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 분야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느낌의 진화(The Strange Order of Things)》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20-01-16 00:02
조회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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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

역자: 임지원·고현석

출판사: 아르테(2019)

 

차례

1부 생명 활동과 항상성

1장 인간 본성에 관하여

2장 비교 불가능한 영역

3장 여러 가지 항상성

4장 단세포생물에서 신경계와 마음으로

2부 문화적 마음의 형성

5장 마음의 기원

6장 마음의 확장

7장 감정

8장 느낌의 구성

9장 의식

3부 문화적 마음의 작용

10장 문화에 대하여

11장 의학, 불멸성 그리고 알고리즘

12장 현대사회의 인간 본성

13장 진화의 놀라운 순서

 

 

사물의 기묘한순서: 느낌의 진화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는 포르투갈 출신으로 현재 미국 남가주대학에 재직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소크 연구소(Salk Institute)>의 겸임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는 근래 가장 영향력 있는 신경과학자 중 한 명이다. 다마지오 교수의 연구는 의사결정 과정 및 여러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되어 왔던 느낌과 감정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대표적인 이론은 신체 표지자 가설(somatic marker hypothesis”인데, 간단히 말해 정서적 과정이 의사결정을 비롯해 다른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는 일찍부터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여러 권을 책을 출판했다. 대표적으로는 Decartes’ Error(“데카르트의 오류로 번역), Looking for Spinoza(“스피노자의 뇌로 번역), The Feeling of What Happens, Self Comes to Mind, 그리고 여기서 리뷰하는 The Strange Order of Things이 있다. 모두 인간의 느낌과 감정의 기원 및 역할을 다룬 책들이다. 이 책의 원제목을 직역하면 사물의 기이한 순서라 할 수 있다. 무엇이 기이하단 말인가? 저자에 의하면 인간의 높은 지성이 이룩한 문화적 성취는 보편적으로 수용되듯이 인간의 창조적 마음이라는 진화의 늦은 단계에 나타난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구 첫 생명체였던 박테리아 같은 단세포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기이한현상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적 환경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똑똑하고 영리하게 행동하는 동물을 보면, 그러한 행동은 복잡한 상황에 대해 신경계가 숙고하고 예측한 결과인 것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생명의 역사 초기에 나타난 단세포생물의 빈약한 능력으로도 가능하다. ‘기묘하다라는 표현은 이런 현실을 묘사하기에 부족할 정도이다.”(15)

 

저자가 이 책에서 밝히려는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인간의 문화적 활동은 생명체가 등장했던 초기에 형성되었던 정서(emotions)와 느낌(feelings)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정서와 느낌, 그리고 이 둘을 하나로 결합한 감정(affect)은 인간의 마음과 의식, 나아가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부당하게 소홀히 취급되어 왔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인간의 문화적 성취를 설명하는 데 있어 의식과 마음 못지않게 몸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정서와 느낌, 그리고 감정은 원천적으로 몸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감정에 해당하는 용어로 “affect”를 사용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감정에 해당하는 다른 용어로는 “sentiment”가 있다. 실제로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의 역작 도덕감정론의 원제는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감정이라는 용어로는 sentiment가 더 일상적인데 굳이 affect를 사용한 것은 저자가 흠모하는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가 이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스피노자는 저서 에티카에서 affect정서 및 느낌과 관련된 몸과 마음의 상태라고 정의하고, 세 가지 주된 감정의 종류로 쾌락(또는 기쁨), 고통(또는 슬픔), 그리고 욕망(또는 욕구)을 들었다. 스피노자는 이런 감정은 몸의 생명력의 변동을 통해서만 감지될 수 있기 때문에 파악하기 매우 어려운 개념으로 보았다. 저자는 느낌이나 감정이 몸에 근거한 개념이라는 점에서 스피노자에 동의하면서 그가 철학적으로 제기한 문제를 신경과학적·환원주의적 방법으로 설명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이런 입장은 스피노자의 뇌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데카르트를 반박하는 한편 스피노자에 보내는 저자의 존경심이 대단하다.

