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분야

래리 도시의 <원 마인드(One Mind)>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20-05-30 14:20
조회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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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래리 도시(Larry Dossey)

역자: 이수영

출판사: 김영사(2016)

 

차례

1부 한마음과의 만남

01 다른 이들을 구조하다 02. 한마음의 수호성자

03. 한마음의 경험들 04. 한마음은 무한한 크기의 거품 덩이가 아니다

05. 응시 받는 느낌 06. 그들은 하나처럼 움직인다

07. 동물과 인간의 한마음 08. 원자 그리고 쥐들

2부 한마음에 대한 연구

09. 뇌 너머의 마음 10. 불멸과 임사체험

11. 재탄생 12. 망자와의 대화

13. 삶의 초기에 나타나는 하나 됨 14. 서번트 증후군

15. 쌍둥이 16. 텔레소메틱 사건

17. 절대적인 확신 18. 추락한 비행기와 가라앉은 배

19. 잃어버린 하프와 도서관의 천사 20. 치유와 한마음

21. 어두운 측면

3부 한마음에 닿기

22. 우주 스프 23. 자아

24. 한마음이 신일까? 25. 막힌 열쇠구멍 뚫기

26. 꿈의 길 27. 마지막 단어는 사랑

4부 앞으로 나아갈 길

28. 확장하는 과학 29. 초월

 

 

<탈물질주의 과학 선언>의 의의

201427일부터 9일까지 미국 애리조나 주 투산에 일군의 과학자들이 모여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의 목적은 물질주의(materialism)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미친 영향, 그리고 과학, 영성 및 사회를 위한 탈물질주의(post- materialism) 패러다임이 부상하고 있는 데 대해 토론하는 것이었다. 이 회의는 애리조나대학교의 신경과학자 마리오 보우리가드(Mario Beauregard), 심리학자 개리 슈워츠(Garry Schwartz), 그리고 생물학자 루퍼트 셸드레이크(Rupert Sheldrake), 심리학자 리사 밀러(Lisa Miller) 및 의사 래리 도시(Larry Dossey) 등 여덟 사람이 주관했다. 이 책의 저자 래리 도시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이 책의 내용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회의를 마친 후 참가한 300여 명의 신경과학자, 심리학자, 정신과 교수, 의사 등 일군의 과학자들은 18개 항에 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선언문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은 물질주의와 환원주의라는 고전물리학의 가정에 근거하고 있는데 19세기 이래 과학적 물질주의(scientific materialism)라는 신념체계로 굳어졌다. 그 결과 마음은 뇌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활동일 뿐이며, 우리의 생각은 뇌, , 행동, 그리고 물리적 세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이런 과학적 방법론이 자연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고 기술 발전을 가져와 자연을 더 잘 통제하면서 인간에게 더 많은 자유를 가져다 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과학적 물질주의의 절대적인 지배로 인해 마음과 영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심각하게 방해를 받아왔다. 과학적 방법론이 곧 물질주의와 동의어는 아니므로 특별한 이데올로기나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1920년대에 확립된 양자역학은 과학적 물질주의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류 과학자들은 양자역학을 이용한 기술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었을 뿐 관찰자로서 인간의 마음(의식)과 관찰 대상의 상호작용을 줄곧 무시해왔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관찰자 효과(또는 측정 문제)는 물리적 세계를 이해하는데 있어 관찰자의 마음(의식)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보여주었다.

과학적 물질주의는 초심리학에서 연구해온 다양한 초자연현상(psi phenomena), 예컨대 텔레파시, 염력. 예지, 원격투시와 같은 현상을 무시해왔으나 이와 관련된 방대한 실증연구결과는 더 이상 무시될 대상이 아니다. 또한 임사체험을 통해 밝혀진 의식과 뇌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뇌가 의식을 생산한다는 과학적 물질주의의 입장에 반하는 것이다. 이는 마음(의식)은 뇌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결론으로 인도한다. 이에 덧붙여 과학적 물질주의는 뇌가 어떻게 마음(의식)을 생산하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탈물질주의 패러다임은 1) 마음은 물질과 더불어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로서 다른 것()으로 환원되는 대상이 아니다. 2) 마음과 물질세계는 깊이 연결되어 있다. 3) 마음은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비국소적으로 작용한다. 즉 마음은 시간적으로는 특정 시각에, 공간적으로는 특정 장소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마음은 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마음은 한계가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개개인의 단일한 마음을 모두 포괄하는 한마음(One Mind)으로 귀결된다. 4) 수많은 임사체험 사례들은 뇌는 정신활동을 중계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마음은 뇌를 통해서 작용하는 것이지, 뇌에 의해 생산되지 않는다. 이것은 육체적 죽음 이후에 존재하는 삶, 즉 사후생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5) 과학자들은 영성과 영적 체험을 탐구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 존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탈물질주의 과학은 기존 과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과학적 탐구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주를 구성하는 근본 요소로서 마음의 중요성을 발견하려는 시도다. 따라서 탈물질주의는 물질을 우주의 근본 요소로서 포용한다. 나아가 탈물질주의 패러다임은 인간과 자연의 깊은 연결을 강조함으로써 기후변화를 비롯해 인간이 당면한 환경적, 생태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하는데 도움을 준다.

