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분야

마이클 셔머의 <천국의 발명(Heavens on Earth)>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20-07-28 01:45
조회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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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

역자: 김성훈

출판사: arte(2019)

 

차례

1부 죽음 체험과 영생 추구의 다양성

1장 고귀한 생각/죽을 운명에 대한 상상

2장 이뤄질지도 모를 꿈/영생을 상상하다

3장 하늘 위의 천국들/일신교의 사후 세계

2부 영생의 과학적 탐구

4장 내면의 천국/영적 구도자들의 사후 세계

5장 영생의 증명/임사체험과 환생

6장 사후세계의 증거/기이한 심리적 체험과 사자와의 대화

7장 영혼의 요소/정체성, 복제, 부활

8장 무신론자를 위한 사후 세계/과학이 죽음을 이길 수 있을까?

3부 우리의 모든 어제와 내일

9장 우리의 모든 어제/진보, 쇠퇴, 그리고 비관주의의 인력

10장 우리의 모든 내일/허구와 현실 속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4부 죽을 운명과 의미

11장 우리가 죽는 이유/개체는 죽지만 종은 영원하다

12장 천국이 없다는 상상/무의미한 우주에서의 의미 찾기

 

 

생명, 의식과 과학적 물질주의

과학계에서 종종 회자되는 조크 가운데 늦은 밤 가로등 밑에서 뭔가를 찾는 사람에 관한 얘기가 있다. 지나가던 행인이 그 사람에게 무엇을 찾고 있냐고 물었더니 집 열쇠를 찾고 있다고 대답했다. 행인이 어디서 잃어버렸냐고 물었더니 집에서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찾느냐고 물었더니 여기가 가장 밝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조크가 시사하는 바는 엉뚱한 곳에서 답을 구하고자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행위인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 조크를 뇌에서 의식의 원천을 발견하려는 신경과학자들의 현재 상황에 적용할 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기능성 자기공명장치(fMRI), 뇌파검사(EEG) 및 경두개자기자극술(TMS) 등 첨단기기와 첨단기법의 도움으로 뇌를 구성하는 개별 신경세포의 작동원리, 신경세포들 간 정보 전달 과정, 그리고 신경망(neural network)과 커넥텀(connectome), 즉 신경망 지도에 관해 많은 것이 밝혀졌다. 이런 여건이 바로 밝은 가로등 밑에 해당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과 의식의 원천 및 본질에 대한 연구는 오직 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고정관념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이를 부인하는 신경과학자들은 이단으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애리조나대학교의 신경과학자 마리오 뷰리가드(Mario Beauregard)Brain Wars는 이런 상황을 상세하게 기술한 후 대안을 모색한 책이다. 이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이와 같이 뇌와 의식(또는 마음)의 관계에 대한 논쟁의 결과에 따라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이 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현재 이 문제를 둘러싸고 주류에 속하는 신경과학자. 심리학자, 물리학자. 생물학자. 컴퓨터과학자 등 다수의 과학자들과 이에 저항하는 일단의 과학자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일찍이 토머스 쿤(Thomas Kuhn)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지적했듯이 패러다임 전환은 종교의 개종과도 같아서 주류에 속한 과학자들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필자가 래리 도시(Larry Dossey)의 저서 원 마인드의 리뷰에서 언급했듯이 2014년 마리오 뷰리가드를 포함한 일단의 과학자들이 탈물질주의 과학 선언을 공표한 것이 훗날 패러다임 전환의 신호탄으로 평가될지도 모른다.

