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분야

로버트 라이시의 《The Common Good》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8-11-10 02:17
조회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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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 

출판사: Alfred A. Knopf(2018)

 

Contents

Introduction

Part I What is the Common Good?

1. Shkreli

2. What Good do we have in Common?

3. The Origin of the Common Good

Part II What happened to the Common Good?

4. Exploitation

5. Three Structural Breakdowns

6. The Decline of the Good in Common

Part III Can the Common Good be Restored?

7. Leadership as Trusteeship

8. Honor and Shame

9. Resurrecting Truth

10. Civic Education for All

 

 

저자 소개 및 핵심 메시지

이 책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는데 조만간 번역되어 널리 읽혔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저자 로버트 라이시 교수는 일찍이 1960년대 초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 케네디의 친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 사무실에서 처음 공적인 업무를 시작해 1990년대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장관(1993~1997)을 역임할 때까지 다양한 공직을 수행했다. 2008년 시사주간지 타임은 라이스를 20세기 10명의 최고 각료 중 한 사람으로 선정했으니 행정 능력도 탁월했던 것 같다. 그리고 공직 생활 중간에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에서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버클리대 골드만 스쿨의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라이시는 모두 18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이 가운데 상당수는 베스트셀러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또한 라이시는 2016년 미국 대선에서는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 후보를 지지하는 등 대표적인 진보성향의 지식인이다. 필자가 리뷰했던 다른 저서 자본주의를 구하라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현재 미국이 처한 상황을 매우 위태롭게 진단하면서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요구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경제학자 조셉 스티글리츠와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실제로 유튜브에서 두 사람이 대담한 동영상(The Great Divide with Joseph Stiglitz and Robert Reich, https://youtu.be/e3aJxy9tA-w)을 보면 미국이 처한 상황에 대한 두 학자의 처방이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국에서 공동선에 대한 담론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미국 사회를 지탱하는 보편적인 선()으로서 역할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진단한다. 한 마디로 미국의 정체성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으며 급기야 민주주의 자체가 위기에 처해있다고 주장한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 또한 이런 미국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트럼프 대통령 자신은 막말과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통해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심하게 훼손시킴으로써 미국 사회에서 공동선을 파괴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필자도 그의 지적에 공감한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차례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먼저 공동선의 의의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공동선은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기에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른 내용을 가질 수밖에 없는 개념이다. 저자 또한 이 점을 충분히 알고 있기에 공동선을 한 마디로 정의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포괄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저자는 공동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공동선은 동일한 사회에서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는 시민으로서 우리가 서로에게 신세지고 있는 공유된 가치들, 즉 우리가 자발적으로 준수하는 규범들과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이상들로 구성되어 있다(The common good consists of our shared values about what we owe one another as citizens who are bounded together in the same society-the norms we voluntarily abide by, and the ideals we seek to achieve. p.18).”

 

