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 분야

브루스 립튼의 《자발적 진화(Spontaneous Evolution)》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8-06-08 17:07
조회
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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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브루스 립튼(Bruce Lipton)·스티브 베어맨(Steve Bhearman) 

역자: 이균형

출판사: 정신세계사(2012)

 

목차 

1부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이 틀렸다면

  1장 믿는 것이 곧 보는 것이다

  2장 지역적으로 행동하고 지구적으로 진화해가라

  3장 지나간 스토리 새로 살피기

  4장 미국의 재발견

2부 말세의 네 가지 신화적 오해

  5장 신화적 오해1: 오로지 물질만이 중요하다

  6장 신화적 오해2; 적자생존

  7장 신화적 오해3; 유전자 속에 다 들어있다

  8장 신화적 오해4; 진화는 임의적으로 일어난다

  9장 교차점의 부조현성

  10장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3부 새로운 패러다임과 지구정원의 회복

  11장 프랙털 진화

  12장 정신과에 가봐야 할 때

  13장 딱 한 가지 충고

  14장 건강한 사회

  15장 국가의 치유

  16장 완전히 새로운 스토리

 

공저자의 배경·책의 특징 

이 책은 전문 분야가 다른 두 사람의 합작품이지만 책 제목이 시사하듯이 신생물학자 브루스 립튼이 주저자라 할 수 있다. 립튼은 생물학, 신경과학. 양자역학 등 과학 분야의 첨단 지식에 입각해 자발적 진화의 과학적 근거를 제공하는 반면, 베어맨은 작가, 희극배우, 그리고 정치평론가로서의 경력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및 사회 전반에서 구시대의 패러다임으로 인한 부작용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자발적 진화의 의의를 논한다. 각자 맡은 부분을 나눠 독립적으로 서술하고 있기에 이 책은 다양한 논의라는 관점에서는 장점이 있으나 챕터들 간의 연결과 일관성이라는 관점에서는 다소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읽는 사람들에게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단지 저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자발적 진화에 의거한 문명의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기존의 문제들을 검토했다는 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책은 한 마디로 문명의 전환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다룬다. 2009년에 처음 영어로 출판되었으니 벌써 10년 가까지 지났다. 이 점을 지적하는 이유는 이 책이 출판될 당시에 비해 현재 우리는 엄청난 기술적·문화적 변화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이면 스마트폰이 막 출시되었을 때이며 우버나 에어비앤비 같이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는 공유기업들이 등장하기 전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정보기술을 메타기술(meta technology)로 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인류는 희망과 절망의 이중주가 들려주는 혼란스러운 화음에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새로운 정신적 안내자임을 시사한다.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문화 나아가 새로운 문명을 준비하는 자세로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여전히 우리에게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할 사항은 패러다임 전환과 이어지는 문명의 전환이라는 거대한 담론(談論)은 이미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물리학자이지 시스템이론가인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The Turning Point를 들 수 있다. 이 책이 처음 영어로 출판된 것이 1982년이니 자발적 진화에 보다 20년여 년 앞섰다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정신과의사이자 초개아(transpersonal)심리학자인 스타니슬라프 그로프(Stanislav Grof)가 편저한 고대의 지혜와 현대과학의 융합1993년에 영어로 출판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스타니 슬라프 그로프, 프리초프 카프라 , 루퍼트 셸드레이크 등 신과학의 정신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은 자발적 진화와 같은 취지에서 고대의 영적 지혜와 현대과학의 발견이 사실상 일치한다고 지적했다. 이외에도 이런 주제를 다룬 책들이 적지 않았지만 자발적 진화는 나름대로 문명의 전환이라는 주제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우리에게 익숙한 진화 개념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스토리를 써나가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상당히 공감한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인류의 공존·공생을 담은 스토리를 만들어 우리 모두 공유하도록 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파편화된 의식 수준을 극복하고 온전한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 불가결하다. 저자가 말하는 전일사상(holism)의 핵심 메시지는 사실 의외로 간단하다. 단지 이를 깊이 인식하고 실천하기 어려울 뿐이다. 새로운 스토리는 이 작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우리가 믿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사고를 정립하고 행동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과학적으로 더 이상 지지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 후 2부에서는 네 가지 신화적 오해(myth-perception)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지배해왔는지, 그리고 이 신화들은 왜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지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myth-perception’misperception을 패러디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3부에서는 이와 같은 신화적 오해를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가자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전일사상을 믿는 사람들이 일정 수준, 즉 임계수준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새로운 문명을 기반으로 모두 풍요로운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정원으로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피력한다. 이런 스토리를 거부할 사람이 누구 있겠는가? 문제는 저자가 말한 대로 정말 우리에게는 그럴 가능성이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자발적 진화란 무엇인가? 

