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 분야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존재의 의미(The Meaning of Human Existence)》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6-12-23 16:56
조회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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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 

역자: 이한음

출판사: 사이언스북스(2016)

 

목차

I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

1. 의미의 의미

2. 인간 종의 수수께끼를 풀다

3. 진화와 우리 내면의 갈등

II 지식의 통일

4. 새로운 계몽 운동

5. 없어서는 안 될 인문학

6. 사회적 진화의 원동력

III 다른 세계들

7. 인류 페로몬 세계를 잃다

8. 초유기체

9. 미생물이 은하를 지배하는 이유

10. 외계 생명체의 초상

11. 생물 다양성의 붕괴

IV 마음의 우상들

12. 본능

13. 종교

14. 자유 의지

V 인간의 미래

15. 우주에 홀로 자유롭게

      

<북 리뷰: 진화론의 관점에서 본 인간의 본성과 존재의 의미>

의미의 의미에 대하여

저자는 첫 장의 제목부터 의미의 의미라고 다분히 도발적으로 정했다. 얼핏 보면 언어의 유희같기도 하다. 그런데 90세를 바라보는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이자 저명한 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이 그럴 리 없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제목대로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라는 개념을 한번쯤 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개인적으로도 의미라는 개념을 가지고 나름 고민해봤기에 저자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할 것 같았다. 유한한 존재로서 삶의 막바지에 우리 스스로에게 할 수 있는 질문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았나?”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저자의 견해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만 동의하면서, 한편으로는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심정이다. 먼저 저자는 의미는 의도, 설계, 그리고 설계자와 같은 개념으로 연결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상 용법에서 의미라는 단어는 의도를 함축하고, 의도는 설계를 함축하고, 설계는 설계자를 함축한다. 그 어떤 실체든 과정이든 단어 자체의 정의든 간에 설계자가 마음속으로 의도한 결과의 산물로 펼쳐진다는 식이다.“(15). 이것은 다분히 설계자, 즉 창조주를 전제로 하는 종교적 관점에서 해석한 의미의 개념에 해당된다. 여기에는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저자의 종교(유일신교)에 대한 입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어서 대안적인 의미의 개념을 제시한다: 한편, 의미라는 단어를 더 폭넓게 쓰고 거기에 전혀 다른 세계관을 담는 두 번째 용법도 있다. 설계자의 의도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들을 의미의 원천으로 삼는 방식이다. 이 용법은 고도의 설계 따위는 전혀 상정하지 않고, 대신에 물리적 인과관계들이 겹쳐진 망을 염두에 둔다.........인문학을 비롯한 삶의 나머지 영역들에 빛을 비추는 이 의미 개념이 바로 과학의 세계관이다.”(15)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의미의 의미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인문학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통섭, 지구의 정복자와 같은 다른 저서에서도 인문학과 과학의 융합 내지는 통섭을 강조해왔다는 점에서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특별히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인문학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다분히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저자가 말하는 의미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은 표현에 잘 드러나 있다: 거미집을 짓는 거미는 결과를 의식하고 있든 아니든 파리를 잡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그것이 바로 거미집의 의미다. 인간의 뇌는 거미의 거미집과 동일한 체제 하에서 진화했다. 인간이 내린 모든 결정은 일차적인, 의도가 담긴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그 결정하는 능력 자체, 그리고 그 능력이 어떻게 왜 출현했고 그럼으로써 어떤 결과가 빚어졌는지는 인간 존재의 더 폭넓은 의미, 과학에 토대를 둔 의미 하에서 바라봐야 한다.”(16) 이 대목에서 저자는 어떤 인문학적인 측면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통섭을 이용해 과학적 제국주의를 펼치려 한다고 비판을 받아왔던 것이리라. 진정한 의도는 저자 본인만 알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저자가 의미의 의미에 대해 해석하는 방식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처음에 설계자를 전제로 한 의미를 논한 것은 결국 과학적 세계관에 기초한 의미만이 의미 있다는 결론을 유도하기 위한 편법으로 보인다. 과학만이 모든 문제의 답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진정한 차원에서 객관적인 의미를 추구하려는 자세로 보이지 않기에 동의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과학적 세계관을 통해 의미를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 그것만이 유일한 의미의 원천으로 해석하는 데는 유보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객관적인 차원에서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과학적 관점이 우세하다고 본다.

