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분야

김용호의 《창조와 창발: 한반도 르네상스를 위한 마음 혁명》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8-03-06 02:24
조회
577

20180305_172144_5a9d7ca8db66d.jpg
 

저자: 김 용 호 

출판사: 수류산방(2015)

 

목차

1장 세 가지 오해

2장 창조성, 체계이자 역량

3장 상상, 창조적 생각

4장 흐름, 창조적 마음

5장 창발성, 창조적 사회

6장 중도, 창조의 길

7장 의미, 창조성의 토대

 

 

창조성과 창발성에 관한 실제 사례와 심층 분석을 조화시킨 책

저자 김용호는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로서 필자가 소개했던 3의 눈의 저자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창조성(creativity) 및 창발성(emergent property)과 관련된 다양한 국내외의 사례들을 소개한 후 다양한 각도에서 이 두 개념의 의의와 특성을 소개하고 있다. 나아가 두 개념 간의 관계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 책은 모두 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의 4장에서는 창조성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었으며 나머지 3장에서는 창발성의 특성, 그리고 창조성이 창발성으로 이어지기 위한 조건들을 다루고 있다. 간단히 말해 창조성이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창발성은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자발적인 현상으로서 창조성을 바탕으로 할 때 의미 있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 창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을 지향할 수 있다.

 

창조성은 간단히 새로운 아이디어와 생각을 바탕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정신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창발성은 복잡계에서 부분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새로운 질서가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창조성과 창발성은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저자는 창조성이 창발성으로 실현되는 과정을 상세히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창조성이 창발성으로 드러날 수 있지만 창발성이 반드시 창조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창발 현상 가운데 창조성과는 무관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교통체증이나 증시에서 주가폭락 등은 창발 현상의 대표적인 예이지만 창조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저자가 이 점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의외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필자가 이 책을 소개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는 이 책의 내용이 좋아서만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창조적인 마음, 즉 창조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사이비 창조성이 판을 치는 바람에 진정한 창조성은 고사(枯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창조성은 개인의 역량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반드시 사회 전반에 새로운 질서를 탄생시킬 정도로 널리 확산되어야 한다는 점도 중요한 사항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과거의 단순한 시스템의 한계를 지양하고 여러 계층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 복잡한 시스템, 즉 복잡계의 특성을 갖춰야 한다.

 

필자도 나름 창조성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부족한지, 그리고 어떡하면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지 생각해왔다. 그러다가 저자의 책을 접하는 순간 바로 필자가 구상했던 내용과 부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부 세부적인 논의에서는 필자와 생각이 다르지만 전반적인 관점에서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 필자는 현재 창조성과 창발성에 관해 이보다 더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책을 발견하지 못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저자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몰입(flow)’ 이론의 대가인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의 창조성 개념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지 않나 하는 점이다. 그의 이론에 크게 의존하지 않더라도 창조성에 관한 논의는 가능하다고 본다. 특히 우리 사회의 실정에 맞는 창조성과 관련해 그의 이론을 적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창조성에 대한 진실과 오해

저자는 이 책 전반에서 창조성과 관련해 우리가 갖고 있는 잘못된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불식하기 위해 주변에서 볼 수 있었던 다양한 사례들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다. 이 점이 이 책의 특별한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창조성이란 아인슈타인이나 모차르트와 같은 특별한 소수의 천재에게서나 발견할 수 있는 특성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잠재해 있는 특성임을 강조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는 창조성은 천재의 전유물이 아니며 똑똑한 사람만이 창조성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창조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님을 설득력 있게 논하고 있다.

