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관련

우리의 가치를 낮추는 사례들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6-03-02 00:16
조회
328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많은 나라들 가운데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달성한 유일한 나라라는 사실만으로도 국제사회에서 높이 평가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지금도 남미, 아프리카, 중동 및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요원하며, 경제발전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이들 나라와 비교한다면 한국은 단연 군계일학이다. 그럼에도 미국을 비롯해 서구의 지식인들 가운데 이런 발전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외국인들에게 한국은 여전히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 아래 있는 정체성이 모호한 나라일 뿐이다.

 

이 점에 관해서 경희대 국제대학원의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한국명 이만열) 교수는 저서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한국은 기적적인 국가 발전의 배경 또는 한국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속 시원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실 한국의 급속한 국가 발전 배경은 한국 정체성에서 찾아야 하고 한국 정체성은 한국의 과거에 있다........한국인은 한국의 과거를 소개하지 않고는 국제 사회에 한국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없다. 한국의 정체성이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는 한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존재감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

 

그의 충고는 한마디로 우리의 전통문화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알릴 수 있는 요소들-예를 들면 선비 정신, 예학(禮學), 홍인인간 이념 등-을 발굴해 이를 국제 사회에 널리 알림으로써 한국의 진정한 가치를 회복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필자 또한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해 몇 차례 만나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보다 우리 전통문화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는 외국인이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무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우정 어린 지적을 바탕으로 우리의 전통문화 중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하고 이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문화에도 열등한 면은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과감하게 극복하고 글로벌 기준에 맞는 새로운 요소를 가미한다면 우리의 전통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문화의 부정적인 면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극단적인 가족주의, 형식주의, 감성주의 및 사대주의적인 요소가 어떻게 우리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다음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조직 개편이 반복되어 왔다. 그런데 정치적 목적에서 원칙 없이 이루어지는 정부조직 개편은 한국의 가치를 낮추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한국을 주의 깊게 관찰한 외국인이라면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예외 없이 정부조직을 개편하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외국에서는 이런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관행은 과거 새로운 왕조가 등장할 때마다 의도적으로 전 왕조를 매도했던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이런 과정에서 과거의 역사적 기록이 대부분 소실되어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부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신라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고려왕조는 정부조직을 변경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 왕조와 관련된 귀한 문헌이나 기록을 대부분 파괴했다. 조선왕조가 고려왕조를 대체했을 때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우리 역사에 관한 기록이나 문헌이 많이 보존되지 못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국의 시원(始原)인 고조선에 관한 자료가 거의 모두 소실된 것은 진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쓸 데 없는 논쟁으로 정력을 낭비하고 있다. 이 점에서 한국인은 유대인과 확연히 구분된다. 이런 방식으로 선행했던 시대를 비판하고 기록을 없애는 것은 근시안적일 뿐만 아니라 반민족적이다. 한국인들이 역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갖지 못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역사의식이 부족한 민족은 결코 세계사의 주역이 될 수 없다. 

 

● 사외이사제도는 외국에서 도입된 좋은 제도가 한국적 기업풍토에서 제 역할을 못하는 형식적인 제도로 전락한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이 제도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IMF의 구제금융에 부과된 조건들 가운데 하나로 기업부문의 구조조정과정에서 도입되었다. 이 제도의 목적은 대주주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업을 독단적으로 경영하는 것을 막고 이사회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어려운 외국투자자들을 비롯한 소액주주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만약 이 제도가 의도한 데로 잘 작동한다면, 기업의 시장가치가 증가할 것이므로 모든 주주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진정한 주주 자본주의를 위한 지배구조의 핵심 사항이다.

 

이 제도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은 객관적인 자격요건을 갖춘 독립적인 인사를 사외이사로 선정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기준에 의해 사외이사가 선정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대부분 대주주의 경영방침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갖는지 여부에 따라 선정되었다. 이렇게 선정된 사외이사는 대주주가 원하는 경영정책을 일방적으로 승인해줌으로써 소액주주들을 보호한다는 본래의 역할에 부응하기 어렵다. 이것이 현재 한국의 현실이며 형식주의의 또 다른 사례에 해당한다. 좋은 제도를 도입해도 이런 식으로 변형되어 운영된다면 한국의 기업들은 내재가치 이상 평가 받기 어렵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대기업의 열악한 지배구조를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 외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이중기준은 한국의 가치를 낮추는 또 다른 원천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미국을 비롯해 서구의 선진국에서 온 외국인들에게는 지나치게 우호적인 경향이 있는 반면, 파키스탄이나 베트남 또는 필리핀 같이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들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한국 팬들의 예상치 않았던 성대한 환대에 놀란다. 이런 태도는 부유한 나라에서 온 일반 관광객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반면, 후진국에서 온 외국인 근로자들을 대하는 한국인들의 태도는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다.

