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 분야

프랜시스 콜린스의 『신의 언어(The Language of God)』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6-08-28 01:27
조회
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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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프랜시스 콜린스(Francis S. Collins) 

역자: 이창신

출판사; 김영사(2009)

 


목차 

1부 과학과 신앙의 간극

  1장 무신론에서 믿음을 갖기까지

  2장 세계관 전쟁 한가운데

2부 인간 존재에 관한 심오한 질문들

  3장 우주의 기원

  4장 미생물, 그리고 인간

  5장 신의 설계도 해독하기

3부 과학에 대한 믿음, 신에 대한 믿음

  6장 창세기, 갈릴레오, 그리고 다윈

  7장 첫 번째 선택, 무신론과 불가지론

  8장 두 번째 선택, 창조론

  9장 세 번째 선택, 지적설계론

  10장 네 번째 선택, 바이오로고스

  11장 진리를 찾는 사람들

부록: 생명 윤리학, 과학과 의학의 도덕적 실천

 

 

<북 리뷰: 과학과 신앙의 조화 모색―바이오로고스란 무엇인가?> 

★ 저자 소개 및 책의 개요

필자는 이 책을 몇 년 전에 읽었지만 특별히 주목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차에 저자에 대해 더 알게 되면서 책의 내용을 정리해 여러 사람들과 공유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저자 프랜시스 콜린스(1950~)는 1953년 이중나선(double helix)을 발견해 프랜시스 크릭과 공동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제임스 왓슨(James Watson)의 뒤를 이어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총괄 지휘한 의사이자 유전학자로서 현재 미 국립보건원(NIH) 원장을 맡고 있다. 2000년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1차성과를 발표했으며 2003년에 최종 완결하였다. 이런 업적으로 콜린스는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과학자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가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수장으로 지명된 것도 유전병을 일으키는 유전자의 실체를 밝히는 데 큰 업적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유전자 사냥꾼(gene hunter)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이 책은 과학자이자 기독교인인 저자가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과학적 진실간의 조화를 추구한 독특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저자의 성장 배경이나 교육 및 연구 경력에 관해서는 위키피디아를 통해 상세히 알 수 있으니 이를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콜린스는 이 책의 앞부분에서 자신이 불가지론자(agnostic)에서 무신론자(atheist)로, 그리고 결국은 기독교인(christian)으로 개종하게 된 과정을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저자의 종교적 입장을 지지하거나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학과 종교 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저자의 열린 태도에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저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수리물리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신학 공부를 한 후 성공회 사제가 되었던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을 연상케 한다. 

 

이 책의 요지를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진화론과 신에 대한 믿음이 모순이 아니며 충분히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자신의 입장을 “바이오로고스(Biologos)” 또는 “유신론적 진화론”으로 묘사하고 있다. 유전학자이며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총괄책임자였던 저자는 DNA에 대한 해석을 통해 진화론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임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사실이 창조주로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의 입장은 신이 우주를 창조한 후 더 이상 개입하지 않았다는 이신론(理神論, deism)의 주장과도 일정 부분 일치한다. 진화론에 대한 저자의 확신은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나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과 같은 철저한 유물론적 진화론자들 못지않다. 

 

이 점은 저자가 지구 나이는 6,000여 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젊은지구창조론과 설계자의 존재를 주장하는 지적설계론에 대해 과학적으로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를 주장하면서 생명이란 고도의 지성을 가진 설계자에 의해 설계되었음이 분명하다면서 진화론을 반박해온 지적설계론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다. 또한 자신이 기독교인이면서도 젋은지구창조론을 주장하는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저자는 객관적 진실로서 과학적 발견을 무척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적 신념과 과학적 진실 사이에 균형을 취하려는 저자의 태도는 본받을 만하다고 본다. 그런데 철저한 유물론적 진화론자인 리처드 도킨스나 샘 해리스(Sam Harris)는 저자의 이런 태도에 상당히 냉소적이다. 필자는 이들이 이런 입장을 취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과학만능주의에 경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종교근본주의가 문제이듯이 과학만능주의도 문제이기는 마찬가지다. 이 점에서 아인슈타인의 명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고,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Science without religion is lame, religion without science is blind)”는 우리가 항상 새겨야 할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에게 콜린스는 아인슈타인의 명언이 담고 있는 메시지에 충실하려 했던 과학자로 여겨진다. 누구도 그를 냉소적으로 폄하할 자격이 없다. 

