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프 코흐의 《의식(Consciousness)》
저자: 크리스토프 코흐(Christof Koch)
역자: 이정진
출판사: 알마(2014)
차례
1장 의식을 향한 출발
2장 개인적인 이야기
3장 의식 문제의 정의
4장 실험실에서의 의식
5장 임상에서의 의식
6장 무의식
7장 자유의지와 뇌
8장 정보 통합과 뇌
9장 새로운 지평을 향해
10장 마지막 문제
■ 저자 소개/환원주의에 대한 반성
크리스토프 코흐는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에서 생물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뇌와 의식의 관계를 연구해온 이 분야를 대표하는 학자다. 코흐는 학위를 받은 후 MIT에서 박사 후 연구과정을 이수했고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교수로 근무했다. 그 후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설립자인 폴 앨런(Paul Allen)이 출연해 설립한 비영리법인인 《Allen Institute for Brain Science》의 최고과학책임자로 선임되어 뇌와 관련된 각종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그리고 의식과 관련해 그가 행한 강연 동영상 다수를 유튜브에서 감상할 수 있는데 이런 강연을 통해 그가 이 분야에서 매우 비중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코흐가 의식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DNA 이중나선의 공동 발견자 중 한 사람인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와 공동 연구를 하면서부터다. 크릭은 분자생물학 분야에서 이룬 업적으로 바탕으로 1980년대 중반부터는 신경생물학 분야의 연구에 매진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뇌와 의식의 관계였다. 이런 의미에서 크릭은 생명과 의식이라는 중요한 두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셈이다. 크릭이 당시 젊은 과학자 코흐를 공동 연구자로 선택하게 된 배경에는 자신과 같이 물리학 학위를 받았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코흐는 1980년대 말부터 크릭이 작고한 2004년까지 약 10여 년 간 크릭과 함께 공동 연구를 통해 의식 문제를 과학 분야의 주요 연구 과제로 격상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당시 과학계의 분위기는 의식 문제는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주제였기에 주로 철학자들의 논의의 대상이었다. 의식 문제를 주요 과제로 다루어야 하는 심리학에서조차 행동주의 심리학의 영향 탓인지 의식 문제는 사실상 무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크릭과 코흐는 “의식의 신경상관물(neural correlates of consciousness)”이라는 개념을 정립함으로써 뇌과학의 관점에서 의식 문제를 다루는 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이 책은 낭만적 환원주의자의 고백(confession of a romantic reductionist)라는 조금은 특별한 부제를 갖고 있다. 이는 동료 신경과학자가 저자의 학문적 성향을 재치 있게 표현한 것으로서 저자는 이를 그대로 수용해 이 책의 부제로 정했다. 우선 저자는 뇌의 여러 부위들의 기능을 통해 의식 문제에 접근한다는 점에서 분명 환원주의자다. 그런데 동시에 저자의 표현대로 뇌의 기능을 철저히 분석해도 의식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낭만주의자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저자가 과학적 물질주의 너머에 뭔가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신비감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각각 수만 개의 시냅스를 지닌 수십억의 자그마한 신경세포가 일으키는 끊임없고 항상 다른 활동에서 의식에 대한 계량적인 설명을 찾기 때문에, 나는 환원주의자다. 또한 우주가 우리 위의 하늘과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서 판독할 수 없는 끝없는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낭만적이다. 우주 진화라는 범위에서 의미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개별 유기체의 삶에서도 그러한 것은 아니다.”(28쪽)
저자의 이런 학문적 입장에 주목하는 이유는 필자 또한 이런 태도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재 주류 과학계는 환원주의적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이 방법을 적용한 결과 우주에는 근본적으로 물질과 에너지 외에는 없으며 모든 현상은 이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의식도 이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한 부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환원주의적 방법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점점 많이 관찰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가 보기에 더 이상 이런 이례적인 현상들을 무시하기 어렵다. 이는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시시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주에는 뭔가 신비로운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반드시 초자연적 현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기존의 방법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현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일찍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명언을 남겼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비로운 것이다. 그것은 모든 참된 예술과 과학의 근원이다(The most beautiful thing we can experience is the mysterious. It is the source of all true art and science).”
