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 분야

에드워드 윌슨의 《지구의 정복자(The Social Conquest of Earth)》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6-12-15 00:04
조회
419

20161214_145941_58515e5d04595.jpg 

저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

역자: 이한음

출판사: 사이언스북스(2013)

 

목차

1사회성이라는 수수께끼

1장 인간 조건

2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2장 정복의 두 경로

3장 진화 미로의 모퉁이들

4장 도약의 거점

5장 진화 미로를 헤치고

6장 사회성 진화의 원동력

7장 인간 본성에 새겨진 부족주의

8장 전쟁, 유전된 저주

9장 탈주

10장 창의성 폭발

11장 문명을 향한 질주

3부 사회성 곤충의 무척추동물계 정복사

12장 진사회성의 발견

13장 사회성 곤충은 진화시킨 발명들

4부 사회성 진화의 힘

14장 진사회성의 희소성 딜레마

15장 곤충의 이타성과 진사회성이 규명되다

16장 곤충의 대도약

17장 자연선택은 어떻게 사회적 본능을 빚어내는가

18장 사회성 진화의 힘

19장 새로운 진사회성 이론

5부 우리는 무엇인가

20장 인간의 본성이란

21장 문화의 문턱

22장 언어의 기원

23장 문화적 차이의 진화

24장 도덕과 명예의 기원

25장 종교의 기원

26장 창작 예술의 기원

6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27장 새로운 계몽

      

<북리뷰: 세 가지 큰 질문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답변>

저자 소개 및 진화론의 교훈

저자 에드워드 윌슨(1929~)은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의 창시자로서 더 이상 소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학자이다. 윌슨은 인간 본성에 대하여(1979)개미(1991)로 논픽션 부분에서 두 번이나 권위 있는 퓰리처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문필가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개미 연구의 권위자이자 뛰어난 생물학자로서 널리 인정 받아왔다. 필자는 생물학에 조예가 깊지는 않지만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생물학적 기초가 중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 Gould), 닐 슈빈(Neil Shubin) 등 몇몇 생물학자들의 주장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다. 윌슨의 비교적 최신작인 이 책을 소개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개인적으로 제일 먼저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하버드대학 고생물학 교수였던 스티븐 제이 굴드다. 그의 다윈 이후풀하우스를 관심 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는 단속평형설(Punctuated Equilibrium)을 주장해 52천만 년 전 캄브리아기 대폭발을 설명하려 했고, NOMA(Non-Overlapping Magisteria)로 불리는 중복되지 않는 교도권을 천명함으로써 종교와 과학은 별개의 영역으로서 양립가능하다는 신념을 피력했다. 개인적으로는 굴드의 생각에 일정 부분 동조하는 편인데, 주류 생물학계는 그의 주장에 비판적이었다. 리처드 도킨스 또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무신론자이자 대중적인 진화생물학자다. 그의 책도 몇 권 읽었는데 뛰어난 문장력과 전문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감탄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닐 슈빈은 시카고대학의 고생물학 교수로서 앞의 두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그렇지만 슈빈 교수도 이 분야에서는 꽤 알려져 있는 젊은 학자로서 앞으로 주목을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의 첫 번째 저서인 내 안의 물고기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기에 두 번째 저서 DNA에서 우주를 만나다를 읽고 이 사이트에 리뷰를 실었다.

 

생물학자로서 대중적인 책을 출간한다는 면에서 윌슨 교수 또한 이들 못지 않다. 더욱이 80세를 훌쩍 넘겨 90세를 바라보는 요즈음에도 책을 집필하고 출간하는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윌슨의 저서 가운데처음 읽은 것은 인간 본성에 관하여였다. 당시에는 이 책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는지 조차 모르고 읽었는데, 생물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본성을 접근했던 책으로서 개인적으로는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못지않게 인상적이었다.