마지막으로 강조할 것은 물질주의 과학에서 탈물질주의 과학으로의 이동은 인류 문명의 진화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보다 더 결정적일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래리 도시는 의사로서 일찍이 탈물질주의 과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마음(의식)을 연구해 왔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이 <탈물질주의 과학 선언>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그래서 이 선언의 내용을 간력하게 요약해 소개한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이해할 점은 탈물질주의 과학의 출발점은 인간의 마음 또는 의식의 본질에 관한 새로운 견해라는 것이다. 과학적 물질주의와 탈물질주의 간의 극명한 차이는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주의 진화 과정에서 인간의 위상에 대한 해석이 전혀 달라진다. 우리는 과연 이 광활한 우주에 우연히 등장한 그야말로 별다를 것 없는 존재인가, 아니면 궁극적으로는 한마음으로 통합된 존재로서 우주의 근본 요소인가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에 쉽게 답을 구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저자도 이 점은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탈물질주의 과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마음 내지 의식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주류 과학자들에게 무자비하게 비판을 받거나 무시당해왔다는 점을 감안해 저자는 이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루면서도 때로는 상당히 강력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필자로서는 저자가 일부 문제, 예컨대 초심리학에서 연구하는 초자연현상에 대해 지나치게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다소 우려하고 있다. 이 분야는 여전히 엄격한 검증을 거쳤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을 리뷰하기 전에 먼저 두 가지 사항을 밝히고자 한다. 첫째, 미국의 대표적인 회의론자, 즉 스켑틱(skeptic)으로서 <The Skeptic Society>의 설립자이자 Skeptic Magazine의 발행인으로서 사이비과학, 미신, 그리고 비합리적인 믿음을 반박하는 선봉에서 활동하고 있는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는 과학적 물질주의의 관점에서 이 책에서 주장한 내용을 반박한 저서 천국의 발명(Heavens on Earth)를 출판했다. 따라서 이 책에 이어 셔머의 책을 리뷰할 예정인데, 이는 논의의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다. 이 두 책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면 과학적 물질주의와 탈물질주의의 관점 중 어느 쪽이 더 신뢰할 수 있는지 각자 판단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내리기 시기상조이므로 양쪽 입장을 객관적으로 검토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둘째, 이 책에서 말하는 One Mind를 이해하려면 마음(mind)과 의식(consciousness)의 관계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지만 문제를 제기한다는 차원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마음과 의식은 동일한가?: 한마음과 합일의식

철학의 오랜 난제인 마음-몸 문제(mind-body problem)의 핵심은 의식의 본질과 관련되어 있다. 저자는 마음 = 의식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필자로서는 여기 동의하기 어렵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One Mind를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합일의식(Unity Consciousness) 내지 우주의식(Cosmic Consciousness)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두 우주 전체를 아우르면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실체를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과 의식의 관계에 대해서는 철학, 심리학, 신경과학, 그리고 종교를 비롯해 여러 분야에서 달리 해석하고 있는 실정이기에 여러 가지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에 대한 논의에 앞서 우선 상식적인 관점에서 마음과 의식이 일상 언어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마음이 아프다라고 하지 의식이 아프다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마음이 무겁다라고 하지 의식이 무겁다라고 하지 않는다. 이런 유형의 표현은 끝도 없다. 한편 의식을 잃었다라고 하지 마음을 잃었다라고 하지 않는다. 마취에서 깨어난 경우 의식이 돌아왔다고 하지 마음이 돌아왔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역사의식, 시민의식이라고 하지 역사마음, 시민마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런 몇 가지 사례만으로도 우리가 마음과 의식이라는 개념을 다른 상황에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영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I changed my mind”라고 하지 “I changed my consciousness”라고 하지 않는다. “I made up my mind”라고 하지 “I made up my consciousness”라고 하지 않는다. “out of sight, out of mind”라고 하지 “out of sight, out of consciousness”라고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일상적으로 마음과 의식을 분명히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음과 의식은 전혀 다른 개념인가? 학문적으로는 반드시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먼저 심리학의 경우를 간단히 살펴보자. 프로이트 정신분석을 포함해 심리학에서는 의식적 마음(conscious mind)과 무의식적 마음(unconscious mind)를 구분한다. 이에 의하면 마음은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더 넓은 개념으로 보인다. 그리고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융은 저서 인간과 상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마음(psyche)'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의식 및 그 의식의 내용물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우리의 마음은 자연의 일부, 끝없는 수수께끼의 연속이다. 그런데 이 자연을, 이 마음을 어떻게 또라지게 정의하란 말인가?”융에 의하면 마음과 의식은 분명 다르다. 나아가 융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마음을 의식과 동일시하면 우리는 중대한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즉 사람은 빈 마음으로 태어나 살아가면서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 빈 것을 채우게 된다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의식 이상의 어떤 것이다. 동물에게는 의식이 거의 없는 듯하지만, 많은 충동과 반응으로 보아 마음은 있는 듯하다.” 이어서 융은 인간의 본질은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다.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복잡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융은 마음과 의식을 분명히 구분하면서 마음을 더 넓고도 복잡한 개념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보편적인 견해라고는 할 수 없다.

 

한편 위키피디아에서도 마음은 의식을 포함하는 더 넓은 개념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마음은 의식, 상상, 지각, 사고, 판단, 언어와 기억과 같은 인지적 측면뿐만 아니라 감정과 같은 비인지적인 측면을 포함하는 사고 기능의 집합이다(The mind is the set of thinking faculties including cognitive aspects such as consciousness, imagination, perception, thinking, judgement, language and memory, as well as noncognitive aspects such as emotion.)” 이 정의에 의하면 의식은 인지적 측면을 담당하는 마음의 하위 개념이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이 정의를 그대로 수용하기 어렵다.

