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분야

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8-10-07 18:17
조회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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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

역자: 전병근

출판사: 김영사(2018)

 

차례

1부 기술적 도전

1. 환멸: 역사의 끝은 연기되었다.

2. :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일이 없을지도 몰라

3. 자유: 빅데이터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4. 평등: 데이터를 가진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2부 정치적 도전

5. 공동체: 인간에게는 몸이 있다

6. 문명: 세계에는 하나의 문명이 있을 뿐이다

7. 민족주의: 지구 차원의 문제에는 지구 차원의 해답이 필요하다

8. 종교: 이제 신이 국가를 섬긴다

9. 이민: 더 나은 문화를 찾아서

3부 절망과 희망

10. 테러리즘: 당황하지 말라

11. 전쟁: 인간의 어리석음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말라

12. 겸손: 당신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13. : 신의 이름을 헛되이 일컫지 말라

14. 세속주의: 당신의 그늘을 인정하라

4부 진실

15. 무지: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무지하다

16. 정의: 우리의 정의감은 시대착오일지 모른다

17. 탈진실: 어떤 가짜 뉴스는 영원히 남는다

18. 공상과학 소설: 미래는 영화에서 보는 것과 다르다

5: 회복탄력성

19. 교육; 변화만이 유일한 상수다

20. 의미: 인생은 이야기가 아니다

21. 명상: 오직 관찰하라


과거·미래·현재에 관한 트릴로지(trilogy)의 완성

저자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사피엔스에서는 인류의 과거를 다루었고 이어서 호모 데우스에서는 인류의 미래를 경고했고 이 책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는 인류의 현재 상황을 진단한다. 따라서 하라리는 과거, 미래, 현재의 순으로 거대한 담론을 완성하려 했기에 필자는 이를 <인류 역사의 트릴로지로> 명명하고 싶다. 마치 프랜시스 코포라 감독의 영화 트릴로지 <대부1>, <대부2>, <대부3>을 보는 것과 흡사하다. 물론 이야기 전개의 순서는 다르지만.

 

필자는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스토리텔러(story teller), 즉 이야기꾼으로서 저자의 탁월한 재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저자가 인용하거나 정리해서 전해주는 이야기, 예컨대 진화론, 뇌과학, 인공지능, 역사, 문화, 종교 등 여러 방면에 걸친 내용에는 특별히 그 자신이 고안한 것은 없다. 그렇지만 서로 특별히 연결될 것 같이 않은 내용을 한 가지 이야기 안에 녹여내어 전달함으로써 이야기의 신빙성을 높여줌과 동시에 재미라는 또 다른 요소를 적절히 추가하는 능력 면에서는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생각이 든다. 공자가 논어에서 언급한 술이부작(述而不作)”. 서술하되 새롭게 짓지 않는다는 말의 가장 높은 경지를 보여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필자도 그 동안 저자와 같이 통합적 관점에서 글을 써보려 노력했기에 그의 역량에 새삼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이미 그의 저서 사피엔스호모 데우스를 통해 이런 능력을 감지했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확인했을 뿐 특별히 놀라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은 21가지에 달하는 주제들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갖고 임해야 하는가를 논한다는 점에서 분명 한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했던 이전 책들과는 사뭇 다르다. 이 말은 자칫하면 저자의 취약점이 노출될 수 있으며 내공의 한계가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을 리뷰하려 한다. 이것은 그의 명성에 흠집을 내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그의 주장이나 제언 가운데 적절한 것은 수용하고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거나 정서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것은 무엇인지 객관적인 입장에서 살펴보자는 의도에서다. 아무리 위대한 천재나 사상가가 내세운 주장이라도 완벽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저자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관점과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관점을 모두 반영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보편성과 특수성, 이 두 가지 기준에 의거해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저자의 세계관과 논리 전개 방식