 

그 후 그의 또 다른 문제작 통섭을 읽으면서 그의 해박함과 학문적으로 열린 공감했었다. 단지 사회생물학이 통섭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메시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이었다. 이러던 차에 올해 초 그의 저서 두 권을 연달아 읽게 되었다. 하나는 지구의 정복자(2013)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존재의 의미(2016)이다. 지구의 정복자라는 제목은 다소 어색하게 여겨졌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한 번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함과 폭넓고 깊은 사고에 감탄하게 되었다. 인간 존재의 의미는 비교적 작은 책으로서 인류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윌슨의 최근 생각을 간략하게 정리해 놓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필자가 여기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몇몇 생물학자들과의 조우(遭遇)를 장황하게 언급한 이유는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행동,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류가 나아갈 올바른 방향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생물학 지식이 절실하다고 느꼈다는 점을 고백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가끔 우리 자신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들 가운데 하나임을 잊고 살아간다. 이것은 진화론을 믿던 창조론을 믿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간만이 이 작은 행성 지구에서 유일한 생명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생명의 다양성과 존엄성에 대해 한 번쯤 깊이 생각할 기회를 준다. 적어도 우리는 왜 이 지구에 태어났다가 언젠가는 떠나야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이 나름 가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 차이가 있다면 주변을 의식하고 자신을 의식할 수 있는 능력의 차이로 인해 생명의 의미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다를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점에서 진화론은 우리에게 더 깊고 넓게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본다.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절대로 교만할 수 없다. 나아가 빅히스토리의 관점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본다면 더더욱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무한한 우주의 시공간에서 우리는 측정 불가능할 정도로 작은 존재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사실을 알기에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이 책을 읽은 후 상당히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리뷰를 하기로 결심했다. 우리나라에는 윌슨 교수로부터 직접 사사한 생물학자들도 있으며, 이들을 포함해 여러 전문가들이 이 책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한 리뷰들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다. 따라서 비전문가인 필자가 굳이 이 책을 리뷰하는 것은 스스로 무지를 드러내는 무모한 행동일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혼란만 가중시키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기에 망설였다. 그러다가 고민 끝에 결국 이 책의 리뷰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 이유는 필자가 가지고 있는 의문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기회가 있다면 전문가들의 조언을 얻기 위해서다. 모르는 것을 묻는 것 또한 용기라는 신념이 없었다면 결코 이런 무모한 리뷰는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 이 책의 제목을 접하면서 다소 도발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굳이 정복자라는 표현을 쓴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영어 제목에도 정복(conquest)”이란 단어가 들어 있으니 의도적으로 이 표현을 쓴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서문에서 저자가 화가 고갱이 타이티로 이주해 죽기 전에 그린 그림에 새겨진 세 가지 질문에서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쓰게 되었음을 알았다. 세 가지 질문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이다. 이른바 빅퀘스천(Big Question)에 해당하는 중요한 질문이다.

 

말이 나온 김에 빅퀘스천, 즉 큰 질문에 대해 간략하게 논하고자 한다. 이런 질문을 제기한 대표적인 물리학자로는 존 휠러(John Wheeler)와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을 들 수 있다. 존 휠러가 제기한 큰 질문은 다음과 같다: “존재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왜 양자(量子)인가?, 동참하는 우주란 무엇인가?, 의미는 무엇인가?, 비트(bit)에서 존재로?”

한편 스티븐 호킹은 다음과 같은 큰 질문을 던졌다: “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 존재하는가?,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다른 법칙이 아니라 왜 지금의 일련의 법칙이 존재하는가?”

 

이들 외에도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영원의 철학에서 다루었던 많은 현자와 신비주의자들이 이와 유사한 큰 질문들을 던졌다. 질문의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은 이런 큰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지구에 왔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깊은 차원에서는 과학과 종교가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져준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여전히 다른 대답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이와 관련해서는 좀 더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인간 조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저자는 이 책의 첫 장에서 인간 조건에 대해 논한다. 사실 이 개념은 윌슨의 다른 책 통섭인간 존재의 의미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윌슨에게는 중요한 개념으로 여겨진다. 소설가 앙드레 말로와 철학자 하나 아렌트도 인간의 조건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는데, 이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인간 조건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윌슨은 이 책에서 인간 조건에 대해 특별한 설명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 조건이라는 크나큰 수수께끼를 종교의 신화적 토대에 기대어 풀 수 없다면, 내면의 성찰이라는 방식을 통해서도 풀 수 없을 것이다..........의식(consciousness)은 수백만 년에 걸친 삶과 죽음의 투쟁을 통해 진화했고, 그 투쟁을 수행하기 위해 설계되었지 자기 점검을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었다. 뇌는 생존과 번식을 위해 설계되었다. 의식적 사고를 조정하는 것은 감정(emotion)이다. 의식적 사고는 궁극적으로 생존과 번식이라는 목적에 철저하게 매진한다.”(17)