 

이 선언의 핵심 메시지는 기존의 과학적 물질주의(scientific materialism) 내지 물리주의(physicalism)는 과학을 바라보는 하나의 철학적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과학적 사고를 지배하면서 인간의 마음과 의식을 오로지 뇌의 작용에서 비롯되는 산물로 간주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좁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인간적, 사회적 문제들의 원인을 제공해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간의 영적 측면을 무시한 결과는 탐욕과 질투, 그리고 파괴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과학적 물질주의와 물리주의에 의하면 우주에는 오직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이들 간의 상호작용에 적용되는 물리법칙만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과 같은 것은 환상(illusion)이거나 기껏해야 진화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등장한 부수 현상(epiphenomenon)일 뿐이다. 그러므로 의식(또는 마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가 없다. 모든 것은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들로 환원해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을 추구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시도가 실패한 이후에도 많은 물리학자들이 이것을 물리학의 성배(Holy Grail)로 간주하면서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과학적 물질주의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거시세계에 적용되는 상대성이론과 미시세계에 적용되는 양자역학을 통합한 그야말로 모든 것의 이론을 구축하기 어려운 이유는 과학적 물질주의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는 일찍이 4세기 전 과학혁명이 일어났을 때부터 이미 과학적 방법론에 내재해 있던 한계였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과학혁명의 선구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자연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씌어있다.”고 선언했다. 이는 자연과학은 오직 수치로 측정 가능한 현상만을 다룬다는 것으로서 주체와 분리된 객체의 여러 측면 가운데 측정 가능한 부분, 예컨대 거리, 무게, 부피, 온도, 운동량 등만이 분석 대상인 셈이다. 이것은 관측과 실험의 대상인 객체의 질적, 주관적 측면은 철저하게 배제한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런 내재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난 400여 년 동안 과학혁명은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문명의 이기들은 과학혁명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혁명은 물론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인 인공지능, 로봇공학, 나노기술, 합성생물학 등 여러 분야에서 전 방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기술혁신은 모두 과학혁명의 결과물이다. 이와 같이 갈릴레이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주체와 객체(대상)을 철저히 구분하고, 관찰과 측정 및 실험을 바탕으로 축적된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인류는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이룩해왔다. 그 결과 물질주의는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실로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유일무이한 원리로 작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다른 측면, 즉 의식과 마음, 나아가 영혼이라는 측면은 모두 물질로부터 파생되는 부수적인 현상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과도하게 물질주의에 편향된 결과 여러 가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등장해 개인의 삶을 황폐화시키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과학적 물질주의를 반박하는 연구 결과들이 상당히 축적되어 왔으며 필자가 리뷰를 했던 래리 도시의 원 마인드는 많은 결과물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왜 물질주의는 이다지도 강력하게 우리의 삶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가?”하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탈물질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음에도 물질주의가 여전히 지배적인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4차 산업혁명의 특성을 감안할 때 물질주의의 영향력은 앞으로도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모든 파괴적 기술이 인간의 영적 측면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감각적 쾌락을 더욱 확장해주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감각적 쾌락을 극대화하고 이를 더 즐기기 위해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할 것이므로 자연스럽게 물질주의의 지배는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상황에서 물질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논리, 바꿔 말하면 탈물질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시한 논리를 반박하는 논리가 무엇인지 점검하는 것은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균형 감각을 잃지 않는 가운데 인간의 의식과 마음, 그리고 죽음이라는 주제를 둘러싼 팽팽한 대립의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불멸이라는 환상

