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분야

스테파노 자마니의 『인류 최악의 미덕, 탐욕』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6-07-25 12:24
조회
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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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스테파노 자마니(Stefano Zamagni) 

역자: 윤종국

출판사: 북돋움(2014)

 

 

목차

프롤로그: 경제학에서 탐욕의 잣대를 세워야 하는 이유

제1장 고대 로마 시대: 탐욕은 모든 악의 뿌리

제2장 11~15세기 상업혁명: 교만보다 탐욕이 더 큰 악덕이 되다

제3장 14~16세기 르네상스: 탐욕, 죄와 번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제4장 17~19세기 권위주의의 시대: 탐욕이 미덕으로 승격되다

제5장 포스트모던 사회: 자유시장이 탐욕의 시장으로 바뀌다

에필로그: 오직 나눔만이 경제가 살 길이다

 

 

<북 리뷰: 탐욕에 대한 사회 인식의 변천사와 궁극의 해법>

★ 저자 소개 및 책의 개요

저자 스테파노 자마니는 필자가 이미 다른 책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를 통해 소개했듯이 협동조합 이론의 권위자인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교의 경제학 교수이다. 개인적으로 저자에 대해 더 이상 아는 바 없다. 단, 최근 다른 저서 『21세기 시민경제학의 탄생』(2015)을 통해 저자가 협동조합 이론뿐만 아니라 유럽의 사회·경제사상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저자가 이 책에서 “탐욕(greed)”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다루게 된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목차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로마시대이래 유럽에서 탐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천 과정을 매우 진지하게 그렇지만 지루하지 않게 다루고 있다. 저자는 특히 탐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하는 데는 중세 가톨릭, 상업혁명, 르네상스, 개인주의, 권위주의 및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번갈아 가면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여러 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논증하고 있다. 탐욕은 영구불변의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분위기, 종교 및 정치적 이데올로기 그리고 경제적 번영의 정도에 의해 영향을 받아온 역사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탐욕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탐욕이라는 현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 탐욕적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기준이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탐욕은 철저하게 상대적인 개념이다. 예컨대 한 시대에는 탐욕적인 행동으로 간주되었던 것이 다른 시대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구의 표현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일들은 자주 벌어졌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저자의 기본 입장은 어쨌든 탐욕이란 존재하며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명제와 관련해 종종 상당한 사고의 혼란을 유발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탐욕의 의미를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결국 우리가 이 딜레마를 극복하는 길을 선물(gift)을 주듯이 조건 없이 나누어주는 데서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피력한다. 이런 점에서 선물경제의 현대적 부활을 제안했던 찰스 아이젠스타인(Charles Eisenstein)의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2015)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 책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필자가 이 사이트 올린 리뷰 파일을 참조하기 바란다.

 

★ 탐욕이란 무엇인가?

모든 고등종교에서는 예외 없이 탐욕을 죄악시하고 있다. 가톨릭에서는 칠죄종(七罪宗)으로 탐욕, 교만, 사치, 질투, 탐식, 분노, 나태를 지적하며, 이 가운데 탐욕과 교만은 가장 큰 악덕을 다퉈왔다. 한편 불교에서도 탐(貪)·진(瞋)·치(痴)를 삼독(三毒)으로 경계해왔으며 그 밖에 모든 도덕적 종교에서도 탐욕을 대표적인 악덕으로 간주하고 있다.

 

한편 최근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달하고, 특히 금융자본의 경제 권력이 강력해진 이후 탐욕은 종종 발전과 혁신을 주도하는 원동력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런 입장은 1987년에 개봉된 영화 “월스트리트(The Wall Street)"에서 악덕 금융자본가 고든 게코 역을 맡은 배우 마이클 더글러스가 역설한 ”탐욕은 좋은 것이다(Greed is good)"라는 명대사(?)에 잘 표현되어있다. 필자는 드러내지는 않지만 어느 사회나 이 말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본다. 아니 역설적으로 아무런 도덕적 제재나 사회적 비난이 없다면 어느 시대, 사회나 탐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넘쳐날 것으로 예상한다. 이런 의미에서 탐욕은 과연 인간의 본성에 깊이 각인된 특성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생각나는 것이 탐욕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어디까지는 탐욕이 아니라 어디까지는 누구에게서나 발견할 수 있는 단순한 욕심에 불과하고 어디부터는 탐욕이라 할 수 있는가? 예컨대 세계 최고의 부자인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가 수천만 달러 상당의 주택을 소유한 것은 탐욕에 해당하는가? 아니면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를 미국 나스닥에 상장해 수십조 원 대의 부자가 된 중국의 마윈이 얼마 전 뉴욕 외곽 고급 주택가에 수천만 달러 상당의 주택을 구입했다는데 그는 탐욕스러운 인간인가? 이런 식으로 질문하다보면 탐욕의 기준이 정말 모호해진다.

