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 분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Der Teil und das Ganze)』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6-09-28 10:35
조회
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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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역자: 유영미

출판사: 서커스(2016)

 

목차 

1. 원자 이론과의 첫 만남(1919~1920)

2. 물리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다(1920)

3. 현대 물리학의 ‘이해’라는 개념(1920~1922)

4. 정치와 역사에 대한 교훈(1922~1924)

5. 양자역학과 아인슈타인과의 대화(1925~1926)

6. 신대륙으로 떠나는 길(1926~1927)

7. 자연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첫 번째 대화(1927)

8. 원자물리학과 실용주의적 사고방식(1929)

9. 생물학, 물리학, 화학의 관계에 대한 대화(1930~1932)

10. 양자역학과 칸트철학(1930~1932)

11. 언어에 대한 대화(1933)

12. 혁명과 대학 생활(1933)

13. 원자 기술의 가능성과 소립자에 대한 토론(1935~1937)

14. 정치적 파국에서의 개인의 행동(1937~1941)

15. 새로운 시작을 향해(1941~1945)

16. 과학자의 책임(1945~1950)

17. 실증주의, 형이상학, 종교(1952)

18. 정치적 논쟁과 과학적 논쟁(1956~1957)

19. 통일장 이론(1957~1958)

20. 소립자와 플라톤 철학(1961~1965)

 

 

<북 리뷰: 진정한 대화의 정수(精髓)를 보여주는 책> 

★ 저자와 주요 대화 상대들에 대하여

이 책은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자신의 일생에 대한 회고록의 성격을 갖는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01~1976)가 자신의 일생을 여러 기간으로 나눈 뒤 각 기간 중 원자물리학을 공부하는 학자로서 몰입했던 주제와 관련해 당시 여러 학자 및 지인들과의 대화 내용 중 기억나는 것, 그리고 이들과 주고받은 서신의 내용을 바탕으로 완성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다른 책과는 다른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겠다.

 

하이젠베르크는 누구인가? 1901년 생으로 1923년 아놀드 좀머펠트를 지도교수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25년 행렬역학(matrix mechanism)을, 1927년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를 발견하였고, 1932년 약관 31세의 나이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으니 대단한 천재임에 틀림없다. 아마 물리학에 정통하지 않은 사람도 그의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그의 불확정성 원리는 물리학에서만이 아니라 경제학을 포함해 사회과학에서도 종종 인용되기 때문이다. 이 원리에 대해서는 뒤에서 조금 더 상세히 논의하려고 한다. 이 원리는 물리법칙의 영역을 넘어 인간의 이성 내지 의식 작용과 관련해 심오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리학에 정통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하이젠베르크가 이룩한 놀라운 업적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원자물리학이나 양자역학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주변 사람들과 나눈 수준 높은 대화이다. 이에 매료되었기에 여기서는 주로 이들이 나눈 대화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에 앞서 이 책에서 저자가 양자역학을 포함해 여러 가지 이슈들에 대해 논의하고, 때로는 격렬하게 논쟁하기도 했던 주요 인사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막스 플랑크(1858~1947),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 막스 보른(1882~1970), 닐스 보어(1885~1962), 에르빈 슈뢰딩거(1887~1961), 볼프강 파울리(1900~1958), 폴 디랙(1902~1984) 

 

여기 언급한 사람들은 모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으며 아인슈타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양자역학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사실 아인슈타인 자신도 1905년 "광전효과(photoelectric effect)“를 다룬 논문을 통해 양자 가설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지만 끝까지 닐스 보어를 중심으로 한 양자역학의 해석―코펜하겐 해석이라 불린다―에 대해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God does not play dice)"는 아인슈타인의 말은 이런 그의 완고한 반대 입장을 대변한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책에서 이런 아인슈타인의 입장에 대해 상세히 다루었다. 