 

예컨대 저자는 타고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신동이 창조적인 인물로 변하는 것이 쉽지 않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재는 창조성과 무관하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천재의 재능은 창조성으로 바로 이어지지 않는다. 재능과 창조성은 그 역량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33) 그러면서 저자는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한때 세계에서 가장 IQ가 높은 사람으로 소개되었던 김웅용의 경우를 든다. 적절한 사례이기는 한데 김웅용의 사례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저자의 이런 결론은 너무 성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천재와 창조성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어떤 환경, 어떤 제도가 천재의 재능을 창조성의 발현으로 유도하는가에 있다. 아인슈타인이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평범한 물리 선생으로 일생을 마쳤을지 모른다는 유머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창조성과 관련해서는 재능보다는 호기심을 강조한다. 맞는 말이다. 아인슈타인도 순수한 호기심(pure curiosity)가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사실 이런 면에서 한국인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이런 특성이다. 물질적 이해관계에 지나치게 함몰되도록 만드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어린 시절에 이런 호기심을 계발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순수 과학보다는 응응 과학을 선호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자자는 또한 똑똑하다는 것만으로는 창조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적시하고 있다. 타당한 지적이다. 똑똑하다는 것은 대체로 기존의 지식을 충분히 갖고 있으면서 이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적절하게 사용하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표현이다. 이른바 지식에 바탕으로 두고 철저하게 도구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똑똑하다고 한다. 예컨대 의학이나 법률을 전공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명예와 부를 얻은 사람을 똑똑하다고 평가하는 것이 우리 실정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창조성은 지도력과 자기 주도성, 자율성 같은 힘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지식만으로는 이런 힘이 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결국 지식은 야욕, 권력, 지도력 등 더 큰 힘에 봉사하는 수단적이고 보조적인 힘일 뿐이다. 창조성은 지식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활용할 보다 근원적인 힘에서 나온다.”(43) 이와 같이 저자는 창조성의 복합적인 측면에 상당한 무게를 두고 있다.

 

나아가 저자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나 유능한 사람이 창조적인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사실 우리 주변에 여러 분야에서 이런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흔히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창조성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그 이유는 이들에게 현실 적합성이 결여되어 있거나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창조자는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전통이 전해 준 지식의 한계를 민감하게 인식하고, 대안적인 지식을 찾는다. 그 때문에 창조자는 전문가가 발휘하는 재능의 전통적인 한계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 첫걸음이 새로운 질서에 대한 상상이다. 상상력은 창조자와 전문가를 구분 짓는 최초의 문턱이다.”(66) 필자 또한 상상을 통해 새로운 패턴을 모색하는 것이 창조성의 핵심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맨땅에서 창조성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지식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상상하다보면 새로운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창조성의 핵심이다.

 

이상이 창조성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렇다면 창조성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 저자는 무엇보다도 창조성이 복합적인 것임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리 새로운 아이디어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창조로 실현되지 않는다.......창조성은 새로움과 유용성, 독창성과 현실 적합성이라는 두 가지 아주 다른 성격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복합성을 지닌다.”(81) 단순히 재능이 있다거나 똑똑하다거나 아이디어가 좋은 사람이 창조적이지 못한 이유는 이런 복합적인 측면을 간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특히 우리 사회와 같이 새로운 질서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경우에 더욱 중요하다. 특히 독창성과 현실 적합성이라는 상반된 특성의 조합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것은 창조의 양극적인 측면을 말한다. 이는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융의 표현을 빌리자면 창조의 대극성에 해당한다. 즉 전체를 구성하는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특성이 공존하고 있음을 이해해고 이들의 조화를 추구해야 창조성이 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어서 심리학자 칙센트미하이를 인용하면서 창조성에는 인물, 영역 및 현장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체계적으로 반영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성은 체계, 즉 시스템적 성격을 갖으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역량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칙센트미하이는 창조성이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는 체계의 상호 작용에서 생겨난다고 말했다........인물, 영역, 현장이라는 세 가지 요인 혹은 수준이 창조성의 복합적 성격을 더해 준다. 이 복합성은 단순한 요소들의 나열에 머물지 않고, 그 상호 작용을 통해 체계성을 갖는다. 그것이 체계로서의 창조성을 주장하는 칙센트미하이의 입장이다.”(97) 이런 취지에서 저자는 영화감독의 임권택과 통계역학의 창시자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의 사례를 통해 창조성에서 현장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즉 현장에서 형성되는 관계를 무시한 상태에서 오직 역량에만 의존해서는 창조성이 피어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창조성의 원천으로서 창조적 마음