이와 같이 공동선은 한 마디로 무엇이라 단정하기 어려운 일단의 가치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진리, 신뢰, 정의, 자비 등을 유지 발전시키는 것이 공동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공동선을 저해하는 요인들을 파악하는 것이 공동선을 이해하는 더 나은 방법이 될 수 있다. 필자는 이런 것들을 통틀어 공동악(common bad)이라고 부르고 싶다. 구글 검색을 해도 공동악이라는 용어를 찾기 어려운 것으로 보아 필자가 명명권을 주장해도 무방할 것 같다. 예컨대 도덕적 해이나 지대추구행위 등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공동악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사회통합의 차원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공동악을 명시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공동선을 이해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저자는 이어서 미국 사회에서 공동선의 위상이 추락하게 된 과정을 역사적 맥락에서 검토한다. 미국 건국 초에는 이른바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은 공동선의 정신을 헌법에 반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인들 대부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함께 지켜야할 가치들을 공유했으며, 중간 중간 굴절이 있기는 했어도, 1960년대 저자의 어린 시절만 해도 이런 정신이 남아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존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문 중 유명한 당신의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라라는 대목에 미국 사회를 지탱해 온 공동선의 정신이 온전하게 스며들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반전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공동선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해지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1970년대 이후 미국의 역사는 공동선 소멸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에만 해당되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미국의 공동선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 저자의 논의는 대부분 우리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미국 사회에서 사라져가는 공동선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비교적 소상히 언급하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다분히 추상적인 논의의 차원을 벗어나지는 않고 있지만 이는 공동선의 본질상 어쩔 수 없는 면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공동선의 회복을 위해 구체적으로 네 가지 덕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차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동선의 회복을 위해서는 신탁관리정신(trusteeship)으로서 리더십의 회복, 명예와 수치심의 적절한 활용, 진실의 부활, 그리고 모두를 위한 시민 교육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필자는 이 점에서는 저자의 견해에 대체로 동의한다. 필자는 공동선은 문자 그대로 시민들이 자발적인 협의와 노력을 통해서 성취되어야 하는 덕목이지, 정부나 특정 세력이 시민들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는 과정을 통해 확립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common”도 공(), “public”도 공()으로 번역되지만 두 단어의 의미는 확연히 다르다. 전자는 시민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자발적인 협약의 의미를 갖는 반면, 후자는 정부 차원에서 방향을 선도한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민으로서 공동선의 필요성에 대한 자각이다.

 

마틴 슈크렐리(Martin Shkreli)와 존 스텀프(John Stumpf): 공동선의 적()

저자는 미국에서 공동선을 파괴하는 데 기여했던 전형적인 인물로 두 명의 사례를 언급한다. 마틴 슈크렐리와 존 스텀프가 이들이다. 우리에게는 아주 생소한 이 두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로서 주변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경우라는 것이다. 슈크렐리는 한때 헤지펀드를 운영하면서 사기죄로 기소되기도 한 전력이 있는 인물로서 금융거래를 통해 번 돈으로 제약회사를 인수한 후 환자들의 형편을 무시하고 특수한 질병에 효과가 있는 다라프림(Daraprim)이라는 약의 가격을 13.5달러에서 750달러로 5,000퍼센트 인상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은 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면서 오만하게 행동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다름 범죄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판사를 비롯한 관련자 모두를 무차별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저자가 슈크렐리의 사례를 인용한 것은 공동선을 부정하는 가운데 매우 거칠고 오만한 방법으로 오직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경우에 해당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저자가 존 스텀프의 사례를 다룬 이유는 표면상으로는 교양 있는 사람으로 행세하지만 실제로는 서슴지 않고 공동선을 파괴하는 전형적인 경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즉 슈크렐리 같은 타입은 공공연하게 거친 방법으로 공동선을 파괴하는 반면 스텀프 같은 타입은 교묘한 방법으로 공동선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필자가 보기에도 스텀프 같은 타입이 사회적으로는 더 위험하다. 그만큼 주변 사람들을 방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른바 친구를 가장한 적이라 할 수 있다. 스텀프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규모가 커진 웰스 파고(Wells Fargo)은행의 CEO로서 은행 직원들이 고객들의 명의를 도용해 위조 통장을 만들어 이들에게 막대한 금전적 손해를 키친 반면 은행은 적지 않은 이익을 취득한 행위를 방조한 혐의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는 것처럼 변명하는 등 무책임한 행동으로 일관했다.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유형이다. 겉으로는 교양 있고 책임 있게 행동하는 척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모든 책임을 부정하고 오직 개인의 안위와 이익에만 몰두하는 유형이다. 이는 그야말로 교묘한 방법으로 공동선을 파괴하는 매우 악질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우리 주변에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자신은 해당되지 않는지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공동선 파괴의 연대기

저자는 시대별로 특기할 만한 사건들을 통해서 미국 사회에서 공동선이 파괴되어 온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미국 사회에서는 한 때 인종, 피부색, 연령, 성별을 불문하고 공동선이 널리 수용되었다고 말한다. 예컨대 대공황 이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네 가지 자유-언론의 자유, 신앙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했을 때 이는 공동선을 유지하려는 노력이었는데 최근에는 졸업식 연사나 정치인을 막론하고 어떤 경우에도 공동선을 거론하지 않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런 풍토를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로 연방준비제도 이사장을 역임한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을 비롯해 자유주의 신봉자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작가 아인 랜드(Ayan Rand)와 그녀의 철학을 계승해 가다듬은 하버드대의 철학자 로버트 노직(Robert Noszick)을 언급한다.

