 우리의 생각에 깊숙이 침투해있다. 다시 말해 그칠 줄 모르고 더 할 나위 없는 성적 만족과 새로운 테크닉의 부단한 활용이라는 문화적 이상에 우리의 애정생활이 미치지 못할 때에는 그것과 관련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48쪽) 즉 성적 취향과 관련된 선택에서 우리는 이미 자유를 상실한 채 광고가 제공하는 기준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선택의 자유가 아니다.

 

이밖에도 저자는 빚을 지도록 강요하는 분위기는 우리를 “선택의 역설”로 몰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 사람들은 빚을 지면서도 일정 소비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착각 내지는 환상에 사로잡혀 막연히 다 잘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럭저럭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소비자는 빚이 있음을 알지만 다 괜찮을 거고 아무튼 그럭저럭 빚을 갚을 수 있을 거라는 환영을 유지하고자 무의식적으로 행동한다. 돈에 관한 이런 고의적인 망각은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관한 관념에 대처하는 방식과 흡사하다.”(65쪽) 이것은 의외로 중요한 의미를 담은 표현이다.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가운데 선택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더 큰 불행을 선택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 타인의 시선과 선택

저자는 “대타자(Big Other)”라는 개념을 이용해 선택 과정에서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지 설명한다. 대타자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라캉 계열의 정신분석에서 즐겨 사용하는 용어다. 저자는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선택 행위를 해석하려 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저자는 우리의 선택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 좌우되며 그래서 고통을 유발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순전히 개인적 선택이라 생각하는 것이 대개는 타인의 인식과 영향 여하에 달려있음을 받아들이는 건 힘든 일일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고, 또 자신이 전적으로 자율적인 존재라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또는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선택을 내릴 수 있을 만큼 적절한 지식을 구비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괴로워한다.”(81쪽) 이런 상황에 내몰린 개인은 점점 더 선택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외면적으로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예컨대 의료서비스의 경우 요즈음 의사는 환자에게 가장 좋은 치료법을 권하지 않으며 대신 환자 스스로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결정하도록 한다. 이것은 선택의 자유가 확대됨으로써 더욱 행복해진다는 논리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사례에 해당한다. 그런데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이런 사례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택에 책임을 져줄 권위자를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본 저자의 해석이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선택의 자유를 내세우면서 동시에 책임을 져줄 더 높은 권위자를 갈구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불안할 때 우리는 보통 책임을 맡아 줄 누군가 혹은 무엇을 찾는다. 우리는 불안감이 진정되길 바라면서 종교 지도자나 자칭 의료 전문가들, 심지어 점성술사와의 상담을 선택할 수도 있다.”(90쪽)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일찍이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지적했던 “자유로부터의 도피”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 선택은 온전히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 문제다. 특히 엄청난 광고와 홍보의 홍수 속에서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의 선택을 지켜봐주는 존재, 이른바 “대타자”를 필요로 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인이 선택을 내리는 방식은 타인이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에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선택이 사회에서 의미하는 바에도 영향을 받는다. 라캉주의 정신분석가들은 언어, 제도, 문화를 명시하고자 ‘대타자’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사람들은 대타자에 대해 염려한다. 라캉주의자들은 대타자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그럼에도 라캉의 가장 중요한 관찰은, 비록 대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기능한다는 것이다.”(93쪽) 여기서 문제는 사람들이 마치 대타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두렵고 불안하게 생각한다는 명백한 증거다.

 

이처럼 우리가 대타자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선택 행위를 한다는 사실은 이로 인해 정신적으로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이런 현상은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의 경우 이런 스트레스가 신경증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남들처럼 선택할 수 없다는 현실이 너무 괴로운 나머지 자신의 정신 상태 자체를 병적으로 만들어서라도 이를 극복하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선택이란 행위는 정신적 외상을 초래하는데, 바로 그 이유는 우리를 지켜봐 주는 대타자가 없기 때문이다. 선택은 늘 맹신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옭아매는 기제들을 자족하려고 애쓸 때 우리가 하고 있는 행위란 오로지 대타자를 ‘선택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선택으로 인한 불안을 덜어 주는 상징적 구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94쪽)  실제로는 대타자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선택으로 인한 불안을 떨치기 위해 인위적으로 대타자를 만든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 소외(self-alienation)에 해당한다. 