 

저자는 정서, 느낌 및 감정이라는 모든 현상의 바탕에는 항상성(homeostasis)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항상성은 이 책의 논의에서 중심 개념으로서 저자는 통상적인 의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양한 관점에서 폭 넓게 항상성을 정의한다. 즉 단순히 생리적으로 몸을 일정한 상태로 유지하려는 성향에 한정하지 않고 생명체가 더 나은 상태로 업그레이드하려는 의지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저자가 이미 스피노자의 뇌에서 상세하게 설명했던 스피노자 철학의 중심 개념인 코나투스(Conatus)’로 이어진다. 코나투스의 생물학적 해석이 저자가 말하는 항상성인 셈이다.

 

또한 저자는 심신론(mind-body problem)이라는 철학의 오래된 논쟁과 관련해 마음의 우위를 강조했던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반박하면서 스피노자에 이어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로 이어지는 몸 중심의 철학적 주장에 대한 신경과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이를 입증하는 유용한 방법으로 정서와 느낌이 진화의 초기부터 어떻게 몸으로부터 발현했는지 설명하려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주장이 생물학적 환원주의’, 즉 모든 것을 초기의 생물학적 요인의 작용으로 귀결시키려는 무모한 시도라는 비판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말이다. 예컨대 느낌은 통상적으로 알려진 점진적 진화 과정을 통해 나중에 중추신경계가 형성된 이후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박테리아와 같은 단세포 생명체가 존재했던 오래전에 이미 정서와 느낌의 전구체(前驅體), 즉 다양한 반응의 형태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진화론을 바탕으로 환원주의적 입장에서 인간의 의식과 마음을 분석하지만 정서와 느낌에 관한 한 주류 신경과학자들과는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정서와 느낌의 근원으로서 뇌보다는 몸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나, 논리적·계산적 사고보다는 감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 그러하다. 따라서 저자의 관점에서 보면 사고를 담당하는 뇌의 신피질(neo-cortex)보다 감정과 관련된 편도체(amygdala)가 더 중요하다. 필자는 저자의 주장에 상당 부분 공감한다. 인간의 이성은 종종 감정이 저지른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항상성: 정서·느낌·감정의 원천

항상성은 다양한 상황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개념으로서 관련된 여러 변수들을 조절하여 내부 환경을 안정적으로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시스템의 특성이다. 생명체의 관점으로 국한하자면 항상성은 신진대사(metabolism) 및 복제(reproduction)와 함께 생명의 특성에 해당하는데, 단세포 유기체에서부터 식물과 동물에 이르는 모든 유기체들이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도록 해주는 기능을 말한다. 예컨대 우리가 주변 환경에 적응해 체온을 일정 범위내로 유지하는 것이나, 혈압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거나 정상적으로 당대사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모두 항상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인간의 면역체계 또한 항상성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대표적인 시스템이다. 이처럼 항상성은 항상 생명 유지와 직결된다.

 

그런데 저자는 이와 같이 통상적인 관점에 한정하지 않고 항상성을 더 넓고도 깊이 있게 해석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정서와 느낌은 모두 항상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한 마디로 항상성은 정서와 느낌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목적에서 정서와 느낌을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상성은 이 모든 개념들의 출발점이면서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셈인데 이에 대한 저자의 기본 입장은 다음에 잘 드러나 있다: 느낌은 마음에 표상된 항상성이다. 느낌에 가려진 채 작용하는 항상성이라는 기능은 초기의 생명 형태와 오늘날 몸과 신경계의 놀라운 협업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이다. 그리고 몸과 신경계의 협업은 의식과 느낌을 가진 마음을 출현시켰고, 그 마음은 다시 인류의 가장 독특한 특성인 문화와 문명을 탄생시켰다. 이 책의 중심에는 느낌이라는 개념이 있지만 느낌의 힘은 항상성에 있다.”(15)

 

이런 의미에서 항상성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느낌이 일어나는 배경에는 항상성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항상성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감정과 느낌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짚어야 할 것은 저자는 정서와 느낌을 확연히 구분한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정서를 느끼는 경험은 안타깝게도 정서 그 자체와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정서와 느낌이 구분할 수 없는 같은 현상이라는 잘못된 개념을 심어 준다. 그러나 사실은 그 둘은 뚜렷한 차이가 있는 별개의 개념이다라고 분명히 지적한다.