이 책은 최근 과학이 발견한 새로운 사실과 고대부터 내려오는 영적 전통, 이른바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가 말한 영원의 철학(perennial philosophy)”은 우리에게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미 지적한 대로 이것은 저자의 고유한 견해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 책의 특징은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근거로 진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자발적 진화(spontaneous evolution).

 

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이 제안했으며 이후 많은 다윈주의자들이 지지했고 나아가 신다윈주의자들이 더욱 강력한 증거를 바탕으로 지지했던 것은 진화란 돌연변이(mutation)와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에 의해 진행되는 무작위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 진화에는 특정한 목표나 방향이 없으므로 인간을 비롯해 지구상에 등장했던 모든 종들은 이런 무작위적 내지 임의적인 과정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뛰어난 고생물학자였던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진화의 시간을 거꾸로 돌려 다시 시작한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또한 진화의 무작위적인 성격을 대변하는 말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의미의 진화는 수동적이며 일방적인 과정이다. 개체는 주어진 환경에 수동적으로 적응할 수밖에 없으며 이때 환경에 적응하기에 유리한 방향으로 돌연변이가 일어난 종은 보존되고 번영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종은 결국 소멸된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이기적 유전자에서 개체는 유전자의 복제와 증식을 위한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은 이런 수동적인 진화의 특성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진화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그 근거로 세포막의 역할에 대한 정확한 지식,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 밝힌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 밥스티트 라마르크(Jean Baptiste Lamarck)가 제시했던 진화 개념의 타당성을 강조한다. 이 시점에서 저자가 왜 진화를 이같이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려 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전통적 의미에서의 진화 개념은 저자가 비판하고 있는 과학적 물질주의의 절정(climax)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제기하고 있는 빅퀘스천(Big Questions)은 여러 사람들이 제시했던 것과 대체로 대동소이한데,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에게 의식이 생겨난 이래로 우리는 세 가지 영원한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해왔다. 1) 우리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2) 우리는 왜 이곳에 있는가? 3) 이왕 왔으니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가? 이 질문에 가장 만족스러운 답을 제공하는 사람이나 단체가 그 사회의 공식 진리 공급자가 된다.”(114)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제공해 온 패러다임은 크게 네 가지가 있었다. 고대의 정령신앙(animism), 다신론(polytheism), 일신론(monotheism) 및 물질주의(materialism)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 패러다임을 구별시켜주는 핵심 요소는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근본요소인 물질과 영()의 관계에 대한 해석이었다. 예컨대 정령신앙은 물질과 영의 조화를 가정했으며 다신론에서 일신론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물질을 무시하고 영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던 패러다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새롭게 부상한 과학적 물질주의는 영의 실체를 무시하고 오직 물질에 편향된 극단적인 패러다임으로의 반전에 해당된다. 이같이 영과 물질 간의 조화로운 관계에서 이탈해 두 극단 사이에서 방황했던 것이 곧 간략한 인류사라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현재 우리는 과학적 물질주의가 진리의 공급자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이 생각의 바탕에서는 데카르트와 뉴턴의 기계적 세계관으로부터 출발해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1953DNA 이중나선의 발견이라는 사건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 모두 과학적 물질주의가 독주하도록 만든 과학적 기반이다. 그래서 저자는 과학적 물질주의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는 작업을 위해서는 진화 개념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려 한 것이다. 이는 전략적으로 나름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는 자발적 진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다. 물론 곳곳에서 자발적 진화의 의미를 설명한 대목을 발견할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자발적 진화에 대한 엄밀한 학문적 정의라고 보기 어렵다. 필자에게는 기존의 진화 개념과의 대비를 통해 자발적 진화의 의미를 부각시키려 한 정도로 보인다. 우선 자발적 진화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엿볼 수 있다. 애벌레는 나비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우리의 진화가 과연 성공할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자연은 이 설레는 가능성을 향해 우리를 채근해주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자발적인 동참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 우리는 생명 진화의 의식적인 공동창조자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선택권이 있다. 따라서 우리의 성공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전적으로 우리의 인식(awareness)에 달려 있다.(39) 여기서는 ‘awareness’인식이라고 번역했는데 알아차림, 즉 의식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자발적 진화의 핵심은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가 주변 환경을 의식하고 이에 적응하는 과정의 특성에 있다. 단지 돌연변이를 통해 수동적으로 자연에 적응한 생명체만이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주장대로 환경과의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적응하고자 하는 생명의 의지를 자발적 진화라고 본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자발적 진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은 유전자의 역할에 대한 재인식이다. 유전자 결정론은 진화론의 핵심으로 간주되어왔다. 유전자가 생명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데 유전자는 복제 과정에서 무작위적인 변이, 즉 돌연변이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환경에 적응하기 유리한 변이는 자연선택에 의해 보존되고 그런 유전자는 계속 복제되고 번식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유전자에 대한 기존 견해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인간 게놈프로젝트를 통해 드러난 유전자에 관한 진실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놀랍게도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인간이 하등생물과 거의 똑같은 수의 유전자를 갖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것은 유전자 결정론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신화적 오해(myth-perception)를 폭로하는 발견이다......그럼 유전자가 생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지배한단 말인가? 그 대답은 우리가지배한다는 것이다! 진화해가는 첨단과학은 위의 생명을 지배하는 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 유전자 속에 프로그램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밝혀주고 있다.”(67) 이것이 자발적 진화의 출발점이다. 

