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관련

진정한 대화란 무엇인가?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6-02-22 10:17
조회
263

필자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오면서 가장 후회스러운 일은 학생들과 충분히 대화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부터라도 학생들과 보다 많은 대화를 시도하려 한다.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교수와 학생 간의 대화는 학생들이 학습한 내용과 관련해 질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필자가 학생이었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은 학생들이 질문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교수와 학생 간에 활발하고 생산적인 대화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러면 한국 사회의 다른 부문에서는 대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형식적으로는 많은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봉건 의식, 식민지 경험을 통해 형성된 식민지 의식, 남북 분단으로 인한 분단 의식, 나아가 개발 과정에서 주입된 군사문화, 그리고 정치적 공작에 의해 인위적으로 강화된 지역 의식으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는 열린 의식을 가지고 진정한 대화를 추구하려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역사적․구조적으로 대화하기 어려운 사회에서 살고 있다. ‘진정한 대화의 부재(不在)’, 이것은 한국 사회의 통합과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요인이다. 이로 인해 정치가 저급한 논쟁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공적․사적 영역에서는 대화의 형식을 빌린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이 창조적 사고를 말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대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에 불과하다. 나아가 진정한 지식 공유를 통한 개인과 사회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필자를 비롯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대화의 방법과 목적에 대해 거의 무지한 상태다. 많은 사람들이 뒷담화나 수다에 익숙해 있으면서 이런 것들이 대화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어려서 가정교육을 통해 대화의 방법을 배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는 전 교육과정을 통해 제대로 된 대화를 위한 훈련을 거의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한국 사회는 서구 사회와 뚜렷이 구분된다. 

 

그러면 진정한 대화란 과연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이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상대방과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상호 혜택을 추구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대화의 혜택은 변증법적 과정, 즉 정․반․합이라는 발전적 통합 과정을 통해 유도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대화란 본질적으로 변증법적인 과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상호 혜택은 금전적․ 물질적 혜택보다는 정신적․정서적 혜택의 특성을 가질 것이다.

 

이와 같이 상호 혜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대화는 경제활동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비유하자면 시장에서는 ‘가격’을 이용해 대화가 이루어지는 반면, 사회에서는 ‘언어’를 이용해 대화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즉 경제활동도 대화의 일종으로 해석할 수 있으므로 경제원리가 대화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컨대, 참여한 사람들 중 단지 일부에게만 도움을 주는 대화는 진정한 의미의 대화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유형의 대화가 사회 전반에 만연한다면, 그 사회는 정체 내지 퇴보할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모두 한국 사회 전반에서 진정한 의미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오늘날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런 면에서 정보화시대는 이전의 산업화시대와 확연히 구분된다. 그런데 이메일과 문자 서비스, 나아가 소셜 네트워크인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같은 다양한 매체들을 이용한 소통이 상당한 대중화되어 있는 현재, 굳이 진정한 대화와 소통의 의미를 생각해 보려는 것이 시대착오적인 발상은 아닌지 자문해 본다. 그럼에도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대화와 소통의 본질은 사람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올바른 지식과 건전한 상식을 공유하는 데 있는 것이지,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한 소통의 양적 증가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양적으로는 엄청나게 많은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와 반대로 진정한 대화와 소통의 기회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필자는 한국사회에서 대화를 저급한 수준으로 전락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으며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주체는 정치인들이라고 생각한다. 대중 매체를 통해 보도되는 이들의 말은 상당 부분 근거가 모호한 일방적인 주장이나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거나, 아니면 상대방을 비난하는 선동적인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타협의 기술인데, 이들의 언행은 이성적 타협을 모색하는 선진적인 정치 관행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정치를 후진적인 수준으로 낮추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집권당과 야당 정치인들이 합리적인 타협에 도달했던 경험이 거의 없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더욱 유감스러운 일은 이들의 저급한 언행으로 인해 일반인들조차 저급한 수준의 표현이나 막말에 대해 무감각해졌다는 사실이다. 유대인 속담에 있듯이 말이란 화살 같아서 한번 내뱉으면 주어 담을 수 없다. 그래서 잘못 뱉은 말은 상대방에게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게 된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험한 말을 들은 아이들이 이로 인해 트라우마(trauma)가 생겨 성장한 후에도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대화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영향력이 큰 소통 수단임을 한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