그러면 이런 복합적 성격을 갖는 창조성은 무엇으로부터 발현하는가?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창조적 생각이다. 생각은 행동에 우선하기 때문에 창조적 생각이 창조성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창조적 생각은 단지 표층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더 깊이 들어간다. 창조성이 창조적 생각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은 분명한데 그 배후에는 창조적 상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상은 우리의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실험을 통해 입증되었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상은 서로 다른 것들을 기억하고, 연상을 통해 그 기억들을 결합시키는 과정에서 나온다. 즉 상상은 기억으로부터 나온다. 영국의 뇌신경학자 하샤비스는 뇌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가 손상된 환자에게 숲이나 해변을 상상해 보라고 주문했다. 환자들은 몇몇 단어는 언급했지만, 그 상황을 그리며 상상해내지는 못했다. 기억이 안 되니 상상도 안 된다. 결국 상상은 기억된 정보들의 연결과 조합에서 나온다는 것이다.”(142)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상상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억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분명한 것은 체면 유지나 감각적 쾌락, 실패에 대한 두려움, 정치적 속셈 같은 저급한 관심에 이끌리는 한, 거기서 기억된 정보로는 창조적 꽃다발을 만들기 어렵다는 점이다.......창조적 상상은 높은 질의 기억들로부터 나오고, 그 기억들은 높은 질의 관심에서 쌓이므로, 결국 상상의 창조성은 마음이 만드는 삶의 품격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겠다.”(144) 저자는 창조적인 상상의 진원지로서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포석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생각은 상상으로부터 나오는데 상상은 기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기억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 답은 분명하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는 지식과 정보로부터 기억을 불러온다. 그래서 저자는 상상은 기억의 문제고, 기억은 정보의 입력 문제다. 여기까지만 보면 상상은 의식 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정보의 입력과 보관이 관심과 호기심에 좌우된다는 점 때문에 상상의 뿌리는 더 깊은 데까지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저자는 창조적 상상의 원천으로서 무의식과 함께 집단무의식을 강조한다. 특히 집단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와 기억은 창조적 상상의 주요 원천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의식도 기억의 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 경우 상상은 내가 경험한 일이되 기억하지 못하는 정보, 즉 의식 창고가 아닌 무의식 창고에 저장된 기억들로부터 나온다고 설명하면 된다. 나아가면 내가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어도, 인류의 선조들과 우주가 경험한 일들이 저장된 심층 차원의 무의식적 기억들로부터 상상이 나온다.’ 상상은 다차원적 기억들로부터 나온다. 의식은 무의식과 직간접으로, 그리고 매 순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161) 개인적으로는 저자의 주장에 원칙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칼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 개념은 아직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이라 할 수 없으므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이것이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된 개념인 것처럼 단정적으로 말하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다.

 

저자가 창조성의 원천으로 상상, 그리고 상상의 기반으로서 기억, 나아가 기억의 저장고로서 의식 및 무의식을 언급하는 이유는 창조성을 궁극적으로 의미를 통해서 마음의 문제와 연결 짓고자 함이다. 저자는 특히 상상이 현실의 모태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실은 과거의 상상이 실현된 결과다. 상상은 현실화되어 전통이 되고 관습이 된다. 이렇게 현실로 굳어진 과거의 상상은 새로운 상상을 억누르는 구질서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모든 현실은 상상의 산물이다.”(172) 이와 같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또한 상상의 산물이므로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의식 및 무의식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궁극적으로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어떤 의식 내지 무의식이 작용하는가는 결국 마음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경우 조심스러운 부분은 마음과 의식 및 무의식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합의된 이론이 없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창조성은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아니라 마음, 그것도 공감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수긍이 간다. 그런데 저자는 마음이란 정의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마음이란 생각을 포함한다는 통상적인 견해와는 달리 마음은 무의식의 흐름마저 통제할 수 있는 가장 포괄적인 정신 작용으로 해석한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대한 저자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자가 왜 이런 입장을 취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마음이란 생각의 배후에 있는 정신적 에너지임을 강조한다. 이 에너지가 생각이라는 정보 처리 과정을 촉발하는 데 이때 의미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의미는 마음이라는 정신적 에너지의 작동을 촉발하는 촉매와 같다.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경우에는 마음이라는 에너지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성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저자의 표현대로 창조성은 복합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실현되기 어렵다. 그러면서 저자는 마음의 통제를 받는 두 가지 요소 호기심과 의지력을 강조한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경우에만 창조적 마음이 작동해 창조성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점을 칙센트미하이의 양면적 복합성개념을 이용해 설명하는 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음양의 조화 내지 대극의 조화와 유사한 개념으로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런 이유로 칙센트미하이의 이론에 지나치게 경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창조에서 창발로