이 책의 저자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 박사는 널리 알려진 스켑틱(skeptic), 즉 회의주의자로서 Skeptic이란 잡지의 발행인이면서 사이비과학을 비판하고 무신론을 지지하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해온 사람이다. 셔머가 비판했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의사이자 영성지도자로 명성을 쌓은 디팩 초프라(Deepak Chopra)와 생물학자로서 대안적 과학이론을 주장해온 루퍼트 셸드레이크(Rupert Sheldrake)를 들 수 있다. 셔머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 근거 없는 허튼 소리라는 식으로 냉혹하게 비판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나는 그에게 근거 없는 잡설(woo-woo nonsense)이나 내뱉으며 사이비 과학을 한다고 비난했다, 그는 나의 사고방식이 편협하고, 독단적인 유물론과 과도한 과학만능주의에 빠져있다고 비난했다.”(131)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셔머는 디팩 초프라가 운영하는 <초프라 센터>를 방문해 거기서 운영하는 영성 프로그램에 참여함으로써 초프라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리고 셸드레이크와는 함께 Arguing Science라는 책을 통해 과학에 대한 서로의 입장을 밝히면서 건전한 방식으로 토론을 하기도 했다. 이것은 셔머 박사의 긍정적인 면이다. 비록 과학적 입장은 다르지만 대화를 통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열린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데, 셔머 박사는 적어도 이 점에서는 호전적인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와는 차별화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부제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에서 영생, 사후 세계, 그리고 유토피아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이 가운데 핵심은 죽을 운명인 존재, 즉 필멸(mortality)의 존재인 인간이 불멸(immortality)을 꿈꾼다는 데 있다. 즉 죽음에 대한 인간의 저항이 이 책의 핵심이다. 그래서 저자는 몇 년 전 우리에게도 소개되었던 철학자 스티븐 케이브(Stephen Cave)가 저서 불멸에 관하여(Immortality)에서 제시했던 네 가지 불멸 모델에 관해 언급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그것은 1) 영생(staying alive) 2) 부활(resurrection) 3) 영혼(soul) 4) 유산(legacy)이다. 영생은 문자 그대로 현재의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고, 부활은 사후 어떤 계기에 의해 원래의 몸을 갖고 되살아나는 것이며, 영혼은 비록 몸은 소멸하지만 별개의 존재인 영혼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산은 자식을 통해 유전자를 물려준다거나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남거나 유명한 작품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유산은 가장 약한 형태의 불멸로서 사실상 불멸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리고 다른 세 가지 경우도 과학적 물질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실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는 매 한가지다. 이 가운데 그나마 논의의 여지가 있다면 영혼의 불멸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철학과 종교의 핵심 주제였는데 지금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저자도 이런 이유로 여기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반박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도 일신교의 관점에서 사후 천국과 지옥을 통한 영생을 논한 부분이나 지상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던 과거의 시도 및 앞으로의 시도에 관한 논의는 이 책의 핵심이 아니다. 왜냐하면 저자가 이런 문제들을 깊이 다룰 수 있는 배경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적으로 불멸을 꿈꾸는 시도라 할 수 있는 인체냉동보존술, 트랜스휴머니즘, 특이점주의, 그리고 정신업로드(mind-upload)에 관한 논의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이와 관련해서는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가 저서 사피엔스호모 데우스에서 전개한 논의에 미치지 못한다. 저자는 회의주의자로서 다양한 주제에 관한 토론에 참여해온 과정에서 축적된 나름의 역량을 바탕으로 이런 다양한 주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는 있지만 굳이 여기서 리뷰할 만한 내용은 없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따라서 불멸 가운데 영혼의 존재에 관한 내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도대체 영혼을 어떻게 정의하고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영혼은 종교와 철학 그리고 심리학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많은 혼란을 야기해왔다.

 

