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관련

3C를 회복하자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6-03-08 01:41
조회
523

로빈슨 크루소 같이 혼자 고립되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도덕이나 규범, 그리고 상식과 같은 덕목은 아무 의미가 없다. 말이나 행동을 하기 전에 고려하고 배려해야 할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의 쾌락을 극대화하기 위한 어떤 행동도 용납될 수 있다. 개인의 행동에 어떤 제약도 없으므로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 명이 추가된다면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해관계가 충돌해 여러 가지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설사 두 사람 모두 성인군자와 같다고 해도 갈등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의식이 남아 있는 한 이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다. 이제 사람 수가 점점 늘어나 N명이 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임의의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N중에서 둘을 선택하는 가능한 조합의 수(NC2)이다. 따라서 N=100이면 4,950가지, N=1,000이면 499,500가지, N=10,000이면 49,995,000가지로 급격히 늘어난다.

 

여기에 세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상호 교류할 수 있는 경우들을 모두 포함한다면 가능한 만남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사람들의 소득 수준의 차이, 성격의 차이 및 생물학적 차이 등까지 고려한다면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갈등이 끊임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어떤 공동체든 법과 관습을 필요로 한다. 이런 공식적·비공식적 제도를 통해 사람들 간의 갈등을 조절함으로써 정신적·물질적 자원의 낭비를 줄일 수 있다. 그런데 사회가 점점 복잡해짐에 따라 법을 적용하기 어렵거나 모호한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키던 관습들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 결과 일반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행동의 기준, 즉 사회규범이 실종되었다. 이것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다양한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지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사회 전반에 불필요한 갈등이 만연해 우리의 잠재력은 고갈될 것이고 이로 인해 선진 사회로의 도약은 점점 멀어질 것이다. 이런 부정적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필자는 ‘3C 운동’을 제안한다. 여기서 ‘3C’는 상식(common sense), 공유지식(common knowledge) 그리고 공동선(common good)에 공통된 영어 첫 글자 C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운동’은 과거 ‘새마을 운동’과 같이 정부가 강제하거나 명령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행동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생각을 바꾸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말이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바꾸려는 사람들의 비율이 임계치를 넘으면 사회 전체가 변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나 자신의 말과 행동은 상식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믿는다는 데 있다. 이것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일반적인 사실이다. 그러는 한편 상대방은 몰상식하다고 비난하는 데 익숙하다. 이런 경우 자신의 감춰진 문제를 상대방에서 투사(projection)한 줄 모르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경우가 대부분임에도 말이다. 자신이 몰상식한 것을 모르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상식을 회복하는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새삼 상식을 논한다는 것이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상식이 실종된 지 오래 되었으며, 지금도 회복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상식이란 무엇인가? 너무 자명해 설명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굳이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논쟁의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연히 여기는 가치관이나 지식으로서 이성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상식에 관한 철학적, 이론적 논의는 멀리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소급하며, 중세 이후 서양에서는 데카르트나 스피노자를 포함해 많은 철학자들이 상식에 대해 논했다. 이들의 논의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상식의 기준이나 내용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상식의 반전은 폴란드의 천문학자이자 카톨릭 사제였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년)가 기존의 천동설에 반하는 지동설을 주장한 사건이다. 그의 사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간된 이래 중세 교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천동설 대신 지동설이 점차 대중들에게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도 저서 『위대한 설계』에서 천동설로도 대부분의 천체 현상을 설명할 수 있지만 지동설을 채택하면 더 많은 현상을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것은 이성에 바탕을 둔 상식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쉽게 상식을 공유할 수 있다면 그만큼 사회적으로 이익이 된다.

 

