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분야

이만갑의 『의식(意識)에 대한 사회학자의 도전』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6-06-12 17:42
조회
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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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만갑 

출판사: 小花(1996년)

 

목차

서언

제1장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과 진화

제2장 의식의 자연과학적 기초

제3장 인간의 뇌

제4장 신경생리학자들의 의식관

제5장 인간의 본성과 의식의 진화

제6장 정신과 인류 진화

제7장 정신의학자 앙리 에의 의식관

제8장 심리학적 의식론

종장: 결론에 대신하여

 

 

<북 리뷰: 의식 문제에 대한 최초의 통합적 접근>

★ 저자 소개 및 리뷰의 성격

저자 이만갑 교수(1921~2010년)는 몇 년 전 작고한 우리나라 1세대 사회학자였다. 사회학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분의 강의를 들은 적도 없고, 만나서 얘기를 나눌 기회도 없었다. 한 마디로 필자와는 인연이 없던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연히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이런저런 책을 살펴보다가 이 교수님이 출간이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이 왜 인간의 의식(意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뒤늦게 자신의 전공 분야가 아닌 분야의 연구에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이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서문을 읽고서야 저자가 이 분야를 연구하게 된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마치 험난한 여행길을 떠나야 하는 데 우연히 그 길을 다녀온 분을 만났을 때와 같은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이 분야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자의 주관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다는 사실이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필자 또한 전공 분야와는 별 관련이 없는 여러 분야(우주론, 양자역학, 뇌과학, 진화론, 심리학, 역사, 영성, 종교 등)의 책을 읽으면서 인간 의식의 본질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연구를 접하고 보니 아이작 뉴턴이 “거인들의 어깨위에 서서 보니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는 말을 조금은 실감할 수 있었다.

 

필자 나름대로 이 문제에 관해 조금 공부하면서 인간의 의식에 관해 제대로 이해하려면 여러 학문 분야에서 정립된 이론들을 통합적인 관점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결코 어느 한 분야에서 독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의식 문제”는 과학의 마지막 미지의 영역이라고 보는 과학자들이 많다. 그런데 필자가 아는 한 이 문제를 저자와 같이 통합적 관점에서 접근한 연구는 지금도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 자신의 전문 분야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20여 년 전에 이런 시도를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책의 초판이 출간된 것이 1987년인데 당시로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최초의 시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열정과 노력에 한없는 경의를 표하고 싶다. 따라서 이 글은 책의 내용에 대한 리뷰라기보다는 정년퇴임 이후 말년까지 식지 않는 학문적 열정을 보여준 고인(故人)에 대한 헌사(獻辭)로 이해해 주기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다보니 글이 조금 길어졌다. 후학들을 위해 학문의 길을 가르쳐 준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하는 의미로 이해해 주기 바란다.

 

★ 책의 특징

이 책은 저자가 오랜 기간에 걸쳐 의식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면서 완성한 독립적인 논문들로 구성된 일종의 논문집인 셈이다. 그렇지만 저자가 기왕에 발표한 논문에 상당한 첨삭을 하고 적절히 안배하여 한 권의 책으로 손색이 없도록 노력한 흔적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개별 논문을 책의 독립된 장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정도로 이해하기에 큰 무리가 없다. 저자가 일반인들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이유로 처음부터 전체 내용을 구상하고 쓴 경우에 비하면 각 장 간의 연결이 다소 매끄럽지 않다는 인상을 주지만 이 책이 제공하는 방대한 정보와 깊은 지식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당시에 의식 문제에 대해 이 정도로 철저하게 서베이를 한 책을 출간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이 왜 인간의 의식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밝히고 있다. 사회학자로서 저자의 주요 학문적 관심사는 “한 사회의 변혁을 주도하는 세력은 지배계급의 바로 밑에 위치한 주변(周邊)집단이다”라는 가설을 설정하고 이를 근간으로 하여 한국 사회의 변화를 연구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왜 주변집단 구성원들이 다른 계층보다 더 강하게 기존체제에 불만을 품고 지배계급에 도전하려고 하는가 하는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인간의 사회적 행동의 근저에 자리한 생물학적 또는 생리학적 기초, 나아가 인간의 뇌의 작용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관심사가 자연스럽게 인간의 의식 문제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의 여러 분야를 망라해 통합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를 “자연과학적 전망”이라고 한 것이다.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여덟 편의 논문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다.

