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의 어두운 면
진화가 특정한 방향을 향해 진행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소 분분하다. 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을 비롯한 대다수의 진화론자들은 진화에는 일정한 방향이 없다고 주장한다. 진화는 인간과 같은 고등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온 것이 아니라 오직 자연선택과 돌연변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진화는 특정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도 일부 존재한다. 그런데 진화 과정에서 복잡성과 다양성이 증가해왔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한다. 이것은 인간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간은 매우 단순하고 획일적인 사회로부터 정말 복잡하며 다양한 사람들이 교류하는 사회로 진화해왔다. 이것이 놀라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자 동시에 크고 작은 갈등의 원천이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의 경제적 욕구를 지속적으로 충족시켜주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기준이 준수되어야 한다. 하나는 효율성이고 다른 하나는 공정성이다. 이 둘 중 하나가 치명적으로 훼손된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암울해질 것이다. 과거 공산주의 체제를 채택했던 국가들이 붕괴한 것은 효율성 기준이 훼손되었기 때문이었다면 자본주의 체제를 채택한 국가들은 공정성 기준이 훼손되면서 내부로부터 붕괴할 수 있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그 동안 이 두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로 널리 지지를 받아왔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자신의 노력과 재능 및 업적에 따라 보상을 받는 시스템을 의미하는데 부지불식간에 사람들 뇌리에 당연한 것으로 각인되었다. 그 결과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오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실패한 사람은 자신의 무능을 탓하며 굴욕감을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능력주의가 초래한 오만과 굴욕감은 부와 소득의 불평등이라는 물질적 상처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에 정신적 상처를 남기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오늘날 능력주의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으면서 상당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경고가 도처에서 들리고 있다. 한국 사회의 높은 자살률도 능력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필자는 이것을 승자독식의 ‘야만적 능력주의(barbarous meritocracy)’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 시점에서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가 어떤 위상과 역할을 하고 있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하버드대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최근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바탕으로 대안을 제시하였다. 원 제목이 ‘능력의 폭정(Tyranny of Merit)’이라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샌델은 능력주의로 인한 부작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보통사람들이 능력주의에 대해 반발한 대표적인 사례로 영국의 브렉시트와 2016년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거론하였다. 이 두 사건 모두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부와 권력을 획득한 엘리트들로부터 무시당하고 굴욕감을 느꼈던 저학력자들과 빈곤층 사람들이 반격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샌델은 다음과 같이 능력주의의 부작용을 지적한다. “노력과 재능의 힘으로 능력 경쟁에서 앞서 가는 사람은 그 경쟁의 그림자에 가려 있는 요소들 덕을 보고 있다. 능력주의가 고조될수록 우리는 그런 요소들을 더더욱 못 보게 된다........우리 스스로를 자수성가한 사람 또는 자기 충족적인 사람으로 볼수록 감사와 겸손을 배우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런 감성이 없다면 공동선에 대한 배려도 힘들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능력주의가 잘못된 방향으로 발현되면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우월감이 만연하게 됨으로써 연대와 협력을 강조하는 공동선은 퇴조하게 되고 사회 양극화가 더욱 악화될 것이 자명하다. 현재 우리는 이와 같은 능력주의의 부작용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능력주의를 폐기처분하고 다시 과거와 같은 세습 신분사회로 회귀한다거나 결과의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능력주의의 장점을 살리는 가운데 이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모색해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불평등과 양극화에 대한 처방을 모색하는 차원을 넘어 향후 도래할 인공지능 시대를 고려할 때 더욱 절실한 과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자동화로 인한 일자리 소멸에 대비해 보편적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은 중요한 한 가지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일의 존엄성,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이다. 단지 소비하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이자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대접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미국 실리콘벨리의 핵심 인물들이 앞장서서 기본소득을 거론하는 배경에는 현재의 야만적 능력주의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에 앞서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저런 잡다한 요인들을 제외하면 능력주의로 향한 첫 단계는 대학입학이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은 일단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간주된다. 다음은 명문대학 진학 여부다. 대학도 같은 대학이 아니기에 명문대학에 진학해야만 능력주의의 혜택을 누릴 기회가 많아진다. 다음은 인기학과에 적을 두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가치 시스템에 가장 충실한 전공, 예를 들면 의대나 법대 또는 경영대에 진학해 향후 커리어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은 졸업 후 각종 국가고시에 합격하거나 유망 대기업 또는 공기업 선발고사에 합격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는 이런 식으로 이미 정형화된 과정을 거쳐 능력주의의 혜택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선택된 길을 가는 것이 후손들에게도 유리하다는 고정관념이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이는 곧 세대를 이어 승자와 패자를 가름으로써 사회 양극화를 악화시키고 새로운 세습사회로 가는 길을 촉진하게 될 공산이 크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요한 삶을 살 수 있다 하더라도 이는 발전이 아니라 퇴보를 의미한다. 야만적인 능력주의는 우리를 건전하고 건강한 사회 대신 분열되고 황폐한 사회로 이끌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기서 능력주의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다. 현재와 같이 돈의 위력이 강력한 상황에서는 돈이 곧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내심으로는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돈으로 측정되는 시장적 가치가 바로 개인의 능력을 측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아니다. 헤지펀드 매니저가 막대한 소득을 올린다고 해서 능력이 있고, 코로나19 사태의 최전선에서 분투하는 간호사가 적은 소득을 번다고 해서 능력이 없다고 단언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모두 시장적 가치의 노예임을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능력인가는 그 사회의 의식 수준 내지 문화 수준에 의해 결정되므로 가변적이다. 예를 들면 유대인 사회에서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는 랍비(rabbi)는 모두에게 존경받는다. 이와 같이 진정한 선생으로 역할을 하는 사람의 능력을 존중해주는 사회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능력의 정의가 시대적, 사회적 산물임을 의미한다. 오늘날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리는 프로스포츠의 슈퍼스타나 인기 연예인들은 지금과 같은 시대에 태어났기에 그런 대접을 받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이들이 100년 전에 태어났다면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이 사실은 능력주의에 대한 다른 비판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데 과연 자신이 기여한 정도가 얼마나 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우연한 행운, 부모의 지원, 적절한 사회제도 등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보다 더 노력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성취한 모든 것은 온전히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회구성원들이 그것을 돈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만큼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극단적인 자기도취자일 뿐이다. 이와 관련해 샌델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사회 속에서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의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이와 같이 능력주의의 혜택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겸손을 배울 수 있다면, 그리고 나아가 이들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강력한 유인을 제공하는 사회규범과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면, 필자는 이런 상황에서의 능력주의를 계몽된 능력주의(enlightened meritocracy)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