 

이어서 저자는 정서는 외부 또는 내부의 자극에 대한 생리적 또는 신경적 반응으로서 순식간에 발생하며 짧은 기간 동안 유지되는 반응이라고 말한다. 이런 정서적 반응이 일어나면 여기에 관련된 과거의 기억이나 생각이 결합하면서 느낌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단계에서 감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저자는 감정을 정서와 느낌의 복합체로서 오랫동안 유지되는 특성을 가진 것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즉 정서 느낌 감정의 순서로 발현된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 입장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저자의 견해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특히 정서와 느낌의 발현 순서, 그리고 이 둘을 구분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전폭적으로 동의한다. 예컨대 숲에서 갑자기 곰을 만났을 때 동공이 커지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소름이 돋는 것은 정서적 반응에 해당된다. 여기에 곰에 물려 죽은 사람에 대한 정보 등이 결합하면서 두려움이라는 느낌이 형성된다. 이것은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와 생리학자 칼 랑게(Carl Lange)가 주장했던 정서이론인데, 저자는 이들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정서와 느낌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분분하므로 이 주장이 반드시 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필자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한다. 바꿔 말하면 눈물이 나니까 슬프다는 느낌이 생기는 것이지, 슬프니까 눈물이 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인간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항상성을 이 책의 중심에 놓은 이유는 문화적 마음이라는 가장 높은 차원의 정신 활동이 항상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항상성은 정서와 느낌을 촉발하며 이들은 이성적 사고와 함께 다양한 문화적 창작물을 만들어낸다고 본다. 즉 이성적 측면만으로는 인간의 문화적 마음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 입장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느낌은 어떤 언어의 도움도 없이, 우리 몸의 생명 작용이 좋은 방향으로 향하는지 나쁜 방향으로 향하는지를 마음에 알려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느낌은 자연스럽게 생명 작용이 우리의 안녕과 풍요에 이로운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한다.”(22)

 

이어서 저자는 문화적 마음이 작동하는 데는 이성 못지않게 느낌이 중요하다면서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한다: 느낌, 좀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전반적인 감정은 문화에 관한 논의에서 투명인간처럼 여겨져 왔다. 모든 사람들이 그 존재를 감지하지만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인간의 탁월한 개인적, 집단적 지능은 강력한 원인 없이 스스로 움직여 지적인 문화적 관행과 도구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 사건이나 상상 속의 사건에 의해 촉발된 온갖 종류, 온갖 정도의 느낌은 지적 능력을 발휘할 동기를 제공한다.”(27)

 

이 점은 인지심리학자로서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인간의 두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을 시스템1과 시스템2로 구분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는 생각이 든다. 시스템1은 감정에 근거해 신속하게 결정하는 시스템인 반면 시스템2는 논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결정하는 시스템인데 주로 시스템1이 저지른 실수를 교정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느낌과 이성의 상대적인 역할을 여기에 비유할 수 있다. 나아가 이 둘을 연결시켜주는 것이 바로 항상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항상성은 초기 생명체인 박테리아부터 비롯되어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에 공통적인 요소로서 인간의 경우 이성과 더불어 정서와 느낌이 문화적 마음이 작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합리적으로 보이는 두 개념, 즉 감정이 인간이 처한 문제에 대한 지적이고 문화적인 해결 방책을 찾아내도록 동기를 유발했다는 생각과, 마음이 없는 박테리아가 인간의 문화적 반응 중 일부의 전조로 해석할 수 있는, 사회적으로 효과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생각을 서로 조화시킬 수 있을까? 진화의 역사에서 그 출현 시기가 수십억 년의 간극으로 갈라져 있는 이 두 종류의 생물학적 특성을 어떤 연결고리로 이어 붙일 수 있을까? 나는 두 생물체의 특성의 공통 기반이자 연결고리를 항상성의 역학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39)

 