 

또한 탐욕과 관련해 모호한 것은 탐욕의 대상에는 무엇이 포함되어야 하는가이다. 대체로 탐욕은 재물(물질과 돈을 망라해서)을 대상으로 표출된다. 그렇지만 권력이나 명예 등도 탐욕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반드시 재물이 대상이라 할 수도 없다.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욕망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한없는 존경을 받고자 하는 집착도 탐욕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는 탐욕의 기준에 대해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이 단편은 끊임없이 땅을 사고 재산을 늘리려는 어리석은 농부 바흠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넓고 좋은 땅을 갖기 위해 어떤 부족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찾아가 토지를 사고 싶다고 제안하였다. 그 부족의 우두머리는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동이 틀 때부터 걷기 시작해 해가 지기 전에 출발점으로 돌아오면 농부가 표시한 모든 땅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단,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지 못하면 땅을 소유할 수 없다는 조건이 붙는다. 농부는 이를 수락하고 길을 떠나지만 중간에 비옥한 땅을 보자 더 소유하고픈 욕심에 계속 걷다가 결국 돌아올 때를 놓쳐 허겁지겁 출발점으로 돌아오지만 결국 과로로 숨지고 만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탐욕의 중요한 기준을 발견할 수 있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탐욕은 “부, 지위 및 권력에 대한 과도하거나 만족할 줄 모르는 갈망”이다. 이 정의에는 앞서 언급한 모호한 기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를테면 “과도하거나 만족할 줄 모르는”이라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개념이다. 또한 “부, 지위 및 권력”에 대한 갈망이라고 하지만 다른 것들도 탐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탐욕을 정의하는 것은 순환론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본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되고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가운데 선택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된 사회에서는 이런 모호한 기준으로 탐욕을 매도(罵倒)한다면 사회적 공감을 얻기 어렵다.

 

필자는 탐욕의 문제에 대해 철학적, 윤리적 및 종교적 관점에서 충분히 검토할 능력도 없고 그럴 입장에 있지도 않다. 단지 모호한 개념에 근거해 누군가를 매도하거나 비난하는 관행은 건전한 사회규범을 확립하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기에 좁은 소견이나마 밝히고자 하는 것뿐이다.

 

우선 ‘탐욕’이라는 범주로 분류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기준을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첫째,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노력한 것 이상을 갈구(渴求)하는 마음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사람은 자기의 내면에 “공정한 관찰자”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얼핏 들으면 모호한 얘기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웬만한 사람에게는 이런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겉으로는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사람이라도 돌아서면 자기가 틀렸음을 알고 있다고 본다. 단지, 체면이나 욕심 때문에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탐욕스러운 사람은 이런 공정한 관찰자를 완전히 배제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오직 매순간 자신의 이익만이 중요하므로 지대추구행위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둘째, 감각적 쾌락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이런 상태에 있으면 인간의 오감(五感)을 넘어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오감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선(善)이요, 그 밖의 것은 모두 악(惡)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곧 모든 감각의 소멸이고 영원한 침묵이므로 가장 외면하고 싶은 사건이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 있으면 감각적 쾌락만이 궁극적 실체이고 나머지는 모두 허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리주의(utilitarianism)는 쾌락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적지 않은 부작용을 초래했다고 본다.

 

셋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나 모든 사물들은 단지 수단일 뿐이라는 마음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는 자신의 이익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아가 자기중심주의에 함몰되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탐욕은 이기심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를 야기한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피해를 주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우선한다. 공동선에 대한 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전형적인 사례는 매국노 이완용 및 그 아류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이상은 필자가 다소 두서없이 “탐욕”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행동의 기준을 제시해 본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제안일 뿐임을 유념해주기 바란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모호한 기준을 가지고 마녀사냥 하듯이 타인을 비방하거나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탐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천사를 다루면서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오늘날 탐욕으로 대변되는 시대적 조류를 지양하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인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 탐욕에 대한 경제학의 책임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유럽 사회를 중심으로 시대에 따라 탐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고찰한다. 그리고 저자는 그 핵심에는 종교(가톨릭과 기독교)와 경제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특히 경제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그만큼 탐욕은 경제 사회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선 탐욕에 대한 저자의 기본 관점은 다음 표현에 잘 드러나 있다: “탐욕은 고귀한 영혼으로 가장할 수 있다. 인색하고 욕심 많은 본심을 숨기고 자녀를 돌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포장하기도 한다. 탐욕이 극도의 절약이라는 옷을 두르면, 탐욕은 ‘경제라는 덕’으로 탈바꿈한다. 이 외에도 탐욕은 여러 얼굴을 하고 있다.”(14쪽)