 

그리고는 인간 조건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한 번 더 언급한다: 그리하여 때로는 이기적이고 때로는 비이기적인 모습을 띠는, 서로 종종 충돌하는 두 충동을 함께 지닌 인간 조건이 탄생했다. 진화라는 거대한 미로를 헤치고 나아가던 호모 사피엔스는 어떻게 이 독특한 지점에 이르게 되었을까?”(29) 이런 내용만 가지고는 저자가 말하는 인간 조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저자는 이미 전작 통섭에서도 이에 관해 몇 차례 언급했던 기억이 있다. 예컨대 저자는 통섭이 매력적인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지적 모험의 전망을 열어 주고 비록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인간 조건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이끈다는 데 있다.”(41)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베이컨은 학문의 모든 가지들에 가장 잘 봉사할 수 있는 귀납적 탐구라는 공통 수단에 초점을 맞추었다.......또한 과학은 넓은 의미에서 시 혹은 시의 과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질서 정연하게 통합된 학문을 인간 조건 향상의 핵심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다.”(70)고 말한다.

      

이 부분에도 여전히 인간 조건 자체에 대한 설명은 빠져 있다. 그런데 통섭에서나 이 책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인간 조건을 탐구하는 여정에서 종교, 철학 및 예술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저자의 기본 시각이다. 아무튼 이 책을 읽은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자가 말하는 인간 조건이란 진화의 긴 여정에서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현재 인간 존재의 바탕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는 20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부터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기 까지 인류가 경험했던 모든 것들, 그리고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경험했던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것들이 포함된다. 이로 인해 현재 우리를 존재하게 한 물질적, 정신적 조건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상호 작용을 통해 인간 조건이 완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에게 인간 조건은 진화의 산물이다. 나아가 기나긴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이 획득한 고유한 특성, 즉 고도의 사회성이 어떻게 출현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인간 조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에서 나는 과학의 발전, 특히 지난 20년 동안에 이루어진 발전에 힘입어 이제는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을 일관성 있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더욱 근본적인 두 가지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고도의 사회성이 대체 왜 존재하며, 생명의 역사에서 왜 그토록 드물게 출현했는가 하는 질문이다. 두 번째는 고도의 사회성을 존재하게 한 원동력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물음이다.”(19) 이런 이유로 저자는 인간 조건을 언급하면서 논의를 시작한 것이다. 특히 저자는 진화 과정에서 인간이 획득한 고도의 사회성, 즉 진사회성(eusociality)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진사회성은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진사회성이다. 저자는 이런 특성의 출현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이것이 앞으로 인류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논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저자는 우선 무엇보다도 진화의 역사에서 진사회성의 출현이 매우 희소하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저자에 의하면 수백 만 종 가운데 진사회성을 획득한 것은 벌과 개미, 그리고 인간을 포함해 20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지극히 낮은 확률이다. 마치 복권에 당첨된 것과도 같다.

 

 

저자는 진사회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생물학자들이 진사회성 동물이라고 부르는 것에 속한다. 집단의 구성원들이 여러 세대로 이루어져 있고 분업의 일부로서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경향을 가진 동물이라는 의미이다. 이 점에서 인류는 학술적으로 볼 때 개미와 흰개미 같은 사회성 곤충에 비견할 만하다.”(27) 진사회성의 핵심은 공동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거기서 이타적으로 다른 개체를 돌봐주는 행동에 있다. 그리고는 진사회성이 출현하게 된 경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사회성으로 향하는 경로는 집단 내 개인들의 상대적인 성공을 토대로 한 선택집단들 사이의 상대적인 성공을 토대로 한 선택사이의 경쟁을 통해 도출되었다. 이 게임의 전략들은 세밀하게 조정되는 이타성, 협력, 경쟁, 지배, 호혜성, 변절, 기만의 복잡한 혼합물이었다.“(28) 이 대목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상호 작용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진사회성은 인간 조건을 구성하는 중요한 특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진화라는 것이 미리 정해진 방향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인류가 진사회성을 획득하기까지는 여러 가지 선행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을 선적응(preadaptation)이라 부른다. 이와 관련해 저자가 특별히 강조한 것은 다른 영장류에 비해 인간의 뇌 용량이 급격하게 커지게 된 원인에 관한 것으로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이 아니라면(그리고 이 문제는 결코 결론이 난 것이 아니다.), 사람과 뇌의 급속한 진화적 성장을 촉발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두개골과 치열의 해부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점에서 드러나듯이, 주된 단백질 공급원인 고기에 더욱 의존하게 된 것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54)