이 대목이 중요하다. 저자는 항상성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박테리아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문화적 마음의 역사를 다루려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항상성은 매우 중요한 생물학적 특성일 뿐만 아니라 저자의 주장에 상당한 근거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항상성이 부족한 경우 대개 부정적인 느낌으로 표출되며, 반대로 항상성이 적절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개체에게 유리한 기회가 열려 있을 때 긍정적인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느낌과 항상성은 매우 긴밀하고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느낌은 마음과 의식적 관점을 가진 생물이 생명 상태, 즉 항상성을 주관적으로 경험한다는 점에서 느낌은 항상성의 대리인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느낌과 항상성은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정신 작용의 이면에는 항성성에 대한 욕구가 자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전자도 항상성을 전제로 하는 경우에만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의식과 마음에서 정서와 느낌의 역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심신문제에 대해 저자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부정하는 한편 마음과 몸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스피노자의 일원론을 지지한다. 저자는 데카르트가 사유하는 것(res cogitans)”연장하는 것(res extensa)”을 철저하게 분리한 후 전자를 우월한 것으로 간주하는 이원론을 주장하면서 특히 사유하는 주체로서 인간의 마음에는 정서가 자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것을 반박한다. 따라서 저자는 정서와 느낌이 몸에 근거하고 있다면 느낌이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주관적 체험으로서의 의식은 결코 몸과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마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마음과 의식은 단순히 뇌의 산물이라는 주류 신경과학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이것들은 뇌의 신경계와 몸을 구성하는 오래된 내부세계 및 덜 오래된 내부세계의 합작이라는 것이다. 오래된 내부세계는 심장, , 장기들로 이루어진 몸의 일부를, 덜 오래된 내부세계는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의 일부를 지칭한다.

 

의식과 마음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기본적으로 진화론과 환원주의적 방법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저자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과 마음은 뇌와 몸의 다른 기관들을 배제하고는 발현할 수 없는 정신 작용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런데 의식은 마음의 일부로 마음이 작동하는 경우에 한해서 발현된다는 견해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저자에 의하면 의식은 마음의 일부에 불과하다. 흔히 의식적 마음(conscious mind)이나 무의식적 마음(unconscious mind)라는 표현에는 이런 인식이 깔려있는 듯하다. 그러나 대부분 심리학자와 신경과학자들도 의식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다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종교계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불교에서는 의식과 마음을 동등한 개념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나 유식학파(唯識學派)에서와 같이 의식과 마음은 구분되지 않는다. 반면 힌두 베단타 철학에서는 의식이 더 근원적인 개념이고 마음은 의식의 스크린에 나타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이런 인식의 차이는 사소한 문제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인류에게 남은 가장 큰 미스터리인 내면세계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의식과 마음에 대한 명확한 이해 및 정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본다. 이 문제가 미결로 남아있는 한 사이비종교가 시들지 않듯이 사이비과학이 난무할 것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저자가 의식과 마음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다음에 잘 드러나 있다: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의식이 발생할 수 없으며 느낌이라는 매우 특별한 종류의 작용 역시 일어날 수 없다. 느낌은 생물에서 몸의 작동과 밀접하게 연결된 이미지로 구성된다. 다시 말해서 내가 바라보는 관점과 용어의 기술적, 일상적 의미로서 의식과 느낌은 마음의 존재 여부에 의존한다.”(87)

 

저자에 의하면 의식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는 주관성과 통합된 경험이다. 주관성은 느낌에 바탕을 둔 주관적 경험을 의미하며, 통합된 경험이란 다양한 경험들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꽃을 보는 경우 꽃의 색깔, 형태, 향기 등을 분리해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대상으로서 통합적인 관점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식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아니다. 예컨대 줄리오 토노니(Giulio Tononi)가 제시한 통합정보이론(Integrated Information Theory)의 일부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런 의미에서 의식은 특정한 마음의 상태에 해당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전통적인 의미의 의식은 마음과 느낌이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지금까지 나는 마음과 느낌을 신경계의 존재와 연결시켜왔기 때문이다......요컨대, 정신적 상태, 즉 마음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의식적인 경험이 존재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그 마음이 관점, 즉 주관적 관점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엄밀한 의미의 의식이 시작될 수 있다.”(211)

 