 

이들은 공동선 개념을 체계적으로 비판했던 대표적인 인물들로서 미국 사회에서 자유지상주의와 개인주의 사상이 득세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아인 랜드는 공동선이란 정의되지 않았으며 정의될 수도 없는 개념이라고 역설했으며, 노직은 개인의 권리만이 사회를 위해 유일하게 정당화될 수 있는 기반이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과 공동선을 강조하는 것이 상호 모순이 아니라면서 이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공동선에 대한 의무감의 공유가 없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입법자, 판사. 규제자 및 경찰-이 이기적으로 행동해 그들의 이익을 위해 법을 제정하고 집행한다고 가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상상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이럴 경우 미국의 대통령조차 슈크렐리와 같이 행동할 수 있다(Without a shared sense of responsibility to the common good, we would have to assume that everybody-including legislators, judges, regulators, and police-was acting selfishly, making and enforcing laws for their own benefit. I know it’s hard to imagine, but even a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could act like Shkreli. p.23).

 

따라서 저자는 아인 랜드는 완전히 틀렸다면서 도덕적 선택이란 우리에게 무엇이 최선이지 계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무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일방적인 의무가 아니라 상호 의무인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공동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좋은 것은 그 의도와 정신을 포함해 법의 지배를 존중하며, 우리의 민주적 제도를 보호하고, 진실을 발견하고 전파하며, 변화에 개방적이고 우리들 간의 차이에 대해 관용적이며, 동등한 정치적 권리와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고, 함께 우리의 시민 생활에 참여하며, 함께 그런 생활을 위해 희생한다는 약속이었다(To summarize, the good we have had in common has been a commitment to respecting the rule of law, including its intent and spirit; to protecting our democratic institutions; to discovering and spreading the truth; to being open to change and tolerant of our differences; to ensuring equal political rights and equal opportunity; to participating in our civic life together, and sacrificing for that life together. p.44).”

 

사실 저자의 이와 같은 주장에서 어떤 모순이나 결함을 찾기 어렵다. 인간은 원래 사회적 동물이므로 사회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지켜야 하는 덕목이 반드시 필요하다. 시대와 사회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필요성 자체를 부인한다는 것은 사회를 해체하자는 주장이나 다름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인 랜드의 주장은 사회를 부정하고 오로지 개인의 존재만을 실체로 인정하는 극단론일 뿐이다. 문제는 랜드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고 게다가 그 가운데는 앨런 그린스펀을 위시해 미국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들이 다수 포함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엄청난 재력을 이용해 미국 정치의 막후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유명한 코크 형제(Koch brothers)도 아인 랜드의 열렬한 팬이다. 한 마디로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인 랜드에게서 사상적 원류를 찾고 있는 셈이다. 이는 기가 막힐 정도로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대부분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바탕으로 부와 명성을 쌓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자유지상주의적인 사상으로 무장한 소수의 특권 계층이 중심이 되어 미국에서 조직적으로 공동선을 와해시켜왔던 중요한 사건들을 하나의 연대기(chronicle)로 엮어 서술하고 있다. 이들의 행동은 한 마디로 착취(exploitation)”에 해당된다고 다분히 격정적으로 묘사하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보여줄 것 같이, 50년 전 부와 권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서 사회적 신뢰를 부당하게 이용하기 시작했다.(As I shall show, around five decades ago a few people with wealth and power began exploiting social trust in order to gain even more wealth and power. p.52).”