 

그리고 이들 외에도 하이젠베르크는 다른 전공 분야의 동료, 후배 및 제자들과의 대화에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 책은 그야말로 한 세기를 풍미했던 물리학의 거장들과 나누었던 대화를 중심으로 한 비공식적인 역사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크라테스 이래 유럽 사회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대화를 통한 학문적·인격적 교류의 전통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왜 우리에게는 이런 전통이 없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사실 이 책을 통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의 탄생 과정에 대한 여러 가지 비화나 상세한 내용을 접하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필자의 얄팍한 지식으로는 닐스 보어와의 대화 과정에서 확인된 양자역학의 문제점을 가지고 고민하다가 하이젠베르크는 행렬역학이라는 수학적 방법론을 고안해 문제를 해결해 양자역학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양자역학의 수학적 구조에 대해서는 필자가 논할 처지가 아니므로 이 원리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나 이 원리가 시사하는 바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와 관련해 별다른 언급이 없기에 다소 무모하지만 이 원리가 양자역학의 영역을 넘어서 갖는 의미와 관련해 필자의 소견을 이야기하려 한다. 

 

★ 진정한 대화란 무엇인가: 닐스 보어와의 대화를 중심으로 

목차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저자가 시기별로 학문적으로나 일상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여러 사람들과 나눈 대화 내용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저자가 20세 안팎의 청년으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심취하면서 원자물리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던 때부터 현역에서 은퇴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던 말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여러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마치 이들의 대화 현장을 엿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를 통해 한 개인, 나아가 한 시대의 과학정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대화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이런 수준의 대화이다.

 

저자는 시기별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고, 함께 산책하기도 하고 여행도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런 대화를 통해 자신의 학문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면에서도 상당히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생을 통해 교류했던 덴마크의 닐스 보어와의 대화는 저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보어는 저자의 멘토이자 동료이며 평생 우정을 나눈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계는 지극히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과학 저술가 데이비드 린들리는 『불확정성』(2009)에서 닐스 보어 부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두 사람의 관계가 그다지 원만하지는 않았던 것처럼 묘사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한 후 원자폭탄 개발과 관련해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사이에 약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필자는 이들 관계는 전반적으로 우호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의 첫 만남은 우연히 이루어졌다. 1922년 초여름 하이젠베르크의 지도교수인 조머펠트 교수는 보어의 괴팅겐 강연에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참석하였다. 이때 보어와의 만남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보어는 그 이의(異意)에 대해 약간 마음이 혼란스러워진 듯, 머뭇거리며 대답을 했고, 토론이 끝난 뒤 내게 다가와 오후에 함께 하인베르크 산을 산책하며 내가 제기한 문제들을 더 상세히 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이 산책은 이후의 나의 과학에 너무나도 강력한 영향을 행사했다. 아니 나의 과학은 비로소 이 산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당할 것이다.”(68쪽) 

 

이 강연에서 보어를 처음 만난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와의 공동 연구를 통해 양자역학의 기본 틀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 둘의 만남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하겠다. 이 대목은 하이젠베르크에게 보어와의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었는지 보여준다. 보어가 192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기 직전에 이루어진 강연이지만 이미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이제 막 물리학을 전공하기 시작한 학생에 불과한 하이젠베르크와 격의 없이 토론하는 보어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만남을 계기로 하이젠베르크는 훗날 코펜하겐의 보어 연구소에서 같이 일하게 된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상황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도 발생한다. 1926년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 분야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쌓았기에 당시 물리학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베를린 대학에서 주관하는 물리학 콜로키움에서 양자역학의 최신 동향에 대해 강연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때 아인슈타인을 처음 만난 하이젠베르크는 그와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콜로키움이 끝나자 아인슈타인은 나에게 함께 자신의 집으로 가서 새로운 생각들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아인슈타인은 내가 공부해온 과정과 지금까지 물리학에서 어느 부분에 관심을 가졌는지 물었다.......“당신이 소개한 내용은 범상치 않게 들려요. 당신은 원자 속에 전자가 있다고 보고 있어요. 그 점은 물론 옳겠지요. 하지만 원자 속의 전자궤도는 폐지하려고 해요. 전자궤도를 안개상자 속에서 직접 볼 수 있는데도 말이에요. 왜 그렇게 이상하게 보게 되었는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어요?”(108쪽) 