 

인도 베단타 철학에서는 의식은 마음보다 더 넓고 상위에 있는 개념으로 간주한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필자의 한계를 벗어나지만 의식에 대한 과학적, 직관적 이해를 바탕으로 생각할 때 의식이 더 근원적인 개념이라고 본다. 르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철학의 제1원리로 삼았을 때 이는 곧 도무지 부인할 수 없는 의식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다. 힌두교 베단타 철학에서 말하는 브라흐만(Brahman)과 아트만(Atman)은 우주의식과 개별 의식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사상에 비추어보면 의식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아트만, 즉 참나를 인식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우주의식의 실체를 깨닫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의식은 불멸인 반면 마음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라면 무엇인 더 근원적인지는 분명하다. 예컨대 20세기 인도의 대표적인 구루로 추앙받았던 라마나 마하리쉬(Ramana Maharshi)는 저서 불멸의 의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식이 참나입니다. 의식은 순수 지식입니다. 마음은 의식에서 일어나며 생각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음의 본질은 자각 혹은 의식입니다.” 이어서 마하리쉬는 다음과 같이 마음과 의식을 구분했다. 의식은 모든 영상들이 오고 가는 스크린입니다. 스크린은 실재이지만 영상들은 스크린 위에 비치는 그림자일 따름입니다.” 여기서 그림자에 해당하는 것이 마음이다. 이 해석에 의하면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의 한 측면, 즉 정신적 측면으로서 의식이라는 바탕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마치 의식이 바다라면 마음은 파도에 해당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의식이 근본적인 것이고 마음은 의식으로부터 일어나는 정신 작용일 뿐이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프로이트나 융의 해석과는 정반대다. 그런데 이런 베단타 철학의 해석이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 서양철학에서 마음과 의식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해왔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17세기 데카르트가 마음과 몸의 이원론(dualism)을 천명한 이래 마음-몸 문제는 철학의 주요 과제가 되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다. 워낙 주관적인 측면이 강해서 다루기 어려운 문제라 데카르트 이후 오랫동안 과학적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가 1990년대에 와서 DNA 이중나선의 공동 발견자인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을 비롯한 일단의 신경과학자와 철학자들에 의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는 곧 의식 문제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구체적으로는 1994년 미국 애리조나 주 투산(Tucsan)에 소재한 애리조나대학교에서 처음 <의식과학을 향한 컨퍼런스(Toward a Science of Consciousness Conference)> 개최됨으로써 현실화되었다. 이후 매 2년마다 컨퍼런스가 열리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이 컨퍼런스를 통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의식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1996년 젊은 정신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는 의식의 쉬운 문제(easy problem)과 어려운 문제(hard problem)를 명쾌하게 구분함으로써 의식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서구 전통에서 철학자와 신경과학자 가운데 마음-몸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의식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의식과 뇌의 관계로 치환된다. 이들은 마음보다는 의식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뇌와의 관계를 다루었는데, 묵시적으로는 마음과 의식을 동일하게 간주해온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아는 한 이 둘 간의 관계를 분명히 밝힌 경우를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이는 이들에게도 마음과 의식의 관계는 간단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류 신경과학자와 심리학자들이 마음보다는 의식이라는 개념을 더 선호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마음보다는 의식이 상대적으로 더 과학적 개념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마음(One Mind)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이 책에서 마음과 의식을 동일한 개념으로 다루고 있다. 원마인드(One Mind)는 문자 그대로 한마음으로서 모든 개별 마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구분할 수 없는 하나의 마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의식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비국소적 의식(non-local consciousness)라고 부르는 것과 동일하다. 물론 이것은 마음 = 의식이라는 전제하에서 성립한다. 이런 비국소성(non-locality)는 분리된 마음 내지 분리된 의식의 특성인 국소성(locality)과 반대 개념이다. 의식의 국소성은 마음, 즉 의식은 뇌에서 생성된다는 주장으로서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마음 또는 합일의식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필자는 마음과 의식은 같지 않다는 입장을 갖고 있지만 여기서는 저자의 입장을 수용해 일단 마음과 의식은 같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논의할 것이다. 그러다보면 이 둘을 구분할 필요가 있는지 드러날 수 있다.

 

비국소성은 한마음에 관한 논의의 핵심인데,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마음에 관한 궁극적인 논의는 의식의 비국소성에 놓여있다. 앞으로 이 용어의 의미를 탐구하게 되겠지만, 우선 간단히 말하면, 사실 개인의 마음들은 그저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말이다. 개인의 마음은 뇌나 몸 같은 특정한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현재와 같은 특정 시점에도 묶여 있지 않다. 마음은 시간과 공간에 대해 비국소적이다.”(25) 사실 이 책은 비국성을 보여주는 여러 증거를 통해 한마음이 단순히 저자의 소망사고가 아니라 반박하기 어려운 객관적,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과거 운석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던 과학자들이 운석이 발견되었음에도 그 실체를 부정했던 것처럼 한마음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증거를 철저하게 외면해 왔다고 반박한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할 점은 저자가 말하는 의식의 비국소성은 양자역학이 밝힌 주요 특성인 양자얽힘(quantum entanglement)에 근거한 비국소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주류 과학계의 조롱에 가까운 반응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냉소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양자역학은 기이하다. 의식도 기이하다. 그러니 양자역학과 의식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양자얽힘에 근거한 비국소성은 곧 모두의 의식이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의 비국소성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한다. 이 얼마나 기이한가?