 

유전자는 세포의 소기관인 세포핵에 자립잡고 있는 염색체 안에 DNA 이중나선의 형태로 존재한다. 저자는 유전자의 기능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유전자는 단백질 부품을 만들어내는 데 사용되는 청사진일 뿐이다.......전통적인 사고방식은 세포핵이 세포의 뇌라고 믿도록 가르쳤지만 세포핵은 세포의 생식선 기능을 할 뿐이다. , 그것은 세포의 생식계인 것이다.......그런데 유전자가 뇌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뇌란 말인가? 사실 세포의 뇌는 세포의 피부에 해당하는 세포막이다. 세포막 속에는 환경 신호에 반응하여 내부의 단백질 경로에 정보를 중계해주는 단백질 스위치가 내장되어 있다. 세포가 인식하는 거의 모든 환경 신호에 대해 제각기 다른 세포막 스위치가 존재한다.”(75) 이같이 세포막이 중요하다는 것은 저자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다. 그런데 저자는 이에 대한 생물학계의 입장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이것이 저자의 새로운 이론인지 아니면 소수 생물학자들의 견해인지 알 방법이 없다. 저자가 이런 새로운 관점을 부각시키려면 이와 관련된 다양한 논의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굳이 이런 사항을 지적하는 이유는 이 책 전반에서 저자의 서술 방식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것과 인류를 위한 바람직하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사안이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하더라도 부정확하거나 편파적인 자료와 증거를 바탕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에서는 첨단과학이 밝힌 새로운 사실에 입각해 자발적 진화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내세우고 있기에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서 양자역학을 비롯해 첨단과학이 밝힌 사실을 인용할 때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예컨대 저자는 양자역학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통찰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 위를 걸을 수 있게 해주는 메커니즘이 물리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간에, 한 가지 결과만은 일치한다. 석탄에 화상을 입으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화상을 입고, 그렇게 예상하지 않는 사람은 화상을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 위를 걷는 사람의 신념이 가장 중요한 결정요인이다. 불 위를 성공적으로 걸은 사람들은 관찰자(이 경우에는 걷는 사람)가 현실을 창조한다는 양자물리학의 핵심원리를 몸소 체험한 것이다.”(57) 이것은 양자역학의 관찰자 효과(observer effect)를 잘못 적용한 사례로 보인다. 이 책에서 이런 표현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지극히 유감스럽다. 

 

이 책에서 세포막은 자발적 진화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관이다. 세포막에 있는 스위치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필요한 유전자가 발현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경우에는 유전자를 대체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각 세포막 스위치는 수용기 단백질과 효과기 단백질이라는 두 개의 기본 부품으로 이루어진, 인식의 기본단위다. 수용기 단백질은 그 이름이 시사하듯이 외부 환경으로부터 오는 신호를 받는다. 수용기가 1차 상응 신호를 받으면 활성화된 수용기는 스위치의 효과기 단백질을 향해 움직여서 효과기 단백질과 결합할 수 있게 된다.”(76) 

 

