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관련

도덕적 해이의 스펙트럼과 파괴력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6-02-22 17:23
조회
315

온 나라를 비탄에 잠기게 했던 세월호 대참사가 발생한지도 벌써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정확한 사고 원인조차 모르고 있다. 과거의 실수를 통해 배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 시점에서 필자가 가장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 사건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었으며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에 대해 깊이 논의된 바가 없다는 점이다. 과거에도 이에 버금하는 대형 참사가 간헐적으로 발생해 우리를 경악케 했었다. 1960년대 경제개발을 시작한 이래 와우아파트 붕괴, 남영호 침몰, 이리역 화약폭발,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등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인재(人災)가 종종 발생했다. 그런데 지금도 이런 사고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저변에 근본적인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그것을 “도처에 만연한 도덕적 해이(ubiquitous moral hazard)”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도덕적 해이 자체보다도 이에 대한 불감증(不感症)이 더 큰 문제다.

 

도덕적 해이는 원래 19세기 후반 이래 보험산업에서 사용되던 용어로서,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위해 공적 자금이 투입되면서부터다. 막대한 공적 자금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도덕적 해이가 발생했지만, 당시에는 특별히 심각한 문제로 주목 받지 않았다. 그렇지만 도덕적 해이는 경제체제를 붕괴시킬 만큼 심각한 사회적 비효율을 초래할 수 있는 문제다. 2008년 금융위기도 도덕적 해이와 무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보험의 경우 상품의 특성으로 인해 보험에 가입한 후 사람들은 가입 이전과 달리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화재보험에 가입한 후에는 화재 예방 노력을 덜 한다거나, 의료보험에 가입한 후 건강관리를 소홀히 하거나 또는 보험이 없던 경우에 비해 자주 병원을 이용하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나아가 보험금을 노리고 고의로 방화를 하거나 의사와 공모해 허위로 칭병(稱病), 입원하는 것 등은 악질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생명보험에 가입한 후 피보험자를 살해하는 것도 극단적인 도덕적 해이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도덕적 해이는 계약 당사자 가운데 한쪽인 보험 가입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계약 내용의 일부를 지키지 않는 간단한 것부터 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악의적인 행동 등 다양한 경우를 포괄한다. 따라서 이런 다양한 도덕적 해이의 스펙트럼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인 요소를 이해하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다. 그것은 도덕적 해이란 근본적으로는 사람들 간의 비대칭정보로 인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도덕적 해이가 경제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걸출한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Kenneth Arrow)가 1960년대 초 의료보험과 도덕적 해이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후부터다. 그 후 도덕적 해이는 보험산업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계약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임이 확인되었으며, 그래서 주인-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로 일반화되었다. 통상적으로 주인은 계약을 통해 대리인에게 권한의 일부를 위임(delegation)하게 되는 데, 이후 대리인이 어떤 행동을 할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 감춰진 행동(hidden action)으로 인한 비대칭정보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리인은 원래 정신에 따라 주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것이 도덕적 해이인 것이다. 보험의 경우 보험회사는 주인, 보험가입자는 대리인에 해당하며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주식회사의 경우 주주는 주인, 전문경영자는 대리인에 해당한다. 민주국가에서 국민은 주인,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자들은 대리인에 해당하며 지역구 주민은 주인, 국회의원은 대리인에 해당한다. 사회 여러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도덕적 해이가 만연한 경우를 상상해보라. 도덕적 해이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비효율을 초래하기 때문에 그런 사회는 쇠퇴할 수밖에 없다. 과거 공산주의 소련이나 동구권 여러 나라들의 몰락은 사회 전반에 만연한 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문제는 대리인들 대부분이 종종 이 점을 망각한다는 데 있다. 이것은 특히 권력 행사와 관련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의 행동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대리인이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는 경우라도 예외가 아니다. 유대인 격언 중에 자동차 문을 잠그는 것은 도둑을 예방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선량한 사람이 타인의 차 안에 있는 물건에 유혹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말이 있다. 이와 같이 도덕적 해이는 개인의 도덕심을 함양하는 노력보다는 법과 제도를 정비해 그런 행동을 하지 않도록 적절한 인센티브를 제공함으로써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은 이를 위한 기본 조건이며,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성과급제도, 스톡옵션, 각종 포상제도 등은 모두 도덕적 해이를 예방하기 위한 수단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도덕적 해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방안은 적절한 인센티브 설계(incentive design)에 있다는 것이 경제학의 기본 관점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와 함께 건전한 사회규범(social norm)이 상보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보상과 처벌이 외재적 동기를 부여한다면, 건전한 사회규범은 내재적 동기의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해이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는 