 

그러면서 저자는 탐욕이 주로 재물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탐욕은 주요 악덕 가운데 가장 ‘경제적인 악덕’에 해당한다. 경제적 환경에서 탐욕만큼 ‘이성의 타락’을 보여주는 예도 드물다. 탐욕가는 소유욕을 다스릴 줄 모르고, 생리적 욕구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탐욕이 충동질하는 것을 구매하게 된다. 따라서 탐욕가가 부를 독점하면 경제적 흐름이 막히고, 생산 활동마저 힘들어지게 된다.”(14쪽) 이것이 요점이다. 탐욕가가 득세하면 한쪽에 부와 재물이 일방적으로 축적됨으로써 경제의 기본 원리인 “순환”이 막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조지 쿠퍼도 『돈, 피, 혁명』(2015)에서 비슷한 논리를 전개했다. 탐욕의 가장 큰 죄는 경제의 선순환을 저해한다는 데 있다. 탐욕가들이 무엇을 소유하던, 무엇을 소비하던 그들의 자유지만 이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 탐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천사

저자는 이 책에서 주로 로마 시대 이후 유럽 사회에서 탐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의 논의는 상당히 제한적이다. 동양 사회에서 탐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떻게 변해왔는가에 대한 논의 및 동서양의 비교 논의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의 탐욕 논의는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탐욕은 특정 시대, 특정 사회에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라 인류에게 보편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시공을 초월해 인간의 본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경우가 바로 탐욕이다.

 

저자는 우선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는 모든 악의 뿌리는 탐욕이라는 입장이 우세했음을 강조한다. 그러다가 5세기 초에는 탐욕 대신에 교만이 가장 큰 악덕이라는 견해가 사회적으로 더 큰 지지를 받았다. 이것은 시대별로 탐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천사를 다루기 위한 도입부에 해당한다. 이 경우 가장 큰 악덕에 대한 논쟁의 근거는 일차적으로 종교적인 데 있었으며 이차적으로는 경제체제에 있었다. 초기에는 종교적인 요소가 더 영향력이 있었지만, 경제가 발전하면서 경제체제로 무게 중심이 옮겨갔다.

 

특히 봉건시대에는 주요 산업이 농업이었으며 시장경제가 거의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사회적으로 잉여의 크기가 미미했기에 탐욕이 부각될 형편이 아니었다. 봉건시대에는 신분제 하에서 각자 자신의 신분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규범이었으며 모두가 "존재의 거대한 사슬(Great Chain of Being)"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탐욕보다는 교만이 더 큰 악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 당시 가장 큰 미덕은 겸손이었다.

 

그러다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동방의 수도승 문화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서구 사회에서는 교만대신에 탐욕이 가장 큰 악덕으로 등장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1세기 초 무렵, 이탈리아에는 동방의 수도승 문화가 유행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에서, 특히 순종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심각한 문제 요인이 발생했다. 홀로 고독하게 살아가는 수도승이 대체 누구에게 순종한다는 말인가?......흥미로운 점은, 탁발 수도회의 새 수도회 회칙이 순종보다는 가난을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겸손이 아니라 가난이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간주되었고,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악덕도 교만에서 탐욕으로 바뀌었다.”(42쪽) 이와 같이 탐욕과 교만은 최고의 악덕이라는 자리를 놓고 다투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중세의 가톨릭이 있었다. 종교가 세속 전반에 유형·무형의 영향을 미쳤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난 원인과 관련해 저자는 중세 연구가 요한 하위징아(1872 ~1945)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11세기, 탐욕은 교만의 자리를 밀어내고 가장 치명적인 죄의 자리에 올라서기 시작했다. 신학적으로 교만을 가장 큰 죄로 여겼던 고대 관습이 드디어 무너진 것이다.........요컨대 교만은 상업사회 이전, 권력이 있는 자들에게 좀 더 심각한 악습이었다. 심지어는 교만을 꾸짖는 설교나 강론조차 권력을 지닌 사람 편에서 권역의 남용을 합리화하는 방편이 되어주었다. 반대로 탐욕은 상업사회에서 개인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사회적으로 가장 위험한 악습이 되었다.”(55쪽) 바로 여기에 단서가 있다. 상업의 발달은 탐욕이 교만을 제치고 가장 큰 악덕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지금 더욱 강화되고 있다.

