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분야

마틴 슐레스케의 《바이올린과 순례자》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9-02-21 01:52
조회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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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마틴 슐레스케(Martin Schleske) 

역자: 유영미

출판사: 니케북스(2018)

 

차례

프롤로그: 용인 그리고 형상화

메타노이아: 연마된 연장

2. 음악: 마음의 조율

3. 영감: 듣는 마음

4. 마음 인도: 영의 부름

5. 지혜: 하느님의 현존

6. 에로스: 생명에 대한 사랑

7. 신비: 힘의 원천

8. 아가페: 삶의 울림

에필로그: 하늘과의 협연

맺음말: 어떻게 하느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독특한 소재의 진실한 책

이 책은 제목과 차례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매우 독특하면서도 진지한 내용의 책이다. 바이올린과 순례자, 이 둘은 쉽게 연결되는 단어라고 할 수 없다. 오래 전에 본 영화 <지붕위의 바이올린>만큼이나 신선한 느낌을 주는 제목이다. 제목에 대한 의문은 저자 마틴 슐레스케의 이력과 직업을 확인하면서 모두 풀렸다. 슐레스케는 저명한 바이올린 제작자, 이른바 마이스터(Meister)이면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저자 슐레스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수녀님을 통해 이 책을 소개받았는데 책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되었고 저자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 슐레스케는 정통 과정을 거쳐 바이올린 제작을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물리학을 전공했는데, 이는 더 좋은 소리를 내는 악기를 만들기 위한 과학적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슐레스케는 예술적 감각과 과학적 감각을 모두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영적 감각까지 갖추었으니 그야말로 훌륭한 울림을 가진 바이올린 제작자로서의 소양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구글 검색을 해보니 그와 관련된 기사가 적지 않은데 대부분 독일어로 되어 있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바이올린에 대해 찬사를 담고 있는 듯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와 닿은 것은 저자가 바이올린의 제작하는 전체 과정이 마치 순례자의 길고도 험난한 영적 여정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필자는 그의 투철하고도 경건한 직업 정신이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바탕으로 마르지 않는 샘처럼 넘쳐나고 있다는 점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필자와 같이 기독교인이 아닌 불가지론자에게도 그의 믿음의 진정성이 느끼질 정도였다. 이 경우 슐레스케가 믿는 신의 존재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의 경건한 태도만이 중요할 뿐이다. 이런 수준에 도달한 사람에게 믿음의 근거를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와 관련해 저자가 한 다음과 같은 말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이 초월적인 존재인 동시에 우리 안에 내재하는 존재임을 잘 압니다. 성숙한 믿음은 우리 안의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에 말을 겁니다.”(309)

 

저자와 같이 성숙한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 한 없이 겸손하고 진정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과 만물을 대할 수 있다면 신의 존재도 신의 부재도 증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신을 경배하는 사람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에게는 신은 더 이상 인격신으로 인식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사실 필자는 이 책을 읽은 후 리뷰를 할 것인지 고민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종교적 내용을 다루는 것이 조심스러워서였다. 기독교인이 아닌 필자로서는 저자가 이 책 곳곳에서 하느님의 사랑, 임재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기도를 말하는 경우 그의 심정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기에 이 책의 진정한 가치를 전달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결국 간략하게나마 리뷰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책의 진정성에 있다. 필자가 보기에 저자 슐레스케는 단순히 기독교인으로서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라 신성(Godhead)”의 깊은 의미를 깨달은 사람으로서 그런 영적 체험을 바이올린 제작에 투영할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오른 마이스터로 보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진정한 신앙인이자 마이스터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것은 종교를 떠나 인간적으로도 매력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부분이다.

 

