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분야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Tyranny of Merit)>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20-12-18 01:05
조회
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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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역자: 함규진

출판사: 와이즈베리(2020)

 

차례

서론: 대학입시와 능력주의

1장 승자와 패자

2: “선량하니까 위대하다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3장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는가

4장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5장 성공의 윤리

6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

7장 일의 존엄성

결론: 능력, 그리고 공동선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근본 문제

경제 시스템으로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가장 두드러진 장점인 효율(efficiency)과 혁신(innovation)은 시장경제에서 치열한 경쟁이 유지되는 가운데 경제주체들이 최선을 다하는 경우에만 실현 가능하다. 이것은 곧 독과점으로 인해 경쟁이 제한되고 나아가 이로 인해 혁신이 불가능하다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쇠락의 길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장점을 유지 발전시키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정한 경쟁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며 각자 최선을 다하도록 적절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포용적 제도가 구축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이상적인 조건이 갖추어진 경우에도 자본주의의 내재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이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분배 문제에 관한 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을 제공하지 못하는 한계를 말한다. 그런데 오랫동안 주류 경제학자들 사이에 분배 문제를 다루는 것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롭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이 문제는 철저하게 외면당해왔다. 1995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시카고대학교 로버트 루카스(Robert Lucas, Jr., 1937~)교수는 이런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다. 그는 2004년 미니어폴리스 연방은행 연례보고서에 기고했던 The Industrial Revolution: Past and Future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건전한 경제학에 해로운 것 중 가장 유혹적이면서 가장 독성이 강한 것은 분배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지난 200여 년에 걸친 산업혁명 과정에서 발생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복지 향상은 부자로부터 가난한 사람에게 소득을 직접 재분배한 것에 조금도 기인하지 않았다. 현재 생산된 것을 분배해주는 다른 방법을 찾음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잠재력은 명백한 무제한적인 생산 증가의 잠재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통해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 중요할 뿐, 분배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다른 글에서 시장이 다 알아서 해결하므로 분배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주류 경제학자들은 대체로 루카스 교수의 견해를 지지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

 

그런데 2008년 금융위기로 자본주의의 취약성이 백일하에 드러난 이후 분배문제는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했다. 그 배경으로는 부와 소득분배의 불평등이 악화된 것이 글로벌 금융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에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점점 악화되는 불평등을 방치하는 경우 더 큰 경제적 재앙이 발생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IMF 수석이코노미스트와 시카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인도 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라구람 라잔(Raghuram Rajan)은 저서 폴트라인에서 불평등 문제를 조급하게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서브프라임 사태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금융위기가 촉발되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불평등이 악화된다는 것은 곧 대중소비가 위축될 것임을 의미하며 이는 결국 만성적인 경기침체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데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이 시대적 상황에서 2014년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역작 21세기 자본을 시발점으로 조셉 스티글리츠 교수의 불평등의 대가, 앤서니 앳킨슨 교수의 불평등을 넘어등 관련 저서들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불평등 문제가 글로벌 이슈로 부상한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글로벌 공조체제를 출범시킨다는 관점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능력주의의 빛과 그림자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분배를 설명하는 유일한 원리는 한계생산성이론(marginal productivity theory)이다. 이것은 경제주체는 각자 생산과정에서 기여한 만큼 소득을 얻는다는 원리로서 일견 상당히 공정한 분배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론은 완전경쟁(perfect competition)과 완전정보(perfect information)의 가정이 성립하는 경우에만 타당하다는 데 있다. 현실은 불완전경쟁과 불완전정보가 지배하고 있으며 이는 결코 바뀌지 않을 속성임을 감안한다면 한계생산성이론은 현실에 적용하기 어려운 유토피아적인 분배이론일 뿐이다. 나아가 이 이론의 추가적인 약점은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다양한 생산요소들의 한계생산성은 측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계생산성이론이 타당하더라도 현실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경우 이 이론의 유일한 용도는 현재 당신이 얻고 있는 소득은 당신의 한계생산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이요, 원인과 결과의 역전이라 할 수 있다. 한계생산성이 측정된 후 이에 따라 소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결정된 소득이 바로 한계생산성을 반영한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현실 경제에 한계생산성이론의 원리를 적용한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로서 능력주의(meritocracy) 내지 실력주의를 들 수 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재산이나 사회적 신분 대신 재능, 노력 및 성과에 근거해서 개인에게 보상해주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현재 미국을 비롯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 지배적인 분배 원칙이라 할 수 있는데 과거 서구의 귀족제도나 조선의 양반제도에 비해 더 효율적이고 공정한 시스템으로 인식되어왔다. 그런데 최근 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이 저자가 이 책 공정이라는 착각(Tyranny of Merit)에서 제기하고 있는 비판적 성찰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능력주의라는 용어는 공식적으로는 1958년 영국의 정치인이자 사회학자인 마이클 영(Michael D. Young)이 저서 능력주의의 부상(The Rise of Meritocracy)에서 처음 사용했다. 사실 영은 능력주의의 장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2033년이라는 미래 시점에서 능력주의로 인해 예상되는 디스토피아를 풍자하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영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능력주의는 공정한 분배의 원칙을 표방한 것으로 인식된 가운데 확고한 가치 분배 시스템으로 정착했다. 물론 과거에도 능력주의가 적용된 사례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과거 중국과 조선에서 실시했던 과거제도는 능력주의 원리를 적용한 대표적인 제도에 해당된다. 신분에 따라 지위와 보상이 결정되었던 서구의 귀족제도에 비해 진일보한 제도로 평가받았던 것을 사실이지만 이 제도도 많은 부작용을 낳았으며 나중에는 원래의 취지가 퇴색되었다. 그럼에도 현대에 와서 이런 제도는 각종 국가고시나 자격증, 대학입학 등 다양한 선별 기제(screening mechanism)로 발전하면서 능력주의가 시회 전반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부상했다.