필자는 주류 과학계의 이런 비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비록 한마음의 관점에서 의식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양자역학을 동원해 의식을 비국소성을 주장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고 싶겠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의 입장은 다음에 잘 드러나 있다. 멀리 떨어진 입자들이 비국소적 연결과 얽힘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번은 접촉한 적이 있어야 한다. 빅뱅 이론에 따르면, 우주의 모든 물질은 본디 아주 뜨거운 한 점의 물질 에너지 안에 농축되어 붙어 있었다. 그물질 에너지의 한 점이 약 145억 년 전에 폭발하여 지금 우리가 보는 우주가 된 것이다. 만약 빅뱅 이론이 유효하다면, 태초의 접촉인 비국소적 연결의 요건은 애초부터 충족되어 있었던 것이다.“(87) 그렇지만 이것이 의식의 비국소성을 지지하는 강력한 증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더 많은 관찰과 실험, 그리고 사례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저자도 이 점에 대해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양자얽힘이 인간얽힘과 정말 같은 것인지 알지 못하므로 우리는 아직 양자얽힘이 인간얽힘을 일으킨다고 말할 수는 없다.”(149) 이것은 바람직한 자세다. 의식 문제에 양자얽힘을 적용하는 경우에는 신중해야 한다. 일부 인사들이 이 개념을 남발하는 바람에 첨단과학을 이용해 혹세무민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예컨대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의사이자 영성가인 다팩 초프라(Deepak Chopra)에 대한 비판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도킨스는 mumbo-jumbo라는 모욕적인 단어를 사용하면서 초프라를 비난한다. mumbo-jumbo는 아무 의미 없으면서 복잡하기만 한 소리, 즉 허튼소리라는 의미다.

 

저자는 또한 한마음은 최근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마음이라는 개념은 고대의 것이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인류의 수많은 영적인 지혜들 가운데서 여전히 명예로운 신념으로 남아 있다. 모든 주요 종교의 내밀한 가르침은, 개인의 의식이 무한하고 절대적이고 신성한 근원이나 우주적인 근원에 포함되어 있고, 거기서 양분을 공급받으며, 궁극적으로 그것과 하나라는 것을 인식시킨다.”(40) 한마음을 연상시키는 대표적인 종교적 명제로는 힌두교에서 브라흐만이 아트만이고 아트만이 브라흐만이다를 들 수 있다. , “그대가 그것이다(tat tvam asi)”라는 것이다. 또는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개별 마음)와 열반(한마음)의 관계에서도 이런 생각을 발견할 수 있다. 나아가 성경에 있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예수의 말도 한마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종교적 지혜는 모두 한마음을 가리킨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일찍이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가 저서 영원의 철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도 한마음을 지지하는 것이다. “ ‘그대그것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다음의 세 가지 방법 중 어느 한 가지를 실행할 수 있다..........세 번째 가장 좋은 방법은 내면과 외부 양쪽에서 궁극의 그것에 접근하는 것인데, 그럼으로써 그 자신의 그대와 모든 다른 그대들(생물이든 무생물이든)’의 본질로서의 신을 경험적으로 깨닫게 된다. 윌리엄 로(William Law)에 의하면, 완전히 깨어난 존재는 신이 자기 영혼의 가장 깊고 가장 중심적인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이와 같이 한마음은 고대 종교적 전통에서도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현대인들에게 어필하기 어렵다. 한마음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저자가 시도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한마음의 지지자들

저자는 한마음에 대한 과학적 접근에 앞서 양자역학을 확립하는데 핵심 역할을 했던 오스트리아 출신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Ervin Schrodinger)가 마음 내지 의식에 대해 가졌던 견해를 소개한다. 사실 슈뢰딩거는 젊은 시절부터 인도 베단타철학에 심취했기에 일찍이 한마음을 지지하는 자신의 철학을 피력한 바 있다. 슈뢰딩거는 저서 정신과 물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안은 오직 하나, 즉 정신들 혹은 의식들을 통일하는 것이다. 정신의 다수성은 다만 현상일 뿐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정신뿐이다. 이것은 <우파니샤드>의 이론이다........당신은 인종과 종교가 서로 다르고 서로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며 수백 수천 년 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살아온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기적적인 일치에 놀라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신비주의는 서양에서 거의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신비주의는 환상적이고 불쾌하다고 여겨진다.”여기서 정신은 마음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정신, 마음, 그리고 의식이 대체로 같은 의미로 사용됨으로써 종종 혼란을 유발하기도 한다.

 

어쨌든 슈뢰딩거의 주장은 곧 헉슬리가 영원의 철학에서 밝힌 고대 현자들의 주장과 대동소이하다. 차이가 있다면 슈뢰딩거는 이성적, 논리적 관점에서 이런 결론을 도출했다는 것이다. 저자도 슈뢰딩거를 한마음의 수호성자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슈뢰딩거는 자신이 읽은 핵심적 가르침들에 관해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언어로 그것들을 재구성했으며, 그것은 그의 여생을 지탱해준 기둥이 되었다. <나의 세계관>, <삶이란 무엇인가>, <마음과 물질> 등과 같은 책에서는 단 하나의 마음이라는 개념을 구축하고자 애썼다......인간 의식이 단일하다는 관점을 수용하면서 슈뢰딩거는 그 자신이 산술적 패러독스라고 부른 것을 깨달았다.”(64) 여기서 산술적 패러독스란 세계는 하나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동일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라는 의미다. 세상이 하나이듯, 이를 관찰하는 의식도 하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마음이다. 이와 관련해 슈뢰딩거는 정신과 물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각자에게 지각을 통해 주입된 상들과 구분해야 할 단일한 실재 세계가 존재할까? 만일 그렇다면 , 우리 각자 가진 상은 그 실재 세계와 유사할까? ........이런 질문들은 창의적이지만, 혼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이 수의 역설(다수의 의식 있는 자아와 하나의 세계라는 역설)을 해결하는 방법은 방금 말한 질문들을 전부 과감하게 없애버리고, 그것들이 가짜 질문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나는 과감하게 주장한다.”따라서 슈뢰딩거에 의하면 한마음은 역설을 해결하는 유일한 해법이다. 슈뢰딩거는 이런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의식은 물리적 용어로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식은 절대적으로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

 

만약 슈뢰딩거가 살아 있다면 의식을 뇌의 산물로 간주하는 지금의 물리학자들의 태도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슈뢰딩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뛰어난 양자물리학자들, 예컨대 닐스 보어(Neils Bohr),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 그리고 특히 막스 플랑크(Max Planck)는 의식에 대해 그와 유사하거나 더 파격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저자가 한마음의 수호자로 막스 플랑크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플랑크는 다음과 같이 과학적 물리주의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말을 남겼다. 의식이 모든 것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나는 의식을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나는 물질은 의식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간주한다. 우리는 의식 너머로 갈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의식을 상정(想定)한다.”