상식이라는 관점에서 지동설 못지않게 서구사회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다른 사례로 미국의 저술가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의 저서『상식』(1776년)을 들 수 있다. 당시 식민지 미국에서는, 비록 모국인 영국의 부당한 간섭과 착취로 신음하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이득을 얻으려는 세력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토머스 페인은 이 작은 책을 통해 당시 대중에게 상식으로 통하던 ‘군주제’가 얼마나 비상식적인 제도인지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민주적 공화제만이 대안임을 설득력 있게 호소하였다. 이 책으로 인해 대중의 생각이 달라졌으며 이는 미국의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지금 읽어도 그의 책은 여전히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이 있다. 건전한 상식에 바탕을 둔 논리는 시공을 초월해 영향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상식이란 고정불변의 무엇이 아니다. 또한 역사적, 종교적, 철학적 관점을 모두 망라해 본다면 상식에 관한 논의가 결코 간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필자가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지금, 여기’, 즉 한국 사회에 과연 상식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상식에 대한 앞의 정의는, 비록 간단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상식을 논하는 경우 핵심은 이성적인 사고의 산물로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지하철에서 장애자나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보행자들이 우측통행을 하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다른 사람에게 본의 아니게 피해를 준 경우에는 사과하는 것이 상식이며,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경우에는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상식이다. 권력을 남용하거나 이를 이용해 다른 사람을 괴롭힌다면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무전유죄, 유전무죄’와 같이 결코 상식이 될 수 없는 것들이 상식으로 간주되는 현실이 문제다. 이런 사례들을 거론하다보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상식이 얼마나 무시당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돈과 권력이 중심적인 가치인 영역에서 상식이 지켜지지 않는 일은 비단 현재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정 부분 공통적이었기에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그렇지만 이런 현상이 계속 지속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영역으로 침투한다면 이는 사회 전반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가치전도(價値顚倒) 현상으로 이어져 사회적 무질서를 초래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에는 이런 가능성이 늘 잠복되어 왔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 건전한 상식이 회복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를 바탕으로 해야만 비로소 공동선(common good)에 관한 논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공동선에 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사건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 야기된 정의에 대한 관심이 순식간에 식어버린 것을 보면 아직도 우리에게는 정의와 같은 공동선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게 남아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론적 논쟁에 앞서 공동체를 유지하려면 최소한의 공동선에 대한 구성원들의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명제를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공동선을 확립하고 이를 실천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허용할 수 없다고 강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공동체의 존립과 번영을 위해 공동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 문제는 공동선의 덕목에는 무엇이 포함 되어야 하는 것이다. 보수를 자처하든 진보를 주장하든 한국 사회에서 아직까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동선의 내용에 합의를 보지 못한 것은 이들 모두의 책임이다. 이에 대해서는 정치인, 관료, 기업인, 교수 등 전문가들 누구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여기서 이에 대해 상세히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예를 든다면 한국 사회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정의의 수준’이 분명히 설정되어야 한다. 이 말은 곧 사회적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불의에는 무엇이 포함되는지 명백히 밝혀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수백억 원을 횡령한 재벌총수가 집행유예를 받거나 형을 경감 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불의로서 명백히 정의를 위반하는 사례에 해당한다. 이런 식으로 구체적인 사례들을 모아 정리하면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정의의 수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글로벌 차원에서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다. 이 문제가 심각한 이유는 앞으로도 불평등이 더욱 악화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사업가들이 막대한 돈을 벌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시장제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장제도는 개인이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어느 누구도 자기 혼자 힘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오만이나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도움을 받아 오늘을 살고 있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더 이상 불평등의 악화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는 불평등의 정도를 정하는 것도 공동선의 주요 내용이 될 수 있다.

 

지금 인류는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각자 편협한 자아의식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인류 전체가 공멸할 위험이 점점 커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기후변화 현상이다.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지구온난화는 이미 임계수준을 넘어섰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직 희망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 의식 전환을 통해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노력해야 한다. 공동선에 관해서도 이런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건전한 상식은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가 빠져있다. 바로 공유지식이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이 공유지식이란 ‘정보에 관한 정보’, 즉 메타정보(meta information)의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지칭하는 용어다. 내가 어떤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알고 있고, 그 사람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내가 알고 있는 상태가 계속 이어짐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사실을 알고 있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상태가 바로 공유지식에 해당한다.

 

이 개념을 상식과 공동선에 다음과 같이 적용할 수 있다. 만약 사람들이 다른 기준에 입각해 서로 다른 상식을 보유한다면, 이는 결코 공유지식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상식을 보유하는 것도 아직은 공유지식이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자동차를 운전하는 경우 차선을 변경할 때 깜박이를 켜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상당수의 운전자들이 깜박이를 켜지 않는다. 이것은 ‘차선 변경 시 깜박이를 킨다’는 것이 현실에서는 상식이 아닐 뿐만 아니라, 공유지식은 더더욱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다. 우리 주변에서 이와 유사한 사례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곧 한국 사회에서 아직도 상식이 부재할 뿐만 아니라 공유지식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런 문제는 공동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복지문제를 생각해 보자. 지나친 불평등을 일부나마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복지정책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는 데는 누구라도 동의할 것이다. 그래서 심도 있는 논의 끝에 보편적 복지와 선택적 복지를 적절히 혼합한 복지정책의 원칙이 채택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이것은 이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동선의 일부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단계에서는 사람들이 쉽게 의견을 일치를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복지정책의 내용이 공유지식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각자는 자신의 입장이나 고정관념에 입각해 해석하는 우(愚)를 범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란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생각을 하고, 다양한 행동을 하는 곳이다. 사회발전이란 이들의 생각과 행동이 다양성을 잃지 않는 가운데 서로 조화를 이루어 정신적·물질적 풍요를 달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건전한 상식과 이에 바탕을 둔 공동선을 마련하는 것은 사회 발전의 기본 조건이다. 나아가 상식과 공동선을 공유지식으로 보유할 수 있도록 구성원 모두가 노력하는 경우에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사회 발전이 가능하다. 지금 시점에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바로 이 세 가지, 3C를 회복하는 것이다.  

전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