우선 영혼에 관한 저자의 정의 또한 과학적 물질주의의 기본 정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자아는 우리의 물리적 구성, 정보 패턴, 고유한 경험, 개인 시점에 의해 정의된다. 이것이 자율적인 자아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진짜 당신이고, 당신의 영혼이다.”(214) 저자는 개인의 영혼이란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형성된 정보 패턴에 지나지 않으며 이 모든 것은 뇌에 저장되어 있다는 입장이다. 영혼을 정의하려는 저자의 시도는 좋지만 과학적 물질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문제가 있다. 영혼도 물리법칙으로 환원해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갈릴레이가 천명한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자의 해석일 뿐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영혼의 정의는 아니다. 예컨대 유식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식을 전() 오식(五識)과 의식, 말나식 및 아뢰야식의 8식으로 구분한 후 윤회하는 것은 아뢰야식이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는 아뢰야식이 영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육체와 상호작용하지만 분리 가능한 정신적 실체로서 영혼의 존재를 탐구한다면 의식의 어떤 측면으로 한정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방법인 것으로 보인다. 레리 도시는 원 마인드에서 이런 의미의 영혼은 결코 소멸되지 않으며 원래부터 우주적 차원에서 원 마인드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육체의 소멸, 즉 죽음 이후에는 다시 여기에 합류한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그러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사례들과 관련된 과학적,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려고 시도했다. 필자가 이미 그의 책을 리뷰하면서 언급했듯이 래리 도시는 의식의 비국소성(non-locality)이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영혼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단언했지만 이는 아직은 성급한 결론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된 더 많은 연구와 반박 그리고 재반박이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저자가 시도한 것은 래시 도시가 원 마인드에서 제시한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간단히 말해 과학적 물질주의와 물리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의식과 마음은 뇌의 산물이므로 죽으면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비롯한 일체의 정신활동도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죽음은 완벽한 소멸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소망사고가 불멸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수많은 종교가 탄생해 이런저런 방식으로 불멸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켜왔다는 것이다. 나아가 최근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점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임사체험(near-death experience)이나 환생(reincarnation)도 대동소이하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의 무의식에 내재해 있는 불멸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 소망사고일 뿐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무엇보다도 임사체험이나 환생과 관련해 저자가 제시한 반박의 논거가 충분하지 않은 것이 필자의 기본 입장이다. 지금까지 임사체험이나 환생에 대해 제기되었던 반박 논리와 비교해 조금도 새로운 것이 없다. 반면 그동안 임사체험이나 환생 관련 연구는 상당한 발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가 구글 검색과 유튜브 영상을 을 통해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와 관련된 방대한 연구와 증언이 축적되어왔으며 하나하나 무시하기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모든 연구 결과와 증언들을 간단히 죽어가는 뇌에서 산소 부족으로 인해 일어난 환각(hallucination)의 일종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비판적인 입장에서 이런 자료에 대한 좀 더 과학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것이 진정 과학에 임하는 자세일 것이다. 임사체험 및 환생과 관련해 필자가 검토했던 다양한 저서, 연구 자료 및 동영상에서 제시된 내용을 간단히 허튼 소리라고 매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초심리학(parapsychology)에서 다루는 초감각지각(ESP) 현상 내지 초자연현상(paranormal phenomena)에 대해 철저하게 부정적이다. 이는 뇌가 의식을 생성한다는 과학적 물질주의의 관점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다. 이 경우 의식은 뇌에 한정되므로 국소적(local) 현상이다. 반면 텔레파시, 예감(premonition), 예지력(clairvoyance), 염력(psychokinesis) 및 원격투시(remote viewing)와 같은 초자연현상들은 시공간적으로 비국소적(non-local) 의식을 전제로 한다. 래리 도시는 원 마인드에서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이런 초자연현상들이 결코 기이한 것이 아님을 강조했으며, 미국 정신과학연구소(Institute of Noetic Sciences)의 딘 래딘(Dean Radin)을 비롯해 다수의 연구자들이 다양한 초자연현상들을 연구하고 있다. 과학적 물질주의를 신봉하는 과학자들은 이들이 그동안 축적한 연구 결과가 모두 허튼 소리에 불과하다고 단언하기 전에 비판적 관점에서 검토하는 전향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저자는 그럴 의도가 없어 보인다. 예컨대 저자는 미국 라이스대학교 종교학과 제프리 크리팔(Jeffrey Kripal) 교수가 여러 가지 초자연현상을 연구하면서 여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냉소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기이한 체험을 사후 세계 시나리오가 진짜라는 증거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라이스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제프리 크리팔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그가 말하는 외상성 초월(traumatic transcendence) 또는 강렬한 인간적 고통의 중력에 의한 영향을 받아 생기는 시간과 공간의 예지적 뒤틀림의 사례로 마크 트웨인이 꾼 죽음의 예지몽을 든다.”(183) 이와 같이 저자는 크리팔 교수의 주장에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처럼 매도하지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크리팔 교수가 제시한 초자연적 사례들은 기존의 과학적 사고, 즉 과학적 물질주의에 의하면 당연히 초자연적이다. 하지만 과학의 영역을 확대한다면 이런 사건들이 정상적인 사건, 즉 자연적인 사건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고 본다. 크리팔 교수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나아가 그는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 가운데는 마크 트웨인을 비롯해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과학자, 의사 등 일반인보다는 훨씬 더 지적이고 과학적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이들은 단지 자신들의 체험이 비합리적이고 기이한 현상으로 취급받는 것이 싫어서 공개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크리팔 교수의 저서 The Flip은 래리 도시의 원 마인드와 더불어 의식의 비국소성을 지지하는 다양한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질 만하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과학적 물질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이상 현상(anomalies) 더욱 많이 축적되면 언젠가는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전환의 과도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전환하는데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아직 충분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레이먼드 무디(Raymond Moody, Jr.)박사가 임사체험이라는 용어를 창안해 이런 사례들을 널리 알린 책 Life after Life를 출판한 것이 1975년이므로 아직 60년도 지나지 않았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삶의 의미와 목적

