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영성 관련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6-02-22 17:46
조회
432

인류가 낳은 위대한 천재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평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과 종교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가 인격신을 인정한 것으로 왜곡하기도 했고, 특정 종교를 지지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종교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글은 Einstein on Cosmic Religion and Other Opinions & Aphorism 이란 책에 수록되어 있는 우주적 종교(Cosmic Religion)에 관한 글을 발췌해 번역한 것입니다. 세 가지 타입의 종교로 분류한 것은 글의 내용을 감안해서 필자가 개인적으로 한 것이다 

 

 

1) 두려움의 종교(religion of fear) 

인간이 행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은 자신이 느끼는 욕구를 충족시키거나 고통을 피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영적 또는 지적 활동, 나아가 이런 활동이 발전해 나가는 방법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느낌과 갈망은 모든 인간의 노력과 생산성–이것들이 우리에게 아무리 고상하게 보여지더라도–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주 거칠게 말해 인류가 종교적 사고와 신앙을 갖도록 만든 느낌과 욕구는 무엇인가? 잠시 생각해보면 종교적 사고와 경험의 요람에는 가장 다채로운 감정들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시시대의 사람들에게 종교적 개념을 깨닫게 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굶주림, 맹수, 질병 및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런 생존 수준에서는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가 매우 제한적이었으므로 인간의 영혼은 대략 그와 같으면서, 인간이 두려워하는 경험이 그 의지와 행동에 의존하는 어떤 존재를 만들어 냈다. 누구나 행위와 희생을 통해 이 존재의 환심을 사고자 했는데, 부족의 전통에 의하면 이것들은 그 존재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호의적으로 보이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이것을 두려움의 종교라 부른다. 

 

이 종교는 사람들과 이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를 중재해준다고 주장했고 그럼으로써 권력을 획득한 사제 계급이 형성됨으로써–이로 인해 비롯된 것은 아닐지언정–상당히 안정되었다. 종종 리더나 폭군 또는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유지했던 특권층은 더 큰 안전보장을 위해 사제직의 기능과 그들의 세속적인 지배를 결합하고자 했다. 또는 정치권력과 사제계급의 이해관계 간의 연합도 가능했을 것이다. 

 

 

2) 도덕적 종교(moral religion)

종교적 발전의 두 번째 원천은 사회적 정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커다란 공동체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들도 실수할 수 있으며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가르침에 대한 열망 그리고 사랑과 구원에 대한 열망이 사회적 그리고 도덕적 신의 개념이 성장하는 자극을 제공해왔다. 이것이 보호하고, 결단을 내리고, 상과 벌을 주는 섭리(攝理)의 신이다. 인간의 확대된 인식의 지평에 따르면, 이것이 사랑을 주며 종족이나 인류의 생명 또는 생명 자체를 사랑하는 신이다. 그는 불행과 좌절된 열망을 위로해주는 존재이며 죽은 자의 영혼의 보호자이다. 이것이 사회적 또는 도덕적 개념의 신이다.

 

유대인의 성스러운 글(구약)을 통해 두려움의 종교에서 도덕적 종교로 발전해 간 것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이런 흐름은 계속 신약으로 이어졌다. 모든 문명인들의 종교, 특히 동양의 종교는 주로 도덕적 종교이다. 사람들의 삶에서의 중요한 진전 가운데 하나는 두려움의 종교에서 도덕적 종교로의 변천이다. 그러나 우리는 원시인들의 종교는 순전히 두려움의 종교로, 그리고 문명인들의 종교는 순전히 도덕적 종교로 간주하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비록 높은 수준의 사회생활에서는 도덕적 요소가 더욱 지배적이기는 하지만, 모든 종교에는 이 두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다. 이 모든 종교에 공통적인 것은 의인화된 신의 개념이다. 