 

★ 각 장의 핵심 메시지와 코멘트

◆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과 진화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 주제를 책의 첫째 장으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저자는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이 진화해 온 과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도 이 점에 공감한다. 인간의 뇌를 구성하는 세 부분인 뇌간(brain stem), 변연계(limbic system), 신피질(neocortex)은파충류의 뇌에서부터 포유류의 뇌 그리고 인류의 뇌로 진화해 온 과정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뇌가 정보를 처리하면 그 결과에 따라 행동을 선택하면서 진화해 왔다. 물론 진화론을 신봉하지 않는 사람은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인정하고 있기에 무시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해 저자의 입장은 다음에 잘 요약되어 있다: “지금의 생물학적 지식은 수십 년 전에 비해서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어서,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모든 학문이 인간의 생물학적 배경을 다시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도달하고 있다. 철학만 하더라도 인간의 정신 현상을 논하기에 앞서 신체에 관해 더 깊고 바른 인식을 가지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17쪽) 저자가 이 책을 쓴 시점이 1980년대 말이므로 그 후 생물학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생물학적 지식을 감안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진화론이 매우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도 진화론자들의 학설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이것을 인간 의식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다. 필자도 기본적으로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한 편으로는 진화론으로 많은 것을 설명하려다보면 인간의 의식은 진화 과정에서 발생한 "부수적 현상(epiphenomenon)"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진화론에 대해 일정 부분 유보적인 입장이다.

 

진화론에 의하면 의식은 종(種) 또는 유전자가 생존과 번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생겨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상당한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몇 년 전부터 의사이자 줄기세포 전문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로버트 란자(Robert Lanza)가 주장한 "생물 중심주의(Biocentrism)“에서는 진화론과 반대의 시각에서 의식을 해석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저자가 의식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우선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을 논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뇌가 갖는 특별한 기능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가소성(可塑性)은 굴드(S. J. Gould)나 워시번(S. L. Washburn)이 논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뇌와 인간의 문화 사이의 진화론적 종합으로부터 연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동의 특성과 그의 정신활동의 실상을 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뇌가 어떤 구조적, 기능적 특징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진화했는가를 파악하는 한편, 생물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는 진화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규명하는 것이 긴요하다.”(29쪽)

 

이와 같이 진화의 중요성의 강조하면서도 저자는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데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다윈은 습관이 생활조건의 변화와 관련해서 일어나며 그것이 그 생체에 유리하면 자연도태에 의해 보존되고 누적된다고 봄으로써 분명히 학습이 생체의 유전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누누이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라마르크가 습성에 의해 획득된 성질이 유전된다고 말한 것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학습의 유전적인 효과를 부정하는 학자들이 유독 공격의 화살을 왜 라마르크에게만 날카롭게 돌리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35쪽) 이 점에 대해서는 필자도 동의한다. 획득형질이 유전된다고 하는 주장 자체는 반박할 수 있지만 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생존에 유리한 습관이 누적되고 학습을 통해 후손에게 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진화론에서는 이 점을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른바 도킨스가 말하는 밈(meme)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저자는 뇌의 발달과 관련해 “뇌가 발달하였기에 걸을 수 있게 되었는지, 걸어야 할 강한 필요성이 빈번히 발생했기 때문에 뇌가 더 발전하게 되었는지 몰라도, 두 다리로 직립보행이 가능하게 된 사실과 대뇌의 발달 사이에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다소 모호한 진술로 보인다.