 

한 가지 특기할 점은 이 책의 제목인 “신의 언어”와 DNA는 논의 전개과정에서 그다지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저자가 DNA가 어째서 신의 언어인지 과학적으로 쉽게 풀어썼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의 명성에 비추어 지극히 당연한 기대였으나 그렇지 않았다. 이 점에서 필자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오히려 저자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진화론은 반박할 수 없는 과학적 사실임이 입증되었다고 말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 책에서 논의한 내용을 많은 분들이 공유한 가운데 이와 관련해 활발한 토론을 하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유튜브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DNA는 특히 지적설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설계자, 즉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이런 관점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책으로는 스티븐 마이어(Stephen Meyer)의 『세포 속의 시그니쳐(Signature in the Cell)』(2013)를 들 수 있다. 마이어를 포함해 진화론을 반박하는 사람들은 정보란 결코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며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생성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DNA와 단백질이 동시에 존재해야 하는데 원시 지구의 유기혼합물의 바다에서 순전히 우연에 의해 DNA와 같이 고도의 질서를 갖는 정보체계와 20개의 아미노산이 절묘하게 배열해 특정한 단백질을 형성하고 이런 단백질 분자들이 3차원으로 접혀 세포를 형성해 생명이 탄생할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마이어의 논리에 따르면 특정한 아미노산 배열을 통해 단백질 분자 하나가 형성될 확률은 1/10179정도로 거의 0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구의 역사 45억 년은 생명이 우연히 탄생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턱 없이 짧다. 따라서 원시 스프에서 우연히 생명이 출현했다는 가설은 과학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된다. 그런데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진화론을 지지하는 과학자들 가운데 확률의 관점에서 이런 논리를 반박한 내용을 보지 못했다. 생명의 기원과 종의 기원의 문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이 둘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불필요한 논쟁이 그치지 않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비록 출간된 지 꽤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들에게 우주와 생명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 과학적 관점에서 본 신(神)의 존재에 대하여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꽤 관심을 끌었던 스티븐 호킹과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의 공저 『위대한 설계』(2010)에서 저자는 우주와 생명의 탄생을 설명하는 데는 중력법칙을 포함한 물리법칙과 자기조직화의 원리만으로 충분하기에 굳이 신을 도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신의 존재를 전제해야만 우주만물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한 것은 아니었다. 즉, “부재의 증명(proof of absence)”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신은 존재하는가? 이에 대해서도 과학적 관점에서는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 즉 “증거의 부재(absence of proof)”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대표적인 유물론적 진화론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늘 말하는 “증거(evidence)가 없다”는 주장에 해당한다.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도 같은 맥락에서 증거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신에 관한 논의는 과학과 이성의 영역밖에 있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모든 종교가 신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므로 신과 종교를 동일시하는 성급한 논의도 피해야 할 것이다. 또한 신을 믿는 종교라도 유일신교인가 아니면 다신(多神)교인가 하는 문제부터 시작해 어떤 신을 믿는가에 따라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다. 일찍이 유대인 랍비가 아인슈타인에게 신을 믿는가하고 물었을 때 아인슈타인이 “당신이 말하는 신은 어떤 신인가?”하고 되물었던 일화처럼 논의의 대상인 신의 특성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또한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융이 말년에 한 기자가 신을 믿는가 하고 물었을 때 단순히 ”나는 압니다“라고 대답한 것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신의 문제는 이성과 과학의 영역에 국한시킬 수 없다. 

 