(19311<The Observer>지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물질은 원자와 같은 입자를 진동하게 하고 원자로 이루어진 가장 작은 태양계를 유지시켜주는 힘으로부터 유래하며 그 덕분에 존재한다. 우리는 이런 힘의 이면에는 의식적이고 지적인 마음이 존재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이 마음이 바로 모든 물질의 매트릭스(모체).

(1944년 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 했던 물질의 본질제목의 연설에서)

 

이와 같이 막스 플랑크는 슈뢰딩거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 한마음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모든 물질의 근원, 즉 모체라고 말했다. 이는 과학적 물리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파격적인 주장으로서 저자가 말하는 한마음의 원천(source)에 대한 탐구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실제로 이 문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궁구하고 인사들의 연구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실제로 저자도 이런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한마음을 근원으로 부르든 모든 것이나 전체로 부르든, 또는 절대자, 우주, 순수존재, , 알라, 주파수대, 집단무의식, 홀로그램 영역, 아카샤 기록으로 부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것으로 부르든 간에 그것은 특색 없는 무한한 크기의 거품 덩어리가 아니다. 한마음은 우리 삶 속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83) 만약 한마음이 존재하며 실제로 우리 모두에게 작용하고 있다면 에너지 차원에서 상호작용할 수 있는 바탕, 즉 장(field)이 필요할 것이다. 중력장을 바탕으로 중력이 작용하고, 전자기장에서 전자기력이 작용하듯이 말이다. 의식, 마음, 또는 기억의 측면에서 작용하는 장의 특성과 관련해 여러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시해왔다. 예컨대 시스템 철학자 에르빈 라즐로(Ervin Lazslo)의 아카샤(Akasha) 또는 정보장(information field), 생물학자 루퍼트 셸드레이크(Rupert Sheldrake)의 형태형성장(morphogenetic field), 천체물리학자 버나드 헤이시(Bernard Haisch)의 영점장(zero-point field),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David Bohm)의 홀로그램 우주(Holographic Universe) 등은 모두 여기에 속한다. 언제가는 이 모든 이론을 통합하는 새로운 이론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면 인류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릴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필연적인 수순인지도 모른다. 진화는 방향이 없이 무작위로 진행되는 과정이 아닐지도 모른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명언대로 우리는 단지 멀리서 들리는 피리소리에 맞춰 춤을 출 뿐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밝혀졌으며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은 자중해야 할 것이다.

 

한마음의 사례들

저자가 이 책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한마음을 지지하는 여러 사례들을 설명한 대목이다. 저자는 다양한 사례들을 언급하면서 모두 과학적, 통계적으로 충분한 지지를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의 입장은 다소 다르다. 저자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주류 과학자들을 설득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 저자가 제시하는 한마음의 증거 내지 사례들은 모두 뇌가 의식을 생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경과학자들은 fMRI를 비롯한 첨단 장비의 도움으로 뇌의 상태, 즉 신경세포들의 활성화 상태와 의식의 상태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세밀하게 규명하는 데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어떻게 그런 의식 상태를 유발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상관관계(correlation)는 밝혔지만 인과관계(causation)는 밝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의 방법으로는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정신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가 의식의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를 구분한 이래 주류 신경과학자들은 오로지 쉬운 문제만을 다루고 있을 뿐 어려운 문제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이런 이유로 의식 연구에 있어 패러다임 전환이 요구되며, 이는 의식의 비국소성을 수용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외부와 내부에서 전달되는 다양한 정보를 처리한 후 이를 의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뇌는 단지 필터(filter) 내지 감축 밸브(reducing valve)로 작용한다고 해석한다면 이는 동서양의 신비체험가들이 깊은 명상 상태에서 체험적으로 터득한 의식의 본질, 그리고 과학적 물질주의의 한계에 도전한 여러 분야의 과학자, 철학자, 그리고 의사들이 제시한 의식의 비국소성 주장과 전혀 모순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의식의 어려운 문제도 단숨에 해결된다는 것이다. 모든 문제의 원천은 뇌가 의식을 생성한다는 물질주의적 일원론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한마음의 다양한 사례들 가운데 특히 주목할 것은 임사체험(near-death experiences), 전생기억(past-life memories), 그리고 초감각지각(extrasensory perception)이다. 필자는 이 가운데 특히 임사체험과 전생기억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싶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분야에서 이루어진 방대한 연구 업적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매도한다는 것은 학문적인 관점이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용납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들이 견지하고 있는 진지한 학문적 자세를 고려할 때 결코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 될 핵심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삶과 죽음에 대한 기존 관념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수 있는 파괴력이 있으며, 의식의 국소성에 대한 반박 불가능한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레이먼드 무디(Raymond Moody, Jr)박사가 1975년 임사체험이라는 용어를 고안한 이후 이 분야에서 이루어진 연구는 매우 인상적이다. 특히 미국 버지니아대학교 인지연구소(Division of Perceptual Studies)를 중심으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정신의학과 브루스 그레이슨(Bruce Greyson) 교수는 임사체험을 지수화하는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이 분야의 연구를 선도해왔다. 그리고 하버드대학을 비롯해 미국의 유수 대학에서 신경외과의사로 재직했던 이븐 알렉산더(Eben Alexander)는 박테리아성 급성뇌막염으로 사망 직전에 극적으로 살아난 후 자신의 임사체험을 바탕으로 나는 천국을 보았다(Proof of Heaven)을 출간해 임사체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크게 고조시켰다. 그 외에도 종양 전문의 제프리 롱(Jeffrey Long)은 전 세계에서 수집한 임사체험 사례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후 결과를 공유하는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죽음, 그 후를 비롯해 여러 권을 책을 출판했다. 또한 심장전문의 샘 파르니아(Sam Parnia)도 심장마비에서 극적으로 회생한 사람들의 임사체험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죽음을 다시 쓴다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이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파르니아와 같이 심장전문의로서 극적으로 회생한 사람들의 임사체험을 연구한 결과를 저명한 의학저널 Lancet에 게재함으로써 이 분야 연구를 학문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드시킨 네덜란드의 핌 반 롬멜(Pim van Lommel)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자역학과 비국소성의 관점에서 임사체험을 다룬 그의 책 Consciousness Beyond Life, 비록 주류 과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지만 이 분야에서는 명저에 속한다. 이 책이 번역되어 널리 읽히기 바라는 마음이다.