죽음은 본래 역설적이다. 우리는 죽기 전에는 죽음의 상태에 대해 알 수 없으며, 죽고 난 후에는 그것을 전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역설적이다. 저자도 지적했듯이 미국 인구조사국의 통계 자료에 의하면 기원 전 5만 년과 기원 후 2017년 사이에 약 1080억 명의 사람이 태어났는데 이 가운데 사후 세계에서 돌아와 그 세계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확인해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죽음은 모든 것의 소멸이라는 과학적 물질주의의 관점에 한 점 오류가 없다는 것인가?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냉소적인 평가는 존재하고 있음을 현재와 같이 육체의 감각에 의존하는 존재를 상정하는 경우에는 타당하다. 그렇지만 마치 주파수가 다르면 전파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는 수신기가 있는 것처럼 육체가 소멸한 다음에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 내지 존재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해야 할 근거가 없다. 문자 그대로 우리는 사후 세계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임사체험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사후 세계에 대한 정보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이는 더 많은 검증을 거쳐야 하는 문제이긴 하지만 수많은 임사체험에 공통적인 요소들을 추출해 분석한 자료에 의하면 사후 세계에 해당되는 무엇이 존재한다고 한다. 심지어 이 세계에서 느끼는 감각의 강도는 현실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고 증언하는 사례도 많다. 대표적으로는 신경외과의사로서 임사체험을 한 후 나는 천국을 보았다(Proof of Heaven)를 쓴 이븐 알렉산더(Eben Alexander)의 사례를 들 수 있다. 필자는 이런 주장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꼼꼼하게 살펴보자는 것이다.

 