필자는 몇 년 전 미국의 영적 지도자 데이비드 호킨스(David Hawkins)박사의 저서 의식혁명(Power vs. Force)을 읽으면서 그가 제시한 의식 지도라는 개념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다. 그는 1970년대 후반 존 다이아몬드 박사가 개발한 행동운동신체학(Behavioral Kinesiology)을 이용해 간단한 측정을 통해 개인의 의식 수준뿐만 아니라 다른 사물, 예컨대 책의 의식 수준도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책의 의식 수준이란 책 내용의 진정성 및 인류에 대한 공헌도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의식 수준은 로그 스케일(log scale)1에서 1,000까지로 분류된다. 필자는 그의 이론을 전적으로 믿는 입장은 아니지만 의식 수준을 분류한다는 자체에는 공감할 수 있다. 마치 지능지수(IQ), 감성지수(EQ) 및 영성지수(SQ)를 측정하듯이 의식지수(CQ)를 측정하는 객관적인 방법이 있다면 인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어쨌든 호킨스 박사는 예수 그리스도, 붓다를 비롯한 여러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과 경전 그리고 미국 헌법을 비롯한 다양한 문서들의 의식 수준 내지 진실 수준을 측정했다. 예컨대 그는 의식혁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래 예수 그리스도가 설파한 진실의 수준은 1,000으로 측정된다. 그것은 지상에서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이다. 2세기까지 예수의 가르침의 실제 의식 수준은 930으로 떨어졌고, 6세기까지는 540으로 떨어졌다. 11초 십자군 전쟁 무렵까지는 현재의 498로 하락했다. A.D. 325년의 큰 쇠퇴는 명백히, 니케아 공의회에서 기원한 가르침의 오역이 확산된 탓이었다.”(297)

 

그리고 그는 붓다의 가르침의 진실 수준 또한 본래 1,000이었다. A.D. 6세기까지, 실제의 진실 수준은 평균 900으로 떨어졌다. 붓다의 가르침은 다른 어떤 종교보다 변질이 덜했다. 소승불교는 여전히 890으로 측정되고, 대승불교는 960으로 측정된다. 선불교는 890이다.”고 말했다. 이어서 아브라함의 가르침은 985였던 것으로 측정된다. 모세 시대의 종교적 실천은 770이었던 것으로 측정되는데, 이것은 토라의 진실 수준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호킨스 박사는 의식혁명의 진실(의식) 수준은 810으로 측정되었으며 미국 헌법은 700으로 측정된다고 주장했다. 비록 호킨스 박사의 측정 방법을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방법을 이 책에 적용한다면 적어도 700 이상은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것은 필자가 그만큼 이 책의 진실성을 높이 평가한다는 의미로서 이것이 이 책을 소개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의심과 질문으로 강화되는 믿음의 세계

필자가 이 책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 가운데는 책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저자의 종교적 향기가 포함된다. 저자는 지극히 심층 종교의 차원에서 자신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려 노력해 온 사람으로 보인다. 특히 그에게 신과의 관계가 의심과 질문을 통해서 더욱 굳건해져온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 필자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책의 첫 장 제목을 <메타노이아(metanoia)>로 정했던 것도 그런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메타노이아는 필자도 공감하는 용어인데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서의 그리스어 원문에는 회심이 메타노이아(Metanoia)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메타노이아는 생각하다(noein)’라는 말과 변화하여(meta)’라는 말의 합성어로, 생각을 바꾼다는 뜻입니다.......메타노이아, 즉 돌이킴은 미래를 만드는 고귀한 행위입니다.......참회만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돌이킴만이 거룩한 평온을 만들어 냅니다.......우리가 현재를 살고 있지 못하다면, 현재의 삶이 자꾸 손가락 사이로 흘러 보인다면, 이는 우리에게 참회와 회심과 믿음과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27)

 

저자가 메타노이아를 강조한 이유는 우리의 마음은 삶의 풍파 속에서 점점 무뎌져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려면 메타노이아를 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뎌진다는 것은 마음의 힘이 약해진다는 뜻입니다. 소망이 흐려지고, 소명에서 멀어지며, 내적 기쁨을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나무를 상대로 일을 하다가 점점 무뎌지는 연장처럼, 우리도 세상을 상대로 일하다가 점점 무뎌집니다.........우리가 무뎌졌다는 것은 소명대로 사는 일이 녹녹치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무뎌지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무뎌진 마음을 벼리려 하지 않는 태도가 나쁩니다.”(20)

 