 

 

★ 선택의 또 다른 문제들: 사랑, 자식 그리고 강제

저자는 선택의 자유가 왜곡되고 있는 현상의 또 다른 사례로 인터넷 시대 데이트 문화를 지적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석 만남 문화에서는 사실 모든 게 선택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삶의 모든 측면에서 너무도 많은 선택지가 있기에 연인을 선택하는 일은 또 하나의 부담을 가중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완전한 자유의 방해물이다.”(117쪽) 따라서 남녀의 만남은 단지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적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진다. 순수한 사랑이라는 낭만적 가치는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점점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지만 이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선택의 자유의 진정한 의미가 철저하게 왜곡되고 있는 셈이다.

 

즉석 만남과 같은 선택의 기회가 많아짐에 따라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선택 이데올로기, 즉 우리는 스스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고 늘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표면상으로는 시장논리에 따라 행동하므로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상 마음 깊은 곳에는 후회와 불안이 떠나지 않는다. 인간은 단지 도구적 합리성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연민과 공감이라는 감정을 중시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선택 이데올로기는 이런 측면을 전적으로 무시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과 충돌하는 것이 당연하다.

 

선택 이데올로기는 자식을 갖는 문제와도 직결된다. 요즈음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식을 낳아 기르고 교육시키는 비용이 너무 커 자식을 포기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은 도구적 합리성이 이런 문제에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미국에서는 가난한 여성이 아이를 갖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라는 생각이 점점 늘어나면서 그런 선택을 제한하는 방법을 주제로 한 공적 토론이 곳곳에서 열렸고 불임수술, 피임기구 및 피임약의 장기 사용, 그리고 특히 입양 제안이 등장했다. 반면 중산층 여성은 자기아이를 가질 수 있는 형편이 될 뿐만 아니라, 합리적 선택을 내릴 능력이 없다고 간주되는 여성들에게서 아이를 입양하거나 돈을 지불하고 대리모를 쓸 수 있는 존재로 간주되었다.”(149쪽)

 

이것은 선택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서 도구적 합리성이 지닌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자식의 문제조차 이런 선택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생명 경시 풍조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하버드대학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자식 문제를 합리적 선택의 대상, 나아가 시장원리가 적용될 수 있는 경우로 인식하는 사고방식이나 문화는 공동체의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다.

 

오늘날 문제가 되는 선택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측면은 대부분 선택이 사실상 “강제된 선택”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이것을 딜레마로 생각한다. 즉 강제된 선택이라도 본질적으로는 선택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른바 ‘강제된 선택’에 관한 이 모든 사례들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점은, 선택이 부재한다고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일한 제스처 속에서 선택은 제공되는 동시에 부인된다. 그러나 이 선택 자체가 강제된 선택일지라도 우리가 선택이라는 제스처를 취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은 주체가 외부나 내부의 힘들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이는 결국 주체성에는 늘 어떤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준다.”(181쪽) 그렇지만 저자가 여기서 말한 자유가 자유의 형식을 취하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는 강제적인 측면이 더 우세하다는 것이 문제다. 이 점을 왜 강조하지 않는지 의문이다.

 

어쨌든 저자의 이런 입장은 다음과 같은 표현에 잘 드러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강제된 선택은 사회를 결속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에게 강제된 선택의 사례가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을 통해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합의가 사회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183쪽) 사실 이 대목에서 저자가 진정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 강제된 선택조차도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는 증거이므로 무조건 부정적으로 해석할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 같다. 물론 이런 자유조차 없는 경우보다는 바람직하지만 선택 이데올로기를 비판해 온 저자의 입장에 비추어 다소 일관성이 결여된 것으로 보인다.