 

3) 우주적 종교(cosmic religion) 

단지 예외적으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나 특별히 고결한 공동체들만이 본질적으로 이 수준(도덕적 종교의 수준을 말함)을 뛰어넘는다. 비록 순수한 형태로 발견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이들에게서 세 번 째 수준의 종교적 경험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이것을 우주적 종교심이라 부를 것이다. 이런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의인화된 신의 개념이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은 인간의 욕망과 목적의 헛됨을 느끼며 또한 자연과 사색의 세계를 통해 드러나는 고결함과 놀라운 질서를 느낀다. 그런 사람은 인간의 운명을 하나의 구속으로 느끼며, 또한 의미로 충만한 통합으로서 존재의 전체성을 경험하고자 한다. 이런 우주적 종교심의 암시를 다윗의 시편(詩篇)이나 선지자편과 같은 발전의 아주 초기 수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우주적 요소는 특히 쇼펜하우어의 감명 깊은 글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듯이 불교에 매우 강하다.

 

모든 시대에 있어 종교적 천재들은 이런 우주적 종교심에 의해 구분되었는데, 이것은 도그마나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주된 교리가 우주적인 종교적 경험에 근거한 교회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확하게 모든 시대의 이단자들 사이에서 이와 같은 가장 높은 수준의 종교적 경험에 의해 영감을 받은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동시대인들에게 종종 무신론자로, 그러나 가끔은 성인으로 보였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데모크리토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그리고 스피노자와 같은 사람들은 서로 유사하다. 

 

이런 우주적인 종교적 경험이, 신이라는 명백한 개념이나 신학으로 인도할 수 없음에도, 어떻게 사람으로부터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는 것일까? 내 생각에 예술과 과학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살아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 관례적인 견해와는 사뭇 다른 해석에 도달하였다. 역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사람들이 종교와 과학을 화합할 수 없는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발생하는 모든 일에서 인과율을 신봉하고 진실로 인과관계의 가정을 수용하는 사람에게는 일상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에 개입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절대로 불가능하다. 두려움의 종교나 사회적∙도덕적 종교는 그런 사람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그에게는 상을 주고 벌을 내리는 신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내적 및 외적 필요에 따라 행동하는데, 무생물이 그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듯이, 신이 보기에는 거의 책임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과학은 도덕을 약화시킨다고 비난을 받아왔지만 이것은 틀렸다. 인간의 윤리적 행위는 오히려 연민, 교육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 근거하고 있으며, 종교로부터 지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만약 인간이 사후(死後) 처벌에 대한 두려움과 보상에 대한 희망으로 인해 규율을 지킨다면 인간이 처한 곤경은 진정으로 통탄할 일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과학과 다퉈왔으며, 과학의 지지자들을 처형했던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그러나 다른 한편 나는 우주적인 종교적 경험이 과학적 탐구의 이면에 있는 가장 강력하고도 고귀한 원동력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대단한 노력을 인정하지 않으며 또한 무엇보다도 과학적 사고에서 선구적인 창조적 업적을 가능케 하는 헌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당면한 실생활로부터는 외면당했지만, 그런 업적이 자라날 수 있도록 해주는 느낌의 힘을 판단할 수 없다. 케플러와 뉴턴에게는 세상의 구조의 합리성에 대한 깊은 믿음과 세상을 통해 드러난 이성의 작은 일부라도 이해하려는 열망이 있었기에 오랜 세월 동안의 외로운 연구를 통해 천체의 구조를 밝힐 수 있었던 것이다. 

 

과학적 탐구를 실용적인 응용의 관점에서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회의적인 동시대인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면서 여러 시대에 걸쳐 여러 나라에 흩어져있던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주었던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를 잘못 해석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이들과 유사한 목적에 바쳤던 사람들만이, 끊임없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그 목적에 충실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힘을 제공했던 영감(靈感)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힘을 허용해주는 것이 바로 우주적 종교심이다. 누군가 대체로 물질주의적인 우리 시대에 유일하게 깊이 종교적인 사람들은 진지하게 연구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 것은 옳다. 

 

※ 아인슈타인의 명언 “Science without religion is lame, religion without science is blind”(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고, 과학 없는 종교는 맹목적이다)는 그가 말하는 우주적 종교심의 관점에서 볼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종종 신이나 종교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어떤 인격신을 전제한 것도 아니고, 특정 도덕적인 종교를 염두에 둔 것도 아니다. 그는 끊임없는 노력과 헌신을 통해서야 겨우 그 일부를 이해할 수 있는 자연, 즉 우주의 신비로움에 경탄한 나머지 인간 이성의 한계와 우주의 무한한 신비를 우주적인 종교심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 또한 신비주의자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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