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분야

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Civilization)』

작성자
이영환
작성일
2016-03-02 01:17
조회
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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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

역자: 구세희, 김정희

출판사: 21세기북스(2012)

 

 

목차

서론 : 라셀라스의 의문

1장 경쟁

2장 과학

3장 재산권

4장 의학

5장 소비

6장 직업

 

 

 

<북 리뷰: 동양을 압도하게 만든 서양의 여섯 가지 킬러앱>

★ 저자 소개 및 책의 성격

미국 하버드대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 1964~)은 다재다능한 학자로서 2004에는 <타임>지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대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필자보다) 젊고 잘생겼으며 영국식 억양을 세련되게 구사한다. 그래서인지 세계경제포럼을 비롯한 각종 심포지엄과 포럼에 자주 초대되는 명사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여러 권의 영향력 있는 저서를 출간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출현한 다양한 동영상을 YouTube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자신의 저서 『The Ascent of Money』(“금융의 지배”로 번역되었음)를 바탕으로 제작한 동명(同名)의 동영상은 4시간이 넘지만 금융사 전반을 개관할 수 있는 좋은 자료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역사학자답게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1500년대 이래 왜 서양이 동양을 압도하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는 15세기 이전 동양, 특히 중국(명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진국의 상태에 있던 서양 여러 나라들이 여섯 가지 핵심적인 요인들로 인해 어떻게 동양을 앞서게 되었는지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이 여섯 가지 요인을 저자는 밑에 첨부한 동영상에서 요즈음 용어로 여섯 가지 킬러앱(killer app)이라고 명명했다. 그의 주장은 포용적 정치·경제제도(inclusive political and economic institutions)와 착취적 정치·경제제도(extractive political and economic institutions)의 차이에 따라 국가 간의 격차를 설명한 대런 애쓰모글루(Daron Acemoglu)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2012)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을 많이 공유한다.

 

여기서 이 책의 제목 “시빌라이제이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1500년대 이래 서양이 동양을 압도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제목이 문명이라니, 이것은 마치 서양에는 문명이 있었고 동양에는 없었다는 것처럼 들린다. 즉 문명화된 세계가 비문명화된 세계를 능가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것 같다. 최근 들어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시아가 서양 발전의 원동력이 었던 여섯 가지 킬러앱을 적용해 서양에 필적하는 세력으로 부상한 것은 사실이지만 저자는 여전히 아직도 멀었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우리가 더 분발해야 하는 이유를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망외(望外)의 소득이라고 생각한다.

 

 

★ 15세기 전후 동서양의 상황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래 유럽은 중세 봉건제도 시대를 거치면서 성장이 정체된 가운데 생존 수준에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강력하고 통일된 중앙집권적인 왕조(정부)가 없는 가운데 서양은 15세기 이전까지 수많은 도시국가들로 쪼개져 있는 상태에서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이 경쟁이지 정확하게는 다른 국가들을 상대로 생사를 건 전쟁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런 혹독한 투쟁과정을 거치면서 서양에서는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인 중앙집권적 정부가 탄생했고 민주주의 제도가 실행되었음을 강조한다. 이를 바탕으로 계몽주의 사상에 기반을 둔 과학과 의학의 발달, 이로 인한 수명 연장과 생산성의 증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재산권의 보호 등 일련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가 지속되었으며, 그 이후로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위는 결코 도전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의 기폭제가 된 것은 항해술의 발달이었다. 11세기 바이킹족이 남유럽을 유린하기 시작한 이래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리고 무한경쟁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유럽의 도시국가들은 경쟁적으로 장거리 항해술을 발전시켰다. 이것을 보통 대항해술이라 부른다. 이런 배경 하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스페인 이사벨 여왕의 지원을 1492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려는 목적으로 출항해 우연히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은 다 아는 상식이다.

 

그런데 이 우연한 발견이 동양에 대한 서양의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서양의 제국주의가 태동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15세기 후반부터 서유럽의 작은 국가들은 위대한 아시아제국을 정복하고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스트랄라시아를 손에 넣은 것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의 생활방식을 서양식으로 바꿔버린 문명을 창조했다.”(42쪽) 여기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란 표현에서 약간의 오만함이 느껴진다.

