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글로벌경제 관련

경제력 집중의 부작용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6-02-22 20:23
조회
2386

한국경제가 사실상 소수의 기업집단, 즉 재벌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국내외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필자가 다른 글에서 강조했던 용어를 사용하자면 이것은 공유지식(common knowledge)에 해당한다. 그러나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공유지식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여기서 재벌의 공과(功過)에 대해 상론(詳論)할 의도는 없다. 단지 한국경제와 한국의 미래를 위해 재벌에의 ‘경제력 집중의 심각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자 할 따름이다.

 

우리나라에서 재벌의 형성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요인으로는 무엇보다도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재벌 자체의 기민한 대응전략을 꼽을 수 있겠다. 그리고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는 상대적으로 정부의 영향력이 컸지만, 그 후에는 재벌 자체의 대응전략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과거처럼 정부가 재벌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정부는 각종 보조정책이나 규제정책을 통해 재벌의 경제적 위상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민주화의 핵심과제로 떠올랐던 재벌개혁은 재벌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정부의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정부는 원고(原告)가 아니라 피고(被告)의 입장에 있는데, 이를 혼동하기에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는 것이다.

 

 1945년 해방이후 한국에서 재벌의 형성과정을 일별해보면 사회적 격동기에 맞춰 재벌 판도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테면 해방이후 일제의 적산불하(敵産拂下) 특혜, 미(美)군정 시절 원조 달러 특혜, 경제개발 과정에서 금융 및 세제 특혜, 중화학공업 육성 과정에서 각종 정책 특혜 등 정부는 실로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재벌의 부침(浮沈)에 영향을 미쳐왔다. 인적․물적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개발 초기에 ‘선택과 집중’을 통해 경제적 도약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전략은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한국의 상황에 적합했던 면이 있었다. 이른바 「선성장-후분배」에 대해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암묵적 배경에는 정부와 재벌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이 있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 각종 열악한 조건을 인내해 온 수많은 근로자 및 일반 대중들에게 후일 적절한 경제적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사실상 좌절되고 말았다. 역대 정부는 성공적인 경제개발의 공(功)을 자찬하기에 급급했고, 재벌총수를 비롯한 임직원들은 각종 위험을 감수했던 용기와 초인적인 노력을 통해 지금의 경제력을 얻게 되었음을 자랑해왔다. 현명한 투자로 세계적 부호의 반열에 오른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이 “자신이 현재와 같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라는 자유로운 시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태도이다.

 

이 시점에서 대폭 양보해, 재벌이 나름 최선의 전략과 엄청난 노력을 통해 지금의 경제력을 갖게 되었다고 인정하기로 하자. 그러면 이로써 재벌의 문제는 모두 해결되는가? 그렇지 않다. 미시적 차원에서는 효율적으로 기업을 경영한 결과 재벌에의 경제력 집중이 발생했다는 점을 수긍할 수 있더라도, 국민경제라는 거시적 차원에서는 이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이다. 특히 지금과 같이 글로벌 차원에서 경제위기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재벌에의 경제력 집중은 ‘국가위험’의 관리하는 차원에서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투자의 기본원칙이 분산투자임을 고려한다면 이는 당연하다. 

 

재벌에의 경제력 집중을 파악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과 재벌의 총자산, 총매출액 및 시가총액을 비교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비교에 이론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력 집중 및 그 추세를 파악하는 데는 유용한 면이 있다. 다음 표는 2012년 말 기준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중앙정부세출과 4대/10대 재벌의 총자산, 총매출액 및 시가총액을 비교한 결과를 보여준다. 4대 재벌은 공정거래위원회의 분류에 의해 삼성그룹, 현대차그룹, SK그룹 및 LG그룹을 말한다.

 

(단위: 조 원)

국내총생산(GDP)

1,377

4대 재벌 총자산

716(GDP의 52.0%)

10대 재벌 총자산

1,070(GDP의 77.7%)

중앙정부세출

325

4대 재벌 총매출액

741(GDP의 53.8%, 세출의 228.0%)

10대 재벌 총매출액

1,071(GDP의 77.8%, 세출의 329.5%)

상장기업 전체시가총액

1,264

4대 재벌 시가총액

670(전체시가총액의 53.5%)

10대 재벌 시가총액

882(전체시가총액의 67.4%)

 

