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 분야

에르빈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정신과 물질(What is Life?/Mind and Matter)》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7-10-25 11:38
조회
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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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에르빈 슈뢰딩거(Ervin Schrodinger)

역자: 전대호

출판사: 궁리(2007)

 

목차

<생명이란 무엇인가?>

1장 주제에 대한 고전물리학자의 접근

2장 유전 메커니즘

3장 돌연변이

4장 양자역학적 증거

5장 델브뤼크 모델에 대한 논의와 검증

6장 질서, 무질서 그리고 엔트로피

7장 생명은 물리학 법칙에 기반을 두는가

 

<정신과 물질>

1장 의식의 물리적 기초

2장 지식의 미래

3장 객관화의 원리

4장 산술적 역설: 정신의 단일성

5장 과학과 종교

6장 감각의 신비

 

 

에르빈 슈뢰딩거에 대한 소견(所見)

잘 알려졌듯이 에르빈 슈뢰딩거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물리학자로서 파동역학(wave mechanics)을 창시해 행렬역학을 이용해 불확정성원리(uncertainty principle)을 제시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더불어 양자역학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그 공로로 193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wave equation)의 해를 구해 얻게 되는 파동함수(wave function)는 파동의 상태로 중첩되어 있는 전자와 같은 소립자를 발견한 확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기에 양자역학을 확립하는 데 슈뢰딩거가 얼마나 기여했는지 상세히 논의할 입장이 아니다. 단지 필자가 양자역학 관련 책들을 읽으면서 느낀 바는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슈뢰딩거도 여러 가지 양자 현상에 대한 해석에는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널리 알려진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당시 양자역학의 주류 해석이었던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반발로 슈뢰딩거가 제안한 사고실험이었다. 아무튼 양자역학은 난해한 분야로서 실험 결과에 대한 해석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들 중 한 명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 1918~1988)당신이 양자역학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역설적으로 말했던 것은 양자역학이 얼마나 난해한 분야인지 말해준다. 아무튼 필자의 일천한 지식으로 양자역학에 대해 논하는 것은 전문가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므로 이 정도에서 그치고자 한다.

 

필자가 다소 무리해 가면서 슈뢰딩거가 양자역학에서 이룬 업적을 언급한 것은 그의 천재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 책의 뒷 부분에는 슈뢰딩거 자신이 쓴 연대기가 수록되어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슈뢰딩거는 젊은 시절부터 철학, 특히 인도 베단타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여러 과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베단타철학에는 뭔가 동서양을 관통하는 지혜가 담겨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의사이자 영성지도자인 디팍 초프라(Deepak Chopra)나 핵물리학자로서 은퇴 후 영성과 과학의 조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아미트 고스와미(Amit Goswami)도 베단타철학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다. 이들이 단지 인도 출신이기에 그렇기보다는 베단타철학에는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리라.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영원의 철학에서도 베단타철학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런 철학적 사유의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슈뢰딩거는 물리학자이면서도 물리주의 내지 유물론적 한계를 넘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 책에서 다루었던 두 가지 주제, “생명이란 무엇인가?”정신과 물질은 지금도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일찍이 궁극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던 것이다. 예컨대 아직까지도 생명의 기원은 풀리지 않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한때 오파린의 생명기원설과 이를 뒷받침하는 밀러의 실험으로 생명이 원시스프(primordial soup)라 불리는 유기화합물에서 자연적으로 출현했다는 주장이 생명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훗날 오류임이 드러났다. 이것은 생명의 기원을 환원주의적 방법으로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드러낸 사건이다.

 