 

저자가 임사체험에 특별히 비중을 둔 이유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공포에 대처하는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유물론적 문화에서 죽음 이후에 살아남는 영혼을 믿는다는 것은 죽음과 소멸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비겁한 위안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런 비판을 넘어 살펴봐야 할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169) 저자가 말하는 두 가지 이유는 1) 이런 신념은 건강을 위해 중요하다는 점, 2) 죽으면 의식이 끝난다는 생각은 과학계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유물론적 사고를 뒤집기 어렵다.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은 개종(改宗)과 같이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더 엄밀한 증거가 필요하다. 임사체험이 단지 죽어가는 뇌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환각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지 않는다면 주류 과학자들은 끝까지 임사체험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저자도 이 점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은 저자를 비롯해 임사체험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미국의 경우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임사체험을 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80년대의 갤럽여론조사는 대략 1,300만 미국인들이 임사체험을 한 것으로 추산했다. 한 연구는 통계학적으로 미국에서 매일 8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임사체험을 한다고 밝혔다.”(178)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대체로 이 사실을 숨긴다고 한다. 잘못하다가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임사체험을 했다는 통계자료가 과연 신뢰할만한 것인지 의문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임사체험은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는 실제 현상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도 임사체험에 대한 주류와 비주류 과학계의 합동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이는 학문과 과학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다.

 

임사체험에 대한 주류 과학계의 비판의 핵심은 산소 부족을 비롯해 죽어가는 뇌에서 일어나는 환각 증상이 임사체험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임사체험을 심도 있게 비판한 연구가 많지는 않은데 대중적인 관점에서 볼 때 대표적인 연구로는 미국 켄터키대학교 의과대학 신경과 교수인 케빈 넬슨(Kevin Nelson)의 저서 뇌의 가장 깊숙한 곳을 들 수 있다. 넬슨에 의하면 렘(REM)수면 상태와 깨어 있는 의식 상태가 미묘한 방법으로 결합해 임사체험을 유발한다고 한다. 그의 주장의 진위를 떠나서 임사체험이 과연 뇌가 의식을 생성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넬슨의 연구가 널리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미루어 주류 과학계에서도 임사체험에 대한 견해가 엇갈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류로든 우리는 임사체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만약 임사체험이 뇌가 만들어내는 환각이 아님이 밝혀진다면 이는 인류사에서 엄청난 사건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신중하게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저자는 주류 과학계의 비판에 대해 공유임사체험(shared-death experiences)의 사례를 들어 반박하고 있다. 건강한 사람이 죽어가는 부모나 친지와 같이 임사체험을 경험하는 사례가 있다면서 이는 죽어가는 뇌에서 발생하는 환각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라는 것이다. 이 개념은 임사체험이라는 용어를 만든 레이먼드 무디 박사가 자신의 부모가 사망하기 직전 실제로 체험했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등장한 개념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유임사체험은 임사체험의 전형적인 요소인 터널체험, 신비한 밝은 빛을 보는 것, 몸 밖으로 나가는 느낌, 일생을 다시 회상하는 등을 대부분 포함한다.......무디는 말한다. “아프지도 않고 죽어가지도 않는 몇몇 건강한 사람이 함께 공유한 신비로운 빛의 감각은, 회의론자들의 주장을 상당히 무너뜨리고 있다. 그들의 주장이란 임사체험자들이 보는 빛은 죽어가는 뇌가 만드는 스파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190) 그런데 임사체험조차 주류 과학계에서는 환각으로 치부하는 상황에서 공유임사체험은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밖에 저자는 임박한 죽음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과 관련된 공사체험(fear-death experience)와 이것 보다 한걸음 더 나간 집단공사체험(collective fear-death experience) 등을 언급하면서 뇌가 의식을 생성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임사체험을 비롯한 이런 현상들 모두 한마음을 지지하는 증거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뇌가 의식을 생성하지 않는다는 것이 곧 모든 사람들의 의식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 점에서 지나치게 앞서 나간다는 인상을 준다. 주류 과학계의 반발을 무력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주관적인 체험 사례가 아니라 엄격한 증거다.