 

그러면서 저자는 이런 착취적 행위의 시발점으로 월남전 당시 유명했던 통킹만 사건을 들고 있다. 1964년에 벌어진 통킹만 사건은 월맹군이 미구축함을 정당한 이유 없이 공격했다면 명분을 내세워 월남전을 확전시킨 것을 말한다. 이는 확전을 통해 이득을 얻는 세력, 즉 군산복합체의 작품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물론 저자가 말한 대로 바로 이 시점부터 공동선이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이것을 전환점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 이때부터 미국에서 공동선은 서서히 그리고 조직적으로 대중의 담론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어서 1970년대부터 2017년에 이르기까지 51가지나 되는 다양한 사건들의 리스트를 제시하면서 이들로 인해 공동선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말한다. 가장 최근의 사건으로는 2017년에 발생한 웰스파고 스캔들(Wells Fargo scandal)을 지적한다. 앞에서 언급했던 존 스텀프가 CEO로 있는 가운데 벌어진 사기 행위를 말한다.

 

저자가 제시한 리스트를 살펴보면서 문득 우리나라의 경우가 떠올랐다. 저자와 같은 방식으로 한국에서 공동선을 파괴했던 사건들의 리스트 만들어 놓으면 후대에 큰 교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곧 그런 생각을 접게 되었다. 이유는 이 리스트에 포함될 사건들이 너무 많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전임 대통령들을 위시해 도저히 이성적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여러 사건들이 포함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진정 한국 사회에 공동선을 회복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언젠가는 이루어져야 할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사고방식의 부상

저자가 미국 사회에서 공동선을 약화시키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여러 사건들을 언급하는 가운데 유독 강조한 세 가지 사건이 있다. 저자는 이 사건들의 공통된 특징을 한마디로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whatever it takes to)”라고 요약하면서 특별히 다음 세 가지를 지적한다.

 

1)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권력을 쟁취

 

2) 잭 웰치와 마이클 밀켄의 행동: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이윤을 극대화

 

3) 루이스 파월의 메모: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정치, 경제 및 교육을 장악

 

 

리처드 닉슨은 1970년대 초 미국 대통령으로서 재임에 대한 욕심 때문에 민주당 당사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로 인한 후유증으로 임기 중 사임했다. 이때부터 미국 정치에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권력을 장악하려는 풍토가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잭 웰치는 GE의 전문경영자 시절 무자비한 구조조정과 사업 집중 전략을 통해 GE의 기업가치를 수십 배 증가시킨 전설적인 인물로 평가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주주가치 극대화를 추구한 대표적인 인물로 비판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정크본드(junk bond)의 제왕으로 불렸던 마이클 밀켄은 고위험 채권을 발행해 확보한 자금으로 기업을 인수·합병하는 과정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함과 동시에 여러 가지 탈법적인 행동을 한 인물로 구속되기도 했다. 저자가 이 두 사람을 대표적으로 거론한 이유는 웰치는 산업계에서, 밀켄은 금융계에서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이익을 극대화하려했던 상징적인 인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 번째로 거론한 루이스 파월은 우리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 사회에서 공동선을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파월은 기업 전문 변호사로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는데 1971년 당시 닉슨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 판사로 지명되기 직전, 이른바 파월 메모(The Powell Memorandum)로 알려진 비망록을 작성했다. 여기에는 미국의 보수 성향의 기업인들이 단결해 정부 규제를 최소화하도록 압력을 넣어야 한다고 촉구할 뿐만 아니라 단계적으로 교육기관과 연구소 및 법조계를 장악해 자유지상주의적 사고를 확산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이 포함되어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후 실제로 미국에서 소수의 재력가들은 파월이 제시한 전략 그대로 정치, 교육 및 연구 활동에 개입해 자신들의 보수적인 사고를 널리 확산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1980년 이후 막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코크 형제는 파월의 전략을 그대로 실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경제를 조작하려 시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저자는 미국 사회에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라는 사고방식이 만연하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신은 퇴조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이를 확인해주는 중요한 지표로서 국민들이 미국 정부에 대한 신뢰가 현저하게 감소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963년에 60퍼센트 이상의 미국인들이 대부분의 경우 정부가 옳은 일을 한다고 믿었는데 지금은 단지 16퍼센트만이 그렇게 생각한다.(In 1963 over 60 percent of Americans trusted government to do the right thing all or most of the time; nowadays only 16 percent do. p.94).”