 

이 무렵 아인슈타인은 이미 1921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으며 상대성이론으로 세계적인 인물이 되어있었다. 그런 그가 막스 보른의 배려로 이제 막 괴팅겐 대학의 강사가 된 신출내기 물리학자에게 격의 없이 다가와 관심사를 논하였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여기에는 어떤 권위도 과시도 없다. 아인슈타인이 늘 강조했던 “순수한 호기심”만이 중요했던 것이리라. 이런 대화를 접하면 왜 우리에게는 이런 전통이 없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군사부(君師父) 일체와 같은 유교적 원리가 여전히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한 가지 원인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가 소개한 양자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데이비드 봄(David Bohm)의 저서 『창조적 대화론』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봄은 진정한 대화를 위한 기본 태도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편견이나 가정을 유보하고 상대방의 말에 집중해야 한다는 원칙은 깊이 새길 만하다. 

 

하이젠베르크는 이외에도 여러 사람과의 인간적 교류 및 대화를 통해 자신의 학문적 입지를 공공이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사람은 볼프강 파울리와 막스 플랑크이다. 볼프강 파울리는 하이젠베르크보다 한 살 연상인데, 지도교수였던 조머펠트 교수가 수업 시간에 소개해 준 이후 그가 1958년 갑자기 병사하기 전까지 양자역학 관련 문제뿐만 아니라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때로는 치열하게 논쟁하고 때로는 감성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평생의 지기였다. 

 

막스 플랑크는 당시 독일 물리학계의 대부나 다름없는 원로였다. 일찍이 아인슈타인의 재능을 알아보고 유력한 물리학회지에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도록 도와줌으로써 무명의 아인슈타인을 일약 스타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기도 했다. 플랑크는 그 정도로 열린 마음을 가졌던 학자였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하이젠베르크는 히틀러 치하에서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시절 미국으로의 이주와 독일 잔류를 고민하던 상황에서 플랑크의 조언을 듣고 독일 잔류를 선택하였다. 이런 점에서 플랑크도 하이젠베르크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다. 

 

독일 잔류를 선택함으로써 하이젠베르크는 어쩔 수 없이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에 관여하게 된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독일이 막대한 개발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빠른 기간 내에 원자폭탄을 개발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기에 적당한 선에서 이 작업에 참여했던 것이다. 이런 전력으로 인해 2차 대전 후 몇 달간 동료 과학자들과 영국에 억류되기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전쟁에 가담한 어떤 혐의도 없었기에 다시 독일로 돌아와 전후 독일의 물리학계를 재건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이것이 바로 하이젠베르크가 장차 있을지 모르는 고초를 각오하면서까지 독일에 잔류하기로 결정했던 이유였던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이런 소회(所懷)는 다음 표현에 잘 드러나 있다: “이성적 사고를 교육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사안이지요. 이런 사고에 다시금 비중을 두는 것은 전쟁 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일 테고요. 원래 지금까지의 전쟁 상황만으로도 독일인들은 현실에 대한 눈을 떴어야 해요........그러나 우리에게는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사고가 어렵습니다. 똑똑한 사람도 많지만 민족 전체로서는 꿈속을 헤매며, 환상을 지성보다 더 높이 평가하고, 감정을 사고보다 더 심오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요. 그러므로 과학적인 사고에 다시금 더 많은 비중을 두는 일이 시급해요. 전쟁 뒤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그렇게 해야 해요.“(302쪽) 이런 점에 비추어 하이젠베르크는 단지 대단한 물리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학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은 인생에서 멘토의 중요성이다. 하이젠베르크에게 멘토는 닐스 보어였다. 1922년 처음 만나 보어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두 사람 간의 학문적 교류, 대화 및 우정은 특별한 데가 있다. 두 사람은 16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은 물론이고 종교, 철학, 예술, 운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자주 회동하고 같이 보어의 저택이나 산장에 머물면서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하이젠베르크가 보어와의 대화를 회상하는 대목은 아인슈타인과의 대화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물론 보어와 학문적으로 더 가까웠던 이유도 있겠지만 보어라는 사람 자체가 상당히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보어 연구소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었던 것이리라. 과학자 이전에 인격자, 이것이 보어의 참모습이었던 것이다. 