 

여기서 문제는 우선 과학의 영역을 어디까지로 확장할 것인가에 있다. 아니면 반대로 환원주의가 시사하듯이 과학에도 위계질서가 있기에 모든 의미는 궁극적으로 몇 개의 물리법칙으로 환원된 상태에서 찾아야하는지도 검토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쨋든 저자는 생물학, 특히 진화론의 관점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다분히 환원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물학에서는 대개 어떻게를 생명 과정의 근접(proximate) 원인과 “궁(ultimate) 원인으로 나누어 설명한다........근접 설명은 해부 구조와 감정이 특정한 활동에 종사하도록 회로가 아로새겨져 있다고 말한다. 궁극적 설명은 왜 다른 회로가 아니라 그 회로가 아로 새겨져 있냐는 질문에 답한다. 인간 조건을 설명하려면, 그럼으로써 인간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려면, 양쪽 수준의 설명이 필요하다.”(18) 그러면서 인류는 오로지 진화하는 동안 일련의 사건들이 누적됨으로써 생겨났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의미에 분명히 획을 긋는다.

 

인간 조건을 이해하면 존재의 의미가 모두 드러나는가?

필자는 윌슨의 지구의 정복자를 리뷰하면서, 그리고 통섭을 다시 읽으면서 저자가 말하는 인간 조건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었다. 왜냐하면 사람에 따라 이 용어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저자가 말하는 인간 조건의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다. 마치 저자는 독자들이 자신이 이 용어를 무슨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혼란이 있었으나 저자의 사고의 큰 틀인 진화론과 사회생물학의 관점에서 인간 조건을 이해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다른 요인들예컨대 종교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요인들도 인간 조건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저자는 이런 요인들조차도 생물학적 제약과 진화론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대표적인 예로 종교도 진화적 관점에서 부족주의(tribalism)의 변형된 형태로 해석한다. 생존을 위해 유일신을 믿는 종교를 내세우는 것이 유리했다는 것이다. 일면 타당한 해석이지만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저자에게 인간 조건에 대한 이해는 곧 인간 존재의 의미를 찾는 작업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진화의 긴 여정을 거치면서 인간 조건을 완성해왔고 오로지 이런 과정을 통해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재의 인간 조건을 이해하려면, 한 종의 생물학적 진화와 그 종을 선사 시대로 들어서게 한 환경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류를 이해한다는 이 과제는 너무나 중요하면서도 벅찬 일이기 때문에 인문학에만 내맡길 수 없다........그러나 생각할 수 있는 수많은 본성 중에서 우리가 왜 다른 어떤 본성이 아닌 지금의 특정한 본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설명한 적은 없다.”(19) 여기서도 인문학에 대한 저자의 부정적인 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인문학과의 협력을 강조한다. 다분히 모순적이다.

      

저자에 의하면 인간 조건은 수십만 년에 걸친 역사적인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종교나 인문학 등 비교적 역사가 짧은 분야에 의존해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화의 전 과정을 아우르는 생물학의 관점에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필자 또한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물학적 바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므로 저자의 주장에 상당히 동감한다. 그런데 이것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생물학자는 인간의 물질적 측면(유전자, 세포, 장기 및 유기체)을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고, 필요한 경우에는 초파리, , 원숭이 등 곤충과 동물을 이용해 실험하고 관찰한 결과를 통해 인간의 행동과 본성에 대해 유추한다.

 

그런데 인간의 의식수준과 이들의 의식수준의 현저한 차이를 감안한다면 이들을 이용한 실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예컨대 마음(의식)뇌 관계가 그렇다. 인간의 경우 뇌가 마음(의식)에 영향을 미치지만, 반대로 마음이 뇌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다른 곤충이나 동물의 경우에는 이런 양방향 관계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로부터 얻은 지식과 정보를 그대로 인간에게 적용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고 본다. 3차원의 세계에서 볼 때 2차원의 세계는 측정 불가능할 정도로(unmeasurably) 거의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따라서 2차원 의식으로 3차원 의식을 추론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진사회성이 인간 존재에서 갖는 의미

저자는 지구의 정복자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진사회성의 특성과 희소성, 그리고 이것이 출현하게 된 원인 등에 대해 소상히 설명한다. 진사회성은 사회생물학자인 저자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개념임에 틀림없다. 이 점은 충분히 수긍이 간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미 지구의 정복자리뷰에서 나름 상세히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생략할 것이다.