 

미국 버클리대 골드만스쿨의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 교수는 저서 자본주의를 구하라에서 능력주의의 위력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급여가 자기 가치를 결정한다는 개념이 대중의 인식에 매우 깊이 박혀 있어서 흔히들 소득이 매우 적은 것은 전부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머리가 좋지 않거나 성격에 결함이 있는 등 개인의 실패라고 생각해 수치를 느낀다. 엄청난 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은 같은 맥락에서 자신이 특별히 현명하고 매력적이고 우월하다고 믿는다.” 그러면서 라이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능력주의의 부작용을 진단했다. 실력주의 사회는 사람들이 대체로 자기 가치에 비례해 보수를 받는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노동의 대가를 매우 적게 받는 사람도 매우 많이 받는 사람도 자신의 가치가 그만큼이라고 추정한다. 미국의 실력주의 관점으로는 개인의 소득과 미덕이 일치하고, 재산과 도덕적 가치가 일치한다.” 이 책에서 샌델도 같은 맥락에서 능력과 시장적 가치를 동일시하는 풍토는 도덕적 가치를 외면하게 함으로써 공동선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사회통합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고 강조한다. 이를테면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으로 더욱 분열된 미국 사회가 단적인 예에 해당된다. 이것은 2020년 미국 대선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미국의 분열은 쉽게 치유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 배후에는 과도한 능력주의와 그동안 이를 부추긴 공화당, 민주당 정부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샌델은 특히 영국의 브렉시트와 2016년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사건을 능력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반발 내지 역습으로 평가한다. 당시 합리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이런 사건이 일어난 이유는 능력주의에 의해 굴욕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에 반발해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는 데 찬성했고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는 것이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세계화와 정보화의 메가트렌드로 인해 일자리를 잃거나 소득이 줄어든 사람들이 능력주의에 입각해 출세한 엘리트들에게 반격을 가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능력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오늘날 양극화된 정치 환경을 넘어 길을 찾으려면 능력주의의 장단점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엘리트층에 대한 분노가 민주주의를 위험 수준까지 밀어내게 될 때, 능력에 대한 의문은 특별히 중대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갈등 지향적 정치에 필요한 해답이, 과연 능력의 원칙을 더 믿고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계층을 나누고 경쟁시키는 일을 넘어 공동선을 찾는 것인가에 대해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38)