 

★ 선택 이데올로기와 사회 변화의 가능성 

사회는 개인들의 집합체이지만 단순한 합은 아니다. 이 말은 사회를 독자적인 실체로 인정할 때 사회 현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사회 현상도 하나의 “창발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도 이런 입장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저자는 1987년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마거릿 대처가 “사회 같은 것은 없다. 개인으로서의 남녀, 그리고 가족이 있을 뿐이다”라고 했던 말을 인용하면서 이런 관점이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있음을 우려한다. 필자 또한 사회구성원으로서 개개인의 선택은 여전히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단, 이들의 선택의 결과가 사회적 차원에서는 어떻게 드러날지 예측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는 의미에서 창발적인 면이 있다고 본다.

 

저자는 개인의 선택이 사회 전반에 갖는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미할 가치가 있다: “우리 스스로 내린 선택에 수치심을 느낄 때 전체 사회를 응시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다. 또한 사회의 부정의 앞에서는 시선을 떨구고, 적절한 선택을 내리지 못한 것에 수치를 느낀다. 우리는 사회질서의 결함을 보는 대신 자신의 결함을 보고, 우리가 누리거나 성취하는 것을 적을 때 자신이 열심히 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힘든 일이다.”(200쪽) 이것은 사회 또는 여론이 부과하는 중압감으로 인해 개인은 늘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죄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 원인이 오직 자신의 무능력과 게으름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사회제도의 모순이 가난의 원인인 경우도 흔하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할 때 저자는 사람들의 선택은 합리성과는 별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이 도구적 합리성이라면 이것은 특별히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예를 제시한다: “우리가 내리는 선택은 흔히 비합리적이다. 우리가 고가의 차를 구매할 때 그것은 남의 부러움을 사기 위해서이지, 그 모델이 필요하다고 합리적으로 결론을 내려서가 아닌 경우가 많다. 부러움 사기는 오늘날 마케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새로 유행하는 마케팅에서는 굴욕감을 이용하기도 한다.”(205쪽) 이와 같이 대부분의 선택에서는 개인의 심리적인 측면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것은 합리성과는 무관한 경우가 흔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미 행동경제학에서 다양한 사례를 통해 분명히 보여주었다. 인간은 종종 매우 비합리적으로 행동한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선택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인간에게 필수적인 능력이다. 개인이 선택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곧 변화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문제는, 우리가 선택을 오로지 합리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그래서 경제이론과 소비자의 관점에서 선택을 사고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견해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는 선택을 인간의 정신 및 심리에 초점을 맞추고 파악하는 더 폭 넓은 이해방식이 필요하다.”(210쪽) 즉 우리가 선택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한다면 사회 변화를 촉진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선택이라는 관념을 찬양하지만, 주로 소비와 관련된 선택이라는 단서가 붙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은 소비 선택만이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도록 함으로써 우리가 진짜 문제를 간과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물질적인 소비라는 욕망에 집착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우리가 여전히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점이 희망을 준다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합리적 선택이 통제력을 유지하고 삶을 예측 가능하게 하며 위험성을 완전히 없애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가르치지만, 합리적 선택이라고 하는 것들이 오히려 미래를 예측하는 바로 그 능력을 앗아 가는 게 현실이다……하지만 우리는 선택의 독재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거부할지 선택할 수 있다.”(213쪽) 우리에게는 선택 이데올로기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참조 사항>

www.ted.com 사이트를 검색하면 “선택”이라는 주제와 관련해 볼 만한 동영상을 다수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이들 가운데 가장 볼 만한 동영상 셋을 골라 여기 수록했다. 첫 번째는 이 책의 저자 레나 살레츨의 동영상이고, 두 번째는 배리 슈워츠(Barry Schwartz)의 “선택의 패러독스(paradox of choice)”에 관한 동영상이며, 세 번째는 루쓰 장(Ruth Chang)의 “어려운 선택(hard choice)"에 관한 동영상이다. 각 화면 하단의 옵션에서 영어 또는 한국어 자막을 선택할 수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이를 이용하면 된다. 이 동영상을 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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