 

하이젠베르크가 보어와 나눈 대화 가운데 양자역학과 관련된 부분을 제외하고 필자에게 가장 의미 있게 느껴진 부분은 진화론의 두 번째 원리인 무작위적인 변이, 즉 돌연변이와 양자역학의 관련성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 원리는 물론 자연선택이다. 하이젠베르크는 보어가 생명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한다: ”우선 확실히 해야 할 것은 유기체는 총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고전물리학의 대상인, 많은 원자로 이루어진 단순한 계는 이런 총체성을 결코 가질 수 없어요.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기존의 물리학이 아니라 양자역학을 이야기해야 해요. 원자나 분자의 정상상태와 같이 양자론에서 수학적으로 묘사되는 총체적 구조들과 생물학적 과정의 결과로 나타나는 상태를 비교해야 돼요. 이 둘 사이에도 특징적인 차이가 있어요.“(184쪽) 

 

보어의 이 말은 유기체의 특성은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으로 들린다. 이 해석이 맞는다면 에르빈 슈뢰딩거가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생명의 양자적 기반에 대해 논한 것보다 보어의 견해가 시기적으로 앞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대화가 이루어진 시점이 1930~1932 기간 중인 반면 슈뢰딩거가 앞의 제목으로 강연한 것이 1943년이니 더욱 그런 심증이 든다. 그렇지만 누가 먼저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시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를 포함해 양자역학의 최첨단에 있던 학자들은 생명과 양자역학의 관계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이런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수십 년을 앞선 통찰이다. 

 

또한 돌연변이에 관해서 보어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한다: ”그것은 단순히 시간 척도의 문제일 거예요. 오늘날 다윈 이론은 두 가지 독립적인 진술을 내용으로 해요.(첫 번째는 자연선택에 관한 것임)........그러나 두 번째로 다윈주의는 새로운 형태는 유전자의 우연적인 변화를 통해 생겨난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두 번째 명제는 훨씬 문제의 소지가 있어요. 달리 어떻게 될 것인지는 상상하기가 힘들어도 말이에요. 노이만(수학자 폰 노이만을 지칭함)이 말하고자 한 것은 이거예요. 충분한 세월이 흐르고 거의 모든 것이 우연을 통해 생겨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결국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을 허무맹랑한 오랜 세월이 필요하리라는 것!”(190쪽)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진화론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중요한 논거로 제시하는 부분이다. 생명의 기원과 종의 기원을 우연으로 설명하기에는 지구의 역사가 너무 짧다는 것이다. 즉 생명의 탄생, 그리고 이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종의 탄생의 원동력으로서 무작위적인 돌연변이가 실제로 유효하려면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이 보어의 추론이다. 과연 지구의 나이는 돌연변이를 통해 수많은 새로운 종을 진화시킬 정도로 충분히 오래되었나? 그 당시에 보어가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외에도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와의 대화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진정 주목할 만한 대화의 전형(典型)이다. 