이런 이유로 지적설계(intelligent design)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이론가인 스티븐 마이어(Stephen Meyer)가 저서 세포속의 시그니쳐(2014)에서 유기화합물에서 자연스럽게 생명이 탄생할 확률은 사실상 0에 가깝다고 주장한 것을 마냥 무시하기도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에 의하면 유기화합물에서 생명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 20가지의 아미노산이 일정한 방법으로 배열해 단백질을 형성하고 이로부터 세포를 복제하는데 불가결한 RNADNA가 형성될 가능성은 1/10179보다 작다고 주장한다. 이는 빅뱅 이후의 우주 역사인 대략 138억 년을 감안하더라도 생명이 탄생하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바탕으로 마이어는 생명의 기원 및 생명의 진화에 관한 기존 이론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필자는 생명의 기원과 관련된 과학적 주장은 그것이 무엇이든 확률적인 관점에서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마이어의 주장을 반박하는 주류 진화론자들의 입장을 확인하고자 했으나 유튜브나 책에서 아직 그들의 반론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 글을 읽게 된 분 가운데 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줄 분이 있으면 감사할 따름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생명에 관해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이 책에서 생명의 기원에 관해서 슈뢰딩거가 특별히 언급한 것이 없다. 생명과 관련된 유전적 메커니즘의 본질과 생명의 열역학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의 논의는 궁극적으로 생명의 기원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생명의 기원과 관련된 문제를 조금 언급한 것이다. 생명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설명하는 데는 현재 진화론 이상의 이론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간을 소급해 생명이 더 단순한 형태를 띠었던 적으로 되돌아가보면 유기체에서 단세포 생명체로까지 소급한 후에는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느낌이다. 현재로서는 우주의 시작이 빅뱅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듯이 생명의 시작에 관한 이론이 있어야만 생명에 관한 논의가 완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지금부터 70여 년 전 생물학자가 아닌 물리학자가 생명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감을 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슈뢰딩거가 이 책에서 주장한 내용 가운데는 지금은 오류인 것으로 밝혀진 것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인간의 염색체가 48(24)이라고 했는데 그 후 46(23)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가치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생명이라는 주제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을 촉발해 생명 연구에 크게 공헌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생명이란 무엇인가?출간 50주년을 기념해 1993년 여러 분야의 저명한 학자들이 슈뢰딩거가 몸 담았던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기념 학술대회를 열었던 것을 들 수 있다. 그 후 이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중심으로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 후 50(2003)이란 책이 출간되었다. 생명 연구에 대한 그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슈뢰딩거는 195610월 영국 캐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정신과 물질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강연을 하기로 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그가 쓴 원고를 가지고 다른 사람이 대신 강연을 했으나 1958년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글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보다 십여 년 후에 쓰인 것으로서 상대적으로 세간의 주목을 덜 받았다. 필자도 이 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글을 보고 느낀 첫 인상은 슈뢰딩거가 정말 대단한 학자였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당시에 의식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양자역학의 대가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로저 펜로즈(Roger Penrose)와 아미트 고스와미(Amit Goswami) 그리고 헨리 스텝(Henry Stapp)을 비롯한 여러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의식 문제를 접근하고 있는 것도 그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한다.

 

생명과 의식, 이 두 가지 주제는 지금도 완벽하게 규명되지 않았으며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분야이다. 생명의 주체인 생물이란 자기복제, 물질대사 및 외부와의 구별이라는 뚜렷한 특징을 갖고 있기에 무생물과 구별된다. 물론 바이러스와 같이 이 기준에 의하면 생물이라고 분류하기 곤란한 것도 존재하지만 대체로 이것들이 생물의 조건이라는 데 이견(異見)이 없는 듯하다. 생물은 이를 바탕으로 항상성(homeostasis)을 유지함으로써 생명을 이어간다. 그런데 생명에 대한 이런 접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생물의 본질인 의식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의식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의식을 넓게 정의해 단세포 생물에도 낮은 수준의 의식이 존재한다고 본다면 모든 생명체는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의식을 가진 존재이다. 그렇다면 생명의 본질을 논하는 경우 의식의 측면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의식이 없는 존재는 이미 더 이상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죽은 생물에는 의식이 없다든가 아니면 의식이 떠났다고 본다면, 그리고 생물의 모든 움직임은 의식, 나아가 이것의 자동화로서 무의식의 명령을 받는다면 의식은 생물의 핵심 요소임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로버트 란자(Robert Lanza)생물 중심주의(biocentrism)”을 주장한 것도 충분히 수긍이 간다. 어떤 의미에서는 의식이 생명에 선행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불확실한 상태에 있으며 더 치열한 논쟁이 요구된다. 한편 슈뢰딩거가 이 책에서 의식과 관련된 주요 문제, 예컨대 의식의 어려운 문제(hard problem)”를 체계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획기적으로 기여한 바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에 이미 의식 문제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이 정도 수준의 글을 발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의식 문제와 관련해서는 그가 젊은 시절 베단타철학에 심취했던 것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그는 물리학의 한계를 넘어 생물학과 철학의 주요 문제들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아인슈타인에 비견될 수도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작은 책은 지금도 여러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생명이란 무엇인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본 생명의 본질

이 글은 슈뢰딩거가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19432월에 행한 강연을 위해 준비한 것으로 다음 해인 1944년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작은 책이 훗날 생명 연구에 미친 영향을 대단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ven J. Gould)생명이란 무엇인가? 그 후 50에 수록된 첫 번째 글에서 이 책을 다음과 같이 다소 부정적인 관점에서 논평했다. 일반적으로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과학의 변치 않는 논리에 대해 탐구하는 시대를 초월한 논의로 지금까지 여겨져 왔다. 하지만 나는 그 반대로 생명이란 무엇인가?과학 통일 운동이라는 목표를 표현한 사회적 문헌으로, 모더니즘으로 알려진 좀더 광범위한 세계관의 표현으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33) 그렇지만 이 책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압도적으로 우세한 것이 사실이다.

