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관련

시장가치와 비시장가치의 조화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6-08-02 17:18
조회
362

오래된 우리 속담 중에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산다”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한 사전적 해석에 의하면 돈을 벌 때는 천한 일이라도 마다 않지만 쓸 때는 떳떳하고 보람 있게 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필자는 여기서 ‘정승같이 산다’는 말에는 보람 있게 쓴다는 의미보다는 남들에게 과시하면서 산다는 의미가 더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설사 원래 의미가 맞는다 하더라도 이 속담은 우리의 사고를 오도(誤導)할 개연성이 있다. 아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속담대로 “개같이 버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도록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즉, 탈법 또는 불법의 차원을 넘어 각종 비도덕적 행위를 일삼으면서도 이 속담에 비추어 자신의 비열한 행동을 정당화시켰을 것이다. 

 

요즈음 세간에 회자되는 이런저런 사건들을 접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속담이 “정당하게 벌어 명예롭게 산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구전(口傳)되어 내려왔다면 우리 사회에서 금전만능주의의 횡포가 조금은 완화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원래 돈 자체는 좋거나 나쁘거나 하는 특성이 없다. 돈을 사용하는 사람의 성품이 고상하거나 천박하거나 할 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오로지 개인의 몫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하버드대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후속 작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사회를 “시장사회”라고 부르면서 “시장경제”와 구분하고 있다. 시장경제는 생산과 거래를 효율적으로 조직하는 경제체제로서 장점이 있는 반면, 시장사회는 우리가 지켜야 할 비시장적 가치, 즉 도덕적 가치를 구축(驅逐)함으로써 공동체의 기반을 약화시킨다고 비판한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무분별하게 모든 것을 돈을 주고 거래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이로 인해 우정, 사랑, 배려, 공평 등 공동체가 지켜야 할 가치들이 돈을 매개로 표준화된 거래에 밀려 점점 퇴색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이기심에 바탕을 둔 이윤 동기는 매우 강력하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자본주의가 외부로부터 이식(移植)된 나라의 경우에는 자본주의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부각되게 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기반이 되는 정신은 외면하고 오로지 이윤 추구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m)와 천민자본주의(vulgar capitalism)가 우리 자본주의를 묘사하는 자연스러운 용어가 되어 버렸다. 이것을 도덕적 자본주의(moral capitalism) 또는 건전한 자본주의(sane capitalism)로 업그레이드하는 방법을 없을까?

 

이에 대한 실마리를 일본 명치유신 시절 수많은 기업을 설립하고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렸던 시부사와 에이치(澁澤榮一, 1840~1931)의 사상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대목에서 일본인을 거론하는 것이 조금 어색할 수 있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데서는 국적이나 성별 및 나이는 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의 생각은 말년에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쓴 저서 『논어와 주판』에 잘 정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 때 그의 책이 관심을 끌었던 적이 있었지만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한 가운데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필자는 다시 한 번 그가 주장한 기업가정신을 언급하려 한다.

 

먼저 그의 이력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시부사와 에이치는 부유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였다. 사무라이 계급이 아니면 인간답게 살기 어려운 환경에서 시부사와는 고향을 떠나 처음에는 사회개혁운동에 참여했다가 이런저런 사연으로 마지막 도쿠가와 막부의 가신(家臣)이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관하게 되면서 새로운 인생길을 가게 되었다. 만국박람회에서 서구의 발전상을 직접 목격한 후 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상업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였기에 귀국을 미루고 2년간 유럽에 머물면서 서구 여러 나라의 현장을 직접 체험했다.

 

그사이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가 천왕에게 권력을 양위하는 명치유신이 이루어졌으며 새로운 근대화의 물결이 막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귀국한 시부사와는 약관 29세에 대장성 조세담당국장으로 공직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갈등으로 인해 33세가 되던 1873년 대장성을 사임하고 자신이 원래 원했던 비즈니스계에 진출하였다. 이때부터 시부사와의 놀라운 인생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후 시부사와는 일본 금융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수백 개의 기업을 설립해 사회에 환원하는 등 문자 그대로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일본 경제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또한 당시 일본이 한국을 합병하는 바람에 말년에는 일본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 대한한국에 불리하게 활동한 기록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적에는 한국의 기업인들이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부사와가 쓴 책의 주제는 『논어』의 기본정신인 인의도덕(仁義道德)과 이익을 추구하는 비즈니스 논리가 서로 상충되기 보다는 오히려 상호 보완적이라는 것이다. 즉 인의도덕에 기반을 둔 비즈니스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에게 이롭고 나아가 사회에도 이롭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공공선과 개인적 이익의 조화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시장적 가치(이윤)과 비시장적 가치(도덕)는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모름지기 그래야만 경제적 번영이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말한다.