 

★ 불확정성 원리와 의식 문제, 그리고 이성의 한계 

필자는 물리학자는 아니지만 경제학에서 불확실성, 위험 및 정보의 문제에 관해 나름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사람으로서 순수한 호기심 차원에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선 위키피디아의 해설에 입각해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 간단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원리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물을 관찰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사물을 때리고 반사한 빛을 보는 것이다. 빛이 없으면 관찰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따라서 물질의 기본 단위인 원자(및 전자와 같은 소립자)를 관찰하려면 빛, 즉 광자(photon)를 발사한 후 원자를 때리고 반사하는 광자를 관찰해야 한다. 이때 빛에 얻어맞은 원자는 그 충격으로 엉뚱한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현상을 막으려면 원자를 최대한 살살 때려야 한다. 가능한 최소한의 빛, 즉 광자 하나로 떼려야 한다. 이때 빛의 파장에 따라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같은 물리량을 측정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한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다. 이것을 수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x·△ph/2 

(x는 입자의 위치에 관한 표준편차, p 운동량의 크기에 관한 표준편차를 나내며, h는 디랙 상수로서 변형된 플랑크 상수에 해당한다. h = h/2π이므로 이 부등식은 x·△ph/4π로 나타낼 수도 있다. 플랑크 상수 h는 입자의 에너지와 드브로이의 진동수의 비, h = E/f로서 6.62606957×10-34J·s에 해당하는 작은 숫자다.)

 

원자와 같은 입자에 관한 정보는 두 가지 물리량, 즉 위치와 운동량(또는 속도, 운동량=속도×질량이므로)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 이 두 가지 물리량을 동시에 측정하는 경우 이 부등식이 나타내는 오차의 한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입자를 한 번 관찰해서 얻은 결과가 아니라 많은 관찰을 해서 얻은 통계적·확률적 해석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확률적 해석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부등식에 의하면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하고자 하면 할수록 운동량에 대해서는 점점 더 불확실한 정보밖에 얻을 수 없으며, 반대로 운동량을 정확하게 측정하고자 하면 할수록 위치에 대해서는 더욱 불확실한 정보밖에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앞의 식을 이용해 말하자면 x를 줄이면 위치를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표준편차가 작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평균값의 주변으로 몰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경우 p 커질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운동량은 더욱 모호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운동량의 측정값은 평균치를 중심으로 더욱 퍼지게 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한계는 어떤 정교한 관측 장비를 사용하더라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밝혔듯이 필자가 비전공자로서 무모하게 이 원리를 언급하는 이유는 물리적 관점에서 뭔가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원리가 인간의 의식 작용 나아가 이성적 사유의 한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보기 위해서이다. 필자가 이해하는 한 불확정성 원리는 사물의 실재(reality)에 대한 이해는 관찰자의 의도(무엇을 측정할 것인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리적 입자의 실재는 위치와 운동량 같은 속성을 통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입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정보를 얻기 위해 아무리 정교한 관측 기기를 활용한다고 해도 하이젠베르크가 밝힌 오차 한계를 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입자의 실재에 접근하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그리고 하이젠베르크는 이 원리가 입자만이 아니라 상보적 관계에 있는 모든 대상에 적용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원리를 발견하기 전에 어떤 것도 정리되지 않아 고민하고 있다가 우연히 아인슈타인과의 대화 내용을 떠올리면서 상당한 통찰을 얻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자정 무렵, 아인슈타인과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하는 가운데 갑자기 아인슈타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론이 비로소 무엇을 관찰할 수 있을지를 결정한다.’ 나는 곧 오랫동안 막혀 있었던 문의 열쇠를 이 지점에서 찾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132쪽) 

 