이미 널리 알려졌듯이 하라리는 철저한 채식주의자(비건)이고 성적 정체성 면에서는 게이이며 대학 시절부터 비파사나 명상을 해왔던 중세 전쟁사 전공의 역사학자다. 필자가 보기에 학문적으로 하라리는 과학적 물질주의와 진화론을 지지하는 것 같은데 이 책에서도 이 점을 분명히 밝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서술한 내용에서 종종 이런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저자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과학적 통찰이 우리 뇌와 몸의 작동 방식에 대해 제시하는 견해는, 우리의 감정은 인간만의 어떤 독특한 영적 특성이 아니며 어떤 유의 자유의지도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보다 감정은 모든 포유류와 조류가 생존과 재생산 확률을 재빨리 계산하기 위해 사용하는 생화학적 기제라고 말한다. 감정은 직관이나 영감, 자유가 아니라 계산에 기반을 둔 것이다.”(85) 즉 모든 것은 뇌에서 일어나는 계산의 결과라는 것이며 이는 의식(意識)에 대한 주류 신경과학과 진화론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21가지 제언은 그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저자의 세계관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이전 책을 포함해 이 책에서도 자신의 세계관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인간을 생화학 알고리즘의 지배를 받는 유기체로 간주하면서 자유의지(free will)가 없다는 견해를 지지한다는 점, 인간의 의식은 온전히 뇌의 생화학적 산물로 본다는 점, 지능과 의식은 별개의 문제로 간주한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현재 지배적인 과학 패러다임인 환원주의와 과학적 물질주의 그리고 진화론을 지지한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저자는 사피엔스부터 이 책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유기체는 알고리즘(Organism is an algorithm)”이라고 단언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을 포함해 다세포 생명체들은 모두 유기체인데 이들을 알고리즘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곧 뉴턴의 기계적 세계관을 수용한다는 의미다. 이 말은 유기체의 특성인 자기조직화에 의한 창발성(emergent property)을 인정하지 않거나 사소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만 성립한다. 이것을 굳이 지적하는 이유는 저자가 일관되게 기계적 세계관에 입각해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어서이다.

그러면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오늘날 과학적 물질주의와 환원주의의 한계가 드러남에 따라 이에 대한 대안으로 유기체적 또는 전일적 세계관이 주목을 받고 있으며 일부 과학자들은 탈물질주의(post- materialism)”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경향은 인간의 의식 문제에 대한 연구에도 영향을 미쳐 의식은 오직 뇌의 산물이라는 주류 과학계의 견해를 반박해 뇌는 의식의 수신기 내지 필터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의식의 본질에 대한 견해차라는 차원을 넘어서 기존의 과학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쟁점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 가운데 주류 신경과학계의 입장에서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적 과정과 인간의 느낌 및 감정 나아가 의식 상태를 연관 지어 말하고 있다, 그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비일상적 의식 상태에 관한 다양한 연구 결과를 전적으로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학문적으로 열린 태도라 하기 어렵다.

 

21세기 인류의 현안 과제: 21가지 제언의 의미

이 책은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을 통해 쓴 글을 바탕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면서 저자는 사피엔스에서는 인류의 과거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고 호모 데우스에서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 다루었다면 이 책에서는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함께 토론하면서 해결방안을 모색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젊은 역사학자가 현재 지구촌 70억의 인구가 당면한 현안 과제들을 선정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야심찬 도전이라 할 수 있다. 감히 누가 이런 도전을 시도하겠는가? 이런 저자의 용기에 감탄하면서도 과연 이 시점에서 적절한 문제 제기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필자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21가지 제언으로 한정한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다룬 쟁점들이 일정 부분 편향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예컨대 저자는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의 융합에 따른 문제에 상당한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물론 이는 적절한 지적이다. 그런데 필자는 정작 더 중요한 것은 파괴적 기술과 금융자본의 결합이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 로봇공학, 나노기술, 생명공학 등은 모두 정보기술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보기술은 메타기술(meta technology), 즉 기술의 기술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위상을 가진 정보기술이 현재 글로벌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금융자본과 담합해 글로벌 차원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한다면 어떤 정부도 그 힘을 제어하기 힘들다, 머지않아 이것이 현실로 다가올 것이라는 우려를 떨칠 수 없다는 것이 현재 필자의 입장이다.