    

이런 관점에서 물리학계의 이단아였지만 뛰어난 양자물리학자였으며, 달라이 라마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같은 사상가들과도 교류했던 데이비드 봄(David Bohm)이 『창조적 대화론』(원제목은 “On Dialogue”이다)이라는 저서에서 제시한 진정한 대화와 소통의 의미에 대해 살펴 볼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견해에서 대화와 관련된 한국 사회의 딜레마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봄은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들의 어원(語源)을 추적한 후, 원래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것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방법을 즐겨 사용했다. 소통이나 대화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그에 의하면 소통이란 “뭔가를 공통된 것으로 만드는 행위”이다. 즉, 정보나 지식을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가능한 정확한 방법으로 전달하는 행위가 바로 소통인 것이다. 물론 그 대상은 정보나 지식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공유함으로써 모두에게 유리한 것들이 모두 소통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또한 그에 의하면 대화란 “말의 의미가 서로 통하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대화는 반드시 두 사람 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참여하는 가운데 이루어질 수도 있으며 혼자의 경우에도 가능하다. 이른바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화는 정해진 주제가 없더라도 서로 얼굴을 맞대고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대표적인 방식에 해당한다. 봄은 소통 가운데서도 대화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해 책의 상당부분을 할애해 대화의 과학적․의미론적 측면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봄이 대화에 많은 비중을 둔 이유는 대화의 목적은 자신의 주장이나 가정(假定)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거나 설득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주장이나 가정에 대한 판단을 유보(留保)한 가운데 이러한 상태를 주의 깊게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의식(意識)이 어떻게 사고(思考)를 유발하고, 이로부터 어떻게 의미(意味)가 형성되어 갈등을 유발하며, 결국 어떻게 사회를 파편화(fragmentation)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대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대화 과정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의미들을 모두 면밀하게 관찰함으로써 보다 높은 차원의 의미를 공유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기존 사고의 한계를 극복하고 창조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대화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적인 결과란 모두가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는 대립적이고 파편화된 상황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으며, 각자는 대화를 통해 서로의 존재에 참여하고 있다는 확장된 의식을 공유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본다.

 

그가 말하는 대화의 관점에서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면 우울하기 그지없다. 정치․경제․사회․종교 및 교육 분야 등 어디를 봐도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우리는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자기주장을 관철하려는 습관에 중독되어 있어 이 엄연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모두들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조차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조금도 유보하지 않는 가운데 여과 없이 마구 토해냄으로써, 비록 대화의 형식을 빌리고는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화의 가능성을 말살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화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사회는 매우 취약한 상태에 있음을 실감하고, 공적 영역에서는 대통령을 정점으로 정치인들과 주요 공직자들, 그리고 민간 영역에서는 재벌 총수를 비롯해 대기업의 전문경영자들은 봄이 제안한 대화의 소통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들은 주어진 권한을 행사하기에 앞서 막중한 책임감을 의식해야 하며, 이런 진지한 자세가 대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진정한 대화를 추구하려는 사람만이 편안하게 위선(僞善)의 탈을 벗을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편협한 자아의식의 한계를 조금이라도 극복한 사람들만이 진정한 대화를 시도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진정한 대화를 위한 이들이 노력이 널리 수용되고, 그럼으로써 사회 전반에서 대화의 질적 수준이 한 단계 높아질 때 비로소 한국 사회는 선진 사회로 발전하기 위한 선결조건들 가운데 하나를 충족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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