물론 저자와 같이 과학적 물질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내용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세계관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학적 물질주의에 입각한 유물론을 신봉하는 일원론자임을 스스로 천명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 임사체험이나 환생에 관한 자료를 인정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유물론자들에게 공통적인 반응이다: 이원론은 직관적으로, 일원론은 반()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한 가지 이유는 뇌가 자신의 신경 과정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신적 활동이 뇌와 별개로 존재하듯, 다른 원천, 즉 정신이나 영혼, 혹은 의식에서 비롯된다고 여길 때가 많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나를 비롯해서 서구식 교육을 받는 과학자 대부분은 이원론적 직관을 신뢰하지 않는 일원론자다. 이원론적 직관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는 직관적으로는 지구가 고정되어 있고 태양이 그 주위를 도는 듯 느껴지고, 또 그렇게 보이지만 그런 직관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와 같다.”(124) 이와 같이 지동설과 우리 직관의 차이를 들먹이면서까지 자신의 일원론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는 일종의 근본주의자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뇌를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전파를 수신하는 텔레비전으로 비유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어느 정도 동조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아직은 기존 주류 과학계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좋다고 은근한 제안을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식이 얽히고설킨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우리는 뇌가 죽을 때 측정 가능한 의식도 함께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와 반대로 증명되기 전까지는 뇌가 의식을 만들어낸다는 기본 설정 가설(default hypothesis)로 삼아야 한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140)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아마도 뇌가 과연 의식을 생성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주류 과학계에서는 신뢰할만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간단히 말해 뇌의 상태와 의식의 상태 간에 상당한 상관관계(correlation)가 있다는 것은 대체로 인정되고 있지만 인과관계(causation), 즉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뇌가 의식을 만들어내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의식의 어려운 문제(hard problem of consciousness)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있다. 옥스퍼드대학교 철학자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슈퍼인텔리전스(Super Intelligence)에서 언급했듯이 아마 이 문제는 초인공지능(ASI)이 등장해야 해결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의식의 비국소성과 관련해 저자가 다음과 같이 의문을 제기한 것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런 비유(뇌를 TV 수상기에 비유)는 통하지 않는다. 텔레비전 스튜디오에서 방송 신호를 만들어 송출하면 텔레비전에서 그 신호를 포착한다. 만약 뇌가 텔레비전과 비슷한 기능을 한다면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방송 시설에 해당하는 의식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의식을 방송으로 내보내는 주체는 누구인가? 바꿔 말하면 뇌가 의식의 원천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 원천이라는 말인가? 사실 의식을 방송으로 내보내는 주체는 존재하지도 않고, 뇌도 텔레비전과 전혀 닮지 않았다.”(129) 임사체험, 유체이탈(out of body experience), 환생 및 다양한 초감각지각 현상들이 의식의 비국소성을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저자가 제기한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뇌가 의식의 필터라면 도대체 의식의 원천은 무엇이고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뇌가 수신하게 되는지 전 과정이 과학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아직 어떤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다. 예컨대 양자물리학자 데이비드 봄(David Bohm)이 주장하는 접힌 질서(implicate order), 시스템과학자 에르빈 라슬로(Ervin Lazslo)가 말하는 아카샤(Akasha) 내지 정보장(information field), 생물학자 루퍼트 셸드레이크가 말하는 형태형성장(morphogenetic field) 또는 천체물리학자 버나드 헤이시(Bernard Haisch)가 주장하는 영점장(zero-point field)이 의식의 원천인지 여부는 아직 누구도 단정하지 못한다. 더욱이 이런 원천과 개별 생명체의 뇌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에 관해서도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의식의 비국소성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전한 그림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것의 이론의 모체가 될 수 있다.

 