 

11세기 이후 15세기까지 이른바 상업혁명의 시대에 탐욕은 가장 큰 악덕으로 여겨졌다. 바꿔 말하면 이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위선적으로 행동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탐욕에 대한 비난과 동경이 동시에 존재하는 가운데 종교적 규범에 의해 탐욕에 대한 동경은 억압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상업혁명이 몰고 온 중요한 변화 가운데 일부이다. 사실 생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농업 중심의 봉건체제에서는 탐욕이 드러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형성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상업적 거래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 탐욕이라는 숨어있던 괴물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추세에 기름을 부은 것이 15세기 이후 르네상스 운동으로 등장한 세속 인본주의자들이었다. 저자는 르네상스 시대인 14~16세기에 도시의 확산과 더불어 예상치 않았던 부작용이 등장했는데 그것은 바로 당파심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당시 영향력 있던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내세운 공동선의 개념과는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이로 인해 탐욕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고리대금업이 있다고 지적한다. 탐욕은 고리대금업의 동기이자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고리대금업을 금지했던 가톨릭교회의 엄격한 규율과 상업혁명으로 등장한 새로운 경제체제의 주역인 상인과 장인들 간의 충돌로 이어졌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교회는 새로운 경제체제를 향한 욕구와 충돌했다. 교회가 공동선의 관점에서 사회적 연대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동안, 새로운 경제체제의 주역인 상인과 장인들은 성공적인 사업 운영을 위해 대부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와 대부업의 갈등은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101쪽) 그리고 이 갈등의 최후 승자는 상인과 장인들이었다.

 

이러한 갈등의 상황에서 탐욕을 악덕에서 미덕으로 승격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다름 아니라 세속 인본주의 정신을 이어받은 당대의 계몽주의자들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인 17세기에서 19세기에는 르네상스 운동의 근본정신이 그대로 계승되지 않고 시민 사회의 위기와 봉건주의의 부활과 왕권의 강화, 그리고 개인주의의 등장이라는 새로운 양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들로서 저자는 마키아벨리와 홉스, 그리고 맨더빌과 벤덤을 든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따라서 16세기 인간을 돌아보면 시민 인본주의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대신 고립된 개개인의 현실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사실 이런 개인주의 사상은 마키아벨리와 홉스에서 시작된 것인데, 개인주의에서 시민 문화를 제외하면 ‘사악하고 끔찍하고 반문명적이고 교활하다’라는 근대의 형용어만 남는다.”(137쪽)

 

공동선에 기초한 시민사회라는 개념이 쇠퇴하고 개인주의가 득세하면서 탐욕은 더 이상 악덕이 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탐욕은 단순히 비사교적인 사람의 개인적인 성향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전통이 계승되어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람들의 무의식에는 “탐욕은 좋은 것”이라는 사고가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에 크게 공헌한 사람이 바로 버나드 맨더빌(Bernard Mandeville, 1670~1733)이다. 그는 『꿀벌의 우화』라는 책을 통해 탐욕이 번영을 가져온다는 논리를 펼쳤다.

 

그러나 저자는 맨더빌이 탐욕을 옹호한 것은 아니라 애덤 스미스가 체계화한 이기심이 사회적 번영을 가져온다는 사상을 처음으로 제시했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렇다면 맨더빌은 탐욕을 옹호했다고 볼 수 있을까? 맨더빌은 탐욕이라는 악덕이 ‘공공의 이익’을 창출하며, 흥청망청 사치품 소비에 탐닉하는 것이 근검절약하는 태도보다 일자리를 더 많이 창출하는 것은 사실이다.......그런데 탐욕가는 소비하기는커녕, 오히려 재산을 쌓기만 하는 사람이다. 탐욕가가 공공의 이익에 반하는 사람인 이유다. 탐욕가에게 돈이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고, 돈이 목적이 되면 시장은 발전하지 않는다. 그런 경우 화폐 유통속도가 확연히 감소하기 때문이다.”(147쪽) 필자도 이것이 맨더빌의 사상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맨더빌은 이른바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를 언급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더빌의 사상이 과거보다 탐욕을 미덕으로 간주할 수 있는 여지를 어느 정도 마련해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추가한 것이 바로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의 공리주의다. 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다음에 잘 요약되어 있다: “벤담의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1789)은 공리주의의 기본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벤담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인간의 동기는 단 하나의 원리로 압축될 수 있는데, 그것은 효용을 최대화하려는 욕망이라고 단언한다........벤담에서 '행복‘은 쾌락이자 ’공공의 행복‘이다. 공공의 행복이란 개인의 쾌락의 총합이며, 이는 시민 사회의 미덕과는 완전히 단절된 개념이다.”(158쪽)