창조성이 개인적 차원의 특성이라면 창발성은 사회적 차원의 특성이다. 과거에는 없던 새로운 질서나 성질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창조성과 창발성은 공통적이지만 그 영향이 미치는 범주라는 면에서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잠깐 왜 우리가 창조와 창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그것은 현재 우리의 삶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문화와 문명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와 불평등 악화 그리고 파괴적 기술 등으로 상징되는 현재 및 미래의 질서는 더 이상 그대로 유지되기 어렵다. 만약 현재의 질서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우리는 인류 문명의 파멸이라는 파국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잠재되어 있는 창조성을 일깨우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질서가 창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창발은 자발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창발과 관련된 것이다. 저자는 복잡계 이론의 대표적인 현상인 창발(emergence)에 대해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잘 정리해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저자가 창발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예컨대 저자는 혁신학교의 사례로 남한산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변화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누구의 강요도 없는 가운데 멀리 떨어진 다른 학교로 파급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른바 나비의 날개짓이라는 작은 요동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과연 이 사례에서와 같이 혁신학교라는 새로운 질서가 문자 그대로 창발해서 우리 사회의 교육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도 과거의 교육 체계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면 이것은 창발이라 할 수 없다.

 

물론 정보기술이라는 메타기술로 인해 사회가 정보화되어 실시간으로 다양한 소셜 미디어를 이용해 수많은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사회는 더 이상 과거의 단순계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복잡계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것은 사회 전반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의 각 부분에서도 그러하다. 예컨대 금융시장은 복잡계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사회 자체가 복잡계의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과거의 단순계에 적용되었던 질서, 나아가 문화는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새로운 질서, 새로운 문화와 문명으로 전환되어야만 모든 것이 지속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기득권층의 반발로 이런 변화의 속도는 매우 느리거나 변화 자체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바로 이런 교착 상태를 깨기 위해서 창조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성은 구질서의 이해관계로부터 독립적인 계층으로부터 발현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 점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다. 국가와 시장이라는 구질서를 대변하는 두 개의 세력과는 독립적인 제3의 세력이 등장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름 아니라 일상 생활권이 바로 그런 세력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로운 사회 질서를 창발하려면 다양한 요소들이 자발성을 갖고 상호 작용하는 복잡계를 이루어야 한다. 복잡성이 없다면 새 요동이 생기더라도 거대한 공명과 자기 조직화를 통해 새로운 사회 질서를 만들 충분한 에너지를 모으기 어렵다. 때문에 시민과 제3섹터는 보다 넓은 마당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시민이라는 근대적 주체성으로 제한된 개념 대신 생활인이라는 더 보편적인 개념을 사용하고자 한다........이 일상생활권이 새 질서가 창발할 터전 혹은 마당이다.”(357) 그런데 과연 이런 질서가 이미 확고하게 정착했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우리 사회의 경우 이미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적인 이념 체계에서는 사회 변화를 선도할 수 있는 새로운 의미가 나오기 어렵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이념 체계가 아직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복잡계로서 현 사회구조의 본질을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의미 있는 변화도 불가능하다. 바로 우리가 지금 그런 상황에 처해있다. 촛불 시위는 이런 무력감에 대한 일상 생활권의 의지의 표출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것이 일회성의 과시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질서 나아가 새로운 문화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하려면 그 철학적, 과학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창조성과 창발성을 연결시키려는 저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창조성은 정신과학의 영역이고 창발성은 자연과학의 영역인데 이 두 개념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이 별개의 분리된 분야가 아님을 의미한다. 즉 정신과 물질은 근원에서는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이원론은 시대착오적이며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창조성이 창발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기본 메시지라 할 수 있다.

