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관련

위선을 장려하는 사회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20-12-06 22:34
조회
657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당선이 사실상 확정된 제46대 미국 대통령 선거는 지구촌 곳곳 많은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필자도 며칠간 긴장감 속에서 밤늦도록 각 주에서 진행되는 개표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유는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절대로 재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파리 기후협약을 탈퇴함으로써 정치적, 경제적으로 기후변화를 부인하는 세력을 지원하였으며, 선악과 진실에 대한 기준을 전도시킴으로써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무력화시켰고, 공동체의 근간인 공동선(common good)의 파괴에 앞장서왔다. 게다가 그의 위선적인 언행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감내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으니 미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양식 있는 사람들은 그의 당락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의 낙선이 거의 확정된 현 시점에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점은 투표에 참여한 인원의 과반수에 조금 못 미치지만 7천 만이 넘는 미국인들이 그를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4년 간 그가 보여준 인종차별적 발언, 동맹국들과의 불화, 국제적 갈등 조장, 기후변화 불인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아도취적인 행동과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언행으로 인해 대다수의 미국인들아 이번 선거를 통해 그에게 등을 돌릴 것으로 예상했던 필자의 예측은 크게 빗나갔다. 그나마 코로나19사태에 대한 대응 실패로 인해 그의 재선이 저지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정치인들 가운데서도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위선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7천 만이 넘는 유권자들이 그를 지지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소셜 미디어의 부작용으로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시대에 사람들의 판단력이 흐려진 것인가, 아니면 그의 위선적인 측면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인가?

 

주지하다시피 위선(僞善)은 표면적으로는 미덕과 선을 주장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이를 부정하는 태도를 말한다. 한 마디로 자신의 실체를 외면하면서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우월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위선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어느 정도 그 정당성을 인정받아왔다. 지금까지 지구에 살다간 사람들 가운데 위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인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체로 위선적인 존재이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융(Carl G. Jung)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사회규범과 관습을 고려해 자신의 페르소나(persona), 즉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존재다. 그것도 상황에 따라 가면을 바꿔가면서 말이다. 그러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의식적인 에고에 바탕을 둔 페르소나는 자신의 무의식적인 측면을 담고 있는 그림자(shadow)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그림자에는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융의 생각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페르소나에 집착하지 말고 의식적으로 그림자를 포용함으로써 더 나은 인간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페르소나가 그림자를 외면하면 할수록 인간은 점점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은 이렇게 해석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선거가 조작되었으며 사기라고 주장하면서 대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그의 태도를 보니 이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얼마 전 재 구속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진실은 가둘 수 없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인간은 누구든 위선을 완전히 극복하기 어려우므로 일상생활에서 일정 범위의 작은 위선은 서로 눈감아주는 것이 모두에게 유익한 경우가 흔하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의 위선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과도한 위선적인 행동이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비정부기구(NGO)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위선적인 행동을 목격하는 것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를 저지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플라스틱 폐기물을 마구 버린다거나 반미운동에 전념하던 사람이 자식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것 등은 명백히 위선적인 행동이다. 얼마 전 사회 문제가 되었던 것처럼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명예 회복을 돕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고 할머니들에게 인간적인 모욕을 주었다면 이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위선적인 행동이다. 이와 관련해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에 일관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위선은 도덕적 아노미, 즉 도덕적 무질서를 유발할 수 있다.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한국 사회에서 일부 성직자들과 정치인들이 그간 보여준 위선적 행동으로 인해 일반인들의 도덕적 기준이 무너지고 이성적 사유와는 점점 멀어지는 쪽으로 기울게 된 것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특히 일부 성직자들이 보여준 극단적으로 위선적인 행태는 인간의 본성을 의심하게 만들 정도다. 게다가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이 보여준 위선적인 행태를 보면 가히 말문이 막힌다. 이와 유사한 사례들을 정치인들의 행동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들 모두 다수의 사람들을 상대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다 보니 자신이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우월한 존재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의 추종자들이 이런 위선적인 행동을 오히려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선거는 조작되었으며 사기라고 주장하면서 그를 지지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사물을 공정하게 판단할 능력을 상실한 가운데 자신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취한다면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은 더욱 강화되고 결국 독선적인 신념체계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트럼프주의(Trumpism)가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이번 미국 대선 이후 전개되는 상황을 관망하면서 문득 향후 한국 사회에서 위선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이로 인해 도덕적 무질서 상태가 만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 사회에 위선적인 인사들이 득세하는 풍토가 조성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제도권 종교계가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관련해 영국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가 동서양 심층종교의 핵심 메시지를 정리한 기념비적인 저서 영원의 철학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고행을 하지만 여전히 자만심에 차있고 자기중심적인 금욕주의자와 고행하지 않는 쾌락주의자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후자는 칠칠치 못하고 야심이 없으며, 마음속으로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서, 자신의 몸·마음·영 외에는 많은 해를 끼칠 에너지와 동기가 부족하다. 전자는 모든 부수적인 미덕을 갖추고 자신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업신여기기 때문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매우 큰 규모로 해를 끼치려고 마음먹을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도덕적인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오만한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은 위선을 범하고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가 정치인들에게도 적용된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은 대의와 공익을 위해 봉사하므로 사소한 실수나 잘못은 문제가 안 된다는 독선에 빠지기 쉽다. 이런 성향은 특히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발견된다. 예를 들어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경력을 바탕으로 제도권 정치인으로 변신한 박원순 시장이 아무 죄의식 없이 여직원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했다가 궁지에 몰리자 자살로 마감한 사건은 이를 웅변적으로 대변한다.

 

인터넷과 모바일 혁명으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정보에만 집착하는 편향된 태도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상황은 필연적으로 자신은 옳고 다른 사람은 틀리다는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고, 이에 따라 자신의 위선을 정당화하면서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심지어 앞으로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이용해 자신의 위선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할지도 모른다. 이런 시대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자기 성찰을 통해 자신의 행적을 되돌아보고 위선적인 태도를 조금이나마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든 위선적인 면을 갖고 있으며 이를 완전히 극복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려면, 그리고 진정 우리 후손들에게 도움을 주려면 위선적인 사람들이 득세하는 풍토가 지양되어야 한다. 자기중심성을 극복하고 타인을 돕는다는 것은 숭고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각고의 노력을 통해 에고의 한계를 극복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회지도층 인사 가운데 이런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공익을 위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위선적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스웨덴의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는 아이작 뉴턴 이후 가장 뛰어난 과학자로 평가받았던 인물이다. 그런 스베덴보리는 53세부터 사망할 때까지 일체 과학 연구를 중단하고 기독교 신비가로서 유체이탈을 통해 영계를 넘나들면서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의 글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기에 필자도 과연 그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스베덴보리가 저서 천국과 지옥에서 인간이 사후 영계에 가면 어떤 위선도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말에 일말의 희망을 걸어본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교황 가운데 상당수가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진실이라면, 그리고 사람들이 이것을 믿게 된다면 자기 자신과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위선적인 행동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이 쉽게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미국 대선을 통해 확인되었듯이 최악의 위선자가 다수의 사람들을 선동하고 그 여파로 인해 사회가 분열되는 비극을 막는 것이 시급한 과제임은 명백하다. 한국 사회에서 심하게 위선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일말의 죄책감도 갖지 않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부조리를 막기 위해서라도 스베덴보리의 경고가 효과를 발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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