저자가 자신을 낭만적 환원주의자임을 인정한 것은 아인슈타인이 말한 의미에서 신비감을 잃지 않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우주만물을 그 기본적인 구성 요소로 환원해 철저히 분석한다고 해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뭔가가 존재한다는 입장이다. 필자도 이제는 주류 과학계도 이런 개방된 입장을 표방해야 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다. 과학의 기존 패러다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환원주의를 폐기할 것을 강조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환원주의에 한계가 있는 것일 뿐 그동안 과학발전에 기여한 바를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방법론은 환원주의와 이에 대극적인 전일주의(holism)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는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복잡계 이론의 기본 원칙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며 동양과 서양의 방법론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직은 모호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조화와 통합을 통해 과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가장 객관적인 방법임을 다시 한 번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저자가 보여주는 학문적 입장은 이런 경로를 따르고 있는 것 같아 필자는 의식 문제에 대한 그의 연구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 의식의 본질: 감각질이란 무엇인가?
의식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의식의 본질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의식에 대한 정의는 실로 다양하다. 각 분야의 필요에 따라 의식을 달리 정의해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중에서 의식에 대한 네 가지 다른 정의를 소개하고 있다. 상식적인 정의, 의료계의 정의, 신경과학계의 정의 및 철학계의 정의가 그것이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정의해 사용해 왔기에 이들 간에 공통점을 발견하기 어려운 가운데 각자 관행적으로 이 개념을 사용해왔다. 그런데 의식을 어떻게 정의하더라도 공통적인 한 가지 요소는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주관적 체험, 즉 감각질(qualia)이라 불리는 것이다.
우선 가장 보편적인 관점에서 보면 의식은 “주변 환경과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알아차림의 상태(state of awareness)”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가장 보편적인 정의로서 여러 분야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즉 의식의 본질은 “알아차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알아차림에 이르는 과정에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감각기관을 통해 얻은 다양한 정보를 수용하고 저장한 후 필요할 때 이를 통합하는 기능, 그리고 적절한 운동 기능을 발휘하는 메커니즘에 관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신경세포를 통해 전달되는 전기·화학적인 신호가 어떻게 주관적인 체험, 즉 “뭔가와 같다는 느낌”으로 전환되는 메커니즘에 관한 것이다. 1995년 당시 젊은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는 전자를 의식의 쉬운 문제(easy problem), 후자를 의식의 어려운 문제(hard problem)라고 명명했으며 이를 계기로 의식 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의식의 쉬운 문제는 주로 감각기관을 통해 얻은 정보를 처리하고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능력과 관련된 것으로 앞으로 뇌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면 상당 부분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데이비드 차머스의 표현대로 이것도 사실은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반면 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주관적 체험, 즉 퀄리아(감각질)가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퀄리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qualia는 quale의 복수형이다. 특정한 경험을 할 때 느끼는 것이 그 경험의 특질, quale이다. 빨간색의 특질은 붉은 석양, 중국의 붉은 국기, 동맥혈, 루비를 볼 때처럼 이질적인 지각 대상에서 공통되는 것이다. 이 모든 주관적인 상태의 공통분모는 ‘붉음’이다......경험한다는 것은 감각질을 갖는다는 의미이며, 경험의 감각질은 그 경험을 특징짓고 다른 경험과 구별되게 한다.”(61쪽) 이런 감각질은 전적으로 1인칭 경험이기에 3인칭 경험처럼 객관적인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렇지만 저자는 “나는 감각질은 자연계의 속성이라고 믿는다. 이는 신성하거나 초월적인 근원을 지니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둘러싼 어떤 연구도 물리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필자가 보기에 저자는 환원주의의 기본 원칙에 충실하려는 입장을 포기할 의사는 없어 보인다. 비록 자신을 낭만적 환원주의자라고 일정한 선을 긋고 있지만 말이다.