 

앞으로 세상은 점점 더 강력한 힘을 가진 극소수와 무기력한 대다수로 양극화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과정에서 금융자본은 현재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는 전략을 추진할 것이다. 예컨대 제임스 배럿(James Barrat)파이널 인벤션에서 현재 월스트리트의 금융자본은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 초국적기업들과 중국 정부가 인공지능에 투자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금액을 인공지능에 투자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금융자본이 글로벌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려는 의도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따라서 인공지능을 비롯한 첨단 정보기술로 무장한 금융자본은 향후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질 것이다. 저자가 제시한 “21가지 제언가운데는 이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다. 이로 인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시각이 편향되지나 않을지 우려된다. 필자가 염려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이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차례>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제반 문제들을 5가지 범주로 나눈 후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독자들로 하여금 생각해 볼 기회를 갖도록 유도한 것은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저자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들의 범위가 너무 넓어 개별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이 한계다.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이미 저자가 다른 책에서 언급한 내용을 보완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컨대 <1부 기술적 도전><2부 정치적 도전>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인공지능과 관련된 문제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의 한계 및 새로운 제도의 필요성, 빅데이터의 문제점, 다양한 문화들과 관련된 쟁점 등이 그러하다. 반면 제3부 이하에서 저자는 새로운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필자의 관심을 끈 부분은 <12장 겸손>, <14장 세속주의> <15장 무지> 그리고 마지막 <21장 명상>이다.

 

이 가운데 일부를 다루자면 <12장 겸손>에서 저자는 우리 모두 겸손(humility)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우리 어느 누구도 세계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일반인들에게만이 아니라 권력자나 부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면서 특히 저자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인류 역사에서 갖는 의미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유대인들이 지난 2,000년 동안 인구수에 비해서는 불균형적일 만큼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종의 역사라는 큰 그림을 보자면, 1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이래 유대인이 역사에 기여한 정도는 아주 제한적이다.”(278) 이와 같이 빅히스토리의 관점에서 보면 유대인의 영향력도 그리 크지 않으니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 적용된다. 히틀러가 이런 생각에 동의했다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도 않았을 것이고 홀로코스트도 없었을 것이다. 오만은 자신만이 아니라 모두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지난 2,000년 동안 서구 문명을 지배해온 기독교에 대해서도 저자는 비판적인 견해를 숨기지 않는다. 흔히 기독교가 서구의 도덕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하지만 이는 진실이 아니라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가 인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음에도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할 점은, 이것이 인류의 보편적 윤리에 도달한 첫 사례는 분명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경이 인간의 윤리를 찍어낸 독점적 글꼴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공자와 노자, 부처, 마하비라는 바울과 예수보다 훨씬 전에, 가나안 땅이나 이스라엘 선지자는 알지도 못할 때에 이미 보편 도덕률을 세웠다(285) 그렇기 때문에 유대교와 그 자손인 기독교인과 무슬림에게 인간의 도덕을 창조한 공을 돌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이들은 이런 면에서 겸손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유독 유대인들에게 겸손하라고 말하지만 이는 보편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경고다.

 