이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단정적으로 말한다, 세포막에 위치한 이 스위치들은 수용기와 효과기로 짝을 지어 육체적 감각을 통해 외부환경 요소를 알아차리는능력을 제공한다. 바로 이 말이 생명의 비밀을 밝혀주는 열쇠를 제공해준다. 준비되었는가? 이것이 인식(perception)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인 것이다.......따라서 세포막 속의 단백질 스위치는 인식의 기본 단위분자인 것이다. 이 스위치들은 세포의 분자적 경로와 특정한 생물학적 기능을 제어하므로 우리는인식이 행동을 지배한다고 확실히 결론내릴 수 있다.”(77) 세포막의 기능에 대한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우리는 진화란 단지 수동적으로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자발적 진화로 이어지는 경로이다. 

 

이런 논의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후성유전학(epigenetics)에 밝힌 사실들인데 이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다음에 잘 정리되어 있다. 후성유전학의 연구에 의하면 환경으로부터 온 신호는 세포막 스위치를 활성화시켜 세포핵으로 2차 신호를 보내게 한다. 그러면 이 신호는 세포핵 속의 유전자 청사진을 골라서 특정한 단백질이 생산되도록 조종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전자가 저 혼자서 스스로 알아서 활동한다는 종래의 믿음과는 한참 다른 이야기다........유전자는 단지 분자 차원의 청사진일 뿐이다. 그것은 실제로 건물을 짓는 계약자가 아니다. 기능적으로 볼 때 후성유전학이란 계약자가 적당한 유전자 청사진을 골라서 신체의 건축과 유지보수를 지휘하게 하는 메커니즘이다. 유전자는 생명을 지배하지 않는다. 유전자는 생명에 의해 사용된다.’후성유전 메커니즘은 실제로 유전자 암호의 정보를 변경시킨다.”(88) 이와 같이 세포막의 역할에 대한 이해와 후성유전학이 밝힌 바에 의하면 생명체는 적극적으로 환경에 적응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자발적 진화와 관련해 의미심장한 내용을 언급한다. 이는 후성유전학이 발견한 내용을 인간의 의식 작용으로 확장시킨 것인데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후성유전 메커니즘은 유전자 암호의 정보를 변경시켜서, 유전자가 읽기 전용 프로그램이 아니라 읽기-쓰기용 프로그램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삶의 경험이 우리의 유전형질을 능동적으로 재정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발견이다........유기체가 환경과 접촉할 대, 유기체의 인식작용이 후성유전 메커니즘을 개입시켜서 생존의 기회가 높아지도록 유전형질을 미세조정하게끔 하는 것이다.”(89) 저자는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의 의식적 마음과 잠재의식적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잠재의식적 마음의 존재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것이 가진 힘을 이해하는 것이 곧 자발적 진화로 이어지는 관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에 다소 비약이 있어 보이지만 저자가 의도한 바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인지작용의 9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잠재의식적 마음의 힘을 알아차리고 이것을 적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수동적 진화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자발적 진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네 가지 신화적 오해와 근본 원인 

우주에 등장한 수많은 생명체 가운데 자아의식이 있는 존재로 확인된 것은 아직 인간밖에 없다. 인간은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같은 빅퀘스천을 스스로 물을 수 있는 존재다. 저자 또한 우리 인간이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오랫동안 고심해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이라면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큰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기본 생각은 우주를 구성하는 두 기본 요소인 보이는 물질과 보이지 않은 영()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중요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세계관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과학적 물질주의(scientific materialism)이다. 이것은 물리주의(physicalism), 환원주의(reductionism), 그리고 객관주의(objectivism)로 요약된다. 즉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물질과 에너지뿐이며, 모든 것들은 그것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 환원해서 이해될 수 있고, 모든 대상을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과학적 물질주의는 르네 데카르트의 이원론, 아이작 뉴턴의 절대적이고 기계적인 우주관에 의해 기본 구조가 결정되었으며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등장한 이후 지배적인 패러다임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는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유전자의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해 분자생물학이 생명과학의 중심을 이루면서 절정에 달했다. 

