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분야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6-02-22 19:54
조회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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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함석헌

출판사: 한길사(2006)

 

 

목차

제1부 새로 고쳐 쓰는 역사

1. 인생과 역사 2. 사관 3. 종교적 사관 4. 세계역사의 테두리

5. 한국역사의 기조 6. 지리적으로 결정된 한국역사의 성질

7. 한국사람

제2부 올라오는 역사 내려가는 역사

8. 당당한 출발 9. 열국시대의 모밭 10. 풀무 속의 삼국시대

11. 다하지 못한 고려의 책임 12. 궁예, 왕건이 그린 나라

13. 깨어진 꿈 14. 고려자기 속에 숨은 빛

15. 팔만 경판에 새긴 마음 16. 최영과 이성계

제3부 났느냐 났느냐 났느냐

17. 수난의 오백년 18. 중축이 부러진 역사

19. 쓸데없어진 세종의 다스림 20. 무너진 토대 21. 의인의 피

22. 회칠한 무덤 23. 살인의 역사 24. 고질 25. 율곡의 헛수고

26. 첫 번째 환난 27. 두 번째 환난 28. 임경업

29. 신생의 가는 빛 30. 기독교의 들어옴 31. 다시 거꾸러짐

32. 해방 33. 6.25

제4부 고난에 뜻이 있다

34. 생활에서 나타나는 고민하는 모습 35. 고난의 의미

36. 역사가 지시하는 우리의 사명 37. 역사가 주는 교훈

 

 

 

<북 리뷰: 한국인에게 역사의식이란 무엇인가?> 

★ 저자 소개 및 책의 배경

필자가 이 책을 처음 접했던 것은 대학 시절이었다. 1970년대 초반 유신독재에 대항해 불굴의 신념과 용기를 갖춘 소수의 민주투사들이 온몸으로 유신독재에 대항하고, 대학생들은 이에 호응에 연일 데모 시위를 통해 민주화를 부르짖던 시절 함석헌 선생님은 독보적인 분이었다. 당시의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국민들에게 함 선생님은 그야말로 꺼지지 않는 등불 같은 존재였다. 흰 도포자락에 흰 수염을 흩날리며 사자후를 토하는 모습은 가히 영웅의 풍모를 닮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함 선생님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우리의 정신세계가 얼마만큼 척박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당시 필자는 이 땅의 젊은이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때에는 시대적 상황을 이해해보려는 의도에서 깊은 생각 없이 그저 읽어야 한다는 당위(當爲)에서 시도했던 탓에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당시 읽었던 내용이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에 대한 방증이리라. 돌이켜 보면 부끄러울 뿐이다. 그러던 차에 최근 한국사회와 관련된 몇 권의 책을 쓰는 과정에서 함 선생님의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고, 그래서 조심스럽게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함 선생님께서 이 책을 집필할 당시(일제시대)와 개작할 당시(해방 후 및 한일회담 후)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할 것 같다. 그분 지적대로 우리 민족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저 눈앞의 이해관계에 급급해 먼 미래를 고려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행동하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한 궤변을 늘어놓는 데는 상당히 익숙한 민족이 된 것 같다. 이른바 도구적 합리성(instrumental rationality)은 발달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이성은 오히려 마비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이런 의미에서 이 땅의 지식인이라면 지금도 우리에게 “생각하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함석헌 선생님은 역사학자는 아니다. 이 말은 역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학자는 아니라는 의미다. 함 선생님은 유영모 선생님이 남강 이승훈 선생님의 부탁으로 평양의 오산고등학교 교장 직을 맡고 계셨을 때 오산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는데, 아마 이 때 역사를 가르쳤던 것으로 생각한다. 이 책의 모태는 선생께서 일제 치하에서 가졌던 작은 모임에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제목으로 우리 역사에 대해 강연했던 것이다. 그 후 이것을 잡지 <성서조선>에 게재했었는데, 이를 토대로 몇 차례에 개편 작업을 한 끝에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 역사관 선택의 의미