 

이에 덧붙여 저자는 1964년에 60퍼센트 이상의 미국인들이 정부가 국민들을 위해 운영된다고 믿었던 반면 29퍼센트 정도만이 정부가 소수 재력가들의 이익을 위해 운영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수치가 역전되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사회의 주요 기관들, 이를테면 대통령, 의회, 은행, 미디어, 대기업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 수준이 정부와 마찬가지로 모두 급격하게 하락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의회에 대한 신뢰 수준은 197342퍼센트에서 20169퍼센트로 하락했으며, 은행에 대한 신뢰 수준은 60퍼센트에서 27퍼센트로 하락했고, 대기업에 대한 신뢰 수준은 26퍼센트에서 18퍼센트로 하락했다,

 

이런 수치들은 미국 사회에 더 이상 공동선이 존립할 수 있는 기반이 사라졌음을 보여주는 실증적 지표라 할 수 있다. 정부가 오직 소수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사회를 과연 더 이상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 사회의 실정은 어떤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제대로 조사한다면 미국 못지않은 결과가 수치로 드러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이런 유형의 조사가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공동선은 회복될 수 있는가?

저자가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사회적 담론에서 사라진 공동선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지 묻는다. 이는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제기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질문이다. 실제로 샌델은 저자의 책과 관련해 201842일자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저자의 견해에 깊은 공감을 표시하면서도 실천 방법의 관점에서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라이시는 공동선은 괜찮은 사회를 위한 기본 원칙을 서술하는 것으로 믿는 것이지 시민들이 이런 기본 원칙 안에서 추구해야 하는 정책이나 목적을 서술하는 것으로 믿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안을 구분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Reich seems to believe that the common good describes ground rules for a decent society, not the policies and purposes that citizens should pursue within these ground rules. But is it really possible to separate the two?)”

 

샌델은 정치철학자로서 구체적으로 현장에서의 담론을 통해 정책에 반영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회에 공동선이 정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예컨대 샌델은 초당파적으로 논쟁을 피하는 가운데 이민 문제에 대한 공동선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라이시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에 실제로 대중적인 담론을 활성화시키기 어렵다는 것이 샌델의 생각이다. 앞에서 인용한 그의 글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샌델은 공동선을 부활시키는 최상의 희망은 어수선하고 논쟁이 많은 민주적 정치의 영역에서 도덕적 논쟁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정치철학자로서 그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위시해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한 것이기도 하다. 도덕적 논쟁을 배제한 정치는 정의를 비롯해 민주 사회에 필요한 가치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논쟁이 가능할지 지극히 회의적이다.

 

필자는 샌델의 지적에 상당 부분 동의하면서도 라이시가 공동선 회복을 위해 제시한 몇 가지 제안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수긍한다. 이런 기본 원칙에 대한 합의 없이는 어떤 정치적 논쟁을 통해서도 생산적인 결론을 도출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점은 우리나라의 경우 명백하다.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기본 원칙이 없는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공동선에 바탕을 둔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라이시는 공동선의 회복을 위한 과제로 네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로는 신탁관리정신(trusteeship)을 가지고 리더십을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면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신탁관리정신을 망각하고 있기에 공동선의 회복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리더십은 신탁관리정신을 포함해야 한다. 리더는 한때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공동선을 구성하는 불문율의 관리인이다(Leadership must entail trusteeship. Leaders are stewards of the unwritten rules we once took for granted, that constitute the common good. p.112).”