 

시부사와는 이 책에서 『논어』의 기본정신은 결코 부귀를 천시하고 오직 인의도덕(仁義道德)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특히 중국 송나라 시절 주희를 포함해 신유학을 발달시킨 일단의 유학자들이 공자의 진정한 뜻을 왜곡해 오로지 정신적 가치만 강조하고 물질적 가치를 폄하하는 잘못된 전통을 수립했다고 비판한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므로 『논어』의 진정한 정신에 대해 더 이상 논하지는 않고 단지 저자의 입장을 가감 없이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려고 한다.

 

『논어』의 기본 정신에 대한 시부사와의 해석은 다음 문장에 잘 드러나 있다: “유학자들이 지금까지 공자의 학설에 대해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은 바로 ‘부귀 관념’과 ‘화식(貨殖) 사상’입니다. 그들이 『논어』를 해석한 바에 따르면 인의왕도(仁義王道)와 화식부귀(貨殖富貴)는 서로 물과 불처럼 절대 어울리지 못하는 상극입니다.........하지만 『논어』 20편을 샅샅이 뒤져 보아도 그런 뜻의 구절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지요. 아니, 오히려 부귀와 화식에 대해 그러한 논단을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이 점은 저자의 지적이 맞는 것 같다. 필자도 논어를 다시 읽어봤지만 부귀를 무조건적으로 천시하는 구절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생각은 『논어』에서 인용한 다음 두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 “부귀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바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부귀를 누리지 말아야 한다. 빈천은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버리지 말아야 한다.”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 “천하에 도가 있다면 드러내고, 도가 없다면 숨어라. 나라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는 데도 가난하고 비천하다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고, 나아에 올바른 도가 없는데 부유하고 고귀하다면 이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

 

이런 구절에 의하면 공자 또한 『논어』를 통해 청빈(淸貧)만이 아니라 청부(淸富) 또한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구절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부사와는 나름대로 『논어』의 근본정신에 대해 오랫동안 궁구(窮究)했던 것 같다. 그는 단순히 이익을 추구하는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자신의 확고한 경영철학을 가지고 비즈니스에 임하면서 개인적 이익과 사회적 이익의 조화를 추구했던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런 사고가 오늘날 가장 바람직한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의 요체라고 본다. 특히 사회적 책임을 공감한다는 면에서 시부사와 에이치는 한 시대를 앞서 갔을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 태동한 기업가정신보다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제시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경영학의 구루로 알려진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가 시부사와 에이치를 그토록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서구에서 비롯된 근대적 의미의 기업은 계속 진화해왔으며, 이에 따라 기업가정신도 다른 의미를 갖는 것으로 해석되어왔다. 시공을 초월한 기업가정신이란 개념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그만큼 기업이라는 것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역할과 성격을 가질 수 있는 신축적인 조직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업이 이윤을 추구한다는 기본 명제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단지 이윤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기술적인 면을 포함해 여러 면에서 어떤 방법을 채택할 것인가에 따라 기업의 성격이 달라지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기업가정신의 유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본다.

 

기업가정신은 보통 기업을 선도하는 사람들이 보유하고 있는 사업의 방법과 목적에 대한 철학을 반영한 혁신적인 태도를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업가정신은 비단 기업의 CEO뿐만 아니라 자신의 책임 하에서 주도적으로 크고 작은 일을 추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가정신은 CEO의 전유물이 아니다. 조그만 점포의 주인도, 대기업의 전문경영자도, 국가조직의 관료나 정치인 등 누구라도 기업가정신을 갖추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야 개인의 발전과 사회발전을 동시에 달성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기업가정신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지대추구행위(rent-seeking behavior)다. 한 사회에 지대추구행위가 만연하고 있다면 이것은 곧 기업가정신이 쇠퇴했다는 증거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일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혁신을 추구하고 과감하게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보다는 권력과 유착해 기득권을 유지·확대하는 데만 관심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기업가정신이 고사(枯死) 직전에 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흔히 거론되는 기업가정신의 덕목에 한국적인 기업 풍토를 감안해 한 가지 덕목을 추가하고 싶다. 다름 아니라 “명예를 존중하는 태도”이다. 여기서 명예란 기업가가 정당한 방법으로 사업을 영위해서 축적한 재산을 개인적, 가족적 한계를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 선용(善用)하려는 자세를 의미한다. 이것은 시부사와가 강조한 인의도덕의 현대적 해석이다. 즉, 과시적인 차원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에고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다 하려는 자세를 말한다. 이것은 자아의식의 한계를 극복하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개 같이 벌어 정승 같이 산다”는 속담이 어색하지 않다. 이것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도 좋다는 천민적 사고방식을 대변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런 의식 상태에서는 진정한 기업가정신이 육성될 수 없다.

 

이제는 우리 모두 변해야 한다. 앞의 속담은 “정당하게 벌어 명예롭게 산다”라는 새로운 격언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부사와가 인의도덕과 이익 추구를 상보적으로 파악한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필자는 “잃어버린 20년”으로 대변되는 일본의 장기 침체의 근본 원인은 오늘날 일본인들이 시부사와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일본의 장기침체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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