이 대목에서 저자는 마음이 의식의 전제임을 분명하게 말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이와 반대 입장이기에 저자의 견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다고 느낌이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신경계가 혼자서 마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생물의 몸에서 다른 모든 부분과 협업하여 마음을 생성한다. 이런 생각은 뇌가 마음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기존의 통념과 거리가 있다라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데카르트는 이 점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 셈이다. 이미 잘 알져 있듯이 심장에서 상당수의 독자적인 신경세포가 있으며, 장은 제2의 뇌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신경세포들이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마음과 의식은 복잡한 방식으로 뇌와 몸의 상호작용에 의존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뇌가 마음과 의식을 생산하는 유일한 주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인지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가 제기해 유명해진 명제, 즉 의식의 어려운 문제(hard problem of consciousness)에 대한 실마리를 의식과 마음에 대한 자신의 견해에서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피력한다. 개인적으로는 온전히 수긍하기 어렵지만 저자 나름 상당히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특히 정서와 느낌을 의식, 나아가 마음의 중심 개념으로 본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박테리아와 같은 단세포 생명체에서 정서와 느낌의 전구체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의식적인 경험에 퀄리아(qualia), 즉 감각질이라고 불리는 주관적인 체험이 수반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차머스는 왜 경험에 느낌이 동반되는지알고 싶어 한다. 감각 정보에 동반하는 느낌이 애당초 왜 존재하는가? 나는 경험 자체가 부분적으로 느낌으로부터 형성된다고 설명하고 싶다. 따라서 이 문제는 동반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느낌은 우리 같은 유기체의 항상성 유지에 필요한 작용들의 결과이다.”(216)

 

따라서 느낌에 대한 저자의 견해에 의하면 어려운 문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게 된다. 느낌이 주관적 체험의 핵심 요소인데, 이는 항상성을 위해 자연스럽게 진화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저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신경과학자, 양자물리학자, 컴퓨터과학자, 심리학자, 생물학자 등 실로 다양한 분야의 많은 전문가들이 여전히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짐작컨대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하지 않으면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다. 즉 기존의 과학적 물질주의와 환원주의적 사고로는 해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저자가 과감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느낌을 강조하기에 이런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저자의 입장은 다음에 잘 드러나 있다: 어려운 문제는, 마음이 유기 조직에서 발생한다면 정신적 경험, 즉 느껴지는 정신적 상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설명하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관해, 관점적 입장과 느낌을 혼합하면 어떻게 정신적 경험이 발생하는지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제안이다.”(217)

 

 

느낌과 인공지능: 몸의 중요성과 범용인공지능(AGI)의 난제

느낌을 강조하는 저자의 견해는 인공지능의 가능성에 대한 다른 전망으로 이어진다. 이 부분은 음미할 가치가 있는데, 특히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정서, 느낌 및 감정이 인간의 문화적 마음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느낌과 감정은 단순히 뇌를 구성하는 신경세포들 간 상호작용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뇌와 몸의 모든 부분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인공지능의 한계점에 대한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마음과 의식을 계산주의(computationalism)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이 사실은 자연적 유기체를 어떤 방식으로든 알고리즘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지배적인 생각을 낳았다. 인공지능, 생물학, 심지어는 신경과학 조차 이런 생각에 물들어 있다. 유기체는 알고리즘이고 몸과 뇌도 알고리즘이라고 말해도 무비판적으로 다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는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인공적으로 알고리즘을 작성하고 그 알고리즘을 자연적인 종에 연결시키고, 알고리즘을 섞을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가능해지는 특이점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265)

 

인간과 같은 유기체를 알고리즘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인공지능이 발달하면, 즉 범용인공지능(AGI) 수준에 이르면 느낌과 감정을 포함한 모든 인간적인 측면들을 더 우월하게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AGI에 이어 초인공지능(ASI)가 실현되어 특이점(singularity)이 도래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느낌과 감정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바탕이 되는 원재료, 즉 기질(substrate)과 무관하므로 실리콘을 사용해서 의식과 마음을 재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에 대한 반박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느낌과 감정은 뇌의 연산 및 인지 능력뿐만 아니라 몸과의 상호작용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정교한 로봇의 몸에 인공지능이 탑재된다고 하더라도 인간 수준의 느낌과 감정을 재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살아있는 유기체가 알고리즘이라는 주장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오해의 소지가 있으며, 엄밀하게 말하면 잘못된 주장이다.......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유기체가 조직과 기관·세포·계통의 합이며, 그 유기체의 모든 구성 요소는 단백질·지질·당으로 이루어진 살아있는 취약한 실체라는 사실이다. 살아있는 유기체는 코드의 줄이 아니라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266)