 

능력주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흐르게 된다. 오로지 자신이 이룩한 업적과 성과를 바탕으로 많은 소득과 높은 지위를 획득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기 보다는 개인주의적 성향을 더욱 강화시키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저자가 정의란 무엇인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비롯해 여러 책과 강연에서 강조해 온 공동선의 함양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필자는 능력주의의 배경인 경쟁과 공동선을 양자택일적인 문제로 간주하는 저자의 입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공동선 경제 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크리스티안 펠버(Christian Felber)모든 것이 바뀐다(Change Everything)에서 강조했듯이 경쟁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공동선과 양립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능력주의가 반드시 공동선과 모순인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필자는 저자와는 다소 견해를 달리한다. 능력주의의 장점을 살리면서 공동선을 함양하는 중도적인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곧 개인주의와 공동선의 조화를 모색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능력주의가 초래한 가장 큰 사회적 문제는 승자와 패자를 확연하게 구분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승자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과 오만을 주체하지 못하는 반면, 패자는 수치심과 굴욕감을 떨칠 수 없는 아주 비열한 방식으로 말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능력주의 이념에 찬성하며 그것을 자신들의 정치 신념으로 삼는 사람들은 이러한 도덕적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그들은 또 더 큰 정치적 의미를 갖는 문제도 외면한다. 승자들 가운데, 그리고 패자들 가운데 능력주의 윤리가 부추기는 도덕적으로 좋지 못한 태도의 문제다.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들을 오만(hubris)으로, 패자들을 굴욕과 분노로 몰아간다.”(52) 이와 같이 오만과 굴욕이라는 반대되는 감정으로 대변되는 현재의 능력주의는 물질적·정신적 사회 양극화의 원천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에 덧붙여 유유상종의 원칙에 의해 비슷한 계층의 남녀가 결혼하는 경향이 대세가 되면서 새로운 세습제도로 정착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근 수십 년 동안의 폭발적인 불평등 증가는 사회적 상승을 가속화시킨 게 아니라, 정반대로 상류층이 그 지위를 대물림해줄 힘만 키워주고 말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명문대학들은 한 때 특권층 자녀들의 입학에 걸림돌이 되었던 인종, 종교, , 민족 등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SAT는 계층과 가문이 아니라 학업 성적으로 학생을 뽑겠다는 약속과 함께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능력주의는 세습귀족제로 굳어져가고 있다.”(50) 이것은 미국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목격할 수 있는 현상으로서 계층 간 이동성이 현저하게 줄어든 나라들은 모두 이런 위험을 안고 있다. 과거 귀족제도에서는 모든 것이 출생의 운에 의해 결정되므로 지배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보통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미안한 감정을 가졌으며, 그렇지 못한 평민들은 자신이 부족한 탓에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자책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을 뿐 자신이 무능하다고 자책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능력주의가 모든 분배를 결정하게 되면서부터 상황은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 관점이다. 승자는 자신의 업적을 오직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자랑하면서 이를 공공이 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예를 들면 결혼 및 자녀의 명문대학 입학 등)을 추구한 반면, 패자들은 낮은 소득을 감수할 뿐만 아니라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굴욕감마저 감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사회의 양극화는 더욱 심해졌으며 이는 극단적인 반발로 표출되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하지만 포퓰리즘적 저항을 편협한 시각이라고 무시하거나, 이를 다만 경제적 불만의 표출일 뿐이라고 받아들이는 일은 잘못이다. 영국에서 브렉시트가 승리한 것처럼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수십 년 동안 불평등이 커지고 상류층에게는 혜택을,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력감을 안겨준 세계화가 진행된 데 대한 분노의 판결이었다. 이는 또한 경제와 문화 조류에서 뒤떨어져 버린 사람들의 항의를 나 몰라라 한 테크노크라트 정치에의 반발이기도 했다.”(42) 여기서 세계화의 주동 세력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한 파워엘리트들과 월가의 금융자본이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미국과 영국의 파워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중산층 이하 저소득층을 착취했다는 역설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월가를 점령하라는 운동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는 이런 정서를 교묘하게 이용한 전형적인 포퓰리스트일 뿐이다.