<14장 세속주의>에서 저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와는 다른 관점에서 세속주의(secularism)를 옹호한다. 이런 저자의 생각은 다음에 잘 드러나 있다. 스스로 세속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세속주의를 아주 다르게 본다. 이들에게 세속주의란 이런저런 종교에 반대하는 입장이라기보다 나름의 일관된 가치 기준으로 규정되는, 대단히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세계관이다.”(305) 이것은 세속주의에 대한 매우 적절한 정의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유일신교에 대한 비판 중심의 도킨스의 세속주의와는 사뭇 다르다. 21세기에는 제도권 종교의 퇴조가 불가피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이런 상황에서 세속주의는 새로운 도덕의 원천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저자가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저자는 세속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진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15장 무지>에서 저자는 필자가 가장 공감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저자의 견해는 한 마디로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무지하다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한다면 세상의 수많은 크고 작은 갈등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무지에 관해서는 일찍이 20세기의 가장 존경받는 물리학자들 중 한 사람인 존 휠러(John A. Wheeler)가 말했던 다음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는 무지의 바다에 둘러싸인 섬에 살고 있다. 우리의 지식의 섬이 커지면 이와 함께 우리의 무지의 해변도 커진다.” 저자가 무지를 언급한 취지는 휠러가 말하고자 했던 것과 대동소이하다고 본다. 누구도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테네의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친 것도 자신의 무지함을 알라는 뜻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헤아리는 경우가 드문 이유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로 가득 찬 반향실(反響室)과 자기 의견을 강화해주는 뉴스피드 안에만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믿음은 계속해서 공공해질 뿐 도전받는 일이 거의 없다.”(327)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편향된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인간은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무지를 극복하려면 자신의 습관이나 선호하는 것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며 심층 독서를 통해 진짜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특히 권력이 주는 달콤함을 극복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혁명적인 지식은 권력의 중심에서 출현하는 경우가 드물다. 왜냐하면 중심은 언제나 존재하는 지식을 토대로 구축되기 때문이다. 구질서의 수호자가 권력의 중심에 다가올 수 있는 자를 결정하는데, 이때 전통에서 벗어난 파괴적 사상을 가진 자는 걸러내는 경향이 있다.”(332) 이 또한 적절한 지적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인 <21장 명상>에서 저자는 자신의 명상 체험을 바탕으로 명상의 의미, 그리고 뇌와 의식의 관계에 대한 입장을 밝힌다. 필자는 저자가 오랫동안 비파사나 명상 수행을 해왔다는 사실과 철저하게 진화론에 바탕을 두고 글을 쓰는 태도는 양립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이 장에서 밝힌 저자의 입장을 이해한 후 어느 정도 의문이 풀렸다. 명상에 대한 저자의 실용적인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포함해 주변의 모든 실체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비파사나 명상을 통해 얻은 통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깨달은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고통의 가장 깊은 원천은 나 자신의 정신 패턴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뭔가를 바라는데 그것이 나타나지 않을 때, 내 정신은 고통을 일으키는 것으로 반응한다. 고통은 외부세계의 객관적 조건이 아니다. 나 자신의 정신이 일으키는 정신적 반응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더한 고통의 발생을 그치는 첫 걸음이다.”(473)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기본 교리와도 상응하는 내용이다. 즉 마음이 모든 고통의 원천이므로 집착을 버리면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저자의 독특한 해석을 엿볼 수 있다. 고통의 원천을 정신 패턴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여기서 정신 패턴은 뉴런의 결합 방식으로 간주할 수 있다. 즉 저자는 뇌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는가 그리고 어떤 부위들이 서로 연결되는가에 따라 고통과 쾌락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저자가 사피엔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실질적인 중요성을 지닌 역사적 진전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는 마침내 진정한 행복의 열쇠가 우리의 생화학 시스템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적, 사회적 개혁이나 반란이나 이데올로기에 시간을 그만 낭비하고, 대신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에, 즉 우리의 생화학 시스템을 조작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저자는 모든 쾌락과 행복의 원천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있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으며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뇌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과정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외부 자극이나 약물 등을 이용해 이런 생화학적 과정을 통제함으로써 쾌락을 느끼고 고통을 줄이는 데는 명백히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약물의 효과는 오래 지속될 수 없으며 더욱 갈증만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붓다가 내면으로 들어가라고 한 충고를 따르는 길이 이런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창안한 비파사나 명상의 핵심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명상을 통해 저자가 얻은 또 다른 관찰 결과는 뇌와 의식의 관계에 대한 해석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논의에서 저자는 정신, 마음, 의식을 같은 의미로 번갈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지나친 단순화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일련의 저서를 통해 저자는 자신이 진화론의 관점을 지지한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런데 저자는 뇌와 의식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수의 과학자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정신과 뇌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둘은 정말로 다른 것이다. 뇌는 물질로 된 신경세포와 시냅스와 생화학 물질의 연결망이다. 정신은 고통, 쾌락, 분노, 사랑 같은 주관적인 경험의 흐름이다.”(473) 저자는 명상 체험을 통해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정신은 곧 의식을 가리킨다. 따라서 저자는 의식은 뇌의 산물이 아니며, 의식의 본질은 주관적 체험의 흐름인 감각질(qualia)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해석에 의하면 의식은 결코 진화 과정에서 나타난 부수현상(epiphenomenon)에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화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명상을 통해 저자가 얻은 통찰과 글을 쓰면서 일관되게 유지해온 진화론 및 과학적 물질주의 간에는 명백한 모순이 존재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뭐라고 해명할지 궁금하다.