 

800만 년 전 돌연변이(이것이 주된 원인인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회의적이지만)로 인해 유인원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원생 인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이미 직립 보행을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후 자유로워진 손을 사용해 여러 가지 연장을 만들고 다른 공작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진화 과정을 통해 언어가 생겨났으며 이후 신피질이 발달하면서 뇌의 용량이 점점 커져 지금부터 5만 년 전에는 이미 지금의 인간의 뇌와 같은 크기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생 인류가 육식을 하게 되면서 고급 단백질을 섭취한 것이 뇌의 용량이 커지게 된 주요 원인이라고 한다. 아마도 저자가 이 책을 썼던 시기 이후 뇌와 관련된 연구에 많은 진전이 있었는데 이런 내용을 당시에는 반영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의식의 자연과학적 기초

저자는 여기서 의식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적 접근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필자도 동의한다. 이 문제를 단지 철학적·종교적·영성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보편적인 현상으로서 의식의 본질과 작용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 먼저 이루어 진 후 의식의 확장으로서 초월적 의식 상태를 탐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초개아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에서 말하는 비일상적 의식 상태(non-ordinary state of consciousness)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위해서는 의식의 본질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식 문제와 관련해 저자는 자연과학 분야로서 우선 생물학, 그 가운데도 고생물학, 사회생물학 및 비교행동학 분야를 지적한다. 뒤에 더 상세히 다루지만 저자는 특히 사회생물학과 비교행동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의식 문제를 많이 다루었다. 그 외에 저자는 물리학, 특히 양자이론의 관점에서 의식에 관한 연구를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에 가까운 이론이었을 텐데 이를 정리해 소개하고 있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면 헨리 스탭(Henry P. Stapp)의 『의식의 양자이론』이나 스콰이어스(E. Squires)의 『물리적 세계에서의 의식적 정신』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담았던 책들로 알고 있다.

 

이 가운데 저자는 스콰이어스의 말을 인용해 의식의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스콰이어스는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의식적 정신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물리적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으며 또 물리적 세계와 상호작용하고 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존재한다는 말은 공간에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양자이론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란 공간의 어떤 점 또는 어떤 영역과 관련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66쪽) 이것은 지금도 양자이론의 관점에서 의식의 본질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본 시각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서 스콰이어스의 말을 인용해 “의식은 지각의 한 형태”인데 그것은 외적 세계에 대한 지각이 아니고 개인이 자기 자신의 내면적 상태에 대해서 갖는 지각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우리가 외부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실제로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뇌가 시뮬레이션한 이미지를 통해 외부 세계를 인식할 뿐이므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외부 세계란 없다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런 논의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서 저자는 이미 오래 전에 최신 과학이론의 관점에서 의식 문제를 탐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저자는 의식 문제와 관련된 어려움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에 단정적인 주장을 하지 않는 가운데 상당히 개방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저자의 입장은 다음에 잘 드러나 있다: “의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만족스러운 답을 찾아내기가 어렵지만, 의식은 무슨 구실을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서 고찰해 보면 의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의 효과 또는 역할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도 구구한 듯하다. 의식이 있건 없건 그것 때문에 세계가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하는 부정적인 답이 나올 수도 있고, 반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주로 의식의 결과라고 하는 식으로 극히 긍정적인 평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답은 이 두 개의 극단적인 답의 사이에 놓이게 된다.”(68쪽) 필자는 지금도 이런 생각이유효하다고 본다. 그만큼 의식 문제에 대한 연구에 획기적인 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 신경생리학자들의 의식관

