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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어디까지 용인(容認)되어야 하는가?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6-04-26 14:01
조회
353

오늘날 글로벌 차원에서 가장 심각한 경제적 이슈로는 단연코 불평등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주류 경제학자들은 분배 문제 또한 시장원리에 따라 결정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소극적인 입장을 유지해 왔다. 이런 입장을 대변했던 대표적인 경제학자로는 미국 시카고대학의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교수를 들 수 있다. 그는 저서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자본주의는 부유한 노동계층을 양산해 중산층 형성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불평등을 완화하는데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불평등을 완화한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한때 적지 않은 경제학자들이 이와 같이 보수적인 그의 견해를 지지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1980년 이래 작은 정부를 내세우며 규제완화, 민영화, 재산권 보호, 금융자유화, 노동시장 유연성 등을 핵심으로 미국과 영국에서 실시된 신자유주의 정책의 후유증으로 소득분배의 불평등이 지나치게 악화되어, 시장원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금과옥조(金科玉條)효율성자체를 훼손시킬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또한 IMF 수석경제학자와 시카고대학교 경제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인도 중앙은행총재로 있는 라구람 라잔(Raghuram Rajan)은 자신의 저서 폴트라인에서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로 촉발된 금융위기의 진정한 원인으로 불평등을 지적했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미국에서 불평등이 악화된 것을 확인한 정치인들이 교육과 같이 장기적으로 불평등을 완화하는 방법 대신, 당장 효과를 내는 방법으로 자격 미달인 사람들도 모기지를 이용해 집을 구입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한 것이 서브프라임 사태를 초래한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불평등이 거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제학자이자 금융저널리스트인 스튜어트 랜슬리(Stewart Lansley)도 영국의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의 저서 우리를 위한 경제학은 없다에서 불평등이 금융위기와 저성장 그리고 높은 실업률 등 모든 문제의 근원임을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1980년대 신자유주의를 채택한 미국과 영국에서 임금 인상이 생산성 향상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었으며, 그 결과 국민소득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속적으로 하락한 반면 자본가의 몫인 이윤(자본이득 포함)이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이런 불평등의 확대가 최근 금융위기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라구람 라잔의 주장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이들의 주장이 옳다면 현재와 같이 금융자본의 지배로 인한 불평등이 지속되는 한 앞으로도 유사한 금융위기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 점이 중요하다.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맥락에서 불평등 문제의 심각성을 깨우쳐 준 또 다른 경제학자로 미국의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저서 불평등의 대가』(2013)에서 다양한 사례와 자료를 바탕으로 미국에서는 이미 불평등이 경제적 효율을 훼손시킬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협할 정도로 악화되었음을 강조하면서, 그 근본 원인은 정부의 정책에 있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나아가 후속작인 『The Great Divide』(2015)에서도 불평등에 따른 양극화 현상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급기야 그는 최근 저서 『Rewriting the Rules of the American Economy』(2016)에서는 경제 전반의 여러 규칙들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

  

과거 1970년대 미국 경제학자 아서 오쿤(Arthur Okun)이 저서 Efficiency and Equality: The Big Tradeoff에서 효율성과 평등은 서로 상충관계에 있다고 지적한 이래, 효율성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평등의 희생이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스티글리츠 교수는 이것조차 1퍼센트의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지대, 즉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고정관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언론을 장악한 후 구조화(framing)’를 통해 관념 전쟁에서 승리한 이래 일반인들에게 이런 생각을 심어주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유지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여기서 구조화란 자신이 의도한 데로 문제를 설계한 후 원하는 결과를 얻는 행위를 뜻하는 행동경제학 용어다. 한 마디로 모든 권력이 극소수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기에 이런 상태로는 불평등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으며, 획기적인 의식의 전환의 요청된다는 것이 그의 핵심 메시지다. 미국이 이 정도니 한국의 경우는 어떠할지 가히 짐작이 간다.

 

불평등 문제를 글로벌 차원으로 점화시킨 사람은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이다. 그는 역작 21세기 자본에서 방대한 자료를 이용해 서구의 주요 국가들에서 소득과 자본의 불평등이 어떻게 전개되어왔는지 설명했는데, 자신의 연구 결과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했다: “본 연구의 독창성은 18세기부터 21세기까지 자본/소득 비율의 변화에 초점을 맞춰, 자본-노동 소득분배율과 최근의 국민소득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몫의 증가라는 문제를 좀더 광범위한 역사적 맥락에서 최초로 다루었다는 데 있다.”(앞의 책, 266)

 