 이 간단한 자료를 통해서도 한국경제에서 재벌에의 경제력 집중이 어느 정도 심각한지 알 수 있다. 2014년 기준 공정거래위원회의 규제를 받는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은 모두 63개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 총수가 있는 민간 기업집단은 40개이다. 그렇지만 이들 기업집단 내에서도 격차가 매우 심한데, 사실상 상위 4대 기업집단에 거의 모든 경제력이 집중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공정거래위원회에서도 4대 기업집단을 별도로 관리하고 있는 실정이다. 4대 재벌의 총자산 규모와 총매출액이 국내총생산과 대비해 절반을 넘는다든가, 이들의 시가총액이 전체 시가총액의 절반을 넘는다는 사실은 4대 재벌에의 경제력 집중이 얼마나 극심한지 말해준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이런 추세가 계속 악화되어 왔기에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이다. 한국경제에는 이들의 경제력 집중을 견제할 수 있는 어떤 제도적 장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히 중세 봉건체제를 연상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4대 재벌 중 특정 재벌, 즉 삼성그룹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으며, 나아가 삼성그룹은 계열사인 삼성전자에의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데 있다. 필자는 이와 관련해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vs. 코리아 프리미엄』에서 상세히 논했다. 간단히 말해 고용을 제외하면 한국경제에서 삼성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30%(국내총생산 대비)에 달하고, 삼성그룹에서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80%에 달한다. 따라서 한국경제에서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대략 20%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한 나라의 경제가 일개 기업에 이 정도 의존한다는 것은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집중 현상은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는 경우 또는 이런 기업이 성장의 한계에 부딪히는 경우 국민경제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음 표는 2012년 말 기준 시가총액 기준 글로벌 상위 15개 국가의 자료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한국경제에서 삼성전자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큰지 확인할 수 있다.

 

(단위: 억 달러)

순위

국가

시가총액(CMV)

최대기업 시가총액(MV)

MV/CMV

1

미국

186,683

5,006(Apple)

2.7%

2

중국

36,974

2,648(PetroChina)

7.2%

3

일본

36,810

1,597(Toyota Motor)

4.3%

4

영국

30,195

2,227(Royal Dutch Shell)

7.4%

5

캐나다

20,161

869(Royal Bank Canada)

4.3%

6

프랑스

26,112

1,246(Sanofi)

6.8%

7

독일

14,863

1,019(Volkswagen)

6.9%

8

호주

12,864

2,474(BHP Billiton)

19.2%

9

인도

12,633

495(Reliance Industries)

3.9%

10

브라질

12,299

1,291(Ambev)

10.5%

11

한국

11,805

2,276(삼성전자)

19.3%

12

홍콩

11,081

2,340(China Mobile)

21.1%

13

스위스

10,790

2,100(Nestle)

19.5%

14

스페인

9,951

867(Inditex)

8.7%

15

러시아

8,747

1,114(Gazprom)

12.7%

(주: 괄호 안은 각 나라의 시가총액 최대기업을 나타낸다.)

 

이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삼성전자는 우리나라 전체 시가총액의 거의 20%를 차지한다. 이에 필적할 만 한 나라로는 호주, 홍콩 그리고 스위스가 있다. 홍콩은 사실상 중국경제의 일부이므로 비교 대상이 아니고, 스위스는 상대적으로 경제규모가 작은 나라이므로 역시 비교 대상으로 적합하지 않다. 반면 호주는 국내총생산 규모나 시가총액 규모 면에서 한국보다 조금 큰 나라다. 따라서 호주만이 한국과 같은 의미에서 한 개의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나라에 해당한다. 호주 최대기업인 ‘BHP 빌리튼’은 2001년 호주와 영국 기업이 합병해 탄생한 세계 최대 광산기업인데 2014년 7월에는 시가총액이 약 700억 달러로 감소했으며, 최근 다시 두 기업으로 분할되었으므로 더 이상 삼성전자와 비교할 이유가 없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삼성전자의 위상은 독보적이다.

 

여기에 한국경제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삼성전자가 글로벌 시장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춘 IT기업으로 계속 성장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삼성전자가 빠르게 성장하면 할수록 한국경제에서 삼성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높아질 것이고, 이것은 위험분산 원칙에 비추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삼성전자가 한국경제보다 평균적으로 느리게 성장하도록 권유할 수도 없다. ‘국가위험’을 효율적으로 분산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경제는 진퇴유곡(進退維谷)에 빠져있는 셈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외국투자자들의 삼성전자 지분보유율이 2015년 6월 기준 51%를 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의 소유구조만을 놓고 보면 삼성전자는 이미 한국 기업이 아니다. 단지 본사가 한국에 있고 한국인들이 경영하고 있으며, 삼성그룹의 계열사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외국투자자가 없을 뿐이다. 현재 삼성전자에 대한 총수일가 그리고 계열사 및 국내 우호지분을 다 더하면 대략 20% 전후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외국투자자들이 협의해 경영권을 장악한 후, 통상 그러하듯 삼성전자를 사업부문별로 분할 매각해 막대한 자본이득을 노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가운데 경제력 집중으로 인한 국가위험을 낮추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정부와 재벌은 서로 권리만 주장하지 말고 진정 국가와 국민을 위해 실천적인 지혜를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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