저자는 이 장에서 분리뇌 연구로 1981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로저 스페리(Roger Sperry, 1913~1994년)와 신경세포간 신호전달 메커니즘에 대한 연구로 196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존 에클스(John Eccles, 1903~1997년)의 주장을 중심으로 신경생리학자들의 의식에 대한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우선 저자는 스페리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분리뇌의 연구결과에 입각해서 스페리는 당연히 의식에 관한 그 나름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는 유물주의(또는 물리주의)와 환원주의를 거부하는 심리주의자(mentalist)라고 자칭하고 있다........그는 마음 또는 정신의 문제를 물질로 환원해 버리려는 생각에 반대하는 동시에 신체와 정신이 별개의 존재로 평행하고 있다고 보는 이원론적인 입장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124쪽) 이런 의미에서 스페리는 비교적 중도적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극단적인 유물론자도 아니고 유심론자도 아니면서 동시에 이원론자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한편 저자는 에클스 역시 의식 문제에 관해서 스페리와 근본적으로 유사한 견해를 가졌던 것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에클스는 의식을 분명히 정의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만큼 의식의 본질이 모호하다는 방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에클스는 의식이라는 말을 정신이나 마음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정신(mind), 정신적(mental), 심성(mentality)이라든가 하는 말의 사용에는 여전히 혼란이 있으며, 그런 것들이 어떤 극단적으로 유치한 형태로는 심지어 무기물질의 속성이라고까지 말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런 말을 사용하는 대신 ‘의식경험’, 또는 ‘의식’의 둘 중 어느 하나를 사용하기로 한다고 말하고 있다.......그가 생각하는 의식경험은 한 사람이 체험하여 갖는 모든 지각, 감정, 소고, 기억을 포함하는 것이다.“(126쪽) 이런 이유로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는 아예 의식이라는 현상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행동의 분석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저자가 여기서 소개한 에클스의 견해 중 주목할 만한 것은 사람이 지각하는 모든 것이 외계에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 마음과 신체의 상호작용을 강조한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에클스는 의식과 관련해 중요한 두 가지 문제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저자는 에클스가 마음이 신체의 상위에 있어서 하위에 있는 뇌와 신체를 통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스페리도 같은 견해였다고 말한다.

 

요약하건데 저자가 주로 인용한 두 명의 신경생리학자, 스페리와 에클스는 대부분의 신경과학자들과는 달리 환원주의적 유물론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의식만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유심론자도 아니었다. 이들은 의식 문제에 상당히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1972년 면역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제럴드 에덜만(Gerald Edelman)이나 기억 연구로 200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에릭 캔델(Eric Kandel)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이들은 철저하게 환원주의적 유물론자의 입장에서 인간의 뇌와 의식 간의 관계를 다루었다. 한 마디로 의식은 뇌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 인간의 본성과 의식의 진화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저자는 인간의 의식과 관련해 생물학 가운데 특히 사회생물학과 비교행동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각 분야를 대표하는 학자로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과 존 크룩(John H. Crook)의 학설을 소개하고 있다. 이 중 특히 윌슨의 주장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윌슨이 사회생물학이라는 분야를 개척한 것은 1975년 『사회생물학』을 출간한 이후인데 저자는 일찍이 이 분야를 주목했던 것이다.

 

윌슨은 『사회생물학』이나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와 같은 초기 저서에게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상당 부분 유전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묘사했다. 필자도 전에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를 읽으면서 그와 같이 생각했다. 저자는 이런 윌슨의 견해에 인문학을 위시한 여러 분야에서 강력한 비판이 제기되었던 점을 지적한다. 윌슨의 이른바 유전자 결정론이 인종적 편견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후에 윌슨이 『유전자·정신·문화』라는 저서에서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co-evolution)를 제시하였음을 지적하면서 사람들이 윌슨의 주장을 오해했다고 말한다.

 

필자도 윌슨의 주장에 관심이 믾아 그의 최신작 『지구의 정복자』(2013)를 읽었는데 여기서도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윌슨이 『이기적 유전자』의 도킨스 못지않게 유전자의 역할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무튼 당시 윌슨의 주장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다음에 잘 요약되어있다: “윌슨은 오늘의 인류가 다른 영장류와는 구별될 뿐만 아니라, 먼 과거, 가령 수십만 또는 수백만 년 전에 존재한 인류와도 다른, 어떤 고유한 생물학적 성질을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생득적인 특성은 많건 적건 간에 개인의 사회적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그러나 생물학적 요인이 진화과정에서 다소 변화를 일으키긴 하지만 역시 개인의 사회적 행동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152쪽) 저자 역시 비록 문화와의 공진화를 주장했지만 윌슨이 유전적 요인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고 본다.

 

그런데 저자는 윌슨의 주장 가운데 의식과 관련해 “개인의 생물학적 특성이 그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고, 그의 학습활동과 사회적 행동을 좌우한다고 보고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해석한다. 즉 유전적 요인 → 정신(뇌) → 사회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문화와의 공진화를 감안한다면 사회적 행동이 문화를 형성하고 이로 인해 후손에 유전되는 형질에 영향을 미치며 이로 인해 다시 정신이 영향을 받는 순환 고리가 형성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 윌슨은 “학습규칙”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이것은 워딩턴(C. Waddington)이 말한 “후성규칙”의 특수한 사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이 대목에서 정신과 의식의 관계, 의식과 뇌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이런 논의가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이 점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다.