 

다음으로 저자가 한마음의 사례로 강조하는 것은 재탄생(rebirth) 또는 환생(reincarnation)이다. 이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긴 이안 스티븐슨(Ian Stevenson) 또한 버지니아대학교 의과대학 정신의학 교수였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이런 점에서 버지니아대학교는 의식의 비국소성 연구에서 최첨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안 스티븐슨 교수의 연구에 감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학박사 이안 스티븐슨(1918~2007)은 재탄생과 과거 생애의 가능성을 연구하는 분야에서 누구보다 우뚝 선 이름이다. 그는 버지니아대학 건강과학센터 인격연구분과(현재 지각연구분과)의 과장이자 정신의학과 교수였다........그의 연구범위는 숨이 멎을 만큼 광범위해서 의심하는 사람조차 그가 모아놓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례를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200) 실제로 환생에 관한 과학적 연구의 표준을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그의 연구는 우리나라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얼마전 죽음학을 연구하는 최준식 교수가 저서 인간은 분명 환생한다를 통해 스티븐슨 교수의 연구를 소개한 것은 의미가 있다.

 

그리고 버지니아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짐 터커(Jim Tucker)교수는 이안 스티븐슨 교수의 뒤를 이어 환생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그의 저서 어떤 아이들의 전생 기억에 관하여는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에 대한 사례를 객관적으로 분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왜 환생(재탄생)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이에 관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재탄생이 받아들여진다면 무슨 차이가 있게 될까? 가장 중요한 결과는 마음과 몸의 이원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라고 스티븐슨은 믿었다. “일상생활에서 마음이 몸과 연관되어 있지만, 또한 몸으로부터 충분히 분리되어 죽음 이후에도 살아 있으며 나중에 어느 때에는 다른 몸과 연결될 수 있을 만큼 독립되어 있다는 신념 없이는 우리는 윤회를 상상할 수 없다.”(206) 이것은 중요한 지적이다. 만약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의 사례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인정된다면 이는 기억은 뇌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의식 또한 뇌가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반박하기 어려운 증거가 된다. 그러면 거의 무시되고 있는 이원론(dualism)이 다시 지지를 받게 될 것이다. 나아가 임사체험이 공간적으로 의식의 비국소성을 뒷받침한다면 환생은 시간적으로 의식의 비국소성을 뒷받침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주류 과학계가 이 두 가지 현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과학적 물질주의의 종언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이 두 가지는 여전히 거센 저항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그동안 이 두 분야에서 축적된 방대한 연구 성과가 앞으로 어떻게 평가될지 두고 볼 일이다.

 

저자는 이 두 가지 현상 외에 초심리학(parapsychology)에서 다루는 초감각지각이나 초자연현상에 해당되는 다양한 사례들을 언급하고 있다. 먼저 이에 대한 필자의 입장은 저자가 이 분야에서 얻은 연구 결과에 지나치게 경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 일상적인 감각을 넘어서는 체험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되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지금은 초감각적 지각에 해당되는 텔레파시(telepathy), 원격투시(remote viewing), 예감(premonition), 응시(staring)라던가 그밖에 신통력(clairvoyance), 예지(precognition), 염력(psychokinesis) 등 다양한 사이 현상에 대한 연구가 매우 활발하다. 이 분야에서는 루퍼트 셸드레이크의 텔레파시와 응시에 대한 연구, 그리고 미국 캘리포니아 소재 정신과학연구소(Institute of Noetic Sciences)의 딘 래딘(Dean Radin) 박사의 다양한 사이 현상에 대한 연구가 돋보인다. 그렇지만 주류 과학계에서는 이들의 연구를 인정하기는커녕 의사과학(pseudoscience)으로 매도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셸드레이크 박사가 몇 년 전 주류 과학계의 도그마를 비판한 테드 강연을 금지한데서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런 분야에서의 연구가 더욱 활성화되어 모두가 납득할 만한 결과가 나오길 기대한다. 아직은 이런 연구가 주류 과학계의 비판과 냉소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 분야의 연구에 전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다. 사실 저자는 이 책의 상당부분을 이들 연구를 지지하는 내용으로 채우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에서는 빙의로 알려진 망자와의 대화에 대해서도 저자는 상당히 우호적이다. 심지어 영매에 대해서는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밖에 서번트(savant) 증후군에 대해서는 의식의 비국소성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번트들이 ESP, 초감각적 지각을 지녔다고 보고하는 임상의가 많다. 그중 하나로, 자기 이름이나 문장을 하나도 쓸 줄 모르는 자폐증 서번트 조지는 부모가 예기치 않게 차를 태워주려 할 때마다 그것을 미리 알아차렸다.”(233) 다양한 서번트 사례는 한마음의 증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서번트들이 한마음에 접속에 초인적인 능력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주장이다. 다양한 서번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초능력을 기존의 뇌에 관한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서번트 증후군과 뇌의 기능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 다른 결론이 나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의식의 비국소성을 지지하는 모든 사례들에 지나치게 긍정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는 과학자로서는 경계해야 할 태도다.