이와 같이 철저한 일인칭 경험인 감각질은 본인이 아니면 설명할 수도, 평가할 수도 없다. 신경세포를 통해 전달되는 전기·화학적 신호들이 아직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결합해 이런 주관적인 체험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런 전환 과정을 밝힌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다. 심지어는 이 과정에서 뇌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주류 신경과학자들은 감각질을 물리법칙에 의해 설명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 반면, 일부 학자들은 이런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문제는 결국 의식은 뇌의 산물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다. 의식이 뇌의 산물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의식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말인가? 물리법칙의 한계를 넘어,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난 어떤 세계가 있으면서 의식적인 경험을 유발하는가? 이와 관련된 다양한 논의들이 혼재해 있지만 아직 어느 것도 객관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무튼 퀄리아는 의식 문제의 핵심이다.
■ 의식의 신경상관물의 의의와 문제점
저자가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의식 연구에 매진하면서 처음 세상에 내놓은 연구 성과는 이른바 “의식의 신경상관물”이라는 개념으로 요약된다. 당시 대부분의 학자들은 분야를 막론하고 의식 문제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에 있었다. 기껏해야 철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수많은 논쟁만 야기했을 뿐 어떤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즉 르네 데카르트가 17세기 중엽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면서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생각하는 자신”을 인정했을 때 이는 곧 “의식적인 존재”인 자신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데카르트가 의식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한 이래 의식에 대한 연구는 거의 진전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의식의 신경상관물 개념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은 크릭과 저자가 왜 신경상관물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저자는 신경상관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990년 초반 크릭과 나는 ‘의식의 신경상관물(NCC)’이라고 부르는 것에 집중했다. 우리는 이것을 특정한 의식적 지각을 위해 공통적으로 충분한 최소한의 신경 메커니즘이라고 정의했다,”(86쪽) 그러면서 저자는 최소를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뇌의 모든 부분이 관련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크릭과 저자가 신경상관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이들이 암묵적으로 뇌가 의식을 산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만약 특정한 신경세포들의 집단이 특정한 의식적 경험을 유발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즉 시간의 흐름상 이들 신경세포의 집단이 의식의 원천이라면 이들은 의식의 “신경원천(neural source)”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뇌의 특정 부위와 특정한 의식 경험이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점은 규명할 수 있었지만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크릭과 함께 신경상관물을 연구하면서 얻은 큰 수확은 뇌의 특정 부위는 의식과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소뇌는 대뇌피질의 네 배가 넘는 690억 개의 신경세포를 가지고 있지만 의식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말한다. 즉 의식의 신경상관물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프랜시스와 나는 의식의 신경상관물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는 대뇌피질 뒤쪽에 자리 잡은 고차원 영역과 앞쪽에 자리 잡은 전전두엽의 계획·의사결정 영역 간의 원거리 상호연결이라고 제시했다.”(89쪽) 이것은 이들이 밝혔으며 이후에 밝혀진 다양한 신경상관물의 일종에 해당된다. 기능성 MRI와 양전자단층촬영(PET) 및 뇌파검사기(EEG)와 같은 첨단 장비들이 개발됨에 따라 신경상관물에 대한 연구는 큰 진전을 보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왜 주관적 경험을 하게 되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 통합정보이론에서 범심론까지