 

그리고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침팬지와 보노보의 진화 역사는 60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에 그들은 인류 분기군과 갈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그 계통 분기 이전에는 우리와 조상이 같은데, 왜 인간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일까? 답은 침팬지와 보노보의 조상이 살아 있는 동물을 잡아먹는 데 투자를 덜 했다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속()으로 진화한 집단은 동물 단백질을 많이 소비하는 쪽으로 분화가 이루어졌다.”(56) 저자에 의하면 인류의 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우연히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뇌의 용량이 커지면서 진사회성을 획득할 수 있는 선행 조건들이 충족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이런 주장을 어느 정도 수용하고 있는지 필자는 아는 바 없다. 하지만 다른 요인들(직립 보행과 언어 사용)과 비교해 저자의 주장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의문이다. 예컨대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간 조상의 뇌에 일어난 변화의 원인으로 우연한 유전자 돌연변이를 지적했는데 이런 주장과 저자의 주장이 양립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아무튼 이것은 중요한 쟁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진화의 미로를 고려할 때 현생 인류가 탄생한 것은 요행이었다고 말한다. 현재 우리가 존재하는 데는 필연 법칙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진화론의 입장에서는 그러하다는 의미다. 따라서 진사회성을 포함해 인간 조건이 형성되는 과정에서는 수많은 선적응들이 일정한 순서로 일어났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 조건이 왜 그렇게 특이하며, 왜 지구 생명의 역사에서 단 한 번만 만들어졌고, 만들어지는 데 왜 그토록 오래 걸렸는지에 관해 합리적으로 타당한 설명을 이끌어 내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 그것이 일어나는 데 꼭 필요한 선적응들이 이어질 가능성이 극도로 낮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62) 이런 이유로 진사회성을 획득한 종은 희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류는 우연히 이런 희소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뿐이다.

 

혈연 선택 vs. 다수준 선택

저자가 강조하는 진사회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안전한 공동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다른 개체를 돌봐주는 행동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이기적 행동으로는 부족하고 반드시 이타적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상반된 특성이 상보적으로 작용하였기에 인류는 진화의 미로를 헤쳐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인류 진화의 핵심 원동력은 무엇인가? 이것이 저자가 이 책에서 제기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저자는 인류 진화의 원동력으로 혈연 선택(kin selection)이 오랫동안 널리 수용되어왔다고 말한다. 혈연 선택은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이 주장한 포괄적 적합도(inclusive fitness)의 다른 명칭이다. 저자 또한 오랫동안 혈연 선택이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상보적인 관계를 설명해주는 대표적인 이론으로 지지해왔다고 고백한다. 널리 알려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혈연 선택의 다른 표현에 해당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 책에서 더 이상 혈연 선택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관점은 지극히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사실 대다수의 진화생물학자는 그것을 거의 교리로 받아들여 왔다. 적어도 2010년까지는 그랬다. 그해에 나는 마틴 노왁, 코리나 타르나타와 함께 혈연 선택 이론이라고도 하는 포괄적 적합도 이론이 수학적으로도 생물학적으로도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78)

 

그런데 이런 표현에서 감정적인 고조된 저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윌슨 교수와 같은 노학자조차 오랜 세월 틀린 이론을 신봉한 자신을 용서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기 어려운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저자는 앞서 언급한 하버드대학의 수리생물학자들과 공동 연구를 통해 구축한 자신의 다수준 선택이론이 혈연 선택보다 더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개체 차원의 자연선택(이기심에 기반을 둠)과 집단 차원의 자연선택(이타심에 기반을 둠)의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류 진화의 원동력은 개체 선택과 집단 선택 둘 다이다. 이 다수준적 선택 과정은 다윈이 인간의 유래(The Ascent of man)에서 맨 처음 예견했다.”(71)

 