 

단지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개인 차원의 선택과 집단 차원의 선택 간의 상호작용에 관해서이다. 이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다수준 선택(multilevel selection)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기서도 이들 간의 상호작용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에 대해 별다른 언급이 없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 힘 사이의 경쟁은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다. 집단 내에서는 이기적인 개인이 이타적인 개인을 이기지만, 이타주의자들의 집단은 이기적인 개인들의 집단을 이긴다. 혹은 위험을 무릅쓰고서 더 단순화하면, 개체 선택은 죄악을 부추긴 반면, 집단 선택은 미덕을 부추겼다고 할 수 있다.”(37) 개인적으로는 이처럼 간단하게 이분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들 간의 상호작용을 규정하는 불변의 법칙이 있다는 생각에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상황에 따라 상호작용의 내용도 당연히 달랐을 것이고 이로 인해 진화 과정에 변화가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인간 조건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인간 존재의 의미도 달라졌을 것이다. 이런 추론에 대해 저자는 어떻게 반박할지 궁금하다.

 

한 가지 진화론에 입각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려는 저자의 입장 가운데 다음에 대해서는 필자도 동의한다: 우리는 모두 성인이자 죄인인, 진리의 수호자이자 위선자인 유전적 키메라(chimera). 인류가 어떤 예정된 종교적 또는 이념적 이상에 도달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종이 수백만 년에 걸친 생물 진화를 통해 기원한 방식이 그렇기 때문이다.”(32) 인간이 선과 악 양면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진화의 관점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주장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개체 수준의 선택과 집단 수준의 선택 간의 갈등으로 인해 형성된 속성일 것이다. 즉 진사회성이 내포하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속성이다. 인간은 모순된 존재다. 이것도 인간 존재의 의미에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인문학과의 협력에 대하여

계몽주의가 서구 사상사 나아가 인류에게 미친 영향을 실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인류를 종교적 속박에서 해방시킨 후 이성의 힘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었으며, 인간 중심의 사고를 갖도록 자극함으로써 과학의 발전을 통해 자연을 정복하고 전대미문의 물질적 풍요를 향유할 수 있는 정신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계몽주의는 모든 사건과 사물을 지나치게 유용성에 따라 판단하도록 유도하는 잘못을 저질렀으며 이로 인해 낭만주의의 역풍을 맞았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나 할까.

 

저자는 이 책에서 새로운 계몽운동을 제창하면서 인문학을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선 계몽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계몽사상가들은 거대한 학문 분야들을 원인과 결과의 연속된 연결망으로 통일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미신을 모조리 떨어내고 현실과 이성만으로 구축한다면, 모든 지식을 하나로 엮어서 계몽 운동의 선구자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인 프랜시스 베이컨이 1620년에 인간의 제국(the empire of man)이라고 부른 것을 구축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계몽운동은 인간이 전적으로 스스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앎으로써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함으로써 전보다 더 현명하게 선택할 능력을 얻는다는 믿음을 토대로 했다.”(42)

 

이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과학 지식의 이 폭발적인 성장은 인문학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모든 면에서 관계가 있다. 과학과 기술은 인류의 위치를 점점 더 정확히 밝혀주고 있다........우리는 아주 특별한 종, 원한다면 선택된 종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인문학은 그 자체로는 왜 그러한지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인문학은 답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질문을 제기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그마한 인지 상자에 갇힌 채, 연속체에서 자신들이 아는 자그마한 영역을 끝없이 세세하게 이렇게 저렇게 조합을 하고 또 하면서 찬미한다.”(56)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인문학을 존중하는 태도라 할 수 없다.

 

그러면서 저자는 인문학이야말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고, 과학이 이 수원(水源), 즉 인류의 미래에 절대적면서 독특한 원천을 엉망으로 만드는데 쓰이지 않게 막아 줄 수 있다면서 인문학은 없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앞에서 한 말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저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문학과 종교에 대한 저자의 태도에는 다소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를 논한다는 것이 윌슨과 같은 세계적인 학자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노자의 명언 지자불언(知者不言), 언자부지(言者不知)가 생각난다.

 

사회적 진화의 원동력과 인간의 본성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여기에는 오랜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일련의 절묘한 선적응(preadaptation)을 통해 획득한 진사회성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시 한 번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인간 조건의 기원은 자연선택이 사회적 상호작용을 선호했다는 개념으로 가장 잘 설명된다. 의사소통하고, 알아보고, 평가하고, 유대를 맺고, 협력하고, 경쟁하는 타고난 성향도, 자신의 특별한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깊고도 따스한 기쁨을 느끼는 성향도 그렇게 나온 것이다. 집단선택을 통해 강화된 사회적 지능에 힘입어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 역사상 최초의 완전한 지배종이 되었다.”(85) 더 이상의 설명은 사족(蛇足)에 불과하다고 강조하려는 듯하다.