 

리더십과 관련해 저자가 말하려는 것은 정부, 기업, 대학, 자선기관, 노동조합 등의 조직에서 리더는 자신의 부와 권력을 확충하는 데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되고 자신들이 관리하는 기관에서 공적 신뢰를 구축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원칙적인 내용이며 리더로서 지켜야할 기본 원칙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팔자가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공동선은 탑다운(top-down) 방식이 아니라 바텀앞(bottom-up) 방식으로 형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리더의 책임과 역할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구성원, 나아가 시민들이 스스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공동선을 고민하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common”“public”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공동선은 공공재와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

 

이어서 저자는 공동선을 회복하는 데 명예(honor)와 수치심(shame)을 적절한 활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명예를 잘못 적용해왔으며 수치심의 효과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유명인(celebrity)에게 모든 명예가 주어지는 현재의 상황은 명예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국회의원, 장관, 장군 등을 부를 때 더 이상 “honorable”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미 현재의 지위만으로도 충분히 명예를 누리고 있는데 별도로 이런 호칭을 붙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정 음지에서 맡은 바 직무를 다하고 있는 소방수, 선생, 경찰, 내부고발자 등에게 명예가 돌아가도록 풍토를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즉 명예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함으로써 공동선의 회복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수치심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미국인들에게 수치심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닫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킹 목사를 통해 미국인들은 수치심을 느꼈고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자신의 사고방식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치심을 적절하게 활용하면 공동선의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필자도 이 점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동선을 회복하는 데 명예와 수치심을 제대로 활용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지극히 유감스럽다. 명예는 남발해왔고 수치심은 은폐하는 데만 급급해 공동선과는 무관한 개념들로 간주되어왔다.

 

이어서 저자는 진실을 부활시키고 시민 교육을 강화함으로써 공동선의 회복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요즘 같이 가짜 뉴스(fake news)가 판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면 시민들은 진정 사회통합을 위해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다.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는 상황에서는 공동선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저자는 진실의 공유 없이는 민주적인 토의는 불가능하다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이와 같이 공동선의 회복을 위해서는 시민적 차원에서 우리 모두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읽고 듣는 사실들을 점검하며 신뢰할 만한 소스를 발견하고 거기에 의존하며, 다른 사람들과 진실을 공유하며, 우리에게 거짓을 말하거나 진실을 은폐한 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우리 모두의 시민적 의무이다(It is the civic responsibility of all of us to check the facts we read or hear, to find and depend upon reliable sources, to share the truth with others, and hold accountable those who lie to us or suppress the truth. p. 158).”

 

시민 교육도 중요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일체 시민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서는 더욱 중요하다. 저자는 미국에서도 이제 더 이상 시민 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점을 강조한 것이다. 시민 교육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보다 훨씬 앞서있는 미국에서도 이 문제를 거론할 정도인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이 분야에서 아무런 변화가 없는 현실에 암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현재와 같은 교육 풍토에서 시민 교육이 가능할지조차 의문이다.

 

저자는 이런 노력이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면서 미국 사회에서 공동선의 회복은 여전히 가능하다는 희망을 피력한다. 저자를 비롯해 다수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미국에서는 이미 금권정치(plutocracy)가 민주주의 정신을 위협하는 상황이 만연해 있다고 우려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저자의 낙관론은 근거 없는 희망사항을 피력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서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려는 저자의 시도가 무의미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아무리 작은 불씨라도 강한 의지를 가지고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일정 숫자에 이르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한국사회에서도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저자가 마지막으로 인용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의 다음 명언은 우리 모두 음미할 필요가 있다.

 

행할 가치가 있는 것은 어떤 것이든 우리 생애에 성취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에 의해 구원받아야 한다. 진실하며 아름답고 선한 것은 어떤 것이든 즉각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없다(Nothing that is worth doing can be achieved in our lifetime; therefore we must be saved by hope. Nothing which is true or beautiful or good make complete sense in any immediate context of history.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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