저자는 1980년대 중반부터 프랜시스 크릭과 공동으로 의식의 신경상관물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으며 이들의 공동 연구는 2004년 크릭이 작고하면서 끝났다. 그런데 저자가 분명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저자는 의식의 원천으로서 신경상관물에 대한 연구에 한계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하나하나의 의식 상태에 대응하는 최소한의 신경세포들로 구성된 메커니즘을 찾아내는 작업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취할 수 있는 의식 상태의 개수에는 제한이 없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는 그야말로 방대한 작업이다. 게다가 사람에 따라 신경세포들로 구성된 네트워크가 달리 작동할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학회에만 만났던 폴커 헨이라는 신경학자가 자신에게 했던 질문에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뭔가 심경의 변화를 겪었던 것처럼 말한다. 폴커 헨이 한 질문은 의식의 주관성, 즉 퀄리아에 관한 것이었고 이는 차머스가 어려운 문제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헨의 질문에는 반드시 답해야 했다. 내 탐구의 종착점은 반드시 어떻게, 왜 물리적인 세상이 현상적 경험을 생성하기에 충분한지 설명하는 이론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이론은 모호해서도, 비현실적이어서도 안 되며, 반드시 확고하고 계량적이며 검증 가능해야 한다. 나는 정보이론이 제대로 수식화되고 정제된다면, 살아 있는 모든 창조물들의 신경 연결 구조를 분석하고 생명체가 경험하는 의식의 형태를 예측하는 대단한 재주를 보여줄 것이라고 믿는다.”(222쪽) 저자는 통합정보이론에서 현상적 경험, 즉 개개인에게 나타나는 주관적 경험을 유발하는 물리적 세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법칙을 발견할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의식의 신경상관물을 발견하고 이들 간의 관계를 규명하는 작업과 통합정보이론의 관점에서 의식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데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런데 저자는 자신의 멘토인 크릭의 유연한 학문적 태도를 이어 받았는지 이 점에 있어서 개방적이고 유연한 태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된 저자의 심정은 다음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지금껏 의식이 복잡한 신경계에서 발생했다는 생각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주관성은 물리적 기반에서 일어난 발현 현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눈 속 원추세포의 광수용체에서 일어나는 전기 활동이 파란색의 느낌을 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전기 활동과 파란색 감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감각은 뇌의 내면에 있는 것이고, 외부 세계에서는 유추할 수 없다. 반면, 전기활동은 외부 관찰자가 접근할 수 있는 객관적인 속성을 지닌다. 두 가지 다른 세계의 현상적 묘사는 물리학적 법칙이 아니 다른 법칙을 따른다.”(229쪽)
저자는 의식은 근본적으로 뇌의 산물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환원주의자다. 그렇지만 철저하게 물리주의에 의존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낭만적 환원주의자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부제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있다고 본다. 앞에 인용한 구절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물리법칙이 아닌 다른 법칙이란 바로 정보이론을 이용해서 구하는 정보량이 갖는 의미를 해석하는 데는 뭔가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론은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라는 복잡계 이론에 상응한다. 부연하자면 저자는 의식경험의 주관성은 복잡계 이론에서 강조하는 창발(여기서는 발현으로 번역했음)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필자도 항상 이 점을 주목했기에 저자의 지적에 공감한다. 개별 물 분자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축축함(wetness)이란 성질을 수많은 물 분자들의 집합에서는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물 분자의 창발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물리적 성질을 유지한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인 변화는 아니다. 단지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에서는 예상할 수 없는 특성일 뿐이다. 의식경험은 그렇지 않다. 신경세포들의 집합이라는 물리적 성질로부터 전혀 다른 정신적 성질이 드러나는 것이므로 보통 말하는 창발과는 차원이 다르다. 저자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며, 이런 이유로 물리법칙이 아닌 다른 법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통합정보이론을 지지하게 된 것이다.
정신과의사이자 신경과학자인 줄리오 토노니(Giulio Tononi)가 2008년경 제안한 통합정보이론(Integrated Information Theory; IIT)은 의식 문제에 클로드 섀넌의 정보이론을 응용해서 제안한 이론이다. 매우 엄격한 수학 모형으로서 많은 학자들이 의식 문제에 대한 유일한 과학 모형으로 인정하고 있는 반면, 의식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도 적지 않은 실정이다. 인간의 뇌를 비롯해 모든 동물의 뇌는 정보를 처리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뇌의 개별 부위에 따라 다양하고 차별화된 정보를 처리하는 정도에 차이가 있으며 동시에 이런 다양한 정보를 통합하는 능력에도 차이가 있다고 보는 데 무리가 없다. 이와 같이 분화(차별화)와 통합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명제를 바탕으로 토노니는 통합정보이론을 제창했던 것이다. 그래서 뇌를 포함한 어떤 시스템에 의식이 있는지 여부는 비트의 양로 측정되는 Φ라는 값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Φ가 클수록 의식의 강도가 높은 것이고 반대의 경우에는 의식의 강도가 낮다는 것이다.