이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보충 설명한다: 성숙한 자식의 수를 최대화하는 데 기여하는 전략을 진화시키는 개체 수준의 자연선택(=개체 선택)은 생명의 역사 내내 우세했다............생물들이 정반대 방식으로 행동하는 진사회성은 생명의 역사에서 드물게 출현했을 뿐이다. 집단 선택이 개체 선택의 지배력을 완화시킬 만큼 예외적으로 강력해야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74) 저자는 진사회성의 출현을 설명하는 데 있어 혈연 선택이 틀렸다는 증거가 많은 반면, 다수준 선택이 옳다는 증거가 점점 축적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필자로서는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이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다수준 선택 이론에 대한 반증 가능성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개체 선택과 집단 선택의 상호작용을 근거로 진사회성의 출현을 설명하고 그래서 인류가 특정한 진화 경로를 거치게 되었다는 주장은 상당히 신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개체 선택과 집간 선택이 어떤 방식으로 상호작용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두 가지 수준에서의 자연선택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어왔는지 전 진화 과정을 소급해서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만약 이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면 다수준 선택이 과학적인 설명으로서는 한계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저자가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는 데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이와 관련해 이 분야의 전문가가 정확하게 설명해주면 좋을 것 같다.

 

인간 본성과 유전자-문화 공진화에 대해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한 또 다른 중요한 견해는 유전자-문화 공진화(gene-culture coevolution)에 관한 것이다. 필자도 이것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본성(nature) 대 양육(nurture)”의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본성은 후천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서 빈서판(blank plate)으로 간주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자연선택과 돌연변이에 의해 결정되는 진화의 산물인가 하는 문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유전자-문화 공진화를 주장한다. 마치 두 극단의 중용을 택한 것 같다.

      

이 문제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과학과 인문학 분야의 많은 연구자들은 마음이 전적으로 환경과 역사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계속 펼쳐 왔다. 그들은 자유의지가 존재하며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마음은 궁극적으로 의지와 운명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윽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진화는 문화적 진화밖에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유전자에 토대를 둔 인간 본성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196)

 

그러면서 인간 본성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선언적으로 말한다: 우선 인간 본성은 그것의 토대를 이루는 유전자가 아니다. 유전자는 인간 본성을 만들어 내는 뇌, 감각계, 행동의 발달 규칙들을 규정한다. 또 인류학자들이 발견한 보편적인 문화적 특징들을 뭉뚱그려서 인간 본성이라고 정의할 수도 없다.”(234)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유전자는 인간 본성의 근접 원인(proximate causation)에 해당한다. 그리고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면 유전되는 인간 본성을 찾기에 가장 좋은 곳은 그 사이, 즉 유전자들이 규정하는 발달 규칙들 속일 것이다. 그 규칙들을 통해 문화의 보편적인 특징들이 만들어진다. 인간 본성은 유전되는 마음 발달상의 규칙적인 속성들로서 우리 종에 공통된 것을 가리킨다. 그 속성들은 후성 규칙(epigenetic rule)’으로서, 머나먼 선사시대에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난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상호 작용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236)

 

이 대목이 중요하다. 저자는 생물학자로서 후성유전학을 창시한 콘래드 워딩턴(Conrad Waddington, 1905~1975)의 후성규칙이라는 개념을 이용해 인간 본성이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상호 작용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학습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저자는 학습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런 내용은 저자가 통섭을 포함해 다른 저서에서 주장한 것과 대동소이하며 다른 학자들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했기에 특별히 새로운 주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 규칙에 근거해 저자는 유전자-문화 공진화를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은연중에 문화적 측면을 더 강조한다는 점에서 도킨스를 비롯한 다른 생물학자와 차별화된다. 사회생물학자로서 당연한 입장 표명으로 보인다.

 

그런데 저자에게 문화 또한 진화적 과정의 산물이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학자들은 뇌가 빈서판이라는 개념을 버린 지 오래다. 문화의 모든 것이 학습을 통해 뇌에 새겨진다는 이 낡은 관점은 진화가 일군 것이 오로지 장기 기억 용량을 토대로 한 비범한 학습 능력뿐이라고 본다. 지금은 다른 관점이 우세하다. 뇌가 선천적으로 복잡한 구조라는 것이다. 뇌가 구축하는 방식의 한 결과물, 즉 그 구조의 한 산물인 의식적인 마음은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의 복잡한 상호 작용인 유전자-문화 공진화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266)

   

이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복잡한 문화의 문턱까지 밀고 간 추진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집단 선택이었을 것이다. 서로의 의도를 읽고 협력하는 한편, 경쟁하는 집단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구성원들을 지닌 집단은 그것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집단보다 엄청난 이점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집단 구성원들 사이의 경쟁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 그 경쟁은 한 개인을 남보다 유리하게 만드는 형질의 자연선택으로 이어졌다.”(273)