자급자족적인 사회뿐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본인이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하므로 원천적으로 도덕적 해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회가 점점 고도화․전문화됨에 따라 자신이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대부분의 업무를 다른 사람(전문가)에게 위임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복지국가의 이상을 지향하는 사회일수록 공적 부문이 비대해져 다양한 형태의 위임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어느 사회에서든 전문가 집단과 공무원 집단은 도덕적 해이를 범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들 대리인이 특별히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보의 비대칭으로 인해 그리 행동하도록 유혹을 받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런 유혹이 너무 강해서 높은 도덕성을 갖춘 사람이라도 외면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문제는 도덕성 회복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주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대리인 자신에게도 유리하도록 시스템을 설계한다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예를 들면 권력 행사와 관련해서 대통령은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사람을 임명하는 데 보다는 누가 임명되든 주인인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하는데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외환위기 이후 도덕적 해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도덕적 해이가 얼마나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회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노력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역대 어떤 정부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센티브 설계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법과 제도를 정비한 적이 없었다. 즉, 시스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사회적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은 도덕적 해이와 무관한 것처럼 공언해왔지만, 이들의 도덕적 해이는 이미 오래 전에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업부문에서도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도덕적 해이는 더욱 악화되는 경향이 있다. 정경유착(政經癒着)이란 이로 인한 광범위한 도덕적 해이 현상을 총칭하는 용어다. 나아가 종교계와 교육계마저 도덕적 해이의 덫에 빠져 있는 현실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이와 같이 한국 사회에서 총체적인 도덕적 해이는 필자가 주장하는 코리아 프리미엄(Korea Premium)의 실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요인이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정도에 따라 여러 급(級)으로 분류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이에 따라 적절한 인센티브 설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가장 심한 도덕적 해이는 1급 도덕적 해이, 그 다음은 2급, 3급 도덕적 해이와 같이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분류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도덕적 해이의 급수에 따라 단순히 금전적 보상을 기반으로 하는 인센티브 설계라는 경제학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한 경우도 있고, 때로는 금전적 보상보다는 사회규범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두 가지 방법을 적절히 혼합하는 것이 바람직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기업에서 하급 직원의 직무태만과 같은 조그만 도덕적 해이는 성과급과 같이 금전적 보상을 기반으로 하는 인센티브 설계를 통해 어느 정도 해결 가능한 반면, 자신의 직권을 남용한 교묘한 도덕적 해이는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사회규범을 통한 도덕적 접근이 유용할 수 있다. 심각한 도덕적 해이는 결국 도덕 수준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도덕적 해이의 스펙트럼을 면밀히 관찰한 후 그 정도에 따라 적절한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주변 사람들의 평판을 의식하게 되어 있다. 이것을 적절히 이용하려면 우선 건전한 사회규범이 확립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는 오래 전부터 건전한 사회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다보니 사람들의 가치관에 문제가 생겨, 도덕적 해이 불감증에 걸린 것 같다. 그래서 교묘하게 악의적인 도덕적 해이를 범하고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공직자나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다수 존재한다. 만약 부정한 방법으로 뇌물을 수수한 공직자의 부인이나 자녀들이 부당한 돈으로 호화롭게 사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로 사회규범이 잘 정립되어 있다면 부당한 뇌물수수라는 도덕적 해이 현상은 상당히 완화될 것이다. 

  

필자는 인센티브 설계와 건전한 사회규범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도덕적 해이를 예방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믿는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도덕적 해이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인터넷과 모바일 기기를 이용한 정보혁명으로 비대칭정보의 문제가 상당히 완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감춰진 행동으로 인한 도덕적 해이 문제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적절한 인센티브 설계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고, 건전한 사회규범이 형성된 후 이 두 가지 요소가 효과적으로 조화를 이룬 경우에만 도덕적 해이를 일정 수준이하로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기득권을 일부 포기한다는 대단한 결심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의미 있는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모두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한 도덕적 해이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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