그런데 이런 특성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잃은 것도 많다. 그 중 저자는 특별히 페르몬의 세계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강조한다. 주지하다시피 페로몬은 곤충을 비롯해 동물, 나아가 일부 식물종이 서로 소통하는 데 사용하는 호르몬이다. 그런데 진사회성을 획득한 인간은 페르몬의 세계를 잃어버림으로써 감각 장애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생태계를 파괴하면서도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으며 다른 생명체들에 대해 조금도 연민의 정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반자연적인 행동이 지금 역풍을 맞고 있는 셈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연과 단절된 방향으로 진화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진화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면 인간의 본성 또한 예외가 아니다. 저자를 비롯해 많은 생물학자 및 뇌과학자들은 인간의 두뇌는 자신을 돌아보고 사고하도록 진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보전과 번식을 위해 진화했을 뿐이라고 강조해왔다. 인간의 의식은 진화 과정에서 발생한 부수적 현상(epiphenomenon)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인간 본성이라고 말하는 이성과 감정의 독특한 결합물은 인간 수준의 능력을 지닌 뇌와 감각계를 갖출 수 있었을 많은 유형들 가운데 첫 번째로 나온 자동적으로 생성된 산물, 즉 상상할 수 있는 많은 산물 중 하나였을 뿐이다.”(152) 이 말은 인간의 보편적인 이성과 감성의 결합이란 전혀 신비로운 것도 유일무이한 것도 아닌 단지 잔화 과정에서 우연히 형성된 결합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이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인간 본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감정과 그 감정이 관장하는 학습의 준비성으로 이루어진 전체다. 일부 저술가들은 인간 본성을 해체해 무()로 만들려고 시도해 왔다. 하지만 그것은 실재하고 명백하며, 뇌의 구조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과정이다...........인간 본성은 문화적 진화를 다른 방향들이 아니라 한 방향으로 편향시키고, 그럼으로써 모든 사람이 뇌에서 유전자를 문화와 연결하는 정신 발달의 유전적 규칙성의 집합이다.”(160) 결국 인간의 본성을 형성하는 원천은 이성(뇌의 신피질)과 감성(뇌의 변연계)의 독특한 결합과 이에 영향을 미치는 학습 규칙을 좌우하는 유전적 패턴에서 찾을 수 있다는 얘기 아닌가? 철저한 유물론적 해석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저자가 말한 대로 종교란 부족주의(tribalism)와 이야기(story)의 절묘한 조합으로서 믿음은 생물학적으로 볼 때 생존과 번식의 증대를 위한 다윈주의적 장치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앙의 유전자가 음악의 유전자와 비슷한 방식으로 신경학적 및 생화학적 매개가 이루어지도록 규정할까? 종교의 신경과학이라는 비교적 젊은 분야에서 나온 증거는 그렇다고 말한다........종합하자면, 지금까지 종교의 신경과학 연구를 통해 나온 결과들은 종교적 본능이 정말로 존재함을 강하게 시사한다.”(166) 최근 이 주제와 관련된 일련의 연구도 저자의 입장을 뒷받침한다. 이른바 신의 뇌(God brain)”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뇌의 측두엽을 자극하면 신의 존재를 경험한다거나 강력한 신비체험이나 환각체험을 한다고 말한다. 이 모두가 진화 과정에서 획득한 생존을 위한 장치라는 것이다. 저자도 기본적으로 같은 입장이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저자는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유물론과 진화론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의식의 본질과도 관련된 문제로서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심리학과 벤자민 리벳(Benjamin Libet) 교수의 실험적 연구를 통해 자유의지란 환상이라는 신경과학적 해석이 주목을 받은 적 있었다. 이것은 당시 매우 충격적인 발견이었다. 어쨌든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경과학자들의 시선은 더 전망이 엿보이고 더 현실성이 있어 보이는 과학의 성배에 맞추어져 있다. 의식의 물질적 토대가 바로 그것이며, 자유 의지는 그것의 한 부분이다. 의식적 생각이라는 유령을 붙잡는 것이야말로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과학적 탐구라 할 수 있다.”(179) 이와 같이 뇌과학자들과 진화론자들은 인간 의식의 본질에 관한한 완벽한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의식은 진화 과정에서 창발한 부수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은 결코 인간 존재의 의미를 논할 때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과연 그러한가?

