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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손 이야기(A Tale of Three Hands)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6-03-15 01:08
조회
3164

우리의 신체 가운데 실물경제와 관련해 자주 사용되는 부분은 ‘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상적으로 자주 접할 수 있는 것으로는 ‘큰손’과 ‘조막손’을 들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큰손은 주식시장에서 막대한 자금을 굴리는 투자자를 지칭하는 반면 조막손은 이른바 개미 투자자같이 큰손과는 비교도 안 되게 적은 규모의 자금을 운용하는 투자자를 말한다. 그런데 왜 경제주체의 활동을 나타내는 용어로 발이나 얼굴이 아니라 하필이면 손을 비유적으로 사용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 이유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의 비유가 널리 알려지면서부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손’과 관련해서는 약간의 오해가 있는 듯하다. 먼저 이 용어는 스미스가 고안한 것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 영국 경제학자 존 케이(John Kay)는 저서 ‘시장의 진실’(원제는 ‘Culture and Prosperity’)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의 은유에 담긴 구절은 일반균형이론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은 관세가 없어졌음에도 상인들이 국산품(영국 제품)을 계속 구매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 은유 자체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에서 따왔고, 맥베스는 스미스의 흥미를 돋우었다.”

 

케이가 말한 일반균형이론이란 완전경쟁의 가정하에서 이상적인 시장경제를 분석하는 균형이론으로 신고전파이론의 정수(精髓)다. 따라서 케이가 주장한데로 애덤 스미스는 이상적인 시장경제의 작동 원리를 간결하게 설명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가 이기심이 개별 경제주체의 행동에 중요한 동기를 부여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만으로 시장경제가 항상 이상적인 결과를 달성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마치 마법의 손인 것으로 오해해 시장만능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셈이다. 게다가 스미스는 이 용어를 자신의 대표적인 두 저서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에서 각각 한 차례씩만 사용하였다. 이것은 그가 이 용어를 빌려 자신의 핵심 경제철학을 나타내려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은유적인 표현 방식 때문에 채택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도 보이지 않는 손의 은유에는 뭔가 신비로운 기능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유발한다.

 

시장을 상징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응해 등장한 것이 정부를 상징하는 이른바 '보이는 손(visible hand)'이다. 그 이유는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손으로서 정부의 시장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단순히 개인의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의무에 초점을 맞춘 정부의 역할을 넘어서 본격적으로 시장에 개입하여 보이는 손으로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 세계 대공황 무렵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 자유방임적인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난 이래 보이지 않는 손과 보이는 손의 상대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은 반복되어 왔다. 이에 대해서는 아나톨 칼레츠키(Anatole Kaletsky)의 저서 『자본주의 4.0』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그 핵심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자본주의 구분

시기

주요 특징

자본주의 1.0

1776년 미국 독립과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출간 ~ 1932년 대공황

사유재산과 이윤추구 동기를 동력으로 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 정치와 경제는 별개라는 자유방임사상의 지배. 사상적 기반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찾을 수 있음.

 

자본주의 2.0

 

 

1930년대 초 금본위제 포기와 뉴딜정책 ~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과 통화시스템의 붕괴

뉴딜정책으로 상징되는 정부의 역할 강조, 시장실패로 인한 시장에 대한 불신, 1971년 미국의 금태환 정지와 오일 쇼크. 사상적 기반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일반이론’에서 찾을 수 있음.

자본주의 3.0

1980년대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의 레이거노믹스에 기초한 신자유주의 정책 실행 ~ 시장 근본주의의 득세와 2008년 금융위기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정부의 규제완화, 민영화, 자유시장 기능 강화, 워싱턴 컨센서스, 인터넷 거품, 부동산 거품. 사상적 기반은 밀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에서 찾을 수 있음.

자본주의 4.0

2009년 금융위기 이후 ~ 현재

정부와 시장의 불완전성에 대한 철저한 인식, 스마트한 정부와 스마트한 시장의 상호작용에 대한 강한 기대, 총수요 관리정책 유지, 금융시장 규제 강화, 적응성 혼합경제 지향을 목표로 함.

 

 

여기서 굳이 이런 형식으로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을 일별(一瞥)한 이유는 이제는 정부와 시장 중 어느 하나가 주도적으로 국민경제의 난제(難題)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나아가 칼레츠키는 비교적 낙관적인 입장에서 자본주의 4.0 시대에는 스마트한 정부와 스마트한 시장의 상호작용에 의해 과거와 같은 위기를 더 이상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가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고 생각한다. 2008년보다 더 큰 경제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은 여전히 상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학자 및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는, 문자 그대로 총체적인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만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지배하면서 수익률 게임을 계속하는 한 보이지 않는 손이 제 기능을 회복할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보이는 손 또한, 정부를 구성하는 주요 인사들이 도덕적 해이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는 한,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 역사적으로 정부의 경우 공개적으로는 공익을 앞세우면서 교묘한 방법으로 사익을 추구했던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지 않았던 적이 정말 희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이는 손의 긍정적인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다분히 연목구어(緣木求魚)에 가깝다. 그래서 시민들이 지금보다 의식이 깨어 선거뿐만 아니라 평소에 시민운동을 통해 정부 주요 인사들의 도덕적 해이를 철저하게 감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언론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손과 보이는 손 모두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마비된 손(palsied hand)’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지금과 같이 불확실성이 높고 변동성이 크며 복잡성이 증가하는 경제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용어다. 사실 이것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다. 그렇지만 필자는 여기서 그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스티글리츠는 보이지 않는 손을 패러디 해 불완전한 정보가 지배하는 시장의 상황을 마비된 손에 비유했다. 그가 말하는 불완전한 정보는 비대칭정보를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인도하는 경쟁의 힘에 의해 가격이 신축적으로 변동하면서 각종 자원을 적재적소에 배분한다는 시장의 이상적인 기능은 사라지고 불완전한 정보로 인해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고 자원도 더 이상 효율적으로 배분되지 않는 상황을 마비된 손에 비유한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마비된 손을 단순히 불완전한 정보로 인해 시장 기능이 마비된 상황 이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현실의 불완전경쟁은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을 중단시켰으며, 정부조직에 만연한 도덕적 해이는 보이는 손을 오염시켰다. 이에 덧붙여 금융자본의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현실에서 불완전 정보는 지금의 경제상황뿐만 아니라 미래의 경제상황도 암울하게 만드는데 일조(一助)하고 있다. 금융자본의 행태에는 거의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상황을 한 마디도 압축한다면 기존의 패러다임을 가지고는 현재 및 미래의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비유적으로 마비된 손으로 묘사하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외형적으로는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모두 불확실하고 변동성이 큰 현실에 그럭저럭 잘 대처하고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치 면도날 위를 걷는 것 같다. 위기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나쁘지만, 맹목적으로 간과하는 것은 더욱 나쁘다. 우리가 지금 그런 상황에 있다.