    

이런 이중기준은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이라는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강한 자에게 비굴했고 약한 자에게 가혹했던 과거의 수많은 경험들이 집단무의식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가난한 나라였기에 가난은 가능하면 잊어버리거나 무시되어야 할 일종의 결함으로 한국인들의 무의식에 각인되었다. 이것은 대체로 서민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이었는데, 이들은 가난의 고통을 외부로 투사(投射)한 후 이를 멸시함으로써 열등감을 피하려 했던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고조선시대의 진취적인 기상이 점차 사라지면서 고대 중국-예컨대 송(宋)이나 명(明)-에 아부하는 사람들이 고려시대 말 이래 조선시대에도 파워엘리트로 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은 사대주의가 한국의 주권을 유지하는 최상의 외교적 방법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 의도는 단지 기득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사대주의란 “공익(公益)을 위한다면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는 사익(私益)을 유지하기 위해 국내외의 강력한 세력에게 일방적으로 편향되어 있는 행동패턴이나 사고방식”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는 온갖 종류의 사대주의적 발상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왔다. 조선시대의 파워엘리트들은 일반대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중국에 아부했다는 의미에서 사대주의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제국주의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사람들은 일반대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과 가문의 번영을 위해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다. 

 

북한에서 김일성을 도와 공산주의체제를 수립하고 유지하는 데 협조했던 사람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전직 대통령들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이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일반대중의 복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들의 복지를 위해 그렇게 행동했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대주의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병리현상이다. 이것은 강한 자에게 비굴하고 약한 자에게 가혹했던 우리의 굴절된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는 한 극복되기 어렵다. 

 

●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유지하려고 결사적으로 노력하는데, 이것 또한 형식주의의 극단적인 표현이다. 이것은 명예를 존중하는 것과는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이 둘을 혼동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명예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잘 모른다. 그 이유는 명예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명예는 개인적인 이익을 희생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자발적인 의지와 관련되어 있다. 화재현장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다 목숨을 잃는 소방관의 죽음은 진정 명예로운 죽음에 해당된다. 명예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근거해 행동하게 되어있다. 반면 체면을 유지하는데 급급한 사람은 오직 다른 사람들의 반응만을 의식하면서 행동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지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니다. 

 

이 두 가지 태도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과거 몇몇 재벌총수들이 몇 천억 원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이것을 명예로운 행동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형사처벌의 수위를 낮추기 위해 마지못해 그렇게 결정한 것이지 자유의지를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부행위는 미국의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그리고 최근 마크 주커버그의 기부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에게는 단지 체면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런 성향이 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반대중의 의식에도 깊이 스며들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사회에서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뿌리내리기 어렵다. 

 

● 종교에 대한 한국인들의 태도는 한국인 특유의 극단적인 쏠림현상, 즉 군집행동과 관련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교회의 예배나 절의 법회에 참석하고 있다. 문제는 그들의 믿음이 영성의 심층 수준으로 고양(高揚)되지 않고, 오직 복(福)을 바라는 표층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종교의 표층 수준이란 오직 자신과 가족 및 후손들의 건강, 그리고 물질적 풍요를 위해 축복을 내려주기를 고대하면서 종교를 믿는 것을 말한다. 영적인 활동을 하면서 물질적인 가치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행위는 모순이다. 

 

신약성서의 핵심 개념인 그리스어 ‘메타노이아(metanoia)’는 영적 변환 내지 의식 전환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실로 촉구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라는 데 모든 종교학자들이 동의한다. 그런데 이런 의식 전환은 사람들이 종교의 심층 차원을 제대로 이해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사람들이 표층 차원에 머물러 있는 한, 메타노이아는 불가능하다.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은 다른 교회들보다 더 많은 축복을 준다고 소문난 교회로 몰려가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이유로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한국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믿음의 영역에서조차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깊이 생각하지 않는 민족은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 어렵다. 이것이 함석헌 선생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우리 민족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에 수많은 고난을 겪고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탄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를 비롯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경험할 때마다 우리는 여전히 문화적으로 미숙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한 사회의 문화수준은 곧 그 사회의 전반적인 의식수준을 반영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여전히 낮은 의식수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고대사의 권위자인 윤내현 교수는 이에 대해 저서 『우리 고대사』에서 “우리 문화를 천시하게 되면 자연히 그 문화를 만들어 낸 우리 자신들은 열등의식을 갖게 되고 자존심의 상처도 받게 된다. 우리 문화를 외래문화 밑에 두고 천시하는 것은 우리 사회와 문화의 발전을 더디게 할 뿐만 아니라 사회병리현상도 가져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이 아직도 한국의 정체성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우리 문화를 열등한 것으로 취급한 반면, 해외에서 수입된 문화-예컨대 불교문화, 유교문화, 기독교문화 및 개인주의문화 등-를 우월한 것으로 간주해 온 사대주의적 풍토가 여전히 만연해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만열 교수의 우정 어린 충고대로 우리의 고유한 문화를 새롭게 조명해 글로벌 관점에서 가치 있는 문화적 요소들을 발굴함과 동시에, 우리의 의식수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왔던 요소들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의 격(格)이 올라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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