 

그런데 한편에서는 의식 문제와 관련해서 예상 밖으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이 점은 저자의 다른 책에서 발견하기 어려웠다. 아마도 이 책이 가장 최신작인 점으로 보아 저자의 심경에 약간의 변화가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의식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경과학자들이 어떻게든 어느 개인의 뇌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들을 상세히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들이 그 개인의 마음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목표에 접근조차 못한다.”(190)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진정 과학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뇌에 관한 방대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뇌가 의식의 원천이라는 증거는 거의 없다. 모든 증거는 뇌와 의식 간의 상관관계를 밝히고 있을 뿐,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한다. 저자도 이 점을 감안해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닌지 추측해본다

 

생물학은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미 많은 진화론자들이 밝혔듯이 인간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길고도 긴 진화의 여정에서 우연히 일련의 조건들을 충족함으로써 선적응 과정을 통과해 진사회성을 획득하고 커다란 두뇌의 힘에 의해 지금의 인간 조건을 완성하게 된 존재일 뿐이다. 분자생물학자 자크 모노(Jacques Monod, 1910~1976)가 저서 우연과 필연에서 말했듯이 인간은 필연보다는 우연에 힘입어 여기에 있게 된 존재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줄 수 있을 만큼 증거가 많고 명확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초자연적 지성체의 창조물이 아니라, 우연과 필연을 통해 나온 지구 생물권에 있는 수백만 종 가운데 하나라고 말이다.”(195) 한 마디로 창조론이니 지적설계니 하는 것들은 과학적, 객관적 증거가 없는 소망사고(wishful thinking)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인간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 같이 말한다. 여기서 인문학에 대한 저자의 애착을 엿볼 수 있다. 생물학과 진화론의 영역을 벗어난 뭔가가 인간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 이것은 인간의 인문학적 경향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점은 이야기(story)의 역할을 강조하는 데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낙관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하는 마지막 이유는 인간의 작화(作話, confabulation) 필요성이다. 우리 마음은 이야기하기로 이루어진다. 현재의 매순간, 현실 세계의 정보는 홍수처럼 우리의 감각들로 흘러든다.........의식적 정신생활은 전적으로 작화로부터 구축된다. 과거에 경험한 이야기들과 미래를 위해 창안된 이야기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끊임없는 검토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188) 저자는 인간의 이런 측면은 진화론의 관점에서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여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끝까지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야만 인간 존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목표(인류 종의 통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선결 조건은 정확한 자기 이해다. 그렇다면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생물학적 진화와 선사 시대로부터 시작해 역사 시대로 들어서서, 막연한 미래로 현재 매일 점점 더 급속히 나아가고 있는 우리 종의 서사시 자체,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어떤 존재가 될지 스스로 선택하는 과정 속에 바로 그 의미가 담겨 있다고 주장해 왔다.”(196) 스스로 선택하는 과정이라는 말은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유물론자이고 진화론자이지만 저자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뭔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로 책을 마무리한다: 과학과 인문학이 하는 말과 하는 일을 볼 때 서로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원을 보면 둘은 서로 상보적이며, 인간 뇌의 동일한 창의적 과정들을 통해 나온다. 과학의 발견적이고 분석적인 힘이 인문학의 내성적 창의성과 결합된다면, 인간 존재는 무한히 더 생산적이고 흥미로운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210)

 

이 대목은 마지막 메시지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저자가 진짜 무슨 생각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상보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인가? 저자가 말하는 통섭의 핵심은 인문학을 과학에 종속시키는 것 아니었는가? 저자의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는가? 아니면 앞에서 인문학에 대해 다소 비하하듯이 발언한 점으로 미루어 인문학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진지한 진화론자이면서 유물론자인 저자가 인간 의식 문제라든가 인문학 관련해서 다소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준 점이 오히려 반갑게 느껴진다.

 

과학은 중요하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과학 말고는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진실을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과학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이론 모델에 스스로를 한정시키는 취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나마 이런 이론 모델이 없으면 과학적 방법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이를 통해 과학의 패러다임 전환이 가능해지며 인류는 더 풍성한 지식의 향연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한계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저자의 노력은 존중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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