 

이런 공리주의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공리주의자들은 세상의 다양성을 무너뜨리고 단일성(정확하게는 이익) 안에서 이질성을 부각하려 한다. 다양성을 감안하지 않고 삶의 공통성만을 지키려는 것이다. 여기에 탐욕이 왜 죄인지가 분명히 드러난다”고 하는 말에 잘 요약되어 있다. 시민 사회의 모든 가치를 쾌락이라는 하나의 가치로 환원시킴으로써 탐욕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도 기본적으로 저자와 같은 생각이다. 인간사의 모든 것을 오직 쾌락만으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를 의식 수준이 낮은 동물로 격하시키는 셈이다. 생물학자들이 주장하는 유전자의 생존기계로서의 인간이라는 해석도 탐욕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공리주의와 마찬가지 우(愚)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탐욕에 대한 저자의 기본 입장은 부정적이다. 비록 시대에 따라 탐욕에 대한 평가가 엇갈려온 것은 사실이고 근래에 들어서는 오히려 탐욕을 정당화하는 분위기가 득세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방관하면 사회는 해체될 것임을 우려한다. 필자도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 특히 금융자본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이것은 결코 기우(杞憂)가 아니다.

 

필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탐욕가의 본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탐욕가가 지닌 욕망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먼저 강조할 것이 있다. 욕망이란 어떤 생리 현상에 의해 표출되는 느낌도, 순식간에 약해지는 감정도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욕망은 결핍을 느끼기를 바라는 감정이다........그러나 탐욕가는 소유욕을 만족해도 만족하지 않고, 그 욕망이 계속 생성되기를 바라고, 소유하는 과정이 계속 되풀이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소유욕을 충족하기 위해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이다.”(172쪽) 이런 탐욕가의 성정(性情)을 우리 모두 보유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여건이 미숙하기에 이런 성정이 발화(firing)되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것이 문제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탐욕가의 삶에 상당한 동정과 연민을 보내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 하는 조언이기도 하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아직 소유하지 못한 많은 돈과 남겨진 짧은 생애를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탐욕가는 현재의 기쁨을 생각하기보다는 끊임없이 미래에 눈을 돌리며 현재를 즐기지 못한다. 바로 이런 사실에서 ‘늙은 탐욕가의 고독’이라는 주제가 나온다.........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존엄성을 지닌 존재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사람과의 관계가 성립한다. 그런 의미에서 탐욕가는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다.”(181쪽) 이것은 탐욕가에 대한 연민을 담고 있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자유시장경제가 탐욕을 더욱 조장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개인적인 불행뿐만 아니라 경제 시스템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음을 우려한다. 최근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글로벌 차원에서 불평등의 악화는 이런 탐욕이 초래한 사회적 재앙에 해당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나눔을 강조한다. 이것은 저자가 다른 저서에서도 강조해온 “상호성”과 “무상성(無償性)”에 입각해 대가 없이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를 만들어가자는 제안이다. 이점에서 저자의 제안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에서 제시한 대안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이런 대가 없는 기부, 즉 선물의 정신이 과연 보편적인 현상으로 정착할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신하기 어렵다. 그만큼 우리 모두 탐욕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금전만능주의가 어느 나라보다 강력한 우리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다음과 같은 메시지에서 일말의 희망을 느낀다: “대가 없이 주는 선물은 일방적인 행위로 끝나지 않고, 상호성이라는 새로운 관계 고리의 포문을 연다. 말하자면 대가 없는 선물은 사람 사이의 유대를 만들어준다. 이때 타인에 대한 관심은 유대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다. 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는 이런 개념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사람들이 서로 운명의 끈으로 묶여야 할 이유를 더는 찾지 못했을 때, 즉 ‘상호 존재’의 개념이 사라졌을 때 사회는 붕괴한다고 말이다.”(211쪽) 필자는 이런 메시지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탐욕의 개인적·사회적 영향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 책을 소개하는 진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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