 

15세기 말까지만 해도 경제적인 면에서 동양은 서양보다 우위에 있었다. 당시 명나라가 통치하던 중국은 현재의 미국과 같이 세계에서 가장 경제 규모가 컸으며 인구 10만 이상의 도시도 중국에 가장 많았다. 그리고 당시 콜럼버스의 선단(船團)과 그보다 이전에 명나라 영락제의 명령으로 탐사에 나섰던 환관 정화의 선단은 규모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동서양의 격차를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정화가 이끌었던 선단의 모선이 쿠르즈 선박이라면 콜럼버스 선단의 모선은 고작 조그만 유람선에 불과하다고 비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후 서양은 크게 변했지만 동양은 절대왕정 하에서 지배층의 관심은 오직 권력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개방이나 변화의 물결은 철저하게 차단되었다. 중국의 경우 황제는 대체로 허수아비에 불과한 적이 많았고 측근에 있는 환관들이 권력을 좌지우지한 경우가 허다했다. 이들이 개혁과 변화를 추구했을 리는 만무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조선시대를 통틀어 제대로 된 개혁을 시도한 적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 당쟁 속에서 무의미한 공리공론만 무성했었다. 조선말 쇄국정책도 개혁과 변화에 대한 지배층의 두려움을 상징하는 사례에 해당한다. 동양의 대부분 국가들은 개혁과 변화를 위한 어떤 의지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문호를 개방하고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일본만이 서구 제국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의 길에 들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 여섯 가지 킬러앱

니얼 퍼거슨은 단지 서양의 우위를 확인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라 서양의 지배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이 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사실 서양 여러 나라들은 원래의 시대정신을 상당히 망각한 상태이다. 그 한 가지 예를 기독교가 점점 쇠퇴하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영국에서 기독교 인구의 급감과 중국에서 기독교 인구의 급증을 들 수 있다. 과연 그가 우려한 데로 동양(중국, 한국 등)이 과연 서양의 우위를 극복하고 다시 과거와 같이 동양의 우위를 확립할 수 있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가 말하는 서양과 동양의 ‘거대한 분기(great divergence)’를 초래한 여섯 가지 킬러앱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경쟁

앞서 언급했듯이 서로마제국의 몰락 이후 많은 나라들로 분할된 유럽에 정착한 봉건체제 하에서 자신의 영지를 가진 영주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해야 했으며 또한 도시국가들도 그들 차원에서 존립을 위해 투쟁해야만 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14세기 유럽에는 대략 1,000곳의 국가 조직이 있었다. 200년 후에도 어느 정도 자주권을 가진 국가는 500개나 되었다”(88쪽) 고 말한다. 실로 대단한 분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양에서는 자연스럽게 경쟁이 일상적인 사건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경쟁은 대런 애쓰모글루가 지적한 ‘포용적 제도’에 의해 보호받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양은 가지고 있었지만 동양에는 부족했던 여섯 가지 비장의 무기 중 첫 번째는 상업도, 기후도, 기술력도, 철학도 아니었다. 그것은 애덤 스미스가 언급한 제도였다.”(67쪽) 착취적 제도는 소수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집중하는 반면 포용적 제도는 경쟁을 장려하고 보호하는 데, 서양은 후자의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미국의 작가이자 과학자인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표현을 빌려 다시 확인하고 있다: “『총·균·쇠(Guns, Germs and Steel)』에서 제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왜 유라시아가 세계의 나머지 지역보다 앞서갔는지 설명했다.........유라시아 동부 광야에 위치한 아시아의 단일제국은 혁신을 억제한 반면, 산이 많고 강으로 나뉜 유라시아 서부의 여러 왕국과 도시국가가 창의적인 경쟁과 의사소통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이다.”(52쪽) 경쟁과 이를 뒷받침하는 포용적 제도는 한 나라의 번영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요건인 것이다. 그런데 절대왕정 하에 있던 동양에서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특권층으로 인해 착취적 제도만 존재했으며 이로 인해 경쟁이라는 개념조차 낯설었던 것이다.