 

저자는 그밖에 초감각지각에 해당하는 다양한 사례들을 언급하면서 모두 한마음의 가능성과 연결시킨다. 예컨대 망자와의 대화, 멀리 떨어진 쌍둥이 간의 놀라운 상호연결, 엄마와 아기의 긴밀한 연결, 놀라운 치유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행적, 예지몽을 비롯한 꿈의 역할, 원격투시의 사례 등 다양한 사례들은 모두 한마음을 강력하게 지지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물리학자이면서 초심리학을 연구했던 러셀 타그(Russell Targ)가 주축이 되어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소련에 대한 정보를 얻을 목적으로 오랫동안 스텐퍼드연구소에서 수행했던 원격투시에 관한 연구가 성공적이었으며, 이는 의식의 비국소성과 한마음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탠퍼드연구소의 원격투시 프로그램은 1972년부터 1995년까지 CIA, DIA, NASA, 해군, 공군, 그리고 정보부대의 2,500만 달러 기금으로 25년간 지속되었다. 타그가 말했듯이, 이 프로그램에서 나온 과학적 발견은 프린스턴, 에든버러, 위트레흐트대학 등에서 재현실험을 하고 <네이쳐>, <IEEE 회의록>, 그리고 미국 물리학연구소에서 후원한 과학저널에 실렸다.”(272) 타그는 실제로 이런 연구를 수행했으며 저널리스트이자 영성연구자인 린 맥타가트(Lynne McTaggart)도 저서 필드에서 타그의 실험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나아가 저자는 타그의 원격투시 원리를 양자얽힘 또는 데이비드 봄의 접힌 질서 개념을 이용해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타그는 홀로그램 아이디어를 이용해 원격투시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과연 그러한지 의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인 반응이 지배적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초감각적 지각 현상을 언급하면서 저자가 내리는 결론은 분명하다. 한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정도로 방대한 정보가 축적되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회의론자들의 한탄과는 대조적으로 한마음을 지지하는 증거는 방대할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실험실에서 실험주의자들이 재현하고 있다.”(268) 필자는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가 지나치게 강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다른 전문가들이 실험실에서 같은 결과를 재현했다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조심스럽다.

  

한마음과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 가능성

한마음은 철학계의 오랜 난제인 마음-몸 문제, 그리고 그 핵심에 있는 의식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 만약 개개인의 마음 내지 의식이 보이지 않는 장(field) 안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면 마음-몸 문제와 의식 문제는 일거해 해결될 것이다. 나아가 한마음의 존재 여부는 유한한 인간을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므로 우리의 삶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예컨대 원수를 사랑하라라든가 하나님은 사랑이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와 같은 경구들이 더 이상 실천하기 어려운 과제가 아니다. 나와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 다른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유기체들이 깊은 차원에서는 하나의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현재 과학적 물질주의를 지지하고 있는 과학계가 의식은 환상(illusion)이거나 기껏해야 진화과정에서 창발한 부수적인 현상(epiphenomenon)에 불과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영적 전통을 지지하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십 년 동안 자아라는 개념은 과학 내부에서 자동차 파괴 경기의 희생자가 되어왔다. 유물론적 과학자들로부터 끊임없이 격류처럼 흘러나오는 책들은 자아와 전쟁을 일으켜왔다. 자아란 한 사람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존재감이고, 자아성찰의 대상이며, 나를 다른 누구가가 아닌 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이 모든 관념을 누가 더 철저하게 쓰레기통에 버리는가를 겨루는 이들처럼 보인다.”(323) 재미있는 표현이다. 의식이 환상이라면 곧 자아도 환상이다. 따라서 자아란 실체가 아니며,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불교에서 무아(無我)를 강조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실재하는 것은 물질과 에너지뿐이라는 유물론적 사고를 반영한 것일 뿐 한마음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 한마음을 지지한다는 것이 오래된 종교적 전통과 모순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저자가 말하는 한마음은 영성가들이 말하는 합일의식 내지 우주의식과 동일하며, 베단타 철학에서 말하는 순수의식(pure consciousness)과도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깊은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단지 우리 감각기관의 한계로 인해 모든 것이 분리된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실재와 환상이 전도되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보통 인간의 한계인 셈이다. 이런 차원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생노병사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사랑도 실천할 수도 없다. 특히 죽음의 공포가 어떤 방식으로든 현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침으로써 더욱 자기중심적인 삶에 집착하게 만든다. 이는 과학이든 종교든 기존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한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다. 이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함과 더불어 한마음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것이다. , 의식의 비국소성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의식의 존재를 상정한다. 이는 곧 육체의 죽음이 모든 것의 소멸을 의미한다는 과학적 물질주의를 폐기처분하는 것이다. 이는 곧 물질주의적 일원론을 폐기하고 데카르트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원론, 즉 합일의식을 바탕으로 개별 의식과 몸으로 구성된 우주를 상정하는 것이다. 지금은 다분히 납득하기 어려운 세계관이지만 이 분야에서 축적된 방대한 연구가 머지않아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따라서 문제 해결의 열쇠는 의식의 본질에 있다. 필자는 양자역학, 철학, 심리학, 초심리학, 신경과학, 생물학, 컴퓨터공학, 인공지능, 영성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통합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한다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힐 것으로 예상한다. 이것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인류사적인 과제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가 다소 편향된 인상을 주지만 한마음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한마음의 인류사적 가치를 일반인들에게 진솔하게 알리려 노력한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저자가 전하는 다음 메시지에 우리 모두 깊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한마음을 체험하는 모든 순간에는 생생한 자각, 연결, 친밀함, 그리고 더 큰 전체와의 교감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절대자, , 여신, 알라 우주 등 그 무엇으로 인식되든, 이 모든 체험은 강렬한 사랑의 경험 속에 녹아들어 있다. 그런 체험 후에는 우리 인생의 존재론적 근거에 심오한 변화가 뒤따른다......이 한마음의 체험은 통과하고 나면 돌아올 수 없는 바늘구멍이다. 이 체험은 우리에게 최상의 희망이지만, 희망 이상의 그 무엇이다. 그것은 모두의 손에 닿을 수 있고, 이미 많은 사람이 경험해온 것이다.”(404) 우리는 지금, 여기서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할 시점이다. 한마음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자기성찰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여건(인간, 유기체,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어야 비로소 그 존재를 체감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