 

이제 저자가 이 책에서 무엇을 주장하고자 했는지 감이 온다. 인간은 매우 희귀하게 진화 과정에서 진사회성을 획득한 동물로서 일련의 정교한 선적응 과정을 통해서 그런 위치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개체 수준의 자연선택(이기심에 기반을 둠)과 집단 수준의 자연선택(이타심에 기반을 둠) 간의 상호작용이었다. 개체 수준의 자연선택은 유전자의 영향을 많이 받는 반면 집단 수준의 자연선택은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컨대 협력을 생각해 보라. 주변 사람들이 대체로 협력하는 문화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협력하는 성향을 개발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많아지면 협력하는 성향이 문화의 특성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개인적으로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째 의문은 유전자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필자가 아는 바에 의하면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인간 DNA를 구성하는 대략 3억 개의 염기 서열이 완벽하게 해독되었다. 주지하다시피 DNA는 네 가지 염기(A, C, G, T)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세 가지 염기가 무작위로 배열되어 아미노산 합성에 관여하는 t-RNA(전령 RNA)로 전사되며 이것을 코돈(codon)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DNA의 기본 역할은 아미노산과 단백질을 합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이것이 인간의 유전자가 수행하는 모든 역할인가? 인간의 다른 속성들은 유전자와 어떤 관계인가? 예컨대 인간의 눈 색깔이나 피부색 등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될 것이나 다른 속성들은 어떠한가?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특성들은 다양한데 이것들은 유전자와 무슨 관계인가? 생물학자 루퍼트 셸드레이크가 주장하듯이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유전자에 관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이 거의 없다는 말이 맞는 것인가? 우리가 유전자에 관해 모두 알게 되어도 인간의 본성에 관해 얻는 지식이 별로 없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정신적인 측면은 유전자와 전적으로 무관한 것인가?

 

다음으로 도킨스가 말하는 문화적 유전자(meme)는 진사회성과 어떤 관계인가? 혈연 선택을 근간으로 이기적 유전자를 주장했던 도킨스는 윌슨이 혈연 선택을 버리고 다수준 선택을 주장한 것에 대해 격하게 반응했다고 한다. 윌슨도 이 책에서 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필자는 문화적 유전자라는 개념이 과학적으로 적절한 근거가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예컨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모방은 중요한 밈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밈을 통해 유전되는 속성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밈이 DNA와 무관하다면 밈을 통해 전해지는 문화적 속성은 무엇을 매개로 하는지 궁금하다. 만약 밈이 인간의 의식을 매개로 전승되고 전파된다면 전 세대의 의식과 현 세대의 의식 간에는 무슨 연결고리가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밈과 유전자-문화 공진화 현상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같은데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저자는 왜 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이런 일련의 우매한 질문에 전문가가 현명한 답을 줄 것을 기대한다.

 

한편 유전자-문화 공진화에 대해 반박하는 사람들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다음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성급하게 판단(공진화를 부정하는 태도를 말함)을 내리는 이유는 유전자와 문화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규정하는 것, 혹은 규정하는 데 기여하는 것은 어떤 형질이냐, 또는 상반되는 저 형질이냐가 아니라, 형질들의 빈도와 문화적 혁신으로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형질들이 이루는 패턴이다. 유전자의 발현은 가소성을 띨 수 있으며, 그럴 때 한 사회는 여러 대안 중에서 하나 이상의 형질을 고를 수 있다.”(290) 여기서 공진화에서 중요한 것은 유전자 발현의 가소성과 형질들이 이루는 패턴이라고 말한다. 유전자 가소성은 유전자 스위치가 환경에 따라서 켜지거나 꺼지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해가 간다. 그런데 형질들이 이루는 패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세 가지 큰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