      

2) 과학

당연한 얘기지만 오늘날 서양의 우위는 과학 발전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우연적인 요소가 작용했다. 먼저 중세의 오랜 암흑기로 인해 서양에서는 과학적 기반이 거의 궤멸되다시피 했다. 고작해야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 정신을 신학의 논리에 응용하는 정도로 그 명맥을 유지할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은 오류투성이로 판명되어 갈릴레이의 근대 과학으로 모두 대체되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서양은 13세기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이 서서히 르네상스의 주역으로 등장하던 무렵부터 이슬람 세계에 보존되어 있던 그리스의 학문과 이를 바탕으로 발전시킨 과학을 도입해 르네상스 운동의 촉매로 활용하게 되었다. 이 점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서양은 고전 지식의 보존과 수학, 광학, 지도 제작, 의학, 철학 분야에서의 새로운 지식 생산에서 중세 이슬람 세계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인식한 영국의 사상가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은 ‘철학은 이슬람에서 나왔다’고 말했다.”(111쪽)

여기에는 우연적인 요소가 많이 작용했다고 본다. 왜 이슬람 세계는 과학의 기초를 정립한 후 이를 유지·발전시키지 못한 반면, 열악했던 서양은 이것을 성공시켰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에는 뭔가 우연적인 요소가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르네상스 이후 서양은 갈릴레오 갈릴레이, 르네 데카르트, 프랜시스 베이컨, 존 록크 그리고 아이작 뉴턴으로 이어지는 걸출한 철학자겸 과학자들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노력은 결국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으로 결실을 맺어 합리주의와 과학정신이 서구의 지배적인 사조가 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것이다. 그 이후 과학 분야에서 서양의 우위는 계속되고 있으며, 노벨 과학상의 수상자가 대부분 서양에서 배출되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기도 하다. 과학은 서양의 우위를 확대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3) 재산권

16세기 영국에서 벌어진 인클로저 운동은 공유지에서 사유지로의 전환을 통해 사람들에게 사적 소유권의 개념을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했다. 물론 이에 대한 이론적 근거는 “시민정부론”을 통해 존 록크가 제공했다. 그러나 재산권의 확립과 관련해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서양의 식민지 경영이었다. 이를 통해 서양은 잉여를 축적할 수 있었고 이것이 사유재산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점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세계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서유럽은 기술의 수혈, 문화의 전달, 부의 이전 등을 동유럽에 의지해야 하는, 유라시아의 작고 뒤처진 지역으로 남았을 것’이 분명하다.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유령 경작지’와 거기서 일할 아프리카 노예가 없었다면 ‘유럽의 기적’도 없고 산업혁명도 없었을 것이다.”(180쪽)

    

이와 같이 식민지 경영을 통해 거두어들인 경제적 잉여는 재산권 확립을 통해 서양의 번영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것이다. 나아가 대런 에쓰모글루가 지적한 대로 ‘포용적 제도’(영국)와 ‘착취적 제도’(스페인)를 가진 나라들 간의 차이는 적절한 재산권 제도의 확립이 경제적 번영에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역사적으로도 입증했다. 그리고 이는 비단 유럽에서만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극명한 차이를 통해 입증되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북아메리카가 남아메리카보다 잘 살게 된 단순한 이유는 다수에게 분배된 재산권과 민주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영국 정책의 모델이 소수에게 부와 권력을 집중한 스페인 모델보다 효과가 뛰어났기 때문이었다”(238쪽) 라고 말한다. 이 부분은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4) 의학

서양에서 의학의 발달은 인간의 평균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의학의 범주에는 전반적인 위생시설의 개선이 포함된다. 위생시설의 개선이 필요한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것이 바로 의학 분야이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1800년 경 인간의 평균수명은 고작 28.5세에 불과했는데 몇 세대 후인 2000년 경 인간의 평균수명은 66.6세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이 평균수명을 연장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특정 질병에 대한 치료법이 발견된 것보다는 위생시설이 대폭 개선된 덕분이라는 것이다.

