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관련

은행의 목표는 무엇인가?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9-02-19 09:17
조회
349

시장경제는 크게 실물시장과 금융시장으로 구분되는데 나라에 따라 두 시장의 상대적 비중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은 어떤 나라에서든 금융시장의 비중이 점점 더 커져왔다는 사실이다. 금융의 원래 목적은 실물시장에서 생산과 거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실물이 주역이고 금융은 조역을 맡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 관계가 역전되어 금융시장이 실물시장의 성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이른바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역전 현상이 고착되었다. 

 

시장경제에서 금융시장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금융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경제를 상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런 경제에서는 현재와 미래, 그리고 경제주체들 간 자금 거래가 불가능하므로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도 선택의 자유가 크게 위축된다. 따라서 경제주체들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해 준다는 점에서 금융은 개별 주체의 복지 향상과 사회복지 향상을 위해 불가결하다. 그런데 현재와 같이 금융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2008년 금융위기는 그런 부작용이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이다.

 

금융시장의 중심은 중앙은행을 필두로 하는 은행 시스템이다. 왜냐하면 금융거래의 기본 단위인 돈, 즉 통화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현금통화와 시중은행이 발행하는 예금통화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금통화란 시중은행이 대출, 즉 신용을 제공함으로써 만들어내는 통화를 말한다. 이것을 신용창조라 한다. 시중은행은 텍스트에서 말하는 상업은행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간단히 은행으로 부를 것이다. 그리고 통화량의 구성을 살펴보면 현금통화에 비해 예금통화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중앙은행이 여러 가지 금융정책을 통해 통화량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지만 이는 은행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민간이 대부분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은행을 단순히 사기업으로 간주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이는 돈의 복합적인 특성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돈은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철저하게 사유재의 특성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사유재, 이를테면 자동차나 휴대폰과는 다른 특성을 갖는 사유재이다. 왜냐하면 돈은 사회 구성원이 지불수단 및 가치저장수단으로 인정하거나 아니면 신뢰할 수 있는 정부가 가치를 보장하는 경우에 만 시장에서 유통된다는 점에서 공적 특성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른 사유재와 뚜렷이 구별되는 점으로서 돈의 역설의 핵심이다. 공공성을 가진 돈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이기는커녕 오히려 궁극적 분리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은행은 이 역설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이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말이 나온 김에 돈의 본질에 대해 잠깐 생각해보자. 화폐 또는 통화라고도 불리는 돈은 다양한 형태를 취하면서 진화해왔는데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은 돈의 가치는 항상 사회적 합의에 기초했다는 점이다. 가치가 없는 것으로 인식되는 순간 돈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것은 로마 시대 이래 지금까지 금융의 역사가 증명한다. 기원전 7세기경 터키 지역에 있었던 고대 왕국 리디아에서 최초의 화폐로서 일렉트럼(Electrum)이라는 주화가 사용된 이래 은이나 금 같은 귀금속의 내재가치에 근거한 은본위제와 금본위제를 거치면서 돈은 정부가 가치를 보장하는 법정화폐(legal tender)로 진화해왔다. 지금 전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화폐는 모두 법정화폐이다. 사람들은 정부가 돈의 가치를 보장할 것이라고 믿기에 돈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돈의 공공성과 신용창조의 특권을 감안할 때 은행은 태생적으로 공적 특성을 가진 조직이다.

 

17세기 유럽에서 처음 시행된 지급준비제도는 당시로는 혁신적인 아이디어였으며 동시에 은행에 엄청난 특권을 부여했다. 이후 이 제도는 점차 정교하게 다듬어져 은행의 신용창조 기능을 뒷받침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 제도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은행은 무에서 돈을 창조해낸다라면서 폐기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특권적인 측면 때문이다. 돈을 발행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특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은행의 목표는 과연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현재와 같이 은행 지분 대부분을 민간 부문에서 보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기업과는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돈을 발행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 이런 관점에서 우리나라에서 은행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잠깐 살펴보자. 이승만 정부 시절인 1957년 은행 민영화가 단행되어 당시 4대 시중은행 가운데 3개 은행이 삼성 이병철 회장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1961년 군사 쿠데타로 박정희 장군의 군사정부가 정권을 장악한 후 부정축재 처벌에 대한 일종의 타협안으로 민간이 소유했던 은행 지분은 모두 국가에 귀속되었다. 은행의 최대주주가 된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했던 전 과정을 통틀어 금융을 이용해 기업을 통제하는 한편 새로운 정경유착의 고리를 만들었다. 당시 정부의 금융 통제의 위력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1972년 사채 동결이다. 정부가 긴급명령을 발동해 사채 이자를 일정 수준에 동결하고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을 강제한 것으로서 정부가 금융을 좌지우지했던 무소불위의 위력은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은행을 장악한 정부는 모든 금융자원을 원하는 대로 원하는 곳에 투입할 수 있었다. 이른바 관치금융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이와 같이 정부가 금융자원을 전적으로 통제하던 관행이 무너진 것은 1997IMF 외환위기 때문이었다. 당시 구제금융의 핵심 조건은 자본시장 자유화와 금융개혁이었기에 은행 통폐합에 이어 은행 민영화가 추진되었으며 이 와중에 외국 자본이 대거 은행지분을 매입했다. 말썽 많았던 론 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는 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외국 자본의 은행 지분 매입은 꾸준히 확대되어 2017년 말 기준 외국 자본은 4대 은행 지분율은 평균 60퍼센트에 이르고 있다. 가장 늦게 민영화된 우리은행을 제외하면 평균 지분율은 70퍼센트에 달하니 소유구조 면에서 보면 은행은 이미 외국 자본의 소유인 셈이다.