이 책을 시작하면서 밝힌 세 가지 큰 질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저자는 나름대로 설득력 있게 답을 제시하려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저자의 설명이 충분한 대답이 되었는지 확신이 안 간다. 진화적 적응 과정을 바탕으로 하면서 인간이 진사회성이라는 희소한 특성을 획득하게 된 과정을 이해하는 것으로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다양한 영역에서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인간 본성에 대해 논한다. 그래서 저자는 문화적 차이의 진화, 도덕의 기원, 종교의 기원, 창작과 예술의 기원 등과 관련된 여러 가지 쟁점들에 대해 상세히 논하고 있다. 하나하나 가벼운 주제가 아님에도 저자는 일관되게 진화론의 관점에서, 나아가 진사회성을 획득하는 데 중요했던 집단 선택의 논리를 바탕으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 한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요약한다: 인간 본성은 진화할 수 있었던 엄청난 수의 가능한 본성 중 하나일 뿐이다. 우리가 지닌 본성은 우리를 낳은 유전적 조상들이 수백만 년에 걸쳐 해쳐 온 있을 법하지 않은 경로의 산물이다. 인간 본성을 진화사적 궤적의 산물이라고 볼 때, 비로소 우리가 가진 감각과 생각의 궁극 원인이 드러난다. 근접 원인과 궁극 원인을 결합시켜야만 우리는 자기 이해를 이룰 열쇠를 얻을 수 있다.”(297)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우리는 어떤 필연적인 이유로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 과정에서 우연히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수준 선택을 통해 현재의 인간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저자는 무엇이라 말하는가? 이 부분은 다소 모호하다.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명확하지 않다. 단지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저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삶은 두 가지 생물학 법칙에 속박되어 있다. 삶의 모든 실체와 과정이 물리학과 화학의 법칙에 따른다는 것, 삶의 모든 실체와 과정이 자연 선택을 통해서 진화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물질적 존재 양식을 더 많이 알수록, 가장 복잡한 형태의 인간 행동조차 궁극적으로 생물학적인 것임이 더 명백해진다. 그 행동들은 우리 영장류 조상들에게서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한 형질들을 드러낸다.”(352)

 

저자의 주장은 더도 덜도 아니라 온전하게 진화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리고는 이에 입각해 인류의 미래를 전망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결국 지구상에 우연히 등장한 진사회성을 획득한 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최종 진리인가? 종교를 신봉하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과학을 신뢰하는 사람들 중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결론에 대해서는 유보적일 것으로 생각한다. 진화론이 생명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설명해주는 만물의 이론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안 이론은 무엇인가? 이것은 아직도 열린 질문이다. 우리 모두 답을 구하기 위해 협력해야 할 시점이다. 그리고 이런 협력은 진정 우리가 획득한 진사회성의 가장 빛나는 모습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인간은 과연 지구의 정복자인가? 현재 인간 존재의 위상으로 본다면 정복자로 군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략 12천 년 전 마지막 빙하기를 살아남은 인간은 결국 지구 전역으로 퍼져나가 자연을 공략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해 왔으며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종들을 멸종에 이르게 했다. 자연을 지배하는 힘이라는 물리적 측면에서 보면 인간은 지구의 정복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스티븐 제이 굴드가 풀하우스에서 무게로 말하면 지구상에서 가장 무거운 종은 나무였는데 이제는 박테리아로 바뀌었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간의 몸무게를 모두 더해도 지구상의 박테리아 전체의 무게에 못 미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과연 지구의 정복자라 할 수 있을까? 진화가 일정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면 무게가 가장 많은 나가는 종이 보존과 번식에 성공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구의 정복자는 박테리아가 아닌가? 이것은 한 번쯤 인간 존재의 위상을 되돌아보자고 한 말이니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진화란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는 자연적 과정이다. 진화의 달력에서 몇 만 년은 흔적도 없는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 그런데 인간이 압도적인 힘으로 지구 곳곳을 점령하기 시작한 것은 길어야 만 년이고 짧게는 수백 년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찌 정복자라는 명칭을 부여할 수 있는가? 인간은 그저 짧은 기간 동안 자연을 정복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다가 멸종될지도 모르는 종은 아닌가? 유발 하라리도 사피엔스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인간은 지구의 정복자가 아니라 지구의 파괴자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이제는 지구의 파괴자에서 지구의 치유자로 거듭나야 할 시점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저자인 윌슨 교수도 이런 생각을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참조 사항>

유튜브에서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강연이나 인터뷰 동영상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필자 생각에 윌슨 교수가 연로해서인지 대부분 그의 말을 알아듣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에는 윌슨 교수가 쓴 인간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동영상을 수록했다. 이 동영상에서는 윌슨 교수가 직접 설명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 주제에 관해 대신 설명하고 있는데 비교적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여기 수록한 것이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기 바란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