 

저자는 양자역학과 복잡계 이론을 비롯한 첨단과학은 이제 과학적 물질주의는 더 이상 진실이 아님을 밝혔다고 말한다. 이는 적절한 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러다임 전화의 어려움을 반영하듯이 사람들은 여전히 과거의 잘못된 신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네 가지 신화적 오해로서 다음과 같다: 1) 오직 물질만이 중요하다. 2) 적자생존 3) 유전자 속에 다 들어있다. 4) 진화는 임의적으로 일어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네 가지 신화적 오해의 핵심은 물질과 영의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우주관 내지 세계관이 사라진 것이다. 오직 물질만이 중요하며 이로부터 인간의 생명, 의식, 정신 등 모든 보이지 않는 것들이 부수적인 현상(epiphenomenon)으로 등장했다는 견해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진리처럼 수용되어왔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다양한 논의를 떠나서 극단으로 치우친 주장은 반드시 반전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 불변의 진리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융(Carl G. Jung)대극의 반전이라고 불렀다. 저자는 이 책에서 융의 견해를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동일한 맥락에서 대극의 반전은 결국 대극의 합일 내지 조화를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대동소이하다. 예컨대 저자가 말하는 물질과 영의 조화란 곧 융이 말한 대극의 조화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의 2부에서 이와 같은 네 가지 신화적 오해의 원인과 이로 인한 후유증에 대해 상세히 논하고 있다. 저자는 첨단과학이 발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논의를 뒷받침하고 있는데 특히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에너지장(energy field)의 개념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양자역학은 원자와 소립자 등으로 이루어진 물질우주가 사실은 에너지들이 모여서 형성하는 힘의 장이라는, 우주의 보이지 않는 배경의 한 구성요소일 뿐이며 이 배경이야말로 물질우주를 지배하고 있음을 강조한다.”(197) 이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에너지장 = 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물질적 영역은 보이지 않는 힘의 세계를 말하고, 고대인들은 그것을 영(spirit)이라 했고, 오늘날 과학자들은 그것을 에너지장이라고 한다. 이 비물질적 힘이 우리 인간의 경험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데는 현대과학자들과 고대의 신비가들 모두가 동의한다. 우리의 논의에서 에너지장을 호환적으로 표현한다.”(118) 이는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다. 적어도 이런 등식을 지지하는 양자물리학자들의 견해를 언급했어야 했다. 

 

양자역학의 지배를 받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장이 우주만물의 배후에 있으면서 물질과 에너지의 등가법칙에 따라 때로는 물질을, 때로는 에너지를 만들어낸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그런데 저자는 뜬금없이 에너지장이 곧 영이라고 단정하면서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묘사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보통 우리가 영이라 지칭하는 것이 곧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에너지장이라고 볼 수는 없다. 차라리 양자물리학자 데이비드 봄(David Bohm)이 말한 대로 에너지장은 접힌 질서(implicate order)이고, 보이는 물질세계는 펼쳐진 질서(explicate order)로서 이는 접힌 질서의 드러난 모습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와 닿는다. 에너지장이 영으로 해석하려면 의식(consciousness)”과 관련된 뭔가가 추가되어야 하는데 이런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모형이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저자는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주장한다. 이는 결코 과학적 태도라 할 수 없다. 첨단과학이 발견한 사실을 적용하려면 우선 과학적 태도를 전제로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진화론에서 말하는 적자생존과 관련해 저자가 언급한 흥미로운 점은 다윈의 진화론 및 라마르크의 진화론과 관련된 것이다. 우선 저자는 다윈은 라이벌이었던 알프리드 월리스(Alfred R. Wallace)와의 진화론경쟁에서 궁지에 몰리게 되자 당대 최고의 지질학자였던 찰스 라일(Charles Lyle)의 도움을 받아 다윈이 먼저 진화론의 체계를 정리해 발표하도록 도왔다고 주장한다. 이는 평민이었던 월리스보다 귀족이었던 다윈을 지지했던 당시의 사회 풍토를 꼬집은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라마르크도 평민이었다는 이유로 학문적 라이벌이면서 귀족이었던 바롱 조류쥬 뀌비에의 모함을 받아 자신의 학문적 업적이 왜곡되는 수모를 당했다고 한다. 흔히 획득형질의 유전으로 알려진 라마르크의 진화론은 뀌비에 같은 사람들의 모함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라마르크가 살아있어서 자신을 변호할 수 있었다면 그는 생명체가 역동적인 환경의 변화에 적응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생물권에서, 진화란 생물들 사이의 협동적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점을 강조했을 것이다.”(270) 저자는 라마르크 진화론의 핵심은 개체와 환경 간의 적극적인 상호작용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는 곧 진화는 다윈의 진화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수동적이고 파괴적인 과정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협동적인 과정이라는 자발적 진화 개념으로 이어진다. 라마르크는 자발적 진화의 기초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저자는 다윈에 대한 변명을 시도한다. 만년의 다윈은 자신의 주장이 잘못 전달되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다윈은 말년에 학계가 받아들인 다윈주의로부터 멀어졌다. 그는 생존과 투쟁을 강조하는 대신, 사랑, 이타심, 그리고 인간의 친절의 유전적 뿌리로 주의를 돌려 거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게다가 다윈은 환경이 진화의 추진력이라는 라마르크의 생각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유감스럽게도 다윈의 제자들은 그의 새로운 생각을 다윈주의가 대변하게 된 모든 의미를 무너뜨리는 반란과도 같은 것으로 간주했다.”(222) 이것이 정확한 진술인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이미 학계의 중심이 된 다윈주의자들의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종교계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일이다. 예컨대 기독교의 경우 예수가 살아 돌아온다면 어찌 반응하겠는가? 아마도 현재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부정할 것이다. 