이 책의 모태가 된 강연 제목에 드러나 있듯이 이 책은 종교적 사관의 관점에서 한국역사를 기술하였다. 주지하다시피 함 선생님은 기독교인이었으므로 자칫하면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적 관점에서 한국역사를 기술한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그러나 그것은 기독교가 홀로 참 종교라는 생각에서도 아니요, 기독교에만 참 사관이 있다 해서도 아니다. 전날에는 내가 그렇게 생각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와서 보면 역시 종파심을 면치 못한 생각이었다. 기독교가 결코 유일한 진리도 아니요, 참 사관이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진리가 기독교에는 기독교적으로 나타났을 뿐이다.”(50쪽)

 

현재 한국역사에 대한 견해는 극단적인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그 정도가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분열적이고 파행적이다. 이것은 이성적인 사회에서는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역사란 학문이 자연과학처럼 정밀한 분석과 엄격한 논리를 바탕으로 객관성을 추구하는 분야는 아니므로 어느 정도 개인의 사관에 따라 역사에 대한 서술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역사 서술에 있어 다양성은 불가피하다. 아무리 실증사학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유물과 사료를 통해 과거 역사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기술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역사라 부르기보다는 “사실과 자료의 모음”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이에 대해 함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역사를 아는 것도 지나간 날의 천만 가지 일을 뜻도 없이 차례로 그저 지저분히 머릿속에 기억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값어치가 있는 일을 뜻이 있게 붙잡아서만 된다.”(39쪽)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과거의 역사를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기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에 관한 한 자신의 견해가 백퍼센트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오만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서로 협력해야 한다. 자신이 발견한 사료나 고고학적 발견을 서로 공유하는 가운데 각자의 제한된 지식과 경험을 통합하는 과정을 통해 더 높은 수준의 역사 인식에 도달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것이 역사라는 학문을 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의 역사관은 매우 중요하다. 무슨 목적으로, 무엇을 위해 역사를 기술하는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이 책의 목차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책은 다른 역사서와는 확연하게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한 마디로 저자가 말한 대로 ‘뜻’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할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영국 역사학자 카아(E. H. Carr)가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라는 간결한 표현이 널리 인용되어왔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것은 역사의 본질에 대한 표현으로서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다. 역사가 대화인 것은 맞다. 그런데 단순한 대화가 아니다. 과거가 현재의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호소하고 있는, 그러나 감춰진 진실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움으로써 그것의 의미를 이해한 후 이를 바탕으로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진정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함 선생님은 한국역사는 “고난의 역사”임을 강조한다. 수천 년 동안 여러 가지 고난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에 만신창이가 되었음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이런 고난의 실상을 이 책 곳곳에서 때로는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표현한 것은 우리에게 자극을 주기위한 방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이제는 우리가 고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더 이상 끌려 다니는 노예의 역사가 아니라 세계사의 주역이 될 수 있도록 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함 선생님은 이를 위해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다름 아니라 지(知), 즉 앎이라고 선언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 책의 맨 마지막에 있는 다음 구절은 지금도 음미할 가치가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어려워진 나라에서는 결국 악순환인데, 가지가지 잘못이 서로 얽혀서 무엇부터 풀어야 할지를 알 수 없는데, 지혜와 용단은 그 어느 고리에서 자르느냐 하는 데 있다. 한 고리가 풀리면 전체가 풀릴 줄 아나, 그 어느 고리에서 자르냐가 문제다. 모험이라면 모험이다. 그러나 마땅히 모험해야 하는 올바른 점은 지(知)에 있다.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하여 한번 모험을 할 전략적인 지점이 셋이 있다 할 수 있다. 부(富)가 그 하나요, 권(權)이 또 하나요, 그 다음은 지(知)다. 그러나 이 셋 중에 반드시 골라야 하는 것은 지(知)라는 말이다.”(496쪽)

 