 

샌델은 이 책에서 능력주의의 장점보다는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이론적 배경에 대한 탁월한 요약과 함께 관련된 사례들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논지를 전개하는 저자 특유의 재능은 여전히 감탄할 만하며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특히 시장적 가치와 능력을 동일시하는 현재의 시장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또한 세계화와 정보기술혁신의 메가트렌드에서 소외된 계층의 불만과 좌절, 이를 무시하고 기술관료적인 행태를 보이면서 너도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You can make it if you try)”라는 공허한 말만 되풀이했던 정치인들에게 큰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이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다음에 잘 드러나 있다. 시장친화적이고 기술관료적인 세계화 개념은 좌우 주요 정당들에게 고스란히 수용되었다. 특히 중도 좌파 정당이 시장 중심적 사고와 시장적 가치를 수용한 일은 무엇보다 의미심장했다. 이는 세계화 프로젝트 진행에, 그리고 뒤따른 포퓰리즘의 반격에 큰 영향을 미쳤다.”(46)

 

그러면서 저자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기술관료적 관점에서 능력주의를 신봉했던 대표적인 정치인이었으며, 결과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부상하게 된 원인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대처 수상이 정권을 잡으면서 세계적인 조류를 형성했던 신자유주의는 세계화와 자유화 및 민영화를 추진함으로써 도덕적 가치를 몰아내고 시장적 가치가 득세하게 만듦으로써 능력주의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부상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보수정권과 진보정권을 막론하고 모든 정부는 세계화와 정보화라는 메가트렌드의 진행 과정에서 오직 기술관료적 관점에서 문제를 풀어나갔다는 데 있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이 서로에게 무슨 책임이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공동선과 관련된 사회적 담론은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이와 같이 시장적 가치가 사회 전반을 압도하게 된 데는 정치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 시각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가장 비판을 받을 사람은 보수정치인이었던 레이건 대통령이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아니라 중도좌파의 정치노선을 표방했던 민주당의 클린턴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특히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매우 신랄한데 상당히 근거가 있다. 이를테면 1999년 클린턴 정부 시절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를 완전히 분리했던 글래스-스티걸 법이 완전히 폐기되었다. 이후 족쇄에서 풀려난 금융자본은 실물자본을 압도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으며 급기야 2008년 금융위기를 초래했다. 또한 오바마 대통령이 2008년 금융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구제금융을 통해 금융위기를 초래한 은행들을 구제해주는 정책을 실시한 것은 공동선을 배제한 전형적인 기술관료적 행태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샌델은 또한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에 나타난 표현을 바탕으로 그가 얼마나 능력주의를 신봉했는지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바마의 사회적 상승 담론은 레이건과 클린턴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능력주의를 지향했다. 비차별을 강조하고 열심히 노력할 것을 주장하고, ‘개인이 각자 책임을 지라고 시민들에게 훈계했다.”(118) 그러면서 저자는 노래 가사에서 따온 너도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라는 표현은 레이건 대통령이 처음 사용한 이래 후임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 되었는데 이를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었다고 지적한다. 이는 전통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을 실시했던 민주당의 전통에 비춰볼 때 다분히 역설적이다. 저자는 오바마 대통령을 진보적이라기보다는 시장적 가치에 더 경도되었던 기술관료적 정치가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샌델은 오바마 대통령의 말이 오히려 반발을 불러왔다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불평등이 위험 수위까지 올라왔을 때 이러한 담론(사회적 상승 담론)이 가장 구역질나게 들렸음은 우연이 아니다. 가장 부유한 1퍼센트가 전체 인구의 50퍼센트보다 더 많이 벌고 있으며 중위소득이 40년 동안 줄곧 제자리걸음만 한 상황에서, ‘노력하고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성공한다는 말이 빈말로 들리지 않을 리 있겠는가.”(126) 이것이 바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에 원인을 제공한 근원이라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단지 경제적 가치의 분배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 가치의 분배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님은 자명하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기본 시스템으로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대부분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에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안은 무엇인가?계몽된 능력주의