 

필자 또한 이런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창조적 마음이다. 우리가 무의식에 봉건의식의 잔재를 감추고 있는 한, 지대를 추구하는 욕망이 잠복해 있는 한 창조적 마음은 결코 발현되지 못한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미투 운동은 창조성을 억압했던 구질서에 대한 본격적인 저항 운동이 태동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 사회에서 창조성을 억압해온 대표적인 세력으로는 정치인들과 재벌을 들 수 있다. 저자는 정치의 경우에는 다소 변화의 조짐이 있지만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는 그렇지 않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질서의 핵심은 재벌 중심의 위계적 경제구조다. 재벌 중심주의는 창조적 지식을 경제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시도에 기장 큰 장벽이 되어 왔다. 소수 재발에 집중된 경제 권력은 중소기업과 개인들의 창조성을 다양한 방법으로 억눌렀다........재벌이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창조성을 탈취한 결과, 국민들의 창조성은 억제 당했고, 경제는 단순계의 저급한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328) 당연한 지적이다.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로 인한 가장 큰 폐해는 창조적 생태계가 형성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제는 재벌도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의 큰 흐름에서 익사하지 않고 생존하려면 창조성으로 무장한 인재들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인식한 재벌은 어떤 형태로든 명맥을 유지할 것이다.

 

창조성은 창발성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명제에는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저자가 말하는 제3세력으로서 일상 생활권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떨치기 어렵다. 저자는 일상에 등장한 창발 세대를 강조한다. 특히 2002년 월드컵에 맞춰 등장했던 붉은 악마는 창발 세대를 대변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광우병 파동으로 인한 촛불 집회, 박근혜 탄핵으로 이어진 촛불 집회 등은 우리 사회에 창발 세대가 등장했다는 명백한 증거로 제시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창발 세대에게서 나타난 개성의 자발적 결합원리와 삶의 이익에 대한 민감성의 원리는 문화, 사회, 지역 정치로 퍼져나가며, 획일주의적인 단순계 사회를 창발성이 높은 복잡계 사회로 바꾸고 있다. 창발 세대의 등장은 일상생활과 사생활을 포함한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복잡성을 비약적으로 높여 왔다는 데 그 궁극적 의미가 있다.”(327)

 

저자의 이런 주장에는 근거가 있기에 전적으로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과연 이들에게 국가와 시장으로부터 독립적인 제3의 세력으로서 일상 생활권이라는 명칭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창발 세대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달라진 것은 이들이 미래의 불확실한 승리를 위해 현재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심각하게 묻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리고는 먼 미래의 불확실한 이익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아이와 가족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이익에 대한 민감성은 창발 세대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원리다.”(325)

 

이것은 창발 세대는 철저하게 도구적 합리성에 따라 행동하는 세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에게서 창조적 마음이 작동하고 새로운 질서가 창발하기를 가대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저자의 이 논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창발 세대는 오로지 도구적 합리성에 충실한 사람들로 구성되어있기에 창조적인 행위와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비록 이들로부터 어떤 창발적인 현상이 드러난다고 해도 이것이 창조적일 것으로 기대하기는 난망이다. 따라서 새로운 질서를 창발하여 새로운 문화를 태동시킬 세력으로 창발 세대를 주목하는 데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도구적 합리성에 함몰된 창발 세대가 의식 수준의 향상을 통해 창조적인 마음을 갖도록 유도한 이후에야 뭔가 새로운 질서의 발현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일상생활에서 창발한다는 저자의 생각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구체적인 매뉴얼이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매뉴얼이라는 말 자체는 창발의 핵심인 자발성에 배치된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어느 정도 이런 인위적인 노력이 불가피하다. 그래서 선각자들이 필요한 것이다.