 

이런 논의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적자생존이라는 관점에서 진화론을 이해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이 강조했듯이 인간이 수백 만 종들 가운데 진사회성(eusociality)를 획득한 몇 안 되는 종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우리는 생존을 위한 투쟁보다는 협력에 더 의미를 부여하면서 진화해왔다는 것을 시시한다. 또한 정치학자 로버트 액설로드(Robert Axelrod)협력의 진화에서 개체는 협력과 배신이라는 두 가지 전략이 가능한 상황에서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자발적으로 협력이라는 전략을 택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일정한 숫자를 넘는 개체들의 협력이라는 조건이 중요하다. 이것은 저자가 이 책에서 자발적 진화를 위해서는 전일사상을 실천하려는 임계치를 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저자는 특히 세포의 관점에서 진화를 조망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적자생존이라는 명제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한다. 지금부터 39억 년 전 햇빛이 지구의 물질과 만나 최초의 단세포 생명체를 탄생시킨 이래 생명은 진화를 거듭해 현재 4막에서 5막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말한다. 단세포의 원핵세포생물을 탄생시킨 것이 1막이었다면 이로부터 세포들이 연합해 진핵세포생물로 진화한 것이 2막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인간과 같은 다세포 유기체가 등장한 것이 3막이었으며 인간이 모여 진사회성을 바탕으로 사회조직을 만든 것이 4막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은 50조 개의 세포들로 구성된 유기체라는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70억으로 구성된 인간 사회는 개별 인간을 세포로 하는 조직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사회 조직이 더 나은 사회라는 5막으로 진화하리라는 예측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진화를 해석한다면 적자생존을 위한 투쟁보다는 협력이 더 적절한 배경논리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인간이 50조 개의 세포들 간의 절묘한 조화와 협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유기체라는 사실을 잊는다. 이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나머지 신화적 오해의 경우에 대해서도 첨단과학에 입각해서 비판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1953년 이중나선의 발견으로 확립된 유전자 결정론 또는 크릭의 도그마는 오류임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 분야에서 있었던 획기적인 발견들을 언급한다. 우선 크릭의 도그마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크릭의 중심 도그마는 대부분의 생물학적 시스템 내부의 정보 흐름을 일방통행으로, DNA로부터 RNA, RNA로부터 단백질로 흐르는 것으로 그려놓았다........왓슨과 크릭에 의하면 생명의 비밀은 마침내 특정 DNA 유전자를 켜고 끄는, 세포핵 속에 꼬리를 물고 배열된 일련의 분자들로 환원된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생명이 물질인 유전자로부터 비롯되어 나온다는 생물학적 환원주의의 전형을 보여주었다.”(244) 

 

그리고는 이런 도그마에 대한 반론으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를 인용한다. “1960년대 말에 위스콘신 대학교의 유전학자 하워드 테민(Howard Temin)은 종양 바이러스가 숙주세포의 유전자 암호 지배권을 탈취하는 메커니즘을 연구하고 있었다.......그리하여 결국 테민은 1975년에 역전사효소, RNA의 정보를 DNA 암호로 옮겨주는 효소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수상했다. 테민의 연구는 유전정보가 양방향으로 흐른다는-DNARNA로 정보를 보내고 RNADNA로 정보를 보낸다는-사실을 증명함으로써 크릭의 중심 도그마의 척추를 분질러 놓았다.”(247) 그밖에 저자는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후속 연구들을 언급함으로써 유전자 결정론의 오류를 반박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의문은 4차 산업혁명의 주요 분야 중 하나가 합성생물학과 유전공학인데 이들은 모두 유전자 시퀀싱(gene sequencing) 기술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여전히 유전자 결정론이 학계와 산업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방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엄청난 이권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일부러 진실을 외면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하다.