이 책의 마지막 개정작업이 이루어진 것이 1960년대 초이므로 벌써 50여 년이 지났다. 현 시점에서 돌아보면 한국은 상당한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달성했으므로 부(富)와 권(權)이라는 면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지(知)라는 면에서는 어떠한가? 그 동안 교육수준이 상당히 높아졌고 사람들이 보다 합리적으로 사고하게 되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공동선(common good)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건전한 사회규범이 실종되었으며, 불평등이 악화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진정한 의미에서 ‘지’를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여기서 ‘지’는 단순한 지식을 넘어서 지혜에 가까운 진정한 앎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함 선생님은 이 책을 통해 지금도 우리에게 깊이 생각하는 국민이 되라고 충고하고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 책은 실증적 분석에 기반을 둔 역사서가 아니다. 이 점을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책에는 한국사의 고질적인 문제인 식민지사관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 같은 것은 없다. 제목이 시사하듯이 함 선생님은 “뜻(의미)의 관점”에서 처음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역사를 조망하려 했던 것이다. 선생께서 말하는 뜻의 근거는 물론 그분의 종교적 배경인 기독교다. 그렇지만 편협한 근본주의자의 시각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드물게 열린 시각을 가지고 기독교의 하나님을 해석하고 우리가 오랫동안 겪었던 고난의 의미를 묻고 있는 것이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반복해서 경험했던 고난의 의미를 모른다면 우리는 희망이 없는 민족이라는 것이 함 선생님의 생각이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무언가를 깨달아야 한다. 이 점은 개인이든 민족이든 차이가 없다. 고난과 고통은 그저 힘들고 견디기 어려운 수치스러운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을 상승시킬 수 있는 경험이요 거듭날 수 있는 기회임을 깨달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참조 사항>

• 실증적인 측면에서 한국역사를 조망할 때 이 책에 대해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함 선생님은 한국 고대사와 관련해 현재 주류 강단사학자라 불리는 일단의 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설치된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함 선생님이 이 책을 집필할 당시 이와 관련된 자료가 부족한 탓에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인지, 아니면 고난의 역사라는 관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인의 정체성과 관련해 이 문제가 갖는 중요성에 비추어 아쉽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 함석헌 선생님의 철학과 사상에 관심 있는 사람은 박재순의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2012)을 추천한다. 저자 박재순 박사는 오랫동안 지근거리에서 함 선생님을 모셨던 분으로서 한신대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씨알사상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이 한 권의 책으로 함석헌 선생님의 민주정신, 문화사상, 평화사상 및 종교사상 등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함 선생님의 체취를 경험하고 싶은 사람은 도봉구 쌍문동에 있는 <함석헌 기념관>을 방문해도 좋을 것이다. 함 선생님의 자제분이 살던 가옥을 개조해 만든 기념관에는 함 선생님의 유품, 연대별 사진 및 애독하던 책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 얼마 전 한국 사회의 뜨거운 쟁점이었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은 어떤 건설적 논의도 없이 정부 방침대로 강행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늘 그랬던 것처럼 잠깐 찬반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있다가 마치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이, 즉 정작 중요한 것은 논쟁 과정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있는 것이지 “이슈” 자체가 아닌 것처럼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함 선생님이 걱정했던 “생각하지 않는 백성”의 면모를 다시 보여주는 사건 같아 마음이 착잡했다. 필자는 우리 역사에 대해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주류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흔히 재야 사학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강력하게 반대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윤내현의 『사료로 보는 우리 고대사』(2013), 『우리 고대사, 상상에서 현실로』(2014), 이덕일·김병기의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2006), 이덕일의 『우리 안의 식민사관』(2014), 김상태의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2013), 성삼제의 『고조선, 사라진 역사』(2012), 이주한의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2013)등을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가 모두 맞는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주류 강단사학자들이 교과서를 통해 전달하는 내용과 비교해 봄으로써 한국역사를 인식하는 데 무엇이 문제인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