필자는 종교의 본질이나 신의 존재를 둘러싼 문제에 관해 본격적으로 논의할 능력은 없다. 단, 콜린스의 저서가 이 문제에 대해 뭔가를 생각하도록 우리를 자극하기에 좁은 소견이나마 피력하려는 것뿐이니 이글을 보게 된 분들의 양해를 구한다. 콜린스는 자신이 처음에는 불가지론자였다가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무신론을 확인하기 위한 탐구 과정에서 역으로 신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런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작가이자 철학자인 루이스(C. S. Lewis,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이기도 하다)의 저서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처음에는 신앙의 이성적 근거들을 철저히 조사해보면 믿음의 가치를 부인하고 내 무신론을 재차 확인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루이스가 지은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였다. 그 뒤 며칠간 책장을 넘기며 이 전설적인 옥스퍼드대학 학자가 펼치는 지적인 주장의 깊이와 넓이를 흡수하려 애썼다. 그러면서 신앙의 허구를 주장했던 내 논리가 초등학생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인간의 질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질문을 고민하기 위해 백지에서 새로 시작해야 했다.“(27쪽) 개인적으로 이 대목에서 저자의 고뇌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인간에게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도덕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의 존재를 입증한다고 말한다. 상당한 논리적 비약이 있지만 저자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는 이런 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진화론이든 포스트모던 철학이든 그 무엇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특별한 사실을 발견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은 비록 그것을 적용한 결과는 극과 극일지언정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보편적인 생각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보니 중력의 법칙이나 특수상대성원리처럼 도덕법도 법칙에 준하는 현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지나치게 엄격하게 적용할 경우 깨져버리는 종류의 법이다........내가 보기에 이 법은 오직 인간에만 해당하는 법이다.“(29쪽) 이것이 저자가 기독교의 신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필자는 콜린스의 신앙을 비판하려고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콜린스와 같은 과학자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 이런 믿음을 고백할 때는 분명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무엇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개인적으로 신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접근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서로 상보적이라고 생각한다. 즉 한편으로는 올더스 헉슬리가 『영원의 철학』(2014)에서 상세히 언급했듯이 동서양의 여러 신비주의적 현자(賢者)들과 같이 오로지 명상 수행과 묵상 기도를 통해 신성(Godhead)을 느끼는 방법도 가능하다고 본다. 다른 한편으로는 수리물리학자였다가 성공회 사제가 된 존 폴킹혼이 저서 『쿼크, 카오스 그리고 기독교』(2009)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양자역학과 같은 첨단물리학을 바탕으로 신의 존재를 지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폴킹혼은 그 책에서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본 실재(reality)의 본질, 카오스 이론에서 말하는 부분의 성질을 뛰어 넘는 복잡성과 창발성 및 자기조직화 등을 바탕으로 신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입증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오래 전에 읽은 책이라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강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폴킹혼은 빅뱅과 진화론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과학자로서 진리에 대한 확신과 종교인으로서 신에 대한 믿음이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이런 맥락에서 과학적인 관점에서 신의 존재를 부활시키는 데 기여한 또 다른 대표적인 물리학자로 아미트 고스와미(Amit Goswami)를 들 수 있다. 그는 『신은 죽지 않았다』(2014)에서 철저하게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신을 정의하고 존재를 입증하려 시도하였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과학은 ”양자 신 가설(Quantum God Hypothesis)“을 전제로 재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가설에 의하면 양자 의식(quantum consciousness)이 모든 하향적 인과관계(downward causation)의 배경에 존재하며 이것이 바로 과학적 관점에서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원천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우주의식(cosmic consciousness) 내지 신의식(god consciousness) 또는 합일의식(unity consciousness)을 언급한 다른 사람들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어 이에 대해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의식의 과학(science of consciousness)“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한편 신의 문제는 역사적 관점과 순수한 철학적 내지 신학적 관점에서도 충분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한다면 그리고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신 개념에 일어난 변화를 인정한다면 순수하게 영성적 관점에만 초점을 맞추거나 오로지 첨단 과학의 관점에서 신 개념을 논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철학자 니체가 19세기 말에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것도 이런 역사적, 철학적 관점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고스와미는 책의 제목을 ”신은 죽지 않았다“라고 정한 것이리다. 

 