 

이 장에서 저자는 윌슨의 주장에 상당히 비중을 두고 설명하고 있지만 의식 문제라는 본연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비교행동학자 존 크룩의 주장이 더 관련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왜냐하면 저자는 크룩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기 때문이다: “고등동물에 있어서는 인지적 체계의 주요 기능은 의식을 유지하는 데 있다. 크룩이 여기서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거기서 표상적 연속(presentational continuum)을 배경으로 하고 새로운 정보를 영사할 수 있는 일종의 스크린 같은 것이다. 이때 과거의 시나리오도 상기하며, 현재 진행하는 상황에 관련시켜 재영할 수 있다. 그래야만 지금의 딜레마가 어떻게 매듭짓게 될 것인지를 평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186쪽) 이것은 의식을 모든 것을 투영하는 스크린으로 해석하는 최근의 견해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크룩이 의식 문제와 더 연관되어 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가 크룩의 주장 가운데 특히 의식과 정신 및 정보와의 관계를 다룬 것은 지금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비교행동학자인 크룩이 이런 문제까지 다루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크룩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는데 저자의 소개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이런 정보를 얻은 것 자체가 망외의 소득이다. 예컨대 크룩의 다음과 같은 말은 지금도 음미할 가치가 있다: “정보가 세포화학적으로 부호화된 구조로 보존되고 또 조작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정보는 물리적으로 표시된다. 이와 같이 해서 정신은 물질적으로 세계 속에 현전(現前)한다. 이원론의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체험하는 방식으로부터 대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원론적 체험은 정보가 행동에 의해 뇌 안에서 처리되는 그 방식에 특유한 성질인 것이다. 의식은 신중한 주의 아래 감사부위에 재현될 때 나타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89쪽)

 

저자는 크룩에 의하면 “의식은 정신의 최전선”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의식과 정신은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정신은 의식을 포괄하는 더 넓은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는 반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마음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견해들을 제시했기 때문에 크룩의 견해가 반드시 옳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정신과 의식 그리고 정보의 관계를 정립한 후 자신의 이론을 전개했다는 점에서는 크룩의 주장에도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정신과 인류 진화

저자는 이 장에서 진화론이 전개되어 온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진화론의 관점에서 인간 정신의 본질에 대해 언급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저자가 정신과 의식 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에 대한 보충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앞 장에서 인용했던 비교행동학자 크룩에 의하면 정신과 의식은 구별해야 하는데 저자도 같은 견해인지 모르겠다. 오히려 저자는 이 둘을 동일한 현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다윈의 진화론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그러면서도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의 발달을 바탕으로 다윈주의를 발전시킨 신다윈주의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다윈주의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자연도태설(자연선택을 말함)에 대해서 가해지는 일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변이가 오직 유전자 내부에서 어떤 우연한 일로 발생하고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유전자의 변이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계속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231쪽) 필자도 이 점에 대해서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한다. 최근 자주 거론되고 있는 문화 유전자 밈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돌연변이 가운데 대부분은 유전자의 보존에 해로운 것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유리한 돌연변이가 축적되어 종의 진화, 특히 소(小)진화가 아닌 종을 뛰어넘는 대(大)진화를 초래한다는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리처드 도킨스는 “오르기 어려운 완만한 산”의 비유를 들며 조금씩 서서히 그렇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 돌연변이의 결과가 누적되어 대진화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이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화석 증거가 충분한지 의문이다. 만약 이것이 단지 진화론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그럴듯한 추론에 불과하다면 진화론의 근간이 흔들릴 것이다. 필자가 아직 공부가 부족해 이런 의문을 갖는지도 모르겠다. 좀 더 공부해 봐야겠다.