능력주의가 잘못된 방향으로 발현되면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우월감이 만연하게 됨으로써 연대와 협력을 강조하는 공동선은 퇴조하게 되고 사회 양극화가 더욱 악화될 것은 자명하다. 현재 우리는 이와 같은 능력주의의 부작용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이런 능력주의를 야만적 능력주의(barbarous meritocracy)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렇다고 능력주의를 폐기처분하고 다시 과거와 같은 세습 신분사회로 회귀한다거나 결과의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능력주의의 장점을 살리는 가운데 이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불평등과 양극화에 대한 처방을 모색하는 차원을 넘어 향후 도래할 인공지능 시대를 고려할 때 더욱 절실한 과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자동화로 인한 일자리 소멸에 대비해 보편적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은 중요한 한 가지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일의 존엄성,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이다. 단지 소비하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이자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대접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미국 실리콘벨리의 핵심 인물들이 앞장서서 기본소득을 거론하는 배경에는 현재의 야만적 능력주의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에 앞서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대학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대학은 인재를 선발하는 기능, 즉 선별기제(screening mechanism)으로 기능하도록 설계되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대학은 능력보다는 자신을 알리는 신호(signal)로 활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명문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이 주어진 업무에 더 뛰어나다는 보장은 없다. 단지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하게 만들 뿐이다. 그렇지만 이런 대학 진학을 둘러싸고 엄청난 경쟁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로부터 능력주의 경쟁이 시작된다는 점에서 대학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대학을 폐기할 수는 없다. 저자는 이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능력주의의 폭정(이 책의 원 제목)을 극복하다는 게, 능력이 직업과 사회적 역할의 배분에 아무 역할을 못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대신 그것은 성공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스스로 잘나서 그런 것이라는 능력주의적 오만에 의문을 제기함을 뜻한다.”(247) 저자는 대학에 진학한 젊은이들이 오직 자신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 성공이 아니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유전적 요인, 부모의 재산과 관심, 사회제도 등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서 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수용함으로써 좀 더 겸손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대체로 동의하지만 이는 다분히 나이브한 발상이다. 능력주의적 오만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해서 이미 기득권을 확보한 엘리트들이 미동이나 할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저자 자신 하버드 대학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대부분 자신의 노력과 분투에 힘입어 하버드에 입학했다는 점을 강변한다는 것은 저자의 생각이 나이브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능력주의의 원천으로서 대학의 역기능을 완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지원자들 가운데 일차로 몇 배수의 유자격자들을 선발한 후 이들을 대상으로 최종적으로 제비뽑기로 선발하자고 제안한다. 얼핏 보기에는 뜬금없는 제안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하버드대에서 지원자들 중 신입생 정원의 5배수(지원자 수를 고려해 조정 가능하다)를 일정 기준에 의해 일차로 선발한 후 다음에는 복권 추첨하듯이 무작위로 최종 신입생을 선발하는 것이다. 5배 수 내에 든 지원자들의 실력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굳이 최종 시험을 통해 선별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과정을 거쳐 하버드에 진학한 학생들은 자신의 능력만으로 입학했다는 자부심과 오만보다는 운이 좋아서 입학했다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며, 이는 훗날 능력주의의 폭정과 오만을 완화시키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서울대를 비롯해 이른바 명문대에서 이런 방안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제비뽑기라는 용어 대신 좀 더 순치된 표현을 찾아야 할 것이고, 우리 실정에 맞춰 지역적 안배와 소득수준 안배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을 고려해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와 같은 대학입학제도로는 야만적 능력주의의 확대재생산과 세습사회로의 이행을 저지할 방법이 없다면 이런 파격적인 발상도 검토해야 한다.