그러면서 저자는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의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는 의심, 그렇지만 끝까지 의심하는 마음으로 남아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확실한 믿음을 지향하는 의심을 역설한다. 사실 필자가 불가지론자임을 자처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섣부른 확신이나 믿음은 오히려 우리에게 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맹신자들을 비롯해 많은 사이비 종교인들이 등장한 이유는 의도적으로 의심하는 마음을 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믿음에 해가 되는 것은 의심이 아니라, 의심이 조금도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바라는 욕심입니다.......우리가 언제나 익숙한 답변을 내놓을 수 없는 것은 묻는 자로 남기 위함입니다. 친숙한 지식이 통하지 않는 것은 깨닫는 자로 남기 위함입니다.”(37)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이 책보다 먼저 출판한 다른 책 가문비나무의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심과 믿음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의심은 믿음의 한 형태입니다. 의심 속에는 자문하는 믿음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성숙한 믿음은 의심과 혼란을 피하지 않습니다. 명쾌한 대답을 통해 의심을 떠나는 일은 드뭅니다.......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의심이 아니라 무심함입니다. 무심함은 사랑의 죽음이자 믿음의 죽음입니다. 물론 의심이 믿음을 더 쉽게 해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진실하고 더 깊이 있는 믿음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177) 필자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저자의 이 말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부정을 통한 긍정만이 진정한 긍정으로 이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심은 자연스럽게 질문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질문이란 반드시 답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질문 자체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한다는 표시이고 이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과정을 통해 무지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저자가 믿는 신을 전제로 하는 진리이다. 물론 진리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할 과제이지만 이는 결코 간단하지 않기에 여기서 다룰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 어쨌든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경우, 무지를 인정할 용기가 없을 때, 거룩한 순간이 주는 약속을 느끼지 못하고, 악기를 제대로 조율할 수도 없습니다.......지식이나 능력보다 느끼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더 중요한 상황이 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 때, 인간은 무력해집니다. 그러나 이런 무력함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같은 무지를 긍정하는 태도야말로 꼭 필요한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니까요.”(50)

 

저자는 자신의 하느님으로부터 대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질문하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을 더 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지극이 영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비록 인격신을 상정하도라도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인다. 인간사에 관여해서 벌과 상을 주는 신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답을 고뇌하게 만드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면모가 강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이 책 이전에 쓴 다른 책 가문비나무의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문비나무가 바로 바이올린의 재료로 사용되는 나무이다.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이 무엇보다 분명히 해야 할 물음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 삶이 어떤 사람 또는 무엇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지 묻는 것이지요. 나는 하느님을 알게 해 달라고 요구하기 보다는 하느님이 오늘 내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135) 이런 물음을 물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신의 본질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물질적인 복을 얻기 위해 신을 믿는 것이 아님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하나 됨의 의미

저자가 이 책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하나 됨이다. 이른바 신과의 합일 또는 우주와의 합일에 비견되는 그런 하나 됨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악기와 온전히 하나 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자신이 악기가 된 듯한 기분이 들지요. 이는 음악의 진정한 본질을 경험하는 드문 순간입니다. 분명 내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지만, 마치 내가 연주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43)

 

이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합일의 순간에 악기는 몸의 일부가 됩니다. 몸을 통해, 손과 팔을 통해, 사랑하는 마음이 청각적으로 표현됩니다. 울림으로 말입니다!.......이처럼 완전한 자기 망각의 순간은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온전히 하나 되는 경험, 마치 진동하는 현과 활 사이의 접촉점이 물리적 과정이 아니라, 신체적 경험처럼 다가오지요. 음이 활을 빨아들입니다.”(44) 악기를 만드는 장인이지만 저자 또한 어린 시절 연주자로서의 경험을 갖고 있기에 이런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합일의 느낌은 악기를 제작하는 사람으로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에 사심 없이 완전히 몰입한다면 이런 하나 됨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단 그런 체험이 어느 정도 깊이 의식 속에 각인될지 여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바이올린 제작자로서 저자는 악기를 제조하는 과정에서 제작자로서의 느낌,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를 보면서 가졌던 생각, 악기의 현과 연주자의 활이 상호 작용을 하면서 하나의 울림으로 드러나는 체험 등을 통해 저자는 신과의 합일에 비견할 만한 합일의 경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무나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감히 그 경지를 논할 수는 없지만 저자의 경험이 진실했을 것이라는 믿음이 간다. 분명 위선적인 말은 아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저자의 말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다. 악기와 연주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 즉 마음과 성령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는 사람은, 진정한 하나 됨이 무슨 뜻인지 압니다. 연주자와 악기는 하나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공동의 울림을 창조해 낼 때, 그들은 하나가 됩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둘이 서로 같은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연합한다는 의미입니다.......이 같은 합일 속에서 영원자의 마음의 소리가 우리 귀에 전해집니다.”(317)

 