 

슈뢰딩거는 이 책을 통해 생명의 물리적 기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려했다. 물리학자들에 의하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즉 생물과 무생물을 포함한 모든 것들은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우주에 존재하는 네 가지 힘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런 주장이 우주의 물질적인 측면에 관한 것이라면 누구도 반박하기 어렵다. 그런데 생명을 가진 생물은 단지 물질적인 관점에서만 접근하기에는 독특한 특성을 가진 실체이다. 그렇다면 생명체, 즉 생물에는 물리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어떤 것이 존재할 수도 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슈뢰딩거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생명의 본질과 관련된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의도는 다음 표현에 잘 드러나 있다. 사실 다양한 주제를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이 기획 전체의 의도는 한 가지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다........크고 중요하며 아주 많이 논의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다. 살아있는 유기체의 공간적 경계 안에서 일어나는 시간과 공간 속의 사건들을 물리학과 화학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20)

 

이 문제와 관련해 슈뢰딩거는 우선 생물에는 고전적인 물리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생물에게는 비주기적 결정(aperiodic crystal)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살아 있는 세포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염색체 섬유)은 비주기적 결정이라 부르는 것이 적당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물리학에서 주기적 결정만 다루었다.”(22) 원자는 매우 작지만 물리학에서는 주기적 결정이라는 동일한 성질을 갖는 수많은 원자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발생하는 현상들을 통계물리학의 관점에서 성공적으로 설명해왔다. 그런데 생명체에는 더 이상 이런 방법을 적용할 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오직 엄청나게 많은 원자들이 함께 행동할 때만, 통계적인 법칙들이 그 집단의 행동을 원자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증가하는 정확도로 통제하기 시작한다........유기체의 생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알려진 물리법칙들과 화학법칙들은 모두 이런 통계적 법칙이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다른 법칙성이나 질서는 원자들의 끊임없는 열운동에 의해 교란당하고 무력해진다.”(28)

 

슈뢰딩거는 생물의 유전 메커니즘과 관련해 당대의 첨단 생물학적 지식에 정통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통찰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유전자는 분자일 수밖에 없다는 그의 통찰은 왓슨과 크릭이 DNA 이중나선(double helix)을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생리학적 과정과 관련한 물리학과 물리화학의 모든 중요한 법칙들은 큰 수와 관련된 통계물리학의 엄격한 요구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도록 잘 보호되어 있다고 과거에는 생각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 견해가 오류라는 것을 안다. 곧 보게 되겠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원자 집단이, 정확한 통계적인 법칙성을 보이기에는 너무 작은 집단이 살아 있는 유기체 속에서 일어나는 매우 질서 있고 규칙적인 사건들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42)

 

이어서 그는 유전자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대에 유전자라는 개념은 이미 잘 정립되어 있었지만 그 물리적, 화학적 구조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었다. 따라서 유전자 한 개는 100만개 혹은 몇 백만 개 이하의 원자만 포함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기체나 액체 방울 속에서처럼 모든 원자들이 동일한 역할을 한다 하더라도 이 수는 너무 작다.......아마도 유전자는 커다란 단백질 분자이며, 그 속의 원자, , 헤테로 고리, 각각은 다른 원자, , 고리와 다른 역할을 할 것이다.”(55) 바로 이런 이유로 수많은 원자들의 집합체에 적용되는 통계물리학은 소수의 원자들의 집합체인 분자 구조의 유전자의 작동방식, 즉 유전 메커니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슈뢰딩거는 통계물리학 대신 양자역학을 적용해 유전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돌연변이다. 그는 돌연변이는 명백히 양자 뛰어넘기(quantum leap) 현상에 해당한다고 보았으며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뛰어넘기식이라는 말은 변화가 아주 크다는 뜻이 아니라 불연속적이라는, 그래서 변화한 극소수의 개체와 변화하지 않은 개체 사이에 중간 형태가 없다는 뜻이다. 드브리스는 그런 변화를 돌연변이로 명명했다. 중요한 것은 불연속성이다. 그 불연속성은 물리학자로 하여금 양자이론을 떠올리게 한다.......실제로 돌연변이는 유전자 분자 내에서 일어나는 양자 뛰어넘기에서 비롯된다.”(63)