 

그렇다면 소유의 관점에서 완전한 사기업이므로 은행이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외국 투자자들이 주주총회에서 이를 관철하고 은행은 이에 따라 은행은 오로지 이윤극대화에 매진한 다음 이들의 요구대로 높은 수준의 배당금을 지급하면 만사형통 아닌가? 실제로 IMF 외환위기 이후 이런 패턴이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금융감독기관은 법의 준수 여부의 관점에서 은행을 규제할 뿐 은행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적이 없다. 모두 서로 눈치만 볼 뿐 은행이 지향해야 하는 목표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진지한 시도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은행은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건물이나 IT인프라와 같은 하드웨어 면에서는 첨단 수준에 도달한 것처럼 보이지만 금융 마인드라는 소프트웨어 면에서 은행은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면 이는 지나친 폄하인가?

 

필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은행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핀테크(FinTech) 혁명으로 은행의 입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크라우드펀딩(crowdfunding)이나 마이크로크레딧(microcredit)등 새로운 금융기법이 등장하면서 은행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또한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블록체인 기술은 중개기관으로서 은행의 존립에 치명타를 안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이유로 일부 전문가들은 은행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지만 이는 지나친 과장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은행의 신용창조 기능을 완전히 폐기한다는 것은 사실상 시장경제를 폐쇄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기존 은행의 신용창조 기능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이 등장한다면 이는 곧 새로운 형태의 은행이 등장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름만 바뀔 뿐 은행은 사라지지 않는 셈이다.

 

필자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은행은 신용창조과정을 통해 통화를 공급하는 특권을 부여받은 조직이므로 소유구조상 완벽하게 사기업이라 할지라도 이윤극대화를 추구하기 보다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보자. 두 기업 A, B가 신규 사업을 위해 1,000억 원을 대출받고자 경합하고 있는데 은행은 현재 두 기업 중 하나만 지원할 여력이 있다고 가정하자. 재무제표와 최근 기업실적을 중심으로 평가한 결과 A기업이 B기업보다 우수한 것으로 판명 났다면 은행은 당연히 A기업에 대출할 것이고 B기업은 사업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A기업이 추진하는 사업은 상당량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할 것인 반면 B기업은 그렇지 않다면 은행은 이 점을 고려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만약 이산화탄소 배출에 적절한 가중치를 부여하는 새로운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B기업에 대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날 수도 있다. 현행 평가 기준으로 인해 B기업이 탈락하는 것이 사회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은행은 제 역할을 다 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은행은 자기자본과 예금을 통해 마련한 자금을 바탕으로 대출 해주는 것이 주된 업무이므로 채무불이행 위험(default risk), 즉 신용위험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핵심이며 이는 은행의 이익을 극대화는 데 핵심 사항이다. 그런데 은행이 오로지 채무불이행 위험을 관리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다면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들 간에 상충관계가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점을 감안해 은행의 목표를 제대로 설정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은행이 본연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지극히 회의적이다. 필자는 은행이 큰 규모의 전당포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본다. 이는 곧 사회적 책임과는 거리가 멀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는 신용창조를 통해 통화를 공급한다는 공적 특성을 고려할 때 매우 부당한 일이다.

 

은행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데 대해 예상되는 반박은 현재와 같이 절반 이상 지분을 보유한 외국 투자자들이 반발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를 투자자들은 더 많은 배당금을 받기 위해서 은행에 지속적으로 이익을 극대화하라는 압력을 행사할 것이고 이런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면 자본을 철수하려 할 것이므로 자본시장과 외환시장에 일대 혼란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물론 이것이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니다. 그렇지만 단기적인 혼란을 감수하더라도 이 문제는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가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상당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필자는 이런 위기를 해소하는 근본적인 처방이라는 관점에서 은행이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지 묻고 싶다. 만약 은행이 기존 관행을 벗어던지고 사회적 책임, 나아가 공공선(common good)을 추구하는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이는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하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은행이 종업원에 대한 처우,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 전문경영자와 종업원 평균 보수의 격차, 이해관계자들과의 관계 등을 감안해 기업을 평가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출을 비롯한 각종 업무에 기본 지침으로 활용한다면 기업도 이에 맞춰 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은행을 필두로 해서 기업, 소비자, 다시 은행으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변화가 연쇄적으로 일어날 수 있으며 여기서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은행 임직원을 비롯해 금융당국의 정책결정자들 가운데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KB국민은행의 파업을 보면서 더욱 이런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노조에서 파업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 가운데 사회적 책임에 충실하겠다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필자는 이것이 우리나라 은행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금융당국이 보여준 행태 또한 조삼모사(朝三暮四)식의 대응 외에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이들의 주요 관심사가 퇴임 후 유관 금융기관에서 후한 대우를 받으면서 적당히 즐기는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누군가 내부에서 은행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조직적인 운동을 추진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정녕 무모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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