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분야

게랄트 휘터의 《존엄하게 산다는 것》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9-09-30 02:38
조회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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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게랄트 휘터(Gerald Huther)

역자: 박여명

출판사: 인플루엔셜(2019)

 

차례 

프롤로그

1장 잃어버린 존엄을 생각하다

2장 존엄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3장 지극히 인간다운 뇌

4장 사회적 뇌, 존엄을 배우다

5장 본능에 새겨진 존엄을 찾아서

6장 타인의 존엄을 지켜야하는 까닭

7장 강인한 삶을 향한 여정의 시작

8장 어떤 세상을 가르칠 것인가

9장 더 이상 수단으로 살지 않기 위하여

 

 

왜 지금 인간의 존엄을 논해야 하는가?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태어났으며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존중을 받으며 살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 이것은 곧 인간이 존엄한 존재임을 말한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존엄(尊嚴)인물이나 지위 따위가 감히 범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엄숙함을 의미한다. 또한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존엄(dignity)이란 도덕, 윤리, 사회적 논고에서 사용되는 단어로 한 개인은 가치가 있고 존중 받고 윤리적인 대우를 받을 권리를 타고 났음을 나타낸다. 이는 계몽주의 시대의 자연권의 연장이다. 존엄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dignity는 명예(honor)나 권위(authority)와는 사뭇 다르다. 명예나 권위란 특정 사람에게 적용되는 개념인 반면 존엄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주요 민주국가의 헌법은 인간의 존엄을 천부의 권리로 보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헌법 제210조에도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기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선언적인 명제가 현실에서는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사실 인간의 존엄을 논하는 것은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즉 누구나 다 인간의 존엄을 인지하고 있지만 막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실에서는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모두 이것을 어쩔 수 없는 당연지사로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도덕적 명령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르는 시대를 기대하는 것을 연목구어(緣木求魚)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는 왜 존엄이라는 인간의 고유한 권리이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치를 외면하고 살아야 하는가? 존엄은 오로지 존엄사(尊嚴死)라는 용어에만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해 인간을 대체하는 영역이 확대될 것이 거의 확실해지는 현 시점에서 인간의 존엄이 갖는 개인적·사회적 의미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독일의 신경생물학자인 게랄트 휘터(Gerald Huther)는 이 책에서 인간 두뇌의 특성인 단순성(reduction of complexity)과 가소성(plasticity), 그리고 열역학 제2법칙, 일명 엔트로피(entropy)법칙에 의거해 인간의 존엄을 보존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독특하고도 설득력 있는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인간의 뇌는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하므로 생존을 위해서는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닫힌계에서는 엔트로피가 결코 감소하지 않는다라는 열역학 제2법칙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정신과 육체의 조화 및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생명을 보존하고 번식에 유리한 조건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 

 

휘터는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는 것이 뇌의 에너지 소비를 줄여줌으로써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더욱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모든 문제를 생물학으로 환원하려는 불손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저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고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이런 생물학적 측면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필자도 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적어도 인간의 생물학적 기반에 대한 이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대부분 위선적인 결론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공익을 운운하면서 허황된 이야기를 남발하는 사람들일수록 뇌에 형성된 신경망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궁금하다. 

 

인간 뇌의 특성: 단순성과 가소성

저자는 인간의 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인체에 필요한 에너지의 20% 정도를 사용하므로 최대한 에너지 소비를 절약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보통 인간이 채택하는 전략이 앞에서 언급한 단순성이라는 것이다. 풀어서 말하면 이것은 복잡한 상황을 단순한 것으로 환원하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은 복잡한 상황에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신 이런 상황을 단순화시키고 유사한 경우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패턴을 만들어 냄으로써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현재 우리 상황에 꼭 들어맞는 말이다.