 

어쨌든 저자는 명상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체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명상을 통해 비일상적 의식 상태(non-ordinary state of consciousness)에 도달함으로써 일상적인 상태에서는 체험하기 어려운 경지, 즉 삼매(三昧)와 같은 지극한 희열(bliss)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저자는 자신의 정신 패턴을 주의 깊게 관찰함으로써 실체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 필자가 보기에 저자에게 명상은 주의 집중을 통해 이성적 사유의 극한에 도달하고자 하는 수련 방법에 해당하며 그 이상의 신비체험을 기대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다음에 잘 드러나 있다. 실제 수행이란 몸의 감각과 감각에 대한 정신적 반응을 철저하게 지속적이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관찰하고, 그럼으로써 정신의 기본 패턴을 드러나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가끔 명상을 특별한 행복이나 황홀경의 체험을 추구하는 것으로 바꿔놓기도 한다. 하지만 진실인즉, 의식은 우주에서 가장 거대한 수수께끼이며, 열이나 가려움 같은 일상적인 느낌 역시 황홀이나 우주적 합일만큼이나 신비로운 것이다.”(477)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명상을 통해 어떤 초월적이고 신비한 체험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수수께끼를 이해하는 방편으로 생각한다. 필자는 이런 저자의 입장에 충분히 공감한다. 어설프게 신비체험을 목표로 하기 보다는 주의 집중을 통해 의식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훨씬 더 과학적이라고 생각한다. 의식에 관한 연구는 주관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명상을 통해 주관적 체험 사례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기존의 환원주의적 방법의 한계를 보안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런 의미에서 명상에 관한 개인적 체험을 기술했으며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책의 말미에서 다룬 것으로 보인다. 21세기라는 지극한 혼돈의 시대에 저자가 무엇을 강조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인공지능과 인류의 미래 전망: 인간을 해킹한다

저자는 호모 데우스에서 인공지능이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다루었다. 필자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기에 그의 논지를 면밀히 검토했다. 그는 이 책에서도 호모 데우스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사실상 거의 반복하고 있다. 적어도 인공지능이 향후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내용 면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호모 데우스에서 그가 제시한 데이터주의(Dataism)는 이를 대변하는 용어로 적절했다. 이 책에서는 이로부터 특별히 진일보한 내용은 없는 듯하지만 굳이 지적하자면 저자가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의 융합을 언급한 다음 구절은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지금 엄청난 두 가지 혁명이 합쳐지는 지점에 와 있다. 한편으로는 생물학자들이 인간 신체, 특히 인간의 뇌와 감정의 신비를 해독하고 있다. 동시에 컴퓨터 과학자들은 우리에게 유례없는 데이터 처리능력을 선사하고 있다. 생명기술 혁명과 정보기술 혁명이 합쳐지면 빅데이터 알고리즘을 만들어낼 것이고, 그것은 내 감정을 나보다 훨씬 더 잘 모니터하고 이해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권위는 아마도 인간에게서 컴퓨터로 이동할 것이다.”(87)

 