그러면서 그는 당시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양자역학에서 한 전자(電子)가 대략적으로―즉 어느 정도 부정확하게―주어진 위치에 놓여 있는 동시에, 대략적으로―즉 어느 정도 부정확하게―주어진 속도를 갖는 상황을 묘사할 수 있을까? 이런 부정확성을 최소화하는 실험 결과와도 모순을 빚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연구소로 돌아와 잠시 계산을 해보니 그런 상황을 수학적으로 묘사할 수 있고, 그런 부정확성에 대해 훗날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라 불리게 되는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확정성의 특징을 갖는 위치와 운동량(운동량은 질량과 속도의 곱이다)의 곱은 플랑크의 작용양자보다 작을 수 없다.”(133쪽) 이 대목은 이 원리를 발견한 하이젠베르크의 당시 심경을 담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원리를 발견한 이후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의 상보성 원리와 이 원리와의 관계에 대해 다소 의견의 불일치가 있었지만 다른 물리학자의 도움을 받아 불확정성 원리와 상보성 원리가 별 차이가 없다는 데 동의하게 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불확정성 원리는 상보성 원리의 다른 명칭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상보적 관계에 있는 대상들의 경우에는 항상 이 원리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다른 방식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연구 방식도 상보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경제학에서는 “uncertainty”를 불확실성이라 번역한다. 물리학에서는 이것과 구분하기 위해 일부러 불확정성이라 명명했다고 본다. 경제학에서 불확실성은 “진정한 상태(true state)”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정보가 완전하다면 불확실성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확실해지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 진정한 상태를 측정하려 해도 측정 자체의 특성으로 인해 완전한 정보를 얻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관찰 행위 및 이에 입각한 이성적 사유에는 근원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피할 수 없는 한계라는 것이 바로 이 원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이 점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불확실성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불확실성은 정보가 완전하면 제거할 수 있지만 하이젠베르크가 말하는 불확정성은 어떤 경우에도 피할 길이 없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이 원리와 관련되어 있으면서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는 하이젠베르크의 다른 면모를 보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하이젠베르크가 인간 의식에 대해 언급한 대목인데 불확정성 원리가 관찰자의 의식적인 관찰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이젠베르크는 당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했는데 필자로서는 놀라울 뿐이다: “양자론을 확장할 필요성이 있다는 견해를 위해 때때로 인용되는 또 하나의 논지는 바로 인간 의식의 존재입니다. 물론 물리학, 화학에서는 ‘의식’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지요. 양자역학이 그와 비슷한 것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살아 있는 유기체도 포괄하는 자연과학에서는 의식에도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현실에 속하니까 말이죠.”(191쪽) 이것은 정말 대단한 내용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젠베르크는 물리학에서 의식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처음 지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이어지는 대화에서 보어도 하이젠베르크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주제와 관련해 보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제는 현실의 일부인 의식이 물리학, 화학이 묘사하는 다른 것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거예요. 이런 두 부분에서의 법칙이 어떻게 갈등을 빚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런 상황은 상보성이 진정으로 들어맞는 경우가 틀림없어요. 물론 훗날 생물학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 그런 상황을 세부적으로 더 자세히 분석해야겠지요.“(192쪽) 

 

이것 또한 대단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상보성 원리를 적용해 객관적인 실재(관찰 대상)와 주관적인 실재(의식)를 통합하는 시도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이젠베르크가 이 책의 제목을 ”부분과 전체“라고 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관찰 대상(부분)은 결코 관찰자와 구분할 수 없기에 전체의 관점, 즉 물리학자 존 휠러(John Wheeler)가 말한 ”참여하는 우주(participatory universe)“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제목을 채택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달리 말하면 사물을 관찰할 때 국소성(locality)과 비국소성(non-locality)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저자의 깊은 뜻을 모르니 추측할 뿐이다. 

 

이와 같이 불확정성 원리는 관찰자가 의식적으로 대상을 관찰하는 경우 피할 수 없는 한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물리적 현상에 대한 측정의 한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 작용, 즉 이성의 한계를 상징하는 원리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자 다카하시 쇼이치로가 『이성의 한계(2009)』에서 인간 이성의 궁극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세 가지 원리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Kenneth Arrow)의 불가능성 정리(Impossibility theorem), 그리고 쿠르트 괴델(Kurt Godel)의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em)를 지적한 것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이성적인 존재로서 우리는 이성의 극한에 도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거기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점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이면 누구나 범하기 쉬운 함정인 오만과 독선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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