 

여기서 능력주의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다. 현재와 같이 돈의 위력이 강력한 상황에서는 돈이 곧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내심으로는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돈으로 측정되는 시장적 가치가 바로 개인의 능력을 측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아니다. 헤지펀드 매니저가 막대한 소득을 올린다고 해서 능력이 있고, 코로나19 사태의 최전선에서 분투하는 간호사가 적은 소득을 번다고 해서 능력이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모두 시장적 가치의 노예임을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능력인가는 그 사회의 의식 수준 내지 문화 수준에 의해 결정되므로 가변적이다. 예를 들면 유대인 사회에서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는 랍비(rabbi)는 모두에게 존경받는다. 이와 같이 진정한 선생으로 역할을 하는 사람의 능력을 존중해주는 사회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능력의 정의가 시대적, 사회적 산물임을 의미한다. 오늘날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리는 프로스포츠의 슈퍼스타나 인기 연예인들은 지금과 같은 시대에 태어났기에 그런 대접을 받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이들이 100년 전에 태어났다면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이 사실은 능력주의에 대한 다른 비판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데 과연 자신이 기여한 정도가 얼마나 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우연한 행운, 부모의 지원, 적절한 사회제도 등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보다 더 노력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성취한 모든 것은 온전히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이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회구성원들이 그것을 돈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만큼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극단적인 자기도취자일 뿐이다. 샌델이 우려하는 것은 필자가 야만적 능력주의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런 능력주의는 사회분열을 조장하고 양극화를 심화시키며, 개인적으로는 승자는 오만의 덫에서, 패자는 굴욕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그 결과 수많은 패자들은 일의 존엄성을 상실하게 되는데 이는 경제적 궁핍보다 인간적으로 더 큰 고통을 안겨준다. 그리고 이것은 승자에게도 적용된다. 경제적 풍요는 누리게 되었지만 시장적 가치에 편향된 상황에서 자신의 능력 이상의 보상에 대한 불안감이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현재보다 열악한 상황이 도래할 것을 지나치게 염려하는 나머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월스트리트의 많은 금융인들이 마약을 찾고 술과 섹스에 탐닉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샌델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일의 존엄성을 회복할 것을 권한다. 맞는 말이다. 이와 관련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16년 이후 시사평론가와 학자들은 포퓰리즘의 불만에 대해 논쟁해왔다. 그것은 일자리 감소와 임금 정체 때문인가 아니면 문화적 변동 때문인가. 그러나 그것들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일은 경제인 동시에 문화인 것이다. 그것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방법이자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는 원천이다.”(309) 일의 존엄성은 곧 인간의 존엄성으로 이어진다. 저자의 지적대로 경제적 이유만은 아니다. 인간적인 굴욕감을 느끼게 만든 것이 트럼프와 같은 선동가가 득세하게 된 이유일 것이다. 바이마르 정부가 붕괴된 혼란기에 아돌프 히틀러가 득세한 것과 같은 이유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면 금융자본의 득세에 따른 가치체계의 왜곡이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이것은 필자도 오랫동안 견지해온 관점인데 샌델도 거의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다. 사실 샌델은 이미 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이런 주장을 했다. 월스트리트로 상징되는 금융자본은 시장자유화의 물결을 타고 실물경제를 지배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장적 가치체계를 금융에 유리한 방향으로 철저하게 왜곡시켰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금융업계는 2008년 금융위기 때 극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이 때 불거진 논쟁은 주로 세금으로 구제금융을 제공해야 되느냐어떻게 월스트리트를 개혁해 앞으로의 위기 가능성을 줄이느냐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그보다 훨씬 덜 주목받은 문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금융이 경제를 재구성했으며 교묘하게 능력과 성공의 의미 또한 뜯어 고쳤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변화는 일의 존엄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그러나 경제의 금융화야말로 아마도 일의 존엄 감소에 더 큰 영향을 미쳤으며, 노동자들의 사기 저하에도 역시 더 큰 역할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현대 경제에서 시장의 보상과 실제 공동선에의 기여도 사이에 아마도 가장 큰 격차 사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335)

 

오로지 시장적 가치에 바탕을 둔 능력주의는 야만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능력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능력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결정되기 보다는 행운이나 우연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능력의 의미가 살아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연대와 협력의 가치를 존중하고 공동선을 함양하는 방향으로 능력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샌델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사회 속에서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의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이와 같이 능력주의의 혜택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겸손을 배울 수 있다면, 그리고 나아가 이들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강력한 유인을 제공하는 사회규범과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면, 필자는 이런 상황에서의 능력주의를 계몽된 능력주의(enlightened meritocracy)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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