깨달음에 이르는 길

저자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깨달음이다. 이는 진정한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저자의 깨달음은 곧 신과의 관계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매우 공정하게 깨달음에 이르는 네 가지 길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상의 사건들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인간이 인식(깨달음)에 이르는 길에는 네 가지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성, 경험, 직관, 영감의 길입니다. 나는 이 네 가지 길을 두루 살펴보는 가운데 특히 네 번째 길, 즉 영감의 길에 관해서 조금도 자세히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 길이 다른 길보다 중요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길에서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나는 우리가 영적으로 진보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진보의 여정은 인식의 네 번째 길인 영감과 맞닿아 있지요.”(91)

 

필자가 저자의 안목에 놀란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저자는 네 가지 길을 말하면서 자신이 가고 있는 영감의 길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에 대해 잘 몰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듯하다. 여기에는 어떤 오만함을 느낄 수 없다. 매우 겸손하게 자신이 체험한 영감의 길을 소개하려는 저자의 태도에서 오히려 무게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실제로 상세히 소개하려는 의도에서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저자의 분류에 의하면 필자는 첫 번째 길, 즉 이성의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익숙한 길에 쉽게 편향되는 경향이 있다. 필자 또한 이런 우를 범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저자는 바로 이 점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일지라도, 인간이 인식하는 것은 새벽 여명일 뿐임을 깨달을 때, 우리의 사고는 거룩해집니다. 고자세로 세상 위에 서서 생각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생각해야 합니다.......다른 방식의 사고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기도라 할 수도 있겠지요.......이성은 세상의 일을 판단합니다. 그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이성의 힘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지혜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교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158)

 

그러면서 저자는 자신이 택한 영감의 길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 이유는 이 길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 길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서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감 있는 삶이란, 은사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영적 체험을 하는 것도 아니며, 신비주의적인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낮추고 비우고 내주는 것이 곧 영감 있는 삶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런 삶을 연습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희생할 위험을 무릅쓰고 마음을 열어 스스로를 극복하고 내주는 것은 우리가 열린 그릇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132)

 

이어서 저자는 이 길을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한다. 매우 압축적이지만 우리 모두 깊이 생각해볼만한 대목이다. 직관이 수많은 경험을 통해 삶이 선사해 준 내적 풍요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영감은 자신의 내적 곤궁을 인정하는 마음에 깃듭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적은지요. 내 안에서 길어 올릴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가난함을 연습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영감 있는 삶이란, 자신의 알량한 지식을 내려놓고 기꺼이 내맡기는 데서 출발합니다.”(171) 저자의 말대로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영감 있는 삶을 위한 준비라면 필자도 어느 정도 이 길을 갈 수 있는 자격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저자의 독특한 철학을 감지할 수 있었던 부분은 역시 바이올린을 제작하면서 체험했던 울림과 공명의 법칙처럼 네 가지 깨달음의 길을 상보적으로 해석한 대목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식의 네 가지 길은 함께 어우러져 좋은 울림을 만들어 내는 바이올린의 네 가지 공명 구역과 비슷합니다. 하나가 너무 약하거나 강하면, 울림은 그 아름다움을 잃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직 겸손하며 다른 사람들을 자기보다 낫게 여겨라.”(<빌립보서 2:3>) 이는 네 가지 인식의 길 중에서 어느 하나를 지나치게 신봉하는 사람들이 꼭 들어야 할 말입니다.......요컨대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이성보다 직관을 더 낫게 여겨야 합니다.“(183) 자신을 낮추는 것이 다른 사람의 길을 존중하는 것이 겸손이며 이것이 곧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어느 길을 가는가는 각자 결정하지만 다른 길을 폄하하면 안 될 것이다.

 

사랑과 믿음의 재발견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소회는 무엇보다도 저자와 같은 신앙인이 말하는 사랑과 믿음은 어떤 지식이나 경험으로도 맛보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종교인뿐만 아니라 양식 있는 지성인이라면 누구든 사랑을 말하고 믿음을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필자도 어렴풋이나마 그 의미를 이해할 것 같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실천이나 신비체험을 통해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해서인지 추상적인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입장이다. 필자는 늘 이 한계를 느끼고 있다. 이런저런 지식을 많이 습득했다는 점에서 마치 여러 나라의 요리책을 달달 외우고 있지만 정작 직접 요리를 해보지 않아 맛을 낼 수 없는 입장과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저자는 다르다. 그는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구체적인 과정을 통해 사랑과 믿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듬어 온 것으로 보인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진실성이 느껴진다. 저자는 유대교의 쉐히나라는 용어를 통해 사랑과 믿음에 대한 자신의 근본적인 입장을 설명한다.쉐히나는 유대교에서 유래한 말로, 거룩하고 불가침적인 것이 아니라 굉장히 민감한 현존을 뜻합니다. 나에게 쉐히나와 성령은 종교적 교리나 관념이 아니라, 삶의 경험입니다. 그 안에서 살지 않고서는 가타부타 말할 수 없는 것들이지요.”(203) 즉 그 안에 살지 않고서는 사랑도 믿음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절대적인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는 한 저자가 말한 쉐히나를 체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경지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말이 진정성이 있게 느껴진다. 이는 종교를 떠나 인간적으로도 존경할 만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믿음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단호하다. 믿음을 구하려는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제대로 물을 수 있고 그런 후에야 제대로 된 믿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믿음을 논할 때, 사람들은 대게 에토스(ethos)를 이야기합니다. 올바른 행동에 관하여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에토스 못지않게 에로스(eros)도 중요합니다. 에로스는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병든 믿음은 주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묻곤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파악하려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에로스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합니다.”(231)