  

타인과의 공존이 어려워질수록,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일들이 많아질수록, 개인의 힘만으로는 변화를 일으키기가 힘들어질수록, 한 사회의 불안감은 커지기 마련이다.........이럴 때 나타나는 것이 노련한 데마고그다. 간편한 해결책을 통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며, 자신을 지도자로 선택하도록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이다. 이를 과학 용어로는 단순화(reduction of complexity)’라고 한다.”(15)

 

이것은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본능적인 성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존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인간의 뇌는 거의 고정된 신경망을 가지고 태어나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매우 불완전한 신경망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이것이 오히려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인간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뇌의 가소성으로서 뇌 과학자들에게는 오래전부터 잘 알려졌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이다. 바로 이 가소성 때문에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새로운 것을 학습할 수 있으며, 세계관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가소성이란 뇌의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망이 신축적으로 변할 수 있는 성질임을 감안한다면 결국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동은 이를 뒷받침하는 신경망, 즉 신경회로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모든 것은 신경세포들이 결정한다는 극단적인 유물론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뇌가 의식의 생산자(producer)가 아니라 단순히 의식의 필터(filter)에 불과하더라도 해당되는 신경망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느낄 수 없으며, 따라서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가소성으로 인해 인간의 열역학 제2법칙이라는 가혹한 법칙의 시련을 극복하면서 환경에 적응하고 개체의 보존과 번식에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것이다. 뇌의 가소성은 정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온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가소성으로 인해 우리는 뒤늦게나마 다시 인간의 존엄이라는 오랜 주제를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은 뇌에 각인되어 있는가? 

필자는 오늘날 글로벌 차원에서 인간의 존엄이라는 가치는 점점 사문화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더 이상 누구도 공개적인 담론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로서 인간의 존엄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도 인용하고 있듯이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 누구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도덕명령을 지키며 살아가기란 정말 힘든 현실이다. 이것은 특히 시장경제가 발달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모든 것에 가격이 책정되어 있기에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거래할 수 있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그저 수단을 뿐이다. 가격이 맞지 않으면 다른 것으로 바꾸면 되기 때문에 그 자체가 목적인 경우란 좀처럼 찾기 어렵다. 이런 세상에서 과연 목적으로서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래서 이 문제는 도덕적 관점이 아니라 생물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런 시도를 한 것이다.

 

저자는 인간 뇌의 특성상 인간은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각과 감정 및 행동을 조율하는 신경세포들의 연결패턴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자신의 행동 방향의 길잡이가 되어줄 내면의 나침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언급한 자신의 내면에 있는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과 유사한 개념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저자는 누구나 자신이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내면의 나침반에 대한 동경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경생물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이것은 결국 내적 표상을 다루는 문제다. 다시 말해 유혹받는 상황에서 활성화되는, 나라는 정체성과 긴밀하게 얽혀있는 뉴런의 연결 패턴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결국 이는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내적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일관된 방향을 제시하여 우리 뇌를 무질서의 상태로부터 지켜주고, 그것을 통해 장기적으로 에너지 소비량을 줄여주는 표상, 바로 그 표상을 일컫는 단어가 있다. 우리 사회가 이미 오래 전에 잊은 듯 보이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그 단어, 바로 존엄이다.”(23) 

 

저자에 의하면 존엄은 내면에 확신으로 깊게 뿌리 박혀 한 사람에게 인간으로서의 특성을 부여하며 그 고유의 인간됨이 행동으로 표출되도록 만드는 관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저자의 지적대로 우리는 존엄을 내면의 나침반으로 삼으면서 인생이라는 험난한 항로를 헤쳐 나가고 싶은 원초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방해하는 강력한 힘이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경우가 흔하다. 바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다. 이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경우 사회적 관계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존재들을 수단으로 간주하는 경우에만 명성과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강화시켜줌으로써 우리를 더욱 존엄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저자의 말대로 존엄이라는 관념은 우리의 내적 표상으로서 여건이 성숙하면 언제라도 드러날 수 있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필자도 이런 저자의 신념에 동조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실상 인류의 미래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사회가 해체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헌신적인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존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떤 숭고한 가치를 주장하기 전에 모두가 동등하다는 원리에 기반을 둔 인간의 존엄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확인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향후 인공지능이 지배할 미래에 인간 소외를 방지하고 사회해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의 존엄을 재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존엄에 대한 피상적인 인식 차원을 넘어 개인의 생존과 사회통합을 위한 가장 절실한 가치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관념은 지금부터라도 우리 뇌에 깊이 각인되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 1세대 사회학자로서 은퇴후 사회변동의 원천으로서 권력 주변 세력의 의식문제를 연구했던 이만갑 교수가 저서 의식에 대한 사회학자의 도전에서 강조했던 다음 구절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좋은 말, 좋은 글에 접하면 적어도 잠시 동안은 정신을 맑고 풍부하게 하는 데 약간의 도움을 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말과 글은 항상 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인간의 상호작용과정에서 체험과 사색으로 다져져서 비단 신피질의 영역에서 지적 논리의 전개로만 맴도는 것이 아니고, 변연계의 영역에서 정서적인 금선을 울리고, 더 깊이 들어가서 생명의 의욕을 분출케 하는 뇌간의 핵심에 도달함으로써 그의 심층적 의식에 연결되지 않으면 정신의 혁신을 가져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말은 정확하게 적절한 신경망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어떤 최고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을 정도의 의식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으로서 이 책에서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대동소이하다. 

