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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압착 시대의 교훈과 기업의 역할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8-11-10 11:39
조회
515

자본주의가 태동한 이후 가장 안정적이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번영을 공유했던 시기를 대압착(Great Compression) 시대라고 부른다. 즉 대압착 시대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여러 나라에서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획기적으로 완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어느 때보다 높은 경제성장을 달성했던 기간을 말한다. 이러니 가히 자본주의의 황금기라 할 만하다. 현재 글로벌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앞으로 이런 황금기가 다시 도래하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정부를 비롯해 어떤 기관, 어떤 사람도 근거 없는 장밋빛 이야기로 대중을 현혹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더 큰 부작용을 낳을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압착은 곧 임금 압착(wage compression)을 말하는데 이는 당시 임금 격차가 현저히 감소했고 이로 인해 소득분배가 상당히 개선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 용어는 경제사학자 클라우디아 골딘(Claudia Goldin)과 로버트 마고(Robert Margo)1992년 논문에서 처음 사용하면서 일반에게 알려졌는데 1929년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세계경제를 강타했던 대공황(Great Depression)과 대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리 한 것이다.

 

대압착 시대의 시작과 끝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조금씩 견해가 다르지만 대체로 1930년대 중반 뉴딜 정책이 시행되고 사회복지제도가 도입된 이후부터 1970년대 말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한 시점까지로 본다. 불평등 연구로 유명한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가 국민소득에서 상위 1퍼센트가 차지하는 비중을 추정한 다음 그래프는 대압착 시대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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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래프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의 경우 국민소득에서 상위 1퍼센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종전의 18퍼센트 수준에서 1930년 대 중반 이후 현저하게 감소하기 시작해 1940년대 이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 10퍼센트 이하를 유지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가장 낮은 비중이다. 따라서 이 기간을 대압착 시대라 부르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그런데 이 그래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비중은 1980년대 중반부터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해 2000년 무렵에는 종전의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게다가 이 그래프에는 나타나있지 않지만 2008년 금융위기를 겪었음에도 현재 1퍼센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 높아졌다. 토마 피케티와 함께 불평등을 연구하고 있는 미국 버클리 대학교 경제학과 에마누엘 사에즈(Emmanuel Saez) 교수의 추정에 의하면 2015년도 미국에서 상위 1퍼센트가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2.0퍼센트로 높아져 새로운 기록을 경신했다고 한다. 지금도 이런 추세가 유지되고 있다. 

 

역사는 진정 반복되는가? 그래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은 대압착에 대비해 이것을 대분기(Great Divergence)라고 불렀다. 미국을 비롯해 한국 그리고 대부분의 국가들은 현재 대분기 시대에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를 더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이런 대분기가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미래에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기본소득(basic income)을 거론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분기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추측하게 해준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대압착 시대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 고심할 필요가 있다. 경제는 실험실에서 이런 저런 방법으로 실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오직 역사적 경험만이 우리에게 실천 가능한 교훈을 제공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경제학자 세바스티안 둘리엔(Sebastian Dullien)이 저서 자본주의 고쳐쓰기에서 대압착 시대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1930년대 대공황의 와중에 출현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세계에서 그 구성을 확고히 굳힌 경제모델은 현재의 상황과 여러 점에서 큰 대비를 보여준다. 경제성장률은 높았고 실업률은 낮았음은 물론이고, 소득분배 또한 공정하였다. 복지국가가 제공하는 여러 복지 혜택과 노동시장 규제를 통하여 인구의 압도적인 다수에게 높은 수준의 사회보장을 제공하였고 생계를 보장하였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라고 묘사할 수 있는 이 모델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 깊은 위기에 빠져들고 이 때문에 시장자유주의의 세계화 프로젝트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된다.”

 

필자는 여기서 대압착 시대를 가능하게 했던 처방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압착 시대와 현재 우리가 처한 정치적·경제적 상황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당시 대압착이 가능했던 요인들로는 대공황의 쓰라린 경험 이후 시행된 고율의 누진세, 노동조합의 권한 강화,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임금과 물가의 통제, 냉전시대에 체제 우위를 과시하기 위한 과감한 분배정책 등을 지적할 수 있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과 사용자-근로자 간의 협력이 가능했다. 반면 세계화와 일자리 파괴적인 정보기술 그리고 금융자본의 부상에 따른 극한적인 수익률 게임이 부와 소득의 분배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분명 다르다. 따라서 대압착 시대와 같은 정책을 실시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효과도 의문이다.