 

여기서 저자가 주로 인용하고 있는 진화론자는 워딩턴과 윌슨이다. 특히 워딩턴의 후성규칙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듯한데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워딩턴은 유전자를 갖는 개체가 환경에 적응하는 데 걸치게 되는, 전체 공간을 넷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있다. 첫째는 유전자형 공간이고, 둘째는 후성적 공간이며, 셋째가 표현형 공간, 넷째가 적응 공간이다........워딩턴의 진화론의 특징은 그가 후성적 공간에 착안하고 있다는 데 있다. 후성적 공간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정란이 개체로 성장하는 발생과정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233쪽) 후성규칙은 바로 워딩턴이 강조한 후성적 공간에 적용되는 생물학적 규칙을 말한는데 간단히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의 유전자는 정신이 형성되는 방식(어떤 자극이 감지되기 쉽고, 어떤 자극이 감지되지 않는가, 어떤 기억이 가장 상기되기 쉽고 또 어떤 감정이 환기되기 쉬운가 등)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효과를 생기게 하는 작용을 후성규칙이라고 한다.

 

한편 저자는 윌슨에게는 “학습규칙”이라는 개념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 개념이 후성규칙과 관련되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습규칙은 후성규칙과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그것은 후성규칙의 한 범주이며, 후성규칙에 포함되는 더 좁은 개념이다........후성규칙은 후성기간에 생체의 해부학적, 생리학적, 인지적 또는 행동적 특성을 특정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키도록 하는 규칙성을 말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쉽게 표현하면, "인간의 유전자는 정신이 형성되는 방식(어떤 자극이 감지되기 쉽고, 어떤 자극이 감지되지 않는가, 어떤 기억이 가장 상기되기 쉽고 또 어떤 감정이 환기되기 쉬운가 등)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효과를 생기게 하는 작용을 후성규칙이라고 하는 것이다.“(246쪽)

 

그러면서 저자는 윌슨이 정신(mind)의 기본적인 틀은 후성규칙에 의해 짜여 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앞의 구절과 사실상 같은 내용이다. 그리고는 여기에 유전자·문화의 공진화를 추가함으로써 진화 과정에서 정신과 유전자가 상호 작용을 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윌슨은 대담하게도 ‘유전자와 문화는 분리시킬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다. 한쪽의 변화는 반드시 다른 쪽을 변화시켜서 우리들이 말하는 유전자·문화 공진화가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정신이나 문화도 유전에서 생긴 생명현상인데, 그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진화의 제4단계에 들어가서부터의 일이다........이 마지막 단계는 지금으로부터 약 200만 년 전에 지구상에 모습을 나타낸 호모 하빌리스에서 비롯된다. 이때부터 유전자·문화 공진화라는 독특한 진화방식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245쪽) 필자는 이것이 윌슨의 주장에 대한 정확한 해석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윌슨의 최근 저서 『지구의 정복자』에서는 상대적으로 문화적 요소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다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여기서 정신과 진화의 관계에 대해 저자가 전하려고 하는 핵심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저자는 마치 윌슨의 학습규칙과 워딩턴의 후성규칙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인류의 정신적 진화와 관련시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전자는 후성규칙에 영향을 주며, 후성규칙은 정신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뇌의 회로망 가설의 기본적인 원칙, 발달의 방향을 좌우한다. 개개인의 정신은 기존 문화의 새 부분을 흡수해서 성장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경험을 통하여 문화를 창조하는 데 기여한다. 그리하여 문화는 당해 사회의 모든 성원이 행하는 정신활동, 그들의 의사결정과 혁신의 총화에 의해서 매(每)세대 경신된다.”(249쪽) 이것이 저자가 이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결론적으로 언급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저자가 의식에 대해 인류가 진화 과정에서 우연히 획득한 부수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진화 과정에서 뇌의 발달과 함께 기능적으로 놀라운 진보를 이룩한 것은 맞지만 뇌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는지는 불분명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저자는 인간의 정신 내지 의식의 변화는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이에 관한 저자의 다음 표현은 음미할 만하다: “좋은 말, 좋은 글에 접하면 적어도 잠시 동안은 정신을 맑고 풍부하게 하는 데 약간의 도움을 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말과 글은 항상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인간의 상호작용과정에서 체험과 사색으로 다져져서 비단 신피질의 영역에서 지적 논리의 전개로만 맴도는 것이 아니고, 변연계의 영역에서 정서적인 금선을 울리고, 더 깊이 들어가서 생명의 의욕을 분출케 하는 뇌간의 핵심에 도달함으로써 그의 심층적 의식에 연결되지 않으면 정신의 혁신을 가져오기는 어려울 것이다.”(255쪽) 우리 모두 깊이 명심해야 할 내용이다. 어설프게 “마음을 비웠다” 또는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부분 자기기만이거나 위선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의식의 전환, 즉 메타노이아(metanoia)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 정신의학자 앙리 에의 의식관