 

돌연변이는 자연선택과 함께 생명의 진화를 추동하는 원천이다. 여기에 양자역학이 작용한다는 것은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도 일정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확장될 수 있다. 적어도 종의 다양성과 복잡성이 상당 부분 돌연변이에서 비롯된다면 이런 생각은 충분히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슈뢰딩거는 막스 델브뤼크(Max Delbruck)의 이론을 바탕으로 이런 결론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런 생각을 했던 최초의 인물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이런 사고를 일반에게 알리는 데는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슈뢰딩거가 이 책을 통해 제시한 가장 중요한 명제는 유전자를 형성하는 데 비교적 적은 숫자의 원자들이 참여하므로 통계물리학의 원리가 적용될 수 없지만 양자역학을 통해 유전자의 안정성과 영구성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유전자는 분자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감히 말하건대 유전자가 분자라는 추측은 오늘날 상식이다. 양자이론에 익숙하든 그렇지 않든, 그 추측에 반대할 생물학자는 거의 없다........따라서 우리는 유전물질이 분자라는 설명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안심하고 단언할 수 있다. 물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유전물질의 영속성을 설명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99)

 

이와 같이 유전자의 분자설을 강조하면서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보여주려는 것은 단지 유전자가 분자라는 이론을 채택할 경우 그 작은 암호문 속에 고도로 복잡하고 세분화된 발생 계획과 그 계획을 실현하는 모종의 수단을 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105)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런 대목들이 왓슨과 크릭에게 DNA 이중나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었다고 여겨진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유전자가 분자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 다음 세대로 유전 정보를 전달한다는 것은 질서로부터 질서라는 주제에 관한 것이다. 슈뢰딩거는 열역학적 붕괴를 견뎌내고 유전 정보를 미래 세대에 전달하기 위해서는 유전자가 (단백질 합성에 관한) 정보를 그 구조 속에 암호문자로 저장하고 있는 어떤 종류의 비주기적 결정이라고 제안했으며 이는 훗날 DNA 구조에 대한 연구에 의해 사실로 확인되었던 것이다. 실로 대단한 통찰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슈뢰딩거가 이 책에서 다룬 또 다른 쟁점은 무질서에서 질서라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이른바 주변으로부터 에너지를 획득해 질서를 유지하는 생명의 고유한 특성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슈뢰딩거는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 1844~1906)의 엔트로피(entropy) 개념을 도입해 생명 유지 현상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부분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과정, 사건, 일 한 마디로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일이 일어나는 장소 근처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유기체는 끊임없이 자신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따라서 살아있는 유기체는 최대 엔트로피 상태, 즉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유기체가 죽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환경으로부터 끊임없이 음의 엔트로피를 끌어들이기 때문이다.”(120) 그가 말한 음의 엔트로피 개념은 오늘날 네겐트로피(negentropy)라고 불린다. 이 개념이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질서를 유지하는 생명체의 기능을 설명하는 데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 부분은 생물학자들의 몫이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창출하는 생물의 특성은 분명 무생물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볼츠만이 창안한 통계역학의 중심 개념이다 그렇다면 생명 현상과 관련해 고전물리학이 기여한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해 슈뢰딩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살아 있는 물질의 구조에 대해 아는 바를 종합할 때 우리는 유기체가 평범한 물리학 법칙들로 환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해야 한다는 것이다.......유기체의 구조는 지금까지 우리가 물리학 실험실에서 연구한 그 어떤 것과도 다르기 때문이다.”(129) 이것이 앞서 말했던 비주기적 결정으로서 유기체의 특징이다. 그러면서 슈뢰딩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통계물리학은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엔트로피 증가 법칙을 임시방편적인 가정 없이 분자적인 무질서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음을 밝혀냄으로써 장막 너머를 보게 해주었고, 원자와 분자의 무질서에서 나오는 엄밀한 물리학 법칙의 위대한 질서를 보여주었다........그러나 통계물리학은 살아 있는 유기체 속에서 소수의 원자들이 산출하는 고도의 질서를 성명하지 못한다.”(134)

 