필자는 또한 프레데릭 르누아르(Frederic Lenoir)가 『신의 탄생』(2011)에서 역사적 맥락에서 신 개념이 어떻게 진화해왔는가를 검토한 내용에 상당히 공감한다. 기회가 닿으면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이 주제에 관해 논의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신 개념을 비롯해 종교 자체가 진화적 산물이라면 이것은 결국 자연법칙의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조차도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상징이요 개념이라는 것인가? 신이란 결국 유한한 인간의 소망 사고(wishful thinking)를 투사(projection)한 것에 불과한 것인가 등의 의문이 떠오른다. 많은 현자들이 말했듯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체험을 글로 공감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보편적인 사실로 수용하기 어렵다는 게 문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는 신학(神學)의 대중화가 중요하다. 이것은 특정 종교의 신 개념을 정당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생물학적, 심리학적, 철학적, 사회학적 그리고 종교적 관점에서 포괄적으로 접근해 이성적이면서도 이성을 한계를 초월하는 신 이론을 일반인들에게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결코 간단한 작업은 아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길희성의 『신앙과 이성사이에서』(2015)는 매우 현학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책은 아니지만 진정한 신앙과 신관(神觀)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유일신관의 의의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과 ”진화적 창조“에 대한 논의는 콜린스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이상 필자가 신 개념과 관련해 두서없이 논의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과학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과학과 종교의 상보적인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 점에서 필자는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와 대체로 같은 입장이다. 굴드는 과학과 종교는 겹치지 않는 교도권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NOMA(Non-Overlapping Magisteria)라고 한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 겹치지 않는 두 분야를 다루므로 서로 다툴 필요가 없으며 충분히 양립 가능하다는 것이다. 필자도 기본적으로는 그의 입장에 동의한다. 각 영역은 각자의 고유한 방법을 이용해 진리를 추구하면 되며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이것은 과학만능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진정한 과학 정신을 추구하는 과학자들과 종교 근본주의에 집착하지 않고 심층 종교를 지향하는 신앙인들 사이에서나 가능할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것이 앞서 인용했던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경구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콜린스는 아인슈타인의 메시지를 충실하게 수행하려 했던 과학자로 존중받을 만하며 유물론적 과학자들로부터 냉소적인 비판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는 아니라고 본다. 과학이든 종교든 인류 최대의 적은 교만(驕慢)과 독선(獨善)이다. 저자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우리 모두 음미할 만하다: ”이전까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을 발견하는 대단한 특권을 누리는 과학자에게는 그 번득이는 통찰력에서 오는 특별한 종류의 기쁨이 있게 마련이다. 과학적 진실을 희미하게 감지하면 나는 그 즉시 만족감을 느끼고 진실보다 더 위대한 것을 이해하고픈 갈망을 느낀다. 이런 순간에는 과학이 단순한 발견을 뛰어넘는다. 이때 과학자는 현실적 설명이 불가능한 세계를 경험한다.“(42쪽) 이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이 말한 ”우주적 종교“로 이어지는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이유로 우리 모두 콜린스의 주장에 관심을 가질 만하다. 

 

★ 우주와 생명의 기원 그리고 진화론 

저자는 기본적으로 빅뱅 이론을 지지한다. 그러면서 빅뱅 이론을 신의 창조 행위와 연결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폭발 이론이 신학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우주를 신이 무에서 창조한 것으로 설명하는 신학 전통에 이 이론은 충격 그 자체였다. 대폭발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야말로 기적이라는 정의에 딱 들어맞는 사건이 아닐까?........나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대폭발을 설명하려면 신을 말할 수밖에 없다. 또 자연은 시작이 분명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나는 자연이 어떻게 자연을 창조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단지 시간과 공간 저 너머에 초자연적인 힘이 존재해 그 일을 했으리라고 밖에는.“(72쪽) 저자의 이런 입장은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다. 대부분의 주류 천체물리학자들은 저자의 해석에 반대한다. 그렇지만 이런 해석을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 있는 논리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는 어떻게 무(無)에서 탄생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적당한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저자는 빅뱅 이론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인류원리(Anthropic principle)“를 적극적으로 해석해 우주가 이처럼 미세 조정되어 인류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것은 다중우주의 관점에서 인류원리를 해석함으로써 인류는 수없이 많은 우주―초끈이론에 기반을 둔 다중우주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무려 10500개의 우주가 존재한다고 한다―가운데 하나에 우연히 등장한 존재일 뿐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저자의 입장은 분명하다. 인류는 우연히 등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류의 등장은 자연법칙과 진화법칙 안에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저자는 18세기까지 갈릴레오, 데카르트, 뉴턴, 스베덴보리와 같은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의 배후에 있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사실상 저자가 새로운 입장을 내세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진화론과 생명의 창조주로서 신에 대한 믿음이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유신론적 진화론, 즉 바이오로고스의 핵심이다. 

 