저자는 이 장에서 프랑스 정신의학자 의식에 관한 앙리 에의 이론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한다. 필자는 앙리 에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저자에 의하면 앙리 에는 대단한 정신의학자임에 틀림없다.

 

필자는 의식 문제에 대한 앙리 에의 이론에 대해 평가할 입장이 아니다. 그리고 앙리 에의 이론에 대해 저자가 정리한 내용만으로는 그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럼에도 앙리 에가 “의식하는 것”과 “의식적이 되는 것”을 구분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가 1996년 의식의 “쉬운 문제(easy problem)”와 “어려운 문제(hard problem)”를 구분한 것과도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의식하는 것”은 쉬운 문제, “의식적이 되는 것”은 어려운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이 책을 쓸 당시에는 차머스의 이론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므로 앙리 에의 주장을 새롭게 느꼈을 것이라 짐작된다. 저자의 안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외에도 저자는 앙리 에의 의식관의 여러 측면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앙리 에는 기본적으로 프로이트나 융과 같이 의식과 무의식 간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전제로 의식 문제를 탐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앙리에 생각하는 의식존재는 그것이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 데 특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방금 말한 것처럼 비인격적 구조가 아니라 심적 유기체로서 무의식을 바탕으로 하면서 무의식과의 관련 밑에 구성되는 구조인 것이다.”(262쪽)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의식 존재“라는 용어다 이것은 앙리 에의 고유한 표현으로서 의식의 구조를 해체해 의식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식보다는 의식존재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따라서 앙리 에의 이론에서는 의식존재가 의식을 대체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앙리 에는 의식존재를, 비록 물질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실체로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행동주의 심리학이나 최근에 인지철학자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과 같이 의식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전통과는 상반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앙리 에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는 데 이 점에서는 저자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앙리 에의 이론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앙리 에의 주장 가운데 주목할 개념으로 “의식야(意識野)”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의식야”에서 “야”는 영어의 “field”를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의식야”는 요즘 사용되는 용어로 의식장(意識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필자의 이런 해석이 맞는다면 앙리 에는 의식 문제에 관한 대단한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의식장 개념은 최근에 와서 몇몇 학자들이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식야(意識野)라고 할 때 야는 영야(領野)라는 뜻이지만, 그것은 결코 물리적 공간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무의식으로부터 벗어나서 의식이 의식존재로 구조를 갖게 되는 기저적인 의 구실을 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그렇게 표현한 데 지나지 않는다. “의식은 가장 기초적인 구성에 있어서는 실재 속에 있어서의 현실의 경험의 조직화”이다. 이 경험의 현실성을 구성하고 그것이 구조를 가진 전체로 형성되어 가는 양태를 의식야라고 부른다.(276쪽) 이 표현 중에 은 field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추측이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앙리 에가 말하는 의식존재는 자신의 구조, 즉 의식구조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것은 의식야(의식장)이라는 기저적인 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의식구조를 해체해가는 과정을 통해 의식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앙리 에의 주장에 대한 저자의 해석으로 보인다. 저자의 이런 시각은 다음과 같은 표현에 드러나 있다: “사람이 주변적(marginal)인 사회적 상황에 놓여 있을 때, 혹은 사회적인 인간관계에 있어서 좌절하게 되었을 때 어떤 느낌과 생각을 갖고, 그것이 뇌에 어떤 물리적, 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그런 반응이 다시 그의 신체 전체에 어떤 효과를 가져 오고, 또 그로 하여금 어떤 사회적 행동을 취하도록 하는가 하는 것을 자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304쪽) 이것은 인간의 의식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의식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는 개인적인 체험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 심리학적 의식론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심리학 분야에서 의식 문제를 다루어 온 과정을 간단히 소개한 후 여러 학파의 심리학자들의 주장을 중심으로 심리학에서 보는 의식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우선 무엇보다도 