 

오늘날 글로벌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운 상황의 배후에는 부와 소득의 극심한 불평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떤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지 두렵기조차 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기업의 역할에서 찾을 수 있다. 대압착 시대를 마감하고 대분기 시대를 초래한 주요 요인으로는 금융자본의 부상과 주주가치극대화를 들 수 있다. 그런데 기업의 목표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윤을 극대화하고 이를 통해 주주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논리가 지배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필자는 우리사회에서 불평등을 논하면서 이 부분에 대한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의아하게 생각해왔다. 아마도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와 이들에 의존해야 하는 언론의 편향된 정보 제공 때문이 아니었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실제로 외국의 여러 전문가들은 대압착 시대가 가능했던 주요 원인으로 당시 기업들이 주주가치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이해관계자가치에도 상당한 큰 비중을 두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예컨대 세바스티안 둘리엔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몇 십 년간은 이해관계자(stakeholder) 자본주의가 지배적 형태였다. 이는 주주들, 경영자들, 직원들을 대표하는 노동조합, 채권자들, 협력업체들, 소비자들, 지방자체단체들 등 다양한 이해집단 사이에 하나의 타협을 추구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이는 주주가치(shareholder value) 자본주의로 대체됐으며, 기업지배구조는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주주가치는 특히 앵글로·색슨 식의 경영 개념으로서 알프레드 래퍼포트(Alfred Rappaport)주주가치의 창출: 사업실적의 새로운 기준에서 만든 말이다.”

 

필자는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래퍼포트가 주주가치를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경제학자는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유시장을 옹호했던 대표적인 경제학자인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1962년에 출판된 Capitalism and Freedom에서 기업의 목표는 이윤극대화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이후 1970뉴욕타임스 메거진에 기고한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is to Increase its Profit이란 제목의 글에서도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

 

따라서 래퍼포트의 주장이 새로운 것은 아님에도 둘리엔이 이와 같이 지적한 이유는 래퍼포트가 주주가치극대화를 위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 책을 출판한 것이 1986년이니 기업의 목표로 주주가치극대화가 전면에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대압착 시대에는 기업이 주주가치보다는 이해관계자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는 것과 이로 인해 불평등이 완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높은 경제성장도 실현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경제학자 조셉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교수가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효율과 평등의 상보성을 지지하는 역사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주주가치극대화에서 이해관계자가치극대화로의 전환은 가능할까?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특히 금융자본의 지배가 완화되지 않는 한 이것은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다. 이런 의미에서 해결의 키는 금융자본이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증권시장에 상장된 대기업들 가운데 해외자본의 지분율이 40퍼센트 이상인 기업들이 적지 않다. 따라서 국제금융자본이 주주가치극대화의 논리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이해관계자가치를 추구하기는 쉽지 않은 여건이다. 그렇지만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이 문제와 관련해 은행이 일정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도와 규칙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 은행은 신용창조를 통해 화폐를 공급한다는 점에서 비록 발행 주식 전체를 민간이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전적으로 사기업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화폐라는 공적 수단을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은행은 기업의 체질을 바꾸는 데 앞장 서야하는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수단도 가지고 있다. 예컨대 기업들이 경영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 이해관계자가치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가를 평가해 대출심사에 반영한다면 작지만 커다란 변화를 위한 시발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하나의 예시이지만 이런 관점에서 다양한 방법들을 궁리해볼 가치가 있다. 기업의 목표가 오직 주주가치극대화에 머물러 있는 한 대분기 시대가 초래할 재앙적인 상황을 피하기 어렵다. 물론 주주가치와는 달리 이해관계자가치는 모호한 부분이 많은 개념이다. 그렇기에 이를 본격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개념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한다. 그런 후 기업이 이해관계자가치를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화하도록 경제 전반의 제도와 규칙을 정비해야만 앞으로 닥칠 재앙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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