 

유전자 결정론과 관련해 하나 더 언급할 점은 후성유전학과 관련된 것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후성유전학에 의하면 유전자와 환경 간에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상호작용이 라마르크의 진화론과도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후성유전학은 유전자의 활동과 세포 형질의 발현이 궁극적으로 ‘DNA라는 내부물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부 영향력의 장으로부터 오는 정보에 의해조절되는 이치를 설명한다........유전자 결정론이라는 도그마가 근거 없는 설임을 과학이 밝혀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류 매체들은 계속 유전자가 생명을 지배한다는 관념에만 조명을 맞추고 있다.......유전자 결정론은 현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바탕 패러다임과 너무나 찰떡궁합이어서, 반박의 여지가 없는 과학적 증가조차 그것을 몰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249) 이와같이 후성유전학은 유전자결정론에 제동을 거는 중요한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다. 후성유전학의 창시자는 콘래드 워딩턴(Conrad H. Waddington)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후성유전적 풍광(epigenetic landscape)”은 후성유전학의 정수를 전달하는 비유로 종종 인용되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워딩턴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저자가 후성유전학의 핵심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진화는 임의적이라는 신화적 오해에 관해서도 저자는 라마르크의 재해석부터 최근의 연구 결과까지 인용하면서 반박한다. 진화는 그런 임의적인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한 증거 중 하나는 1988년 유전학자 존 케언즈(John Cairns)가 밝혀낸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케언즈의 연구에서는, 환경으로부터 오는 위협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의 하나로서 생존에 유리한 형질변이가 일어난 듯했다. 흥미롭게도, 좀더 면밀히 조사해본 결과 오직 락타제 대사와 관련된 유전자만이 변했음이 밝혀졌다.........케언즈는 이 새로이 발견된 메커니즘을 유발변이(directed mutation)라 불렀다. 그러나 환경의 자극이 생명체에 피드백되어 유전자 정보가 고쳐 쓰이는 사건을 유발한다는 생각 자체가 중심 도그마의 금기여서, 기성 과학계의 반응은 신속하고 적대적이었다.......그 후 10년 동안에 다른 연구자들도 케언즈의 실험결과를 재현해냈고, 그것은 그의 연구에 신뢰성을 더해주었어야 했다.”(277) 이 말은 케언즈의 연구는 명백히 진화란 임의적인 과정이 아니라 어떤 목적에 의해 추동되는 과정임을 보여주었지만 진화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둘러싼 저자의 평가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진화가 목적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절충적인 의견을 제시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한다. 그러니, ‘진화는 의도적으로 일어나는가, 우연히 일어나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은 양쪽 다 우렁찬 예스!’. 이제 우리가 깨닫고 있듯이, 의도와 우연과 같은 반대극들은 동시에 작용하는 것 같다. 지나치게 의인화하고 싶지는 않지만 박테리아는 살아남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280)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덧붙임으로써 자신들의 입장을 재차 강조한다. 생명과 진화라는 현상이 순전히 임의적인 돌연변이나 우연에 의한 것이라는 신다윈주의의 맥 빠지고 부정확한 가정은 특히나 파괴적인 신념이 아닐 수 없다. 케언즈의 박테리아와 같은 생물이 스트레스를 주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래 적응변이 메커니즘을 가동할 수 있다는 사실은, 진화에는 의도가 담겨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그러므로 라마르크가 내다본 것처럼, 진화현상이란 생명체가 환경 속에서 역동적인 변화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적응해가는 능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283) 이것은 과학적 주장이라기보다는 저자의 의도를 담은 선언적 내용에 가깝다. 아마도 자발적 진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이런 입장 정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자발적 진화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까지 과학적 물질주의가 제공하는 극단적인 세계관에 함몰되어 자신의 정체성은 물론, 우주만물의 운행 법칙도 망각한 채 살아온 셈이다. 저자는 이제 자발적 진화의 개념을 수용하는 가운데 이런 세계관을 버리고 물질과 영, 또는 물질과 에너지장의 개념을 통합하는 새로운 세계관, 즉 전일사상(holism)을 받아들일 것을 제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새로운 과학과 오랜 영적 지혜가 통합되어 나온 새로운 바탕 패러다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새로운 문명을 지칭할 공식적인 이름은 주어진 적이 없지만, 우리는 이 새로운 바탕 패러다임을 전일사상이라 부를 것이다.”(372) 전일사상은 유기적 세계관이나 시스템적 세계관으로 불릴 수도 있으며 융이 말한 대극의 조화에 기초한 세계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과학적 물질주의나 일신론의 전통 중 어느 한쪽만 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극단적으로 편향된 사고체계를 극복해야 하는 시점에 와있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회조직의 새로운 단계로의 진화를 위해서도 절실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우리 몸을 구성하는 수많은 세포들과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조직들 간의 제닮음의 본질, 즉 프랙탈(fractal) 성격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프랙탈 진화론이다.