필자는 저자가 이 책에서도 인공지능과 관련된 논의에 상당한 비중을 두는 데는 공감한다. 인공지능은 향후 인류의 미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공지능과 관련된 저자의 관점에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은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저자가 인공지능 전문가는 아니지만 역사학자로서 인공지능이 인류의 미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논평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이것은 경제학자인 필자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로서 인공지능이 고용, 생산성, 산업구조 및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인공지능 기술의 본질이나 향후 발전 과정에 대한 논의에는 조심스럽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저자는 이 모든 면에서 단호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인공지능 기술의 로드맵에 관한 별 다른 언급 없이 현재와 같은 수준의 인공지능, 즉 약인공지능(ANI)의 시대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를 테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가지 희소식은 최소한 앞으로 수십 년 안에 AI가 의식을 얻어 인간을 노예화하거나 멸종시키는 공상과학 같은 악몽이 현실로 닥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 알고리즘에 점점 더 의존하기는 하겠지만, 알고리즘이 의식적으로 우리를 조작하기 시작할 것 같지는 않다. 알고리즘은 의식조차 없을 것이다. 공상과학은 지능과 의식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하지만 현실에서 인공지능이 의식을 얻을 거라고 가정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지능과 의식은 상이한 것이기 때문이다.”(118) 단지 상이하다는 이유만으로 인공지능이 의식을 가질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다. 저자와 같이 진화론을 지지하는 사람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지능, 즉 패턴을 인식하는 능력이 증가함에 따라 의식도 진화하게 된다는 것이 진화론의 입장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저자는 자신의 논리에 내재된 모순을 인지하지 못하는 셈이다.

 

저자와는 반대 입장에서 의식 있는 인공지능의 출현을 예견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토머스 에디슨 이후 최고의 발명가이자 인공지능 전문가로서 몇 해 전 구글의 기술이사로 영입된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과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물리학자 미치오 카쿠(Michio Kaku)를 들 수 있다. 인공지능에 관한 한 이들은 분명 저자보다 더 전문적인 식견을 갖고 있다고 보는데 무리가 없다. 커즈와일은 저서 마음의 탄생에서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이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의식이란 복잡한 물리적 체계 속에서 부분들의 상호작용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예기치 못한 속성이다........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복잡한 인간의 뇌를 성공적으로 모방한 컴퓨터라면, 인간과 같은 수준의 의식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내가 예측하기로는 머지않은 미래의 기계들은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퀄리아(qualia)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생물학적 인간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할 것이다.” 미치오 카쿠도 마음의 미래에서 이와 대동소이한 내용을 다뤘다. 이에 대해 저자가 어떻게 반박할지 궁금하다.

 

현재 인공지능이 향후 인간과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것은 사실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인간 수준의 인공지능, 즉 범용인공지능(AGI)은 결코 개발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저자도 이렇게 전망하는 사람들 중 하나인 것 같다. 만약 이것이 맞는 것으로 드러난다면 저자가 의식이 있는 인공지능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은 타당할 것이다. 실제로 약인공지능의 수준에 머무른다 해도 인공지능이 향후 수많은 일자리를 소멸시켜 저자가 명명한 이른바 쓸모없는 계층(useless class)”를 양산할 것이라는 예상은 매우 실현 가능성이 높다. 인공지능의 미래에 대해서는 이견(異見)이 있더라도 이 점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의견을 같이 한다. 예컨대 마틴 포드(Martin Ford)도 저서 로봇의 부상에서 기술적 봉건주의의 대두를 우려하면서 같은 전망을 내놓았다. 인공지능을 통해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초국적기업들의 경제논리는 비용우위를 통해 독점적 힘을 강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교우위의 논리에 의해 인간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일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공지능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 수준의 인공지능이 개발된다면 일자리 소멸의 범위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웬만한 인간은 더 이상 인공지능과 경쟁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의사. 변호사, 회계사, 판사 등 이른바 고도의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조차 예외가 아닐 것이다. 나아가 범용인공지능은 실질적으로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정부의 기능을 상당 부분 대체할 수도 있다. 물론 정치인들의 거센 저항을 이겨낸다는 전제가 충족된다면 말이다. 이것은 사실상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이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 다음 지능폭발(intelligence explosion)이 일어나 초인공지능(ASI)이 등장한다면 이는 인류에게는 재앙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제임스 배럿이 파이널 인벤션에서 지적했듯이 인류의 마지막 발명은 초인공지능일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는 의미다. 초인공지능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자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슈퍼인텔리전스에서 인류의 존재적 위험(existential risk)을 언급했던 것이다. 초인공지능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류를 절멸시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의 약인공지능 수준에서 조금만 더 발달해도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인간을 해킹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을 우려한다. 매우 초기 수준의 인공지능을 탑재한 인공지능 스피커나 스마트폰에 의존해 거의 좀비(zombie)와 같이 행동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 이는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공짜로 SNS를 이용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데이터를 제공하는 상황에서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이렇게 얻은 빅데이터를 처리해 인간을 해킹한다는 저자의 우려는 이미 상당 부분 현실화되었다. 앞으로 이런 추세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 분명하다.