 

 

인간의 존엄은 회복 가능한가? 

저자는 존엄이라는 관념은 오랫동안 잊혀져왔음을 지적하면서 이제는 다시 존엄을 회복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향후 전개될 인공지능 시대를 대비해 존엄의 회복이 시급하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필자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처럼 알고리즘과 디지털 숫자의 조합은 인간의 직업뿐 아니라 존재 가치를 완전히 바꿔 놓을 것이다. 사실 오늘날에도 이미 컴퓨터는 인간의 행동을 평가하고 있다. 심지어는 한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오랜 경험을 쌓아야 하는 신뢰도를 평가하는 데도 컴퓨터가 활용된다.......알고리즘은 자체 수정이 가능하고, 실수를 통해 학습한다. 끊임없이 발전을 거듭하며 최적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 앞에 더 이상의 최적화가 불가능한 인간들은 무익한 존재가 되고 만다.”(44) 

 

저자 또한 데이터주의(Dataism)를 경고한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와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인간이 쓸모없는 계층으로 전락할 위험을 경고한다. 문제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발전할수록 이런 추세를 막기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의식혁명인데 이를 위한 첫 단계가 인간의 존엄에 대한 공감대의 확산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저자도 이런 맥락에서 존엄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과연 인간의 존엄이 회복 가능한지 여부다. 만약 이런저런 이유로 존엄의 회복이 불가능하다면 모든 논의는 무의미하다. 이와 관련해 저자의 입장은 낙관적이다. 즉 인간 두뇌의 특성을 감안할 때 존엄의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를 수단으로 간주하는 정치·경제·사회 시스템에서 이것은 파격적인 주장으로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소망사고(wishful thinking)에 불과하다. 그러데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일말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뇌에는 존엄을 회복할 수 있는 고유한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열역학 제2법칙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단순성과 가소성을 실현하면서 동시에 불일치 상태를 극도로 싫어하는 뇌의 특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불일치 상태란 우리의 삶에서 방해를 받거나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태의 특징은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기에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일관성 있는 상태를 되찾으려 하는데, 존엄은 바로 그런 일관성 있는 상태로 인도하는 나침반이다. 비록 사회적 관계 속에서 존엄이라는 관념이 처절하게 무시되고 망각되어 왔지만 여전히 우리 뇌의 깊은 곳에서는 존엄에 대한 동경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 여건이 개선되면 언제라도 그 실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존엄과 관련된 모순적인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의 행동이 자신이 존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에 모순될 경우 내면에 일어나는 동요를 느껴봐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야만 자신의 존엄하지 않은 행동을 인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존엄한 인생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존엄하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60)

 

즉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존엄하지 않은 삶이 무엇인지 깨달은 다음에야 비로소 존엄한 삶에 대한 확신이 선다는 것이다. 이른바 부정을 통한 긍정이다. 적어도 이런 성찰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서로를 존엄한 존재로 인정하는 사회에서 살게 될 공산이 크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서로를 수단으로 간주하면서 끊임없는 탐욕과 갈등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추세는 인공지능과 로봇공학, 그리고 나노기술과 생명공학 등 첨단 기술이 발달한 미래에 더욱 강화될 것이다. 다른 존재들을 수단으로 간주할 때 자신의 이득이 점점 더 증가하며 발달한 정보기슬이 이런 추세를 더욱 강화해준다면 이 궤도를 벗어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과 관련해 저자가 인용한 사례로 우리 모두 주목할 만한 것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의미를 잃지 않았기에 생존할 수 있었던 두 명의 유명인사에 관한 부분이다. 이스라엘의 예술가 예후다 베이컨과 로고테라피를 창시한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았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례임이 분명하다. 특히 빅터 프랭클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은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자신의 존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권력자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 누구나 계발할 수 있는 덕목이자 가치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존엄은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존엄은 부나 지위와는 무관하게 모든 인간에게 고유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부유한 사람이자 지위가 높은 권력자들이 존엄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은 데 이들은 가치 기준을 다른 사람들에게 둘 뿐만 아니라, 그들을 존엄하지 않게 대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엄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존엄이라는 관념을 일깨울 수 있는 내면적인 욕구가 잠재되어 있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결코 박탈할 수 없는 그런 가치로서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존엄이 사실상 사라진 시대이지만 다시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위계질서가 상당 부분 무너지면서 아직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지 않은 현 시점에서 존엄의 회복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더 이상 과거의 질서’, 즉 지금까지 이어져온 위계질서의 구조는 통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향성을 제시해줄 구조 없이 인류가 나아갈 수는 없다. 현대사회가 빠진 딜레마가 바로 이것이다. 이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개인과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질서의 원칙을 함께 만드는 것, 즉 모든 인간에게 나아갈 방향을 가리켜줄 내면의 나침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나침반은 바로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을 인식하고 개인의 삶을, 그리고 타인과의 공존을 만들어나가도록 우리를 이끌 것이다.”(89)