또한 저자는 생명의 기원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가 있는 지구의 역사에 대해서 지구의 나이는 대략 45억 년이며 탄생 후 약 6억 5천만 년이 지난 후 비로소 단세포 생명체가 등장했다는 과학계의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이른바 ”젊은지구창조론“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한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비과학적인 주장을 함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신앙을 훼손시킨다는 저자의 입장에 공감한다. 이른바 종교의 심층에 도달한 사람만이 이런 자세를 견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전학자이자 게놈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저자에게 특히 관심을 갖는 부분은 ”생명의 기원“에 관한 견해다. 이 문제는 여전히 과학계의 수수께끼이다. 또한 이 문제는 진화론과는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마치 진화론이 생명의 기원마저 자연선택과 우연(돌연변이)에 의해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진화론은 종의 기원과 다양성 및 복잡성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지만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최초의 자기복제 유기체는 대체 어떻게 생겨났을까? 현재로서는 그저 모른다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그러나 이 선을 넘어 더 자세히 들어가면 그야말로 안개속이다. 이런 화합물에서 자기복제 정보를 가진 분자가 어떻게 자발적으로 모일 수 있을까? DNA는 인산과 당을 뼈대로 하는 복잡한 염기서열로 이루어졌으며, 이 염기들은 사다리의 발판처럼 차곡차곡 쌓여 꼬인 이중나선 구조를 이룬다. ‘우연히’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분자 구조다. DNA에는 자기복제 수단이 내재된 것 같지 않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95쪽) 앞으로 이 문제가 어떻게 풀릴 것인가가 관건이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결되었고 DNA와 관련해 상당 부분이 밝혀진 지금도 생명의 기원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다. 앞으로 등장할 이론은 우주의 나이 138억 년과 지구의 나이 45억 년을 기본 사실로 전제한 가운데 DNA와 단백질이 동시에 존재하는 가운데 생명의 자기 복제와 번식이 일어나게 된 필연적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중나선의 공동 발견자 중 한 명인 프랜시스 크릭이 생명이 외계로부터 지구에 유입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은 그만큼 이 문제가 미스터리에 쌓여 있음을 의미한다. 이에 관해 우리는 여전히 추측만 할 뿐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은연중에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생명의 기원에 관한 심오한 질문 앞에서는 과학도 무력하다보니 유신론자 중에 어떤 이는 RNA와 DNA의 출현을 신의 창조 행위를 설명할 기회로 삼는다. 우주를 창조할 때 신이 의도적으로 자신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인간을 만들었다면, 그리고 생명이 생성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복잡성이 우주에 존재하는 화학물질의 자기결합 능력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면, 신이 개입해 이 과정을 시작하지 않았겠는가?“(97쪽) 과연 그러한가? 

 

그런데 일단 DNA와 RNA를 이용한 유전정보의 전달과 단백질 합성이 이루어진 후 이에 기반을 둔 단순한 생명체가 탄생함으로써 전개된 생명과 관련된 모든 사건들은 진화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 시각이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균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여러 생물을 연구한 결과, DNA와 RNA에 담긴 정보를 단백질로 번역하는 데 쓰이는 이 ‘유전암호’는 이제까지 알려진 모든 생물에서 공통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생명의 언어에는 그 어떤 바벨탑도 허용되지 않았다. GAG(세 가지 염기서열을 말함)는 토양에 있는 세균의 언어로도, 애기장대풀이나 악어의 언어로도, 우리 고모의 언어로도 똑같이 글루탐산이다.“(110쪽) 모든 생명체의 유전체(게놈)는 공통적으로 네 가지 염기인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민(T)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모든 생명이 공통조상으로부터 진화했다는 분자 차원의 증거인 것이다.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저자의 말이기에 더욱 신뢰감을 준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저자가 신의 설계도라고 묘사한 인간 게놈을 해독할수록 기이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24개 염색체를 가로질러 배열된 DNA 암호가 담긴 31억 개의 글자로 된 방대한 인간게놈을 연구하다 보면 이내 놀라운 사실들이 나타난다. 그 중 하나는 실제로 단백질 합성에 쓰이는 게놈은 지극히 적다는 사실이다. 인간 게놈에는 단백질을 합성하는 유전자가 대략 2만~2만 5,000개에 불과하다. 이 유전자가 단백질 합성에 사용하는 DNA는 다 합쳐봐야 전체 DNA 가운데 고작 1.5퍼센트다........더구나 벌레나 파리 같은 단순한 유기체나 단순한 식물을 구성하는 유전자 수도 대략 2만 개 정도로 우리와 비슷한 수준이라는 사실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128쪽) 생물학자 루퍼트 셸드레이크도 지적했듯이 유전자를 모두 해독한다고 해도 인간의 본성에 관해 더 이상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이것이 ”환원주의적 유물론“의 한계인 것이다. 

 

인간 게놈을 해독함으로써 모든 질병에 대한 근본 치유법을 발견하고 다른 종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수한 물질적 기반을 확인할 수 있다고 믿었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이와 관련해 저자의 다음 표현은 특히 음미할 만하다: ”인간과 생쥐의 게놈을 비교해보자. 두 게놈의 전체적인 크기는 거의 똑같고, 단백질을 합성하는 유전자 목록도 놀랄 정도로 비슷하다. 그러나 조상이 같다는 명백한 증거는 그 세부적인 부분을 살펴볼 때 금방 드러난다. 이를테면 인간과 생쥐 염색체에 있는 유전자 순서가 기나긴 DNA가닥을 따라 계속 일치한다는 점이다........어떤 경우에는 이런 관계가 상당히 길게까지 나타나기도 해서, 이를테면 인간의 17번 째 염색체에 있는 사실상 모든 유전자가 생쥐의 11번 째 염색체에서 똑같이 나타난다.“(137~138쪽) 이 얼마나 놀라운 과학적 사실인가? 