필자도 이 이론에 관심을 갖게 되어 공부하는 중이라 이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어쨌든 저자는 이 이론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최근까지도 토노니와 함께 이 이론을 보완하는 공동 연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공동으로 완성한 몇 편의 논문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저자가 통합정보이론을 이용해 의식의 양뿐만 아니라 의식의 질도 평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Φ값으로 측정한 단일한 수치를 가지고 의식의 질을 평가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수치를 가지고 질적 수준을 평가한다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를 극복하기 어려우며 이는 질적 평가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통합정보이론은 의식의 양, 즉 Φ를 특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시스템의 개별 상태와도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또한 특징적인 경험의 ‘질’ 또한 포착한다. 이것은 근본적인 물리적 시스템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정보적 관계의 집합을 고려함으로써 가능하다.”(248쪽)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의식경험의 주관성, 즉 퀄리아를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의식의 어려운 문제는 상당 부분 해결될 수 있다. 즉 어려운 문제는 더 이상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수치로 비교 평가할 수 있는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저자의 희망사항으로 보인다. 이 문제는 적어도 범용인공지능(AGI)가 개발될 때 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여기서 인공지능을 거론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저자는 기능주의(functionalism)의 입장에서 의식의 물리적 기질(physical substrate)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즉 의식은 “기질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의 뇌와 같이 단백질로 구성된 물체뿐만 아니라 실리콘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물질체서도 의식과 같은 기능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능주의를 의식에 적용하면 인간의 뇌와 기능적으로 동일한 내부구조를 지닌 어떤 시스템도 인간의 뇌와 동일한 마음을 지닌다는 말이 된다. 뇌 속의 모든 축삭돌기, 시냅스, 신경세포가 구리선, 트랜지스터, 동일한 기능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전기회로로 대체된다면, 내 마음은 동일하게 남는다는 말이다.”(232쪽) 이런 의미에서 범용인공지능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높은 수준의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따라서 이런 수준의 인공지능이 개발되면 퀄리아와 관련된 의문이 상당히 해소될 것으로 예상된다. 필자도 이런 점에서는 저자와 같은 생각이다. 이런 이유로 인공지능이 인류의 미래에 우리 생각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 의식의 본질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다.
통합정보이론에 의하면 인간뿐만 아니라 각종 동물 나아가 무생물의 경우에도 의식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 이들이 통합된 시스템으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앞서 인공지능을 거론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통합정보이론을 이용해 범용인공지능의 의식을 측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새로운 문제가 등장한다. 생물, 무생물을 포함해 의식의 존재 여부 및 의식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면 이는 자연스럽게 오래된 사상으로 이어진다. 바로 범심론(panpsychism)이다. 우주만물에는 의식이 존재한다는 이 사상은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동양에서도 힌두교와 불교의 전승을 통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사상이다. 아마 의식에 관한한 가장 포괄적인 사상이라 할 수 있다. 통합정보이론은 그 고유한 특징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범심론과 연결된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이 책에서뿐만 아니라 각종 강연에서 그리고 달라이 라마와 만났던 세미나에서도 범심론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던 것이다.
범심론과 관련된 저자의 단호한 입장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보다 단순한 물체도 약간의 Φ를 가진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세 개의 쿼크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은 한 번도 고립되어 관찰된 적이 없다. 이들 또한 극미한 통합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의식이 갑자기 생겨난 단순한 요소가 아니라 우주의 근본적인 특징임을 상정한다면 통합정보이론은 정교한 형태의 범심론(panpsychism)이 될 것이다.......의식이 실존하며 물리적 기질과는 존재론적으로 구분된다고 가정하면, 전 우주에 지각이 퍼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다. 우리는 의식에 둘러싸여 있고 또한 그것에 빠져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중에 있고, 밟는 흙에 있고, 장에 가득한 박테리아에 있으며, 생각할 수 있는 뇌에 있다.”(253쪽)
그런데 저자가 기본적으로는 여전히 환원주의자이고 과학적 물질주의를 신봉한다면 범심론을 지지하는 것과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모순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예컨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어떤 랍비가 자신에게 “어떤 신을 믿는가?”라고 묻자 자신은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스피노자의 신이란 만물에 깃든 자연의 정신으로서 범심론에 해당한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계몽주의 시대에 대표적인 범심론자였다. 라이프니츠도 범심론자였다. 따라서 저자가 뇌를 의식의 원천으로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만물에 의식이 깃들어있다는 범심론을 믿는 것이 모순은 아니다. 우리는 너무 인간 중심으로 생각해 왔기에 다른 생물에도 의식이 있다고 믿는 것이 물리법칙을 위반하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갖는 것이다. 의식의 신경상관물을 연구하고 이어서 통합정보이론의 관점에서 의식의 본질을 탐구하고, 나아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주만물에는 의식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저자의 학문적 열정과 유연한 사고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 의식 문제의 미래