 

저자의 이런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필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치명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공동선에 바탕을 둔 새로운 자본주의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공동선의 제1원리는 다름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가치이므로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려는 경우 사람들로부터 최소한의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인간의 뇌에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존엄에 대한 관념을 일깨울 수 있는, 더 나아가 일깨울 수밖에 없게 만드는 특수한 조건이 있다는 점을 환기한다. 바로 인간 뇌의 거대한 개방성 그리고 그것을 통해 평생에 걸쳐 이어지는 뇌의 가소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가소성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 특성을 이용해 존엄에 대한 관념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스스로 동물 수준의 의식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셈이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분명 개인의 몫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뇌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에 대해 무지하기에 스스로를 동물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알려줄 필요가 있다. 이것 또한 다른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간주하는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보편적 가치로서 인간의 존엄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과연 존엄은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인지 말이다. 사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지키기 가장 어려운 것이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는 모든 상대방을 단순히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기 어려운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예컨대 식당에서 종업원에게 주문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실랑이가 있는 경우 과연 그 종업원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옳은가? 이 경우 과연 어디까지가 상대방을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고, 어디부터가 목적으로 대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실제로 현실에서는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넘쳐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존엄을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이 가치로 존중할 수 있는가? 이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 대부분 자신의 행동을 뒤돌아보면 존엄을 지키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렇지만 존엄은 여전히 우리가 지켜야할 보편적인 가치임은 분명하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필자도 이에 공감한다. 물론 이를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렇기에 우선 뇌와 존엄의 관계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성적인 행동은 항상 이론모형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개인의 차이를 뛰어넘어, 아니 더 나아가 그 차이 덕분에 보편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관념, 그 어떤 사상이나 종교로도, 윤리 혹은 도덕적 가치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 바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각자의 경험만이 서로 다른 개인을 하나로 엮어주는 공통의 관념이 될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지극히 인간다운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21세기의 가장 시급한 과제다. 다행히도 최근 정신과학 분야뿐 아니라 자연과학계에서도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결과를 꾸준히 보이고 있다.”(107) 

 

바로 이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인류를 하나로 묶어줄 뿐만 아니라 21세기에 인류의 공존과 번영의 공유를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다름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장기적으로도 가장 절실한 문제라면서 저자는 다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존엄하지 않는 행동은 단기적으로 볼 때 성공적인 전략처럼 보인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존엄하지 않은 행동으로 인해 문제가 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개인의 생존과 사회의 안전을 단기적으로는 물론 장기적으로까지 보장해줄 방법은 과연 있을까?”(115) 

 

이에 대한 답은 존엄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과 기업, 나아가 정부도 매사를 단기적인 관점에서 추진해왔다. 특히 기업의 경우 목표는 단기적인 관점에서 매출이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지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회적 책임을 의식하고 행동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런 단기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을 수단으로 간주하게 된다. 오늘날 기업의 목표로 널리 수용되고 있는 주주가치극대화는 다른 모든 이해관계자들을 주주들의 가치극대화를 위한 수단으로 간주한다는 사고가 전제되어 있다. 이것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해관계자가치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지 않는 한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여전히 존엄과는 거리가 먼 현실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고 완전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저자가 강조하는 메시지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매사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면 존엄을 회복하는 데 상당히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방향 전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뇌 속에는 신경망의 재배선이라는 과정을 통해 존엄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생물학적 기반을 갖추고 있지만 그 가능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사회적 관계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수많은 일들 가운데 다른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중요한 경험을 꼽으라면, 단연코 타인과의 공존을 통해 얻는 경험을 들 수 있다........공존에서 오는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며 어떤 모습으로 인간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하는지, 그에 대한 신념이 생기는 것이다. 이 관념이 개인의 정체성과 연결될 때, 우리 뇌에는 특별한 내적 표상이 만들어진다. 바로 존엄이라는 표상이다.”(132) 