 

그 후에도 데카르트의 이원론적·기계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인류의 질병 치료와 관련된 획기적인 치료법이 대부분 서양에서 발견되었다. 의학 발전에 관한 한 동양의학은 이 기간 동안 거의 아무것도 기여한 바가 없다. 지금도 의학의 서양의 주도하고 있으며 이 추세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 말은 동양의학에 바탕을 둔 대체요법이 종전 보다는 대중적인 관심을 더 받고 있지만 서양의학을 대체하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의학 발전은 단지 평균수명의 연장에 그치지 않고 근로자들의 생산성을 대폭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의학의 발전은 모든 면에서 과학의 발전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5) 소비

고대 그리스 철학은 독립적인 권리의 주체로서 ‘개인’을 발견했다. 그 후 인간은 군주에게 봉사하는 기본 단위가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면서 독립적인 지위를 갖는 주체로서 확고한 위상을 획득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전통은 로마로 이어졌고, 비록 중세 암흑기에는 무시당했지만, 14세기 이후 르네상스 운동이 전개되면서 다시 회복되었다. 이 후 산업혁명이 전개되고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가 열리면서 소비의 주체로서 그 위상이 강화되었다.

 

소비의 주체로서 개인의 발견은 결코 사소한 사건이 아니었다. 심지어 저자는 칼 마르크스가 간과한 중요한 사실이 바로 이 점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두 가지 면에서 틀렸다. 첫째, 그들이 이야기한 임금 철칙은 한마디로 헛소리였다........자본가들은 마르크스가 놓쳤던 부분을 이해하고 있었다. 바로 노동자가 곧 소비자라는 사실이었다.”(343쪽) 아마도 이 점을 가장 확실히 인식하고 실천한 사람은 헨리 포드였을 것이다. 그는 근로자들이 곧 소비자가 될 수 있음을 직감하고 근로자들에게 높은 임금을 지불해 포드자동차에서 만든 모델T를 구매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소비와 투자의 선순환을 실현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을 제치고 미국이 슈퍼파워로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미국의 소비 중심의 경제가 있었다. 비록 오늘날에는 과잉 소비로 인해 문제가 되고 있지만 당시 소비는 경제의 선순환을 가능케 한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계속 이어진 많은 숫자의 이민에 힘입어 미국은 대중소비를 축으로 하는 시장경제를 구축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소비-투자-고용-소득-소비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고리를 완성했다. 이런 순환 메커니즘은 곧 서구 전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동양에서는 일본이 처음으로 이 메커니즘을 실현해 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일본의 경우 서양 의복에 대한 일본인의 지대한 관심,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섬유산업의 발달이 일본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6) 직업

저자는 여섯 가지 킬러앱의 마지막으로 서양의 직업의식을 언급한다. 순서는 마지막이지만 실제로는 이것이 서양과 동양 사이에 소득의 큰 격차, 즉 저자가 말한 거대한 분기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택한 직업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소명의식은 그 뿌리를 프로테스탄트, 즉 청교도적 전통에 두고 있다. 이것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지적한 이래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여전히 무시하기 어려운 근거를 갖고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한 역사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수많은 북유럽 국가를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종교개혁 이후 경제 권력은 오스트리아, 프랑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같은 정통 카톨릭 국가들에서 영국, 폴란드, 프로이센, 작센, 스코틀랜드와 같은 신교도 국가들로 대폭 이동했다.(412쪽) 그리고는 이런 현상을 이성적으로 설명한 사람이 바로 독일의 막스 베버였다고 말한다. 실질적으로 1,2차 산업혁명을 주도한 것이 영국과 독일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프로테스탄트 정신에 입각한 직업윤리가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해도 별로 무리가 없어 보인다.

 

저자는 같은 논리에 입각해 오늘날 서양이 동양에 밀리는 현상을 설명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놀라운 점은 근로 패턴의 대서양 간 분기가 신앙심의 분기와도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유럽인들은 이제 일을 덜 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도도 덜하고 신을 덜 믿는다”(422쪽) 고 말한다. 그리고는 “아시아의 근검절약 풍조와 산업 부상은 가장 뜻밖의 서양화 부작용과 함께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성장인데, 그것도 중국에서 일어났다. 중국의 개신교도 수는 1949년 약 50만에서 오늘날 약 4,000만으로 급증했다”(438쪽)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이 모두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직업윤리가 중요하고 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종교 또는 시대정신에 기반을 둔 윤리의식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윤리가 무너지면 직업의식도 무너진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다.