 

이상 간단히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 저자가 내린 결론은 DNA차원에서의 증거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하나의 단순한 생명체에서 유래했다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사실상 다원은 당시 진화론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31억 쌍의 염기 서열 가운데 대부분이 쓸모없는 이른바 “정크 DNA”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 인간과 침팬지가 96%의 유전자를 공유한다는 점 등은 모두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임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창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흔히 진화론은 ”하나의 이론‘이라고 매도하는 데 저자는 이에 대해 분명히 반대하는 입장을 천명한다. 과학자로서 훌륭한 태도일 뿐만 아니라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 과학과 신앙은 양립할 수 있는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문제에 대한 저자의 확고한 입장은 과학과 신앙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생명의 기원과 종의 기원을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 무신론과 불기지론을 비롯해 창조론, 지적설계론 등 다양한 입장을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한 후 자신이 주장하는 바이오로고스, 즉 유신론적 진화를 강조한다. 저자는 이런 견해를 갖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말한다: “내 안에서부터 세계관의 조화를 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 건 우리 인간과 지구상의 다른 유기체의 게놈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나는 이러한 자료(진화론을 지지하는 자료)에 마음이 불편해지기는커녕 모든 생물이 서로 유연한 관계에 있다는 이 명쾌한 증거에 경외감을 느꼈고, 이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세운 거대한 계획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당시 정확한 명칭을 알지 못했던 나는 흔히 사용되는 합성어인 ‘유신론적 진화’라는 말에 만족했고, 오늘날까지도 이 입장이 무척 만족스럽다.”(201쪽) 저자에게 진화법칙은 생명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달성하기 위한 신의 계획의 일부인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진화론을 해석하는 데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좀 더 궁구(窮究)해볼 필요가 있다.

 

콜린스에 의하면 바이오로고스는 신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생명은 신의 의지를 표현한다는 믿음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바이오로고스는 생명의 원천으로서 신을 믿음과 동시에 진화법칙에 의해 생명의 다양성과 복잡성이 발현하도록 한 것 또한 신의 뜻이라고 해석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법칙을 신의 뜻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해석했던 아이작 뉴턴의 전통을 잇는다고 할 수 있다. 단, 진화론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적설계와 달리 바이오로고스는 스스로를 과학적 이론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진실은 단지 마음과 정신과 영혼의 영적 논리로만 증명될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바이오로고스에 가장 크게 반발하는 사람은 신을 믿되, 신이 다윈의 진화와 같이 마구잡이식으로 무정하고 비능률적인 방법으로 만물을 창조했다는 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다.”(206쪽) 진화론에 대한 저자의 확신이 각별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이오로고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옹호한다: “유신론적 진화론, 즉 바이오로고스는 이제까지 나온 여러 견해 가운데 과학적으로 가장 일관되고 영적으로 가장 만족스러운 견해라고 볼 수 있다. 나중에 한물갔다는 이유로, 과학에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틀렸다고 증명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212쪽) 저자가 이런 확신에 도달하게 된 과정을 소상히 알 수는 없지만 과학자로서의 명성을 걸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과학과 신앙의 조화를 모색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질만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과학자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면서도 저자는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견해요 해석임을 강조한다. 각자 자신에게 적합한 우주와 생명의 전개 과정에 대한 이론을 갖출 것을 제안하면서 아인슈타인의 명언을 빌려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과학만으로 그 무거운 질문에 빠짐없이 대답할 수 없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순수한 자연주의적 세계관의 빈약함을 인정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가며 이렇게 썼다.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며,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 인간 존재의 의미, 신의 실재, 사후세계의 존재 가능성, 그 외에 많은 영적 질문은 과학이 닿을 수 있는 태두리 밖에 존재한다.“(229쪽) 이런 이유로 우리는 과학과 신앙의 조화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결코 끝이 보이지 않는 여정이지만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이라면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참조 사항> 

여기 수록한 동영상에는 저자 프랜시스 콜린스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이 책 『신의 언어』의 내용을 바탕으로 행한 강연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북 리뷰와 함께 동영상을 감상하면 저자가 진정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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