 

이미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접어들었다는 증거는 도처에 널려있다. 우리 스스로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알고리즘에 모든 것을 맡기는, 이른바 새로운 유형의 자유로부터의 도피현상이 보편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체주의가 힘을 얻어 다시 인류를 지배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저자는 역사의 종언은 연기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더 이상 인류를 구해주는 이데올로기로서 역할을 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고 지혜를 모아 파괴적 기술이 지배하는 시대를 순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정치·경제·사회 시스템을 모색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다음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생명기술과 정보기술이 융합하는 시대에 민주주의는 현재 형태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해야 한다. 안 그러면 인간은 디지털 독재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115) 향후 우리가 직면하게 될 여러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는 새로운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필자는 저자가 제시한 “21가지 제언하나하나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제언은 이보다 더 많을 수도 있고 더 적을 수도 있으니 21이라는 숫자는 별 의미가 없다. 나아가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을 감안할 때 저자가 다룬 21가지 제언이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을 모두 망라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예컨대 부와 소득의 불평등, 금융자본의 지배, 암호화폐(crypto currency)의 등장과 블록체인(blockchain) 기술의 확산 등 인류의 미래와 직결된 경제적, 기술적 쟁점들과 관련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 책에서 블록체인과 관련해서는 민주주의 체제는 지금도 기술의 충격을 이해하느라 허우적대고 있다. 인공지능의 부상과 블록체인 혁명 같은 후속 충격에는 대처할 준비도 거의 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라는 문장에 단 한 번 등장한다. 향후 경제와 사회 전반에 미칠 블록체인 기술의 엄청난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21세기의 어젠다로 블록체인 기술에 대해 다루지 않은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에 덧붙여 아직은 시험 단계지만 암호화폐의 등장과 미래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전무한 것도 아쉽다. 만일 암호화폐 실험이 성공한다면 이는 인류역사에서 가장 큰 혁명으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필자는 무엇보다도 저자가 현재 금융자본의 과도한 지배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은 일반대중의 문제의식을 호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심각한 한계라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는 경제학자가 아니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적어도 문제 제기는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현재 글로벌 경제를 파행으로 몰고 있는 원천은 바로 금융자본의 과도한 지배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기업은 단기적 관점에서 오직 주주가치극대화에만 몰두하게 되었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CEO에게 상상을 초월한 막대한 보수를 제공하기 시작했으며 비용절감을 위해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것이 비즈니스 관행이 되었다. 이것이 부와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많은 경제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와 같이 저자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향후 인류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다루어야 할 주요 쟁점들을 다루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책은 분명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 책에서 현재 우리가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과 변화가 요구되는지와 관련해 저자 특유의 글 솜씨를 바탕으로 유연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이전에 쓴 두 권의 저서를 통해 익히 짐작하였지만 이야기꾼으로서 저자의 능력은 가히 족탈불급(足脫不及)이라 할 수 있다. 재치 있는 글을 통해 일반대중이 무겁고 어려운 주제들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한 저자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