 

  

★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저자가 강조한 여섯 가지 킬러앱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저자가 냉소적으로 지적했듯이 동양은 여섯 가지 킬러앱을 다운로드함으로써, 즉 무임승차해 오늘날 서양을 위협하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 일본을 선두로, 다음은 우리나라 그리고 지금은 중국이 이런 경로를 밟고 있다. 이 가운데 중국은 명나라 이후 거의 600년 만에 서양을 압도할 수 있는 경제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이런 추세가 지속될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질문이다.

 

이미 중국의 부상(浮上)을 예견했던 저자는 이에 대비해 서양 사회에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런 그의 입장은 후속 저서인 『위대한 퇴보』(2013)에 잘 요약되어 있다. 한 마디로 오늘날 서양은 번영을 가져온 제도와 정신을 대부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가 바로 2008년의 금융위기라는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The Great Degeneration"으로 우리말로는 ‘거대한 퇴보’라고 해야 하는데 ‘위대한 퇴보’라고 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용어는 저자가 ”시빌라이제이션“에서 제기한 ”The Great Divergence"에 대응해서 선정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이 후속작을 통해 서양 사회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주의하라! 이대로 가면 동양에 주도권을 넘겨준다는 경고다.

 

그러면 우리나라, 일본 및 중국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알 것 같다. 한 마디로 경제의 이면에서 작용하면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신문화의 차원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인식하고 있는 정치·경제·사회 분야의 리더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은 대부분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적당히 무게를 잡으면서 가끔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듯 발언하는 것으로 자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다. 비록 지금까지는 저자가 적시한 데로 여섯 가지 킬러앱을 적당히 응용해 여기까지 왔지만 우리 스스로 고안한 독창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기술, 아이디어, 제도, 문화 등 모든 것이 서양의 발명품이다. 우리는 대부분 이에 무임승차하는 바람이 팔로워(follower)로서 덕을 본 것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필자는 인류 역사 이래 동양이 서양을 선도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가 지금이라고 생각하며, 이런 역사적 전환점에서 다른 나라보다 우리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동안 세계사의 변방에서 고난을 역사를 살았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한다. 함석헌 선생님이 지하에서 고대하고 있는 것도 바로 우리의 이런 정신적 자세일 것이다. 그리하려면 우리를 지탱해주는 정신적 뿌리부터 공공이 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지금은 거의 사문화되었지만 우리 고유의 사상인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 정신이 세계를 선도하도록 하는 정신적 기반이 될 수 있다. 이를 어떻게 실천하는가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참조 사항>

• 니얼 퍼거슨은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테드(TED) 강연을 했다. 이 동영상을 첨부하려 했는 데 기술적인 문제로 일단 보류해야 했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후일 첨부할 것을 약속하는 바이다. 저자는 이 동영상에서 20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1500년 대 이후 동서양의 소득 수준에서 거대한 분기(the great divergence)를 초래한 여섯 가지 킬러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동영상을 보면 책의 주요 내용을 대부분 이해한 것이나 다름 없다. 특히 니얼 퍼거슨은 이 동영상에서 한국에 대해 두 번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데 외국 지식인 사이에서 한국에 대한 평가가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동영상을 직접 보고자 하는 분은 www.ted.com 에서 검색창에 Niall Ferguson을 친 후 “The six killer apps of prosperity"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찾으면 된다. 한글이든 영어든 원하는 자막으로 볼 수 있으니 이해하는 데 별 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암묵적으로 서양의 우월감을 저변에 깔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실 역사학자라면 이것은 금기사항이다. 부족한 사료와 유물을 바탕으로 객관적 사실을 추론하려면 편견이나 독선을 절대적으로 배제해야 할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노스코트 파킨슨의 『동양과 서양』(2011)과 로버트 B. 마르크스의 『어떻게 세계는 서양이 주도하게 되었는가』(2014)라는 책들이 동서양의 역사 전개과정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역사학자가 아니기에 추천하는 데 조심스럽다. 그래서 이 글을 읽은 역사학 전문가들이 더 좋은 책을 추천해 주기를 고대한다.