과학적 물질주의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의 차이는 결국 의식은 국소적인가, 아니면 비국소적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관되게 의식이 비국소적이라는 입장, 즉 뇌가 의식을 생성한다는 입장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증거를 제시했다. 그러면서 이것을 기정사실로 인정하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것만이 진정 지상의 천국들(heavens on earth)’을 건설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원래 이 책의 제목이 지상의 천국들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천국이 복수인 이유는 제도권 종교에서 말하는 그런 천국이 아니라 각자의 삶을 통해서 만들어가는 천국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나름 감동적(?)인 멘트로 책을 마감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기회는 단 한 번이고, 태양 주위를 80바퀴 돌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다. 가설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우주의 드라마에 설 짧지만 영광스러운 시간이다. 우리가 우주와 자연의 법칙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이 정도가 우리 대다수가 합리적으로 바랄 수 있는 최대의 시간이다. 다행히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 시간이 생명의 영혼이다. 그 시간이 바로 지상의 천국들이다.”(417) 그런데 저자가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 자체는 의문이다. 뜬금없이 삶의 목적과 의미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저자는 이런 우주적 관점(빅뱅에서 출발한 우주)이 옳다면 우리는 대체 어디 가서 의미와 목적을 찾아야 할까? 그 답은 영성(spirituality)과 경외에 관한 더욱 깊은 이해에서 출발한다.”고 말하며 또한 용기, 자각, 정직한 마음으로 죽음과 삶을 마주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좋은 것과 가장 소중한 것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감사의 마음과 사랑이다.”라는 식으로 갑자기 영성, 사랑, 의미 그리고 목적을 강조한다. 이것은 과학적 물질주의를 지지하는 회의주의자로서는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더 나아가 저자가 인간의 자유의지(free will)를 강조하는 대목에서는 헷갈린다. 과학적 물질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저자의 일관성이 결여된 태도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하는 데서도 확인된다. 저자의 논증은 이른바 체리피킹(Cherry Picking)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다름 아니라 저자가 분명 존경하고 있을만한 대단한 과학자들이 의식의 비국소성을 지지하는 말들을 남겼음에도 저자는 이들의 견해를 전혀 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널리 알려진 것 몇 개를 소개하는 다음과 같다.

 

막스 플랑크(191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나는 의식을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나는 물질은 의식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간주한다. 우리는 의식 너머로 갈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의식을 상정(想定)한다.”

 

만물은 원자를 진동하게 만들고, 가장 작은 태양계와 같은 원자를 유지시켜주는 힘으로부터 유래하며 이로 인해 존재한다. 우리는 이런 힘의 뒤에는 의식적이고 지적인 정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이 정신이 바로 만물의 매트릭스다.”

 

에르빈 슈뢰딩거(193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의식은 물질적 관점에서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식은 전적으로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찰스 셰링턴(1932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자연과학의 추종자들로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서의 전체적인 상관관계 외에는 생각과 뇌의 관계에 대해 알지 못한다.”

 

존 에클스(1963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나는 내 몸과 뇌에 관해서는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이상 뭔가가 있다. 나는 나를 유일무이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 즉 나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그밖에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순간 중력에 의해 태양 주변에서 빛이 휘는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원리를 입증해준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아더 에딩턴(Arthur Eddington)경은 물리적 세계는 의식과의 연결이 끊어지면 완전히 추상적이면서 실제성을 잃게 된다.”고 했으며, 영국의 천체물리학자로서 왕립학회 회장을 역임한 제임스 진스(James Jeans)경은우주는 거대한 기계라기보다는 점점 거대한 생각처럼 보인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외에도 양자역학의 거물이었던 닐스 보어(Niels Bohr),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그리고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를 비롯해 많은 과학자들이 이들과 유사한 견해를 피력했다. 한 마디로 의식은 비국소적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의식이 비국소적이라는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또한 과학적 물질주의와 물리주의라는 과학적 사조를 바탕으로 인류가 이룩한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는 지금 역사적 전환점에 와 있으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개인의 삶은 물론 사회 전체가 암울한 질곡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극단적인 상황을 피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현재 진행중인 4차 산업혁명은 물질적 풍요의 가치를 더욱 드러낼 것이므로 우리는 물질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나아가 코로나19로 촉발된 글로벌 팬데믹이 자주 반복될 수 있는 미래, 그리고 기후변화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을 수도 있으며, 생태계가 파괴되어 모든 종()이 소멸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고려할 때 우리 모두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에 대한 탐구에 더 많은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 이를 통해 만약 의식의 비국소성이 과학적 진실로 수용되는 날이 온다면 이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죽음을 기억하면서 또 다른 의미를 찾아 새로운 세계로의 여정을 즐겁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이다. 그리고는 스스로 그리고 함께 빅퀘스천을 탐구하는 것이다. 나는 어디에도 없으면서 모든 곳에 있고,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그런 존재인지 여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