 

생존을 위한 창조와 창발

저자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도 창조와 창발을 불가피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지극히 당연한 지적이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과거 삶의 양에 중점을 두었던 질서에서 삶의 질에 중점을 두는 질서로 이행해야 하며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세력으로서 일상생활권이라는 새로운 마당이 형성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상 모든 문명 질서는 새로운 감수성에 의해 발견된 의미로부터 창발했고 유지되었다. 국가와 시장의 쌍두마차로 움직인 산업 문명은 삶의 양이라는 의미를 중심으로 작동되었다. 이재 그 의미를 거부하는 세대가 광범위하게 나타나면서 삶의 질이라는 의미가 공명의 물결을 이루는 새로운 마당이 만들어져 간다. 그 마당이 일상 생활권이다.”(366) 삶의 양과 삶의 질이라는 대비는 참신하다. 이제는 양보다는 질이 중요한 사회로 이행하고 있고 그 배경에는 정보기술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이런 추세는 점점 더 강화될 것이므로 적절히 힘을 결집하면 국가와 시장의 폭력에 저항할 대항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다. , 인공지능 같은 파괴적 기술의 부작용이 이런 추세에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창조와 창발을 논하면서 정보기술이 미칠 파괴적 영향을 배제하는 것은 반쪽의 논의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기존의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제러미 리프킨이 한계비용 제로 사회에서, 그리고 협동조합 이론의 대가인 스테파노 자마니 교수가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새로운 질서의 대변하는 조직으로 협동조합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럽에서는 협동조합을 포함한 사회적 경제 규모가 GDP10%에 육박한다. 그러나 경제 규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경쟁 논리와 대비되는 협동의 원리, 그리고 공산주의의 집단주의와 대비되는 자율의 원리가 사회 전반에 퍼져나간다는 것이다. 협동과 자율이 함께 결합한다는 점에서 이 움직임은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품어 넘는 새 경제의 요동이 될 가능성이 있다.”(397) 이것은 협동조합이 경제적인 면에서는 새롭게 창발하는 질서를 대변한다는 뜻이지 모든 것을 망라하는 근본 질서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생존을 위한 근본 질서로 중도의 논리를 제시한다. 저자가 말하는 중도는 중용을 품어 넘은 개념으로서 양극단을 품어 넘어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흐름을 말한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중도의 실천적 응용이라 할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도는 구질서의 양극단 가운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질서의 밑동을 하나하나 빼내면서 더 나은 새 밑동으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 가는 과정이다. 중도는 가운데 길을 걸어 나가며 보다 높은 삶의 차원을 지속적으로 창조해 간다. 그런 점에서 중도의 창조성은 한 번에 끝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보다 수준 높은 질서를 끊임없이 만들어 간다. 이런 식으로 중도는 부단한 창조의 길이 된다.”(411) 그리고 이런 중도를 실천할 수 있는 세력이 바로 일상 생활권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성이 창발하기에 가장 적합한 여건이 갖춰진 곳이 바로 한반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극단적인 갈등이 응집되어 있는 곳이 바로 한반도이기 때문이다. 복잡계 이론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혼돈의 가장자리(edge of chaos)”에 있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가 창발하기 가장 적합한 여건이라는 것이다. 필자도 이에 공감한다. 그렇지만 창발이란 자기조직화의 원리에 의해 자발적으로 드러나는 질서를 의미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창발이 반드시 중도의 원리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저자가 새로운 질서의 원리로 중도를 제시한 데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새로운 문명을 주도하는 원리로서 중도가 자발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를 위한 전제조건은 무엇인가? 저자가 말하는 의미의 양의미의 질의 조화를 통해 가능한가? 아니면 동서양의 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적인 마음에서 비롯되는가? 그렇다면 이런 중도적인 마음이 어떻게 보편적인 현상이 될 수 있는가? 필자에게는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창조와 창발의 필연성과 이들 간의 관계에 대한 폭넓고 깊은 논의를 통해 우리에게 진지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우리 모두 저자의 말을 경청해 볼 필요가 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