그가 서구 여러 나라의 역사적 자료를 이용해 분석한 결과는 한마디로 우울하다. 역사적으로 서구 사회에서 소득과 자본의 불평등이 가장 악화되었던 시기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였다. 그런데 이후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해 전통적인 지주 및 귀족 계층의 자본이 상당부분 해체됨으로써, 1950년대부터 1970년대 까지는 소득과 자본의 불평등이 상당히 완화되어 이상적인 자본주의 시대가 실현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현상임이 드러났고, 1980년대부터는 이른바 자본의 반격이 이루어져 최근에는 다시 20세기 초반과 같이 불평등이 악화되었다. 그는 신자유주의의 대두를 자본의 반격이라고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나아가 그는 이런 추세라면 2100년 무렵에는 어떤 사회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평등이 악화될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여기서 그의 주장을 상세히 소개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가 장기적으로 불평등이 계속 악화될 수밖에 없다고 예측하는 중요한 근거는 다름 아니라 자본수익률(r)과 경제성장률(g) 간의 격차다. 그는 역사적으로 항상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상회해왔으며 이로 인해 자본/소득 비율이 높게 유지되었고, 그 결과 자본소득분배율이 일정 수준이상 높게 유지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그가 주장한 자본주의 제1, 2 기본법칙의 배경을 간략하게 줄여 말한 것이다.

 

피케티의 계산에 의하면 1700년부터 2012년에 이르는 대략 300여 년에 걸친 기간 중 세계적인 첨단 기술을 보유한 국가라 할지라도 연평균 1.5%를 넘는 성장률을 기록한 사례가 없다고 한다. 반면 자본수익률은 역사적으로 4~5%를 유지했으므로 r > g인 관계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이며 만성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관계가 유지되는 한 자본의 우위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와 같이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시대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피케티가 주장한 것 이상으로 불평등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2008년 금융위기를 경험한 이후에도 금융자본의 행태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지금 글로벌 금융시장의 동향을 살펴보면 금융위기 이전과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때 주춤했던 헤지펀드들이 다시 활개치고 있으며, 여전히 천문학적인 규모로 매일매일 다양한 파생상품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 나아가 금융기관을 비롯한 기업이나 개인들도 부채비율을 줄이기는커녕 저금리에 편승해 오히려 부채비율을 늘리고 있는 실정이다.

 

피케티도 지적했듯이 자본의 규모가 클수록, 즉 부유한 사람일수록 자본수익률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으며, 이로 인해 자본소득의 불평등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금융자본의 지배가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슈퍼경영자의 부상으로 인한 노동소득 불평등 확대와 금융자본의 지배로 인한 자본소득 불평등의 확대라는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해,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 총체적인 소득분배의 불평등은 점점 더 악화될 것이다

 

그러면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한국의 경우 다른 선진국에 비해 조세수입 대비 탈루소득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대부분 자본소득에 해당한다고 간주해도 무리가 없다. 공식통계에 의하면 2000년대 이래 우리나라에서 노동소득분배율은 대략 60% 안팎에서 소폭 변동해왔다. 이것은 자본소득분배율이 대략 40% 안팎을 유지해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 탈루소득의 비중을 감안한다면 자본소득분배율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선진국의 경우 자본소득분배율이 대략 30% 안팎인 것과 비교해 노동소득에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이 지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국민소득의 분배가 더욱 불평등해지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해왔다.

 

불평등 연구의 대부라 할 수 있는 경제학자 앤서니 앳킨슨(Anthony Atkinson) 교수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불평등에는 "좋은 불평등"과 "나쁜 불평등" 이 있다. 전자는 과감하게 리스크를 감수하거나 혁신을 이룩하는 등 남다른 노력에 기인한 불평등이라면, 후자는 지대추구행위나 탈세 등 불공정한 방법에 기인한 불평등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이후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좋은 불평등보다는 나쁜 불평등이 압도적이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일일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고 본다. 현재 소득과 부의 상위 10%, 나아가 1%에 속한 사람 가운데 자신의 근면과 창의력으로 현재의 부를 이루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이런 이유로 한국 사회에서 불평등의 문제는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되는 국가의 지상과제인 것이다.

 

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내세웠던 경제민주화는 향후 한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서 핵심은 공정한 소득분배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다모든 나라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기준을 마련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각 나라의 역사적·문화적·경제적 상황을 감안해 국민들이 용인(容認)할 수 있는 최소한의 분배 기준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정부는 각계 전문가들과 함께 객관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람직한 소득분배의 기준을 마련하는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이것은 진정한 국민적 통합을 위해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차대한 사안이다. 특히 현재와 같이 지대추구세력이 정치와 경제 양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것이 정부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국민이 세금을 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는 공허한 정치적 약속의 남발을 자제하는 가운데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국가 비전을 제시해야 할 시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지하게 검토해 볼만한 대안 중 하나가 2013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쉴러(Robert Shiller) 교수가 저서 새로운 금융시대』(2013)에서 제안한 "불평등 연동 세제"이다. 이 제도의 특징은 소득 구간별 소득세를 고정시키지 않고 불평등의 정도를 반영해 세율을 탄력적으로 적용함으로써 불평등의 악화를 예방하거나 적어도 현재보다 더 불평등해지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피케티가 제안한 "누진적 글로벌 자본세"보다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현재 정부가 해야할 일은 소득세율 조정이라는 미봉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대안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 국민이 용인할 수 있는 불평등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런 후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이를 달성할 수 있는 장기적인 비전과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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