 

우리는 현재 경제적 상황을 결코 낙관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경제적·비경제적 요인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뭔가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다음 세대를 위해 지금 기성세대에게 주어진 의무다. 기성세대는 결코 이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정부만이 이런 의무를 수행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시대에 의식 있는 기성세댜라면 누구든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적어도 정부를 감시해야 하는 책임은 어느 누구도 면할 수 없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더욱 막강해진 금융자본의 위력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손으로 대변되는 시장의 기능은 점점 약화되고 있으며, 기존 방식의 정부 개입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시장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그리고 인터넷과 모바일 통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정보의 비대칭이 점차 완화되고 있지만 진정 중요한 정보의 비대칭인 사람의 감춰진 의도나 계획과 관련된 비대칭은 쉽게 완화되기 어렵다. 또한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 점점 확대되고 있는 현실은 시장과 정부의 기능을 모두 약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스티글리츠가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패러디해 “1퍼센트의, 1퍼센트에 의한, 1퍼센트를 위한 경제”라고 말한 것이 비단 미국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여기서 시장과 정부 그리고 시민단체 등 모든 주체들이 협력해 마비된 손을 고쳐서 ‘치유하는 손(healing hand)’으로 거듭 나도록 할 것을 제안한다. 치유하는 손이란 시장과 정부가 진정으로 협력해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용인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는데 최선을 다하며, 시장의 독과점을 완화시키는 정부의 본래 기능을 최대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시민들은 자본주의적 기업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분야에서 협동조합을 설립해 경쟁과 협력의 상보적인 관계를 실천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생활화하고 시장경제를 보완하는 것을 의미한다. 치유하는 손은 모든 사람들은 고립된 사회적 원자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라는 의식을 공유할 때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새로운 문명의 전환에 대비해야 하는 시점에 있으며 이는 우리의 의식의 전환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시야를 넓혀 세계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이 현재의 총체적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양식 있는 지식인들은 현재 전 세계적 차원에서 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경고하고 있다. 예컨대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21세기 자본』에서,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의 대가』에서 이구동성으로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쇠퇴시키고 양극화를 심화시켜 결국 장기침체를 초래할 것을 경고했다.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한계비용 제로 사회』에서 사물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커뮤니케이션과 에너지 시스템에 일대 혁명적인 변화가 올 것이며 이로 인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상당 부분이 공유경제로 대체될 것이며 이에 따른 커다란 지각변동을 경고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인구통계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해리 덴트(Harry Dent)는 『2018년 인구절벽이 온다』에서 베이비부머들의 은퇴에 따른 소비감축과 이로 인한 장기불황의 가능성을 예상하고 있으며, 투자전략가로서 국제금융에 정통한 제임스 리카즈(James Rikards)는 『화폐의 몰락』에서 향후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상 약화에 따른 국제통화시스템의 재편과 이로 인한 혼란을 예상하고 있다. 한편 진보적인 환경운동가면서 영향력 있는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인 톰 하트만(Thom Hartman)은 『2016년 미국 몰락』을 비롯한 일련의 저서에서 금융자본과 이에 영합하는 정치세력으로 인해 암울한 미국의 미래를 전망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미국의 문제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또한 물리학자이면서 사상가인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는 일련의 저서와 강연을 통해 새로운 생명관을 중심으로 하는 문명의 전환이 절실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이상 언급한 사람들 외에도 많은 양식 있는 지식인들이 한결같이 지구적 차원에서 생태적 위기와 경제적 위기를 경고하고 있다. 이들이 제시하는 처방은 과거의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의식 전환 절실하다는 것이다. 너와 내가 분리되어 있으며, 인간과 자연 또한 분리되어 있으므로 인간의 번영을 위해 자연은 얼마든지 약탈하고 파괴할 수 있다는 분리의식으로는 지금의 지구적 차원의 심각한 문제들을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면에서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는 불평등 또한 이런 분리의식의 산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분리의식의 한계를 넘어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하나라는 전체의식, 나아가 자연을 포함되어 있다는 생물권의식으로 확장해야 한다. 이것은 엄청난 공부와 실천을 바탕으로 의식을 전환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그렇지만 미래세대를 위해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런 노력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치유하는 손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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