 

그러면서 저자는 믿음의 진정한 가치는 탐험, 즉 순례자로서 여정을 떠나는 데 있다면서 자신의 전공인 음향과 울림의 차이를 이용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믿음은 탐험을 떠나는 일입니다. 철학적 사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를 울림과 음향의 차이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음향과 달리 울림은 우리가 들을 때 비로소 탄생합니다. 듣는 귀가 음향의 영역에 잠길 떼 비로소 울림을 경험하고 느끼게 됩니다. 듣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소리는 청각적 음파일 뿐, 울림은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음향이 물리학적 자극의 크기라면 울림은 심리음향적 느낌의 크기라 할 수 있습니다.”(292) 믿음이 있는 사람이 울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그렇지만 오로지 믿음만이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본다. 예컨대 종교적 배경이 없는 사람이라도 황금률을 금과옥조로 삼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 이성과 양심이라는 두 개의 요소로도 이는 가능한 일이다. 이런 사람도 울림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오만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저자는 사랑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한다. 흔히 신은 사랑이다(God is love)”라고 말한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에서 신비체험을 한 현자들, 그리고 임사체험을 했던 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것이 무조건적인 사랑(unconditional love)“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경우에는 이런 사랑의 주체는 신일 것이고 불교라면 부처일 것이고, 유대교라면 야훼일 것이다. 임사체험을 한 사람이 특정한 종교를 믿지 않은 가운데 무조건적인 사랑을 느꼈다면 이는 우주의식과의 합일에서 오는 안도감일 수도 있다.

 

어쨌든 사랑은 기독교에서만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존재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대 그리스어에는 사랑을 뜻하는 단어가 여러 개 있습니다. 물론 조금씩 개념이 다르지요. ‘필레오(phileo)’는 우애 또는 형제애를 뜻합니다. ‘에로스는 감각적 아름다움에 대하여 기쁨을 표현하는, 갈구하고 욕망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아가페는 상대를 존경하고, 그에게 생명을 누리게끔 해 주는 헌신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사랑은 바로 아가페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입니다.”(295) 이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아가페가 바로 무조건적인 사랑의 본질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냥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하나 됨, Oneness의 체험 없이는 위선적인 사랑으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성경에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든가 원수를 사랑하라와 같은 금언을 과연 누가 끝까지 지킬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모두 분리되어 있는 존재라는 의식이 지배하는 한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따라서 이로부터 당연한 논리적 귀결은 만약 우리가 본질적으로는 하나라는 합일의식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너와 내가 사실은 하나인 전체의 부분인데 어떻게 증오하고 미워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경우 사랑은 당연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의식을 이런 수준으로 확장하는 것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것이 자신과 같은 믿음을 통해 가능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아마도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삶을 통해 바이올린과 제작자, 바이올린과 연주자가 하나가 되지 않으면 결코 좋은 울림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절절한 체험을 통해 이런 확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평범해 보이지만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랑 없는 의무감이나 유용성에 얽매인 믿음은 커다란 돛만 있고 용골이 없는 배와 같습니다. 그런 배는 빠르게 전진할 수는 있겠지만, 폭풍우를 만나면 쉽게 뒤집히고 맙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깊이와 무게를 더할 때만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은 전혀 쓸데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며 만들어 내는 모든 것이 사랑에서 나옵니다.”(275) 바이올린의 제작하면서 살아온 저자의 삶이 무척이나 부럽게 다가온다. 나에게 바이올린의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인지 자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