이런 이유로 슈뢰딩거는 생명 현상의 물리적 기초를 설명하는 이론으로서 물리학의 한계는 고전물리학에만 적용되며 양자역학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생명의 본질을 질서에서 질서, 그리고 무질서에서 질서를 창출하는 메커니즘에서 찾으려 했으며 후자의 경우에는 통계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전자의 경우는 오로지 양자역학을 이용해서만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의 물리학적 기초를 제시하려 했던 것으로 결론적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명 현상에 만나는 질서는 다른 원천에서 나온다. 질서 있는 사건을 산출하는 메커니즘무질서에서 질서를산출하는 통계적인 메커니즘질서에서 질서를 산출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메커니즘, 그렇게 두 가지인 것으로 보인다..........명백히 확인할 수 있듯이, 살아 있는 물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은 많은 부분 질서에서 질서를 산출하는원리에 기반을 둔다........우리는 유기체 내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새로운 유형의 물리학 법칙을 기꺼이 찾아야 한다.......그 새로운 원리는 전적으로 물리학적이다. 그 원리는 다름 아닌 양자이론의 원리라고 나는 믿는다.”(135) 당시 생물학을 전공하지 않은 물리학자가 이런 주장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단 슈뢰딩거가 생명의 기원에 관해서는 어떤 통찰도 제공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다.

 

■ 《정신과 물질(Mind and Matter): 정신의 단일성에 관해

슈뢰딩거가 이 작은 책을 출간한 것이 1958년이니 작고하기 3년 전이며 생명이란 무엇인가?출간과는 14년 정도 간격이 있다. 그럼에도 이 두 책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는데 이것을 생명이란 무엇인가?<후기: 결정론과 자유의지에 관하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슈뢰딩거가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쓸 당시 이미 이 책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 후기에서 슈뢰딩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아가 여럿이라는 관념, 정신이 복수라는 관념은 어떻게 생겨날까? 의식은 몸이라는 제한된 구역에 있는 물질의 물리적 상태에 의존하며 그것과 직접 연결된다. 그런데 몸은 아주 많이 존재한다. 따라서 의식 또는 정신의 복수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그럴듯한 가설처럼 보인다.”(146)

 

이런 일반적인 견해에 대해 슈뢰딩거는 자신이 젊은 시절 심취했던 베단타철학의 입장에서 반론을 제기하려는 의도에서 이 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신의 단일성을 주장했다. 베단타철학에서 말하는 불이일원론(non-duality)과 같은 입장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정신(의식)과 물질에 대한 그의 궁극적인 입장인지는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 입장에서 양자 현상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닐스 보어가 말한 입자-파동의 상보성과 관찰자효과를 수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슈뢰딩거가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실재론을 완전히 철회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에 덧붙여 슈뢰딩거는 나란 무엇인가?”라는 영원한 질문에 대한 자신이 견해를 후기에서 밝혔는데 이 책 정신과 물질은 이에 대한 답을 구하는 여정으로 볼 수 있다. 그는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일하게 가능한 대안은 의식이 단수라는 직접적인 경험을 고수하는 것이다. 의식이 복수라는 것은 알려진 적이 없다........그러나 우리 각자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 전체가 한 단위를 형성하며, 그 단위가 다른 어떤 사람의 단위와도 다르다는 명백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단위를 라고 부른다. 과연 그 는 무엇일까? 당신이 를 세밀히 분석한다면, 그것이 개별 자료(경험과 기억)들의 집합을 위한 밑바탕으로 캔버스에 불과함을 발견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148) 이것은 물질세계를 다루는 일반적인 물리학자로부터는 기대하기 어려운 진술이다. 그는 이미 물리학자의 한계를 넘어섰던 것이다.

 

이 책에서도 슈뢰딩거는 의식의 물리적 기초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또한 정신, 마음, 의식 그리고 영혼 등의 용어와 관련해서는 어떤 일관된 설명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보통 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논하는 경우 몸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몸을 제외한 의 나머지 부분은 정의하기 쉽지 않다. 여기에는 마음, 정신, 의식 또는 영혼이라 불리는 것이 포함될 것이다. 이들에 관해서는 내면세계라는 점 외에는 어떤 공통된 정의를 발견하기 어렵다. 예컨대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인간과 상징에서 마음은 의식보다 크다는 취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마음(psyche)'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의식 및 그 의식의 내용물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우리의 마음은 자연의 일부, 끝없는 수수께끼의 연속이다. 그런데 이 자연을, 이 마음을 어떻게 또라지게 정의하란 말인가?”(26) 그러면서 융은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마음을 의식과 동일시하면 우리는 중대한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즉 사람은 빈 마음으로 태어나 살아가면서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 빈 것을 채우게 된다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의식 이상의 어떤 것이다. 동물에게는 의식이 거의 없는 듯하지만, 많은 충동과 반응으로 보아 마음은 있는 듯하다.“(110)

 