 

저자는 프랙털 구조는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우연히 형성된 것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저자는 이 대목에서 세포막이 효율적으로 면적을 늘림으로써 의식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프랙탈 구조를 필요로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저자는 프랙탈 진화는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말하는데 이것과 자발적 진화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의문이다. 프랙탈 진화는 진화의 양적(형태적) 측면을, 자발적 진화는 진화의 질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이 두 개념 간의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첨단과학에 지나치게 경도된 나머지 이론의 정합성을 고려하지 않고 이것저것 인용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주장하려는 자발적 진화의 기본 정신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진화란 전적으로 임의적인 과정은 아니며 그렇다고 전적으로 목적 지향적인 과정도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화는 대극적인 양면을 포함하고 있는 과정이므로 대극의 조화라는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첨단과학과 고대의 영적 전통이 제시한 전일사상과 부합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4막을 종료하고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추구하는 진화의 5막으로의 이행을 도울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 최초의 단세포생물에서 현재의 유기체로 진화해온 과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진화 개념을 정립해 새로운 문명의 기초 원리로 삼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리는 자발적 진화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가능하다. 

 

저자가 자발적 진화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추구하고자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인 전일사상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미 여러 사람들이 영원의 철학으로 상징되는 고대의 영적 지혜와 양자역학을 비롯한 첨단과학이 제공하는 메시지 간의 유사성을 간파하고 이것을 새로운 문명의 기본 원리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럼에도 저자의 메시지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진화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점은 분명 다른 사람들의 주장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단지 아쉬운 점은 저자가 말하는 자발적 진화의 과학적 근거에 대한 전문가들의 논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발적 진화의 의미를 창조와 진화라는 대극적인 관점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진화로 해석할 수 있다면 이는 해묵은 논쟁을 종식시키고 진정 인류의 미래를 위한 과학과 영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기본 원리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저자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일신사상의 창조론과 과학의 진화론이 선전하는 왜곡된 기원설은 인간과-인간이 그 한가운데서 살고 있는-환경이 서로 별개의 것이라고 강변한다. 일신론이 인간은 생물권을 지배할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가르치는 한편에서 과학적 물질주의는 과학의 임무란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우리를 환경으로부터 더욱 분리되도록 부채질한다.”(505) 이런 점에서 일신교와 과학은 서로 비난하면서도 본질적으로 닮은꼴이다. 이 둘 모두 극단을 상징하므로 전일사상의 관점에서 통합되어야 할 것이다. 이른바 대극의 합일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마지막으로 우리 인류가 자발적 진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고 이를 공유하는 가운데 새로운 문명을 추진하려면 임계숫자를 넘는 사람들의 참여가 절실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행히도 인터넷 혁명으로 인해 이런 가능성이 점증하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희망을 피력한다. 인터넷이 지구촌을 그물망처럼 이어준 덕분에, 이 같은 대화는 이미 진행되고 있다. 실로 정치는 바야흐로 그 가장 높은 목적을 성취하려는 문턱에 있다. 풍요로운 지구 위에 건강한 인류를 탄생시켜 그 모든 세포의 영혼들이 번성하게 하는 목적 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지 우리의 스토리를 바꿔 놓은 작업에 참여할, 임계 숫자의 인류의 적극적인 의도다.”(570) 우리가 할 일은 자발적 진화의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우리가 마음속 깊이 새겨야할 스토리다. 

 

<참조>

여기 업로드한 동영상에는 브루스 립튼이  이란 제목으로 한 강연 내용이 담겨 있다. 1시간 20분이라는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 브루스 립튼은 자신의 저서에서 다룬 "자발적 진화"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강의하였다. 영어 자막도 가능하니 이 주제에 관심 있는 분들은 감상해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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