이제 의식 문제는 쉬운 문제와 어려운 문제로 구분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쉬운 문제도 실제로는 쉬운 문제가 아니지만 어쨌든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점차적으로 해결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어려운 문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통합정보이론이 이 문제에 어느 정도 대답을 제공할 것처럼 말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는 지나친 낙관론일 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문제는 우선 범용인공지능이 어느 정도의 의식을 가진 기계지능으로 모습을 드러내는지에 따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범용인공지능이 인간의 의식과 구별할 수 없는 특성을 보인다면 퀄리아, 즉 주관적 경험은 더 이상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라 신경세포들의 작용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물론 이 경우에도 인공지능이 보여주는 의식 상태와 인간의 의식 상태를 온전하게 비교할 수 있는지 여부가 문제가 될 수 있다. 인공의식과 인간의 의식이 동일한 차원에서 비교되어야 한다는 법칙은 없기 때문이다. 철학자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이 『슈퍼인텔리전스』에서 지적했듯이 인공의식은 인간의 의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는 인간이 해결하지 못한 의식의 어려운 문제를 범용인공지능이 해결할 수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 문제는 상당 기간 동안 미해결로 남을 것이다.
저자가 의식의 원천으로 오로지 뇌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저자의 학문적 여정을 감안하면 이해는 할 수 있지만, 다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우선 저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내가 일생 동안 몸-마음의 관계를 탐구하며 배운 것이 있다면, 어떤 의식이든 개와 새, 모든 종이 가진 뇌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287쪽) 이것은 저자가 철저하게 의식의 국소성(locality)을 믿는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말에서는 뇌가 의식을 산출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다. 아마 저자도 이 점에 대해서는 확신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뇌를 의식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대부분의 뇌과학자들의 문제점은 뇌와 의식 간의 관계가 인과관계(causation)인지 아니면 단순히 상관관계(correlation)인지 분명히 밝히지 못한다는 점이다. 주류 과학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가 의식의 비국소성(non-locality)과 관련된 문헌이나 자료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이에 반대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말이다.
또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마음(의식으로 바꿔도 무방)과 뇌의 쌍방적 관계에 관한 저자의 입장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뇌에서 마음으로 향하는 인과관계의 흐름은 이해하기 쉽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이해하기 어렵다. 마음-뇌 사이의 대화는 자연법칙을 따라야 하고, 특히 에너지보존법칙에 부합해야 한다. 시냅스들이 서로 얽히는 것 같은 동작을 뇌가 하게끔 하려면, 마음 또한 이에 관련된 동작을 행해야 한다.”(287쪽) 저자는 신경회로의 변화가 마음의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 반대의 경우는 마치 물리법칙에 어긋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런데 마음-몸 의학(mind-body medicine)에 의하면 마음이 몸의 상태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과학적 물질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영향을 사소한 것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저자도 그런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점은 환원주의자들에게 공통적이다. 저자는 2013년 달라이 라마가 주도한 과학자-티벳 불교 승려들의 합동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이 책은 그 전에 출판되었으므로 이 모임에서 받았던 영향은 배제되어 있다. 저자의 최근 생각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궁금하다. 마음 또는 의식에서 몸으로 가는 되먹임 경로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는 이런 경로가 존재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 책은 읽는 사람이 많은 생각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좋은 책이다. 의식과 관련해 뇌과학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최근의 다양한 연구 결과를 접할 수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높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저자가 지루하고 어려운 주제를 흥미롭게 풀어나가는 솜씨를 감상하는 것도 즐거움이다. 저자가 이 책에 대해 “낭만적 환원주의자의 고백”이라는 다소 엉뚱한 부제를 붙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신경과학자로서 부득이 환원주의자로서 연구해왔지만 마음속 깊이 어딘가에서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내면의 소리가 들려왔던 것 같다. 저자 스스로 신비주의자들의 태도보다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더 신뢰한다고 말하면서도 적어도 의식 문제에 관한 한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의식 문제에 관한 문적인 내용을 다루면서 이 만큼 솔직하게 쓴 책을 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