개인적으로 의식은 그림을 그릴 때 캔버스와 같은 역할을 하며 이 위에 그려진 주관적 표상이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융의 생각과는 상반된다. 그렇지만 인지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가 명명해 널리 알려진 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의식의 주관적 체험, 즉 퀄리아(qualia)로서 곧 마음의 상태에 관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해석이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즐겁거나 슬프거나 한 것은 모두 주관적 체험이며 이는 곧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들이다. 한편 정신은 의식과 마음을 연결하는 가교로 해석하면 좋을 듯하다.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 자신이 의식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며 무슨 마음의 상태에 있는지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정신을 놓고 있으면 이 점을 간과하게 된다. 그리고 무의식은 반복된 학습을 통해 자각할 필요가 없어진 행위에 대한 정보가 축적된 상태로서 프로이트가 말한 성적 억압을 포함하는 과거 기억과 체험 및 정보의 저장고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는 필자의 해석이라는 점을 유의하기 바란다.

 

이런 개인적인 생각을 언급한 이유는 정신, 마음 및 의식의 관계에 관해서는 여전히 누구나 수용할 수 있는 설명이 없다고 생각해서다. 이 점은 슈뢰딩거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그가 의식의 물리적 기초라는 제목으로 다룬 것은 기본적으로 뇌의 의식 작용 간의 관계, 즉 차머스가 말한 의식의 쉬운 문제(easy problem)”에 관한 내용으로서 특히 새로울 것은 없다. , 물리학자로서 그 옛날에 이런 문제를 다루었다는 사실 자체는 놀라울 뿐이다. 그 이후에 이 분야에서는 엄청난 진전이 이루어졌으며 이런 면에서 슈뢰딩거가 특별히 기여한 바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신경과학자들의 뇌 연구는 대부분 의식의 쉬운 문제, 즉 뇌의 특정 부위와 의식 활동 간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왔기 때문이다. 이른바 신경상관물(neural correlates)은 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용어이다.

 

그럼에도 의식의 물리적 기초에 대한 슈뢰딩거의 논의에서 여전히 주목할 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는 우선 세계는 우리의 감각과 지각과 기억으로 구성되며 세계가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비판적인 논의를 전개했다. 처음부터 주체와 객체를 확연히 구분했다는 점에서는 슈뢰딩거는 일면 데카르트의 이원론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 의하면 주체는 뇌를 사용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를 관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실재론으로서 관념론을 부정한 것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뇌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세계는 빈 객석 앞에서 벌어지는 연극,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연극,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연극이 되었을까? 그렇다는 생각은 세계관의 파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157) 이것은 마치 의식 있는 관찰자가 없다면 사실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론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뒤에서 베단타철학의 입장에서 정신의 단일성을 지지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관념론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슈뢰딩거의 견해가 일관성이 결여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슈뢰딩거는 기본적으로 정신과 물질은 분리되어 있지만 일정한 접점을 가지고 있기에 결국 하나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이해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점을 뒷받침하기 위해 진화론의 관점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다룬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는 진화론을 다윈의 진화론에 국한하지 않고 여기에 라마르크의 진화론, 즉 용불용설의 핵심 내용을 접목한 것으로 확대 해석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리하르트 제몬의 므네메(mneme) 개념을 이용해 이런 융합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감각과 지각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행동으로 참여하는 어떤 사건이 똑같은 방식으로 매우 여러 번 반복되면 그 사건은 점차 의식의 영역에서 빠져나간다.......어떤 사건이 의식 속에서 점차 퇴색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적인 삶의 구조 전체를 위해 특별히 중요하다. 우리의 정신적인 삶은 전적으로 반복을 통한 학습 과정에 기반을 둔다. 리하르트 제몬은 그 과정으로 므네메(mneme) 개념으로 일반화했다.”(159) 므네메는 모든 생물에서 기억이 흔적으로 남아 다음 세대로 유전되는 성질을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리터드 도킨스가 말한 밈(meme)의 원조 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슈뢰딩거는 마음, 즉 여기서 말하는 정신은 기본적으로 진화과정의 산물로 보았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진화론의 입장을 수용했다. , 전통적인 진화론은 의식과 같은 정신적인 측면을 유기체의 생존을 위한 부수적인 현상으로 간주하는 데 반해 그는 정신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는 이런 차이의 근거를 진화론을 폭넓게 해석해 유전자를 통하지 않더라도 학습을 통해 유전되는 특성을 인정한다는 데서 찾았는데 이것을 다음의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라마르크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획득 형질의 유전을 부정한다 하더라도, 다시 말해서 다윈의 진화론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개체들의 행동이 종의 진화 방향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우리는 주장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일종의 유사-라마르크주의를 주장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167)