 

이것은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가 저서 호모 데우스에서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라고 단언한 것을 전면 반박하는 것이다. 저자가 말한 대로 인간과 같은 유기체는 알고리즘으로 볼 수 없다면 ASI는 물론, AGI도 불가능할 것이므로 특이점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저자의 주장이 맞는지, 아니면 특이점주의자들의 주장이 맞는지 현재로서는 가늠하기 어렵다. 그런데 느낌과 감정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신뢰한다면 특이점주의자들이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특이점주의자들의 전망에 무게를 두었는데 저자의 견해에 상당 부분 동의하면서부터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현재로서는 어느 한 쪽이 분명히 맞는다고 단정하기 어려우니 향후의 전개 과정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느낌의 진화와 문화적 마음의 탄생

저자가 이 책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원시 단세포 생명체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항상성은 항상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생명의 보존 및 복제라는 관점에서도 유전자보다 항상성이 우선했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항상성이 유지되지 못한다면 유전정보를 운반하는 유전자의 역할 또한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항상성은 중추신경계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주변 환경의 감지(sensing)와 이에 대한 반응(responding)이라는 형태로 표현되었지만 중추신경계가 등장한 이후 정서와 느낌, 그리고 감정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항상성은 개별 유기체의 차원에서 적절하게 작동하도록 진화한 기능이지 무리지어 살아가는 사회 전체를 위해 진화한 기능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항상성이 개체 차원에서는 유리하게 작용하지만 사회적 차원에서도 반드시 그러리라 보장할 수는 없다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우리 각각의 유기체 안에서 작용하는 항상성은 아주 큰 집단에서는 자연 발생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문화나 문명 전체 차원은 차치하더라도 이질적인 구성원들로 구성된 집단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서로 불협화음을 이루는 인간들의 큰 집단에서 자연 발생적인 항상성 조화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289) 

 

사회적 관점에서 보자면 항상성은 거버넌스(governance)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런데 개별 조직이나 사회 전반의 차원에서 항상 제대로 작동하는 거버넌스가 갖춰졌던 것은 아니다. 저자는 잘못된 거버넌스의 대표적인 사례로 공산주의를 들고 있다. 그 밖에도 거버넌스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던 다양한 사례들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화적 차원에서 계속 발전하려면 거버넌스가 중요하며, 그 기저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느낌과 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전하려는 주요 메시지다. 문화적 마음을 계속 발전시키려면 그 근원에 있는 느낌과 감정의 역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느낌과 이성의 상호작용이라는 복잡한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느낌의 역할을 더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는 자칫하면 생물학적 환원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오해할 만한 내용이 담겨있다. 과거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이 저서 통섭에서 생물학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의 융합을 강조해 인문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일이 떠오른다면 지나친 비약일 것이다. 저자는 신경과학자이면서 신경과 의사로서 많은 환자들을 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임상 경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지금과 같은 학문적 입장을 취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면에서 저자는 주로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대중적인 저서를 통해 소통했던 고 올리버 색스(Oliver Sacks)와 뇌 연구에 매진해온 뇌과학자 크리스토프 코흐(Christof Koch)를 합쳐 놓은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많은 임상 경험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왔기에 저자에게서 그런 오만함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저자는 학자로서 사고와 계산을 담당하는 이성적 측면에 비해 느낌과 같은 감성적 측면이 소홀하게 취급되어온 것에 대해 학문적 반론을 제시하는데서 환원주의적 시도 같은 것을 찾으려 애쓸 필요는 없다. 이 점은 저자의 다음 표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위치는 인간의 고통과 기쁨이 과거에 대한 개인과 집단의 기억과 가능한 미래를 상상함으로써 증폭되는 독특한 방식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은 반복해서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 분자에서 시스템까지 생물학 지식을 쌓는 것은 휴머니즘을 강화한다.”(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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