그동안 심리학에서 의식 문제를 기피했던 이유는 의식 현상을 과학적으로 다루기 어렵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사실 무의식을 발견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조차 심리학을 하나의 독립된 과학으로 발전시키고자 했기에 뉴턴의 방식으로 심리학을 정립하려 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런 전통이 심리학계에 깊이 자리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의식이라는 용어는 너무 애매해서 과학적으로 다루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저자는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독일의 빌헬름 분트(W. Wundt)의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의식을 분석한 것부터 시작해 다양한 학파에 속한 심리학자들이 어떻게 의식 문제를 파악했는지 소개하고 있다. 특히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제임스(W. James)의 의식관에 대한 저자의 해석은 흥미로웠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임스가 생각하는 의식에 관해서 언급해야 할 또 하나의 점은 그가 의식을 실체로 보는 주장을 배격하고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그는 철저한 경험론자로서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의식도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순수한 경험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사고의 흐름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318쪽) 솔직히 말해 필자는 이것이 제임스의 견해에 대한 정확한 해석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필자가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제임스의 의식관과는 다르게 해석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좀더 상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의식 문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소극적으로 대했던 행동주의 심리학을 창시한 왓슨(J. B. Watson)의 견해를 소개한 후 그의 계보를 이은 신행동주의에서는 의식 문제를 단지 부수적인 현상으로 간주함으로써 사실상 부정하게 된 과정을 다루었다. 이 점에서는 특히 하버드대의 스키너(B. F. Skinner)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는 의식 문제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자극(Stimulus)과 반응(Response)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후 이런 전통에서는 의식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다가 인지심리학이 등장하면서 이 문제가 다시 전면으로 부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들 외에도 저자는 신경심리학자 도널드 헵(D. Hebb)를 비롯해 온슈타인과 맨들러 같은 인지심리학 계열의 심리학자들의 견해를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들의 연구로 인해 의식 문제가 다시 심리학계에서 주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1996년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인지철학자인 데이비드 차머스가 의식 문제를 다시 전면에 등장하도록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여기서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 헵, 온슈타인 및 맨들러의 주장은 최근에 의식 문제와 관련해 거론되는 있는 쟁점들과 상당 부분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저자는 “정신을 인지과정으로 보고, 의식을 사고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는 헵에 있어서는 사고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는 사고의 기초로서의 세포집성체에 관해서 집중적으로 논한 뒤에 사고의 구조에 관해서 고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접근은 지금도 유효한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저자는 온슈타인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온슈타인은 인간 의식의 기능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주요한 특징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의 기능은 정보의 단순화와 선택성이다.......의식의 둘째 기능은 활동을 인도하고 감독하는 것이다.........셋째 기능은 활동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넷째 기능은 차이를 발견하고 해소하는 것이다.”(362쪽) 그리고 이어서 온슈타인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합리적 의식은 사물 중심적이며, 자기를 사물로부터 심지어 유기체, 즉 자기의 신체에서조차 자기를 분리시켜서 사물에 능동적으로 작용하여 선택적으로 대응한다. 합리적 의식의 본질적 양태는 선적(線的)이며 언어적인 동시에 분석적이다. 그것은 사물을 서로 구별하고 또 사물을 요소 또는 요인으로 세분하여 그들 사이의 인과성을 따지는 과학적인 작업을 촉진한다. 그러나 합리적 의식은 의식의 유일한 양태는 아니다. 그것은 의식의 하나의 특수형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온슈타인은 말한다.“(364쪽)

 

이와 같이 저자가 이 책의 말미에서 여러 심리학자들의 견해를 비교·검토한 이유는 이제는 심리학이 의식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심리학만이 아니라 관련된 자연과학 분야를 모두 망라한 가운데 의식의 본질에 대해 통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이런 연구를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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