 

나아가 그는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므네메 개념을 이용해 기존 진화론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다윈주의의 기본 전제들을 전혀 바꾸지 않아도 개체의 행동이, 개체가 천성적인 자질들을 사용하는 방식이 진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아니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 라마르크 이론의 핵심은 매우 타당하다. 즉 특성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과 그 특성이 여러 세대에 걸쳐 목적에 맞게 발전하는 것 사이에는 부정할 수 없는 인과관계가 있다........다만 다윈주의에 대한 피상적인 해석에서 그 인과관계가 쉽게 간과될 뿐이다.”(177)

 

필자는 슈뢰딩거가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관한 논의에서 라마르크의 개념으로 보완된 이른바 확장된 진화론의 관점을 강조한 이유는 지식이나 정보가 개체의 반복된 학습을 통해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가라앉은 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형태로 다음 세대로 유전되어 행동의 변화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정신(의식)과 물질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시각을 가졌던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그는 이런 시각이 현대과학의 방법론에 의해 상당 부분 훼손된 것으로 보았다. 이 점은 객관화 원리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객관화 원리는 그가 강조한 두 가지 원리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자연의 이해 가능성 원리로 이것은 그리스 밀레토스학파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말했는데 여기에는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객관화 원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객관화 원리는 실재 세계 가설이라고도 한다면서 이것은 인간이 복잡한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채택한 일종의 단순화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즉 실재(reality)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과 지각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며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데 이 원리의 가장 큰 취약점은 이렇게 인식된 세계에는 인간의 감각이나 지각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이를 인지하는 주체의 주관적인 감각이나 지각을 철저하게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관찰자 효과(observer effect)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오직 우리 자신을 세계에서 배제하여 세계와 무관한 관찰자의 역할로 물러나게 하는 비싼 대가를 치름으로써만 적당히 만족스러운 세계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발생하는 가장 분명한 이율배반 두 가지만 언급하자. 첫 번째 이율배반은, 우리의 세계상이 경악스럽게도 무채색이며, 차갑고, 말이 없다는 발견이다.......두 번째 이율배반은 우리가 물질이 정신에, 혹은 반대로 정신이 물질에 작용하는 지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196)

 