 

우리는 우선 본능에 새겨진 존엄의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존엄에 대한 본능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자신의 존엄을 인식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존엄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존엄을 무시하는 사람은 곧 자신의 존엄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호혜성(reciprocity)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의 존엄성을 인식한 사람은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경쟁에서 성공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광고 전문가들이 들이미는 그 어떤 대리만족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타인을 자신의 의도와 기대, 목적과 전략의 수단으로, 더 나아가 유혹과 허황된 약속의 수단으로 이용할 마음도, 그를 통해 이득을 얻는 일도 없다. 이미 자신의 존엄을 인식하고 있기에 타인의 존엄을 해치지도 않는다. 이것은 곧 자신의 존엄을 해치는 일이기 때문이다.”(163)

 

이것은 물론 이상적인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가 말하는 내면의 나침반이나 애덤 스미스가 말한 공정한 관찰자는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다른 사람의 존엄을 해친 사람은 자신의 존엄도 해치고 있다는 것 말이다. 단지 이것을 드러내놓고 인정하지 않을 뿐이지 내면의 관찰자는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내면적으로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물학적으로는 존엄에 대한 인식, 존엄의 회복이 가능한 하드웨어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지만 사회적 관계를 통해 형성된 소프트웨어는 끊임없이 존엄에 대한 내면의 욕구를 무시하라고 명령한다. 그래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간에 충돌이 일어나고 우리 뇌는 과부화로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면 더 상위의 법칙인 열역학 제2법칙이 작용해 단순화와 가소성의 원리에 따라 불일치 상태를 단시간에 해소하도록 함으로써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려한다. 이것이 단기적으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반복되고 있는 현상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해결책은 간단하다. 타인의 존엄을 무시하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존엄을 무시하는 실수를 범하는 것이고, 이로 인해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에너지가 소요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런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갖가지 전략을 개발해왔다. 예컨대 상황을 애써 외면하는 것도 그런 전략 중 하나다. 우리는 보통 서로 무시하고 상대방을 수단으로 간주함으로써 장기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는 악순환에 빠져 있지만 자신의 존엄은 인지한 사람은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결국 자신만이 존엄에 해를 가할 수 있다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모두가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똑같은 행동으로 사람을 대해도, 존엄성에 상처를 입었다고 느끼는 정도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다시 말해, 자신의 존엄함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은 타인의 존엄하지 않은 행동에도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주 주목할 만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의 존엄성에 해를 가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이다.”(178) 

 

우리가 사회적으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려면 우선 존엄이 인간의 고유한 본능이기에 우리 뇌의 신경망에 각인되어 있다는 생물학적 사실을 이해함과 동시에 이것은 오로지 존엄을 존중하는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만 강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널리 인지해야 한다. 그 결과 존엄한 사람들이 조금씩 많아진다면 이로 인해 존엄한 삶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고, 종국에 가서는 존엄이 최고선으로 존중받는 사회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여전히 소망사고에 속한다. 그렇다고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저자가 이 책에서 펼친 주장이 다분히 낙관적이라는 인상을 주면서도 우리가 여기에 희망을 걸어야할 이유는 충분하다. 필자는 저자의 주장에 더해 존엄을 장려하는 금전적·비금전적 인센티브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예컨대 종업원이나 소비자 등 이해관계자들을 존중해주는 기업에는 세제와 금융 면에서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는 주체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는 그런 제도를 실시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다음과 같은 메시지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에 충분하다. 

 

“(존엄성을 인식한 사람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높은 평가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느끼게 해줄 권력이나 영향력, 재산, 상징, 지위, 자리 또한 갈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존엄함을 해치지도 않는다. 상대방을 자신의 의도와 평가, 목적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우리사회가 존엄함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주변의 많은 것이 서서히 힘을 잃고 결국에는 사라져버릴 것이다.”(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