이런 의미에서 슈뢰딩거는 당시 주류 과학적 사고에 기반을 둔 세계관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곧 데카르트-뉴턴의 이원론적, 기계적 세계관을 수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관련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라면 이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정신은 자신이 지닌 재료로부터 자연철학자들이 말한 객관적인 외부 세계를 건설했다. 정신은 자기 자신을 배제하는, 자신의 개념적 창조물로부터 물러나는 단순화 기법을 사용하는 것 외에는 달리 그 거대한 과제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정신의 창조물 속에는 창조자가 없다.”(200) 그는 과학의 세계가 끔찍하게 객관화되었기에 정신과 정신의 직접적인 표현인 감각들의 입지가 없어졌다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정신에 대한 슈뢰딩거의 기본 생각은 세계관을 구성하는 데 정신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관찰자효과에 대해서는 분명히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는 코펜하겐 해석에 비판적이었던 그의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주체(主體)는 감각하고 생각하는 존재로서 감각과 생각은 에너지 세계에 속하지 않고, 따라서 에너지 세계, 즉 물리세계에는 어떤 변화도 산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의식 있는 관찰자의 존재가 파동함수를 붕괴시켜 물질적인 실체를 드러나게 한다는 관찰자효과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슈뢰딩거는 관념론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편으로 슈뢰딩거는 젊은 시절 베단타철학에 심취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정신(여기서는 의식)에 관한 베단타철학의 입장에 상당히 기울어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정신의 단일성에 대한 그의 믿음이 이를 방증한다. 여기서 정신의 단일성이란 비록 다수의 인간이 개별적으로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정신을 드러내는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브라만(Brahman)이 아트만(Atman)이고 아트만이 브라만이라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특히 슈뢰딩거는 서양 과학과 동양의 동일성 이론(브라만이 아트만이라는 주장)을 결합함으로써 정신의 단일성과 다수성의 역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데서 분명히 확인된다. 이와 관련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안은 오직 하나, 즉 정신들 혹은 의식들을 통일하는 것이다. 정신의 다수성은 다만 현상일 뿐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정신뿐이다. 이것은 <우파니샤드>의 이론이다........당신은 인종과 종교가 서로 다르고 서로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며 수백 수천 년 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살아온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기적적인 일치에 놀라게 될 것이다.”(213) 이 대목에서는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영원의 철학을 읽는 것 같다. 그러면서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지만 모든 정신이 서로 간에 그리고 지고의 정신과 동일하다는 신비주의의 가르침을 옹호하기 위해, 또한 라이프니츠의 무시무시한 모나드 이론에 반대하기 위해 한 가지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의식은 결코 복수로 경험되지 않고 오직 단수로 경험된다는 경험적인 사실이 동일성 이론을 뒷받침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내가 이 논의를 하는 목적은 동일성 이론과 우리의 과학적 세계관을 냉정함과 논리적 정확성을 잃지 않으면서 통합하는 미래의 작업을 예비하는 것이다.(215) 이 대목에서 과학과 영성의 조화를 추구하려는 열려있는 과학자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이 책에서 슈뢰딩거가 제기한 문제들 가운데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이것은 그만큼 그의 문제의식이 시대를 앞서 갔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또한 과학과 종교에 대한 견해를 밝히면서 그 시절에 이미 과학이 이들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던 점도 이채롭다. 이를테면 종교에서 제기하는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과학은 시간의 점진적인 관념화(idealization)를 통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하면서 플라톤의 이데아론, 시간과 공간의 주관성에 대한 칸트의 선언 그리고 시공간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해석을 구체적인 사례로 들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결코 종교에 배타적인 인물이 아니었으며 베단타철학에 심취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정신과 물질의 문제를 다룬 이 책의 마지막 주제를 감각의 신비를 채택한 것은 인간은 감각의 세계 너머를 인식할 수 없다는 한계를 강조함과 동시에 이를 통해 구축된 과학이론의 한계, 나아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의 한계를 논하려는 의도에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다음과 같이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입장과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는 말을 했다. 그러나 발전된 장치들이 관찰에 아무리 많이 동원되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모든 정보는 살아 있는 사람의 각각 지각에 의존한다. 또한 직접적인 관찰에서든 장치를 동원한 관찰에서든 측정값을 최종적으로 읽는 것은, 그러니까 측정된 각도나 거리, 혹은 현미경으로 측정한 거리, 혹은 사진 필름에 기록된 스펙트럼선들의 사이의 거리를 최종적으로 읽는 것은 관찰자이다.......누군가 읽지 않는다면, 아무리 정확한 기록도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없을 것이다.”(263) 뜬금없이 이것은 무슨 말인가? 이 대목에서는 관찰자효과를 수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슈뢰딩거가 정신과 물질에 대한 근본적으로 어떤 견해를 가졌는지 여전히 헷갈리고 있다. 그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실재론자의 입장에서 양자 현상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에 비판적이었던 반면, 정신의 단일성에 대해서는 우파니샤드와 같이 불이일원론의 입장에서 관념론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슈뢰딩거는 이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하고자 했다고 한다: 1) 모든 과학적 지식은 감각 지각에 기반을 둔다는 사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형성된 과학적 자연관은 모든 감각 지각을 결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감각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은 곧 인간의 감각이 배제되어 있는 과학적 이론에는 명백히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기 때문에 감각을 포함하는 인간 정신 내지 의식을 포괄하는 세계관이 요청된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슈뢰딩거가 전하려고 했던 근본 메시지에 가깝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정신과 물질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 일정 역할을 한다.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가에 대해서는 과학과 베단타철학의 도움을 통해 일반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지만 깊이 있는 책

필자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은 몇 해 전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이 두 개의 작은 책에 대한 리뷰가 매우 빈약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비록 일부 사람들에게는 과학의 고전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이 책이 여전히 일반인들에게서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다시 읽고 정리하게 되었는데 여전히 만만하게 읽을 책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소화하기 위해서는 분자생물학, 진화론, 통계역학, 양자역학, 의식이론, 마음이론 등 실로 다양한 분야의 과학 이론에 일정 수준의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기에 필자가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그럼에도 다시 읽었던 탓인지 슈뢰딩거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기에 이제는 이 책을 소개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혹자는 수십 년 전에 쓰여진 과학 분야의 책은 과학이론의 발전 속도를 감안할 때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별다른 가치가 없을 것이라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결코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퇴색할 그런 책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책이 최신의 과학 지식을 전달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의 전형(典型)을 보여주었으며 과학의 한계를 명확하게 지적했기 때문이다. 감출 수 없는 호기심에 추동되어 자신의 과학적인 사유 능력을 총 동원해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한 대답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은 마치 어려운 항해 길에